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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 거북섬과 광개토대왕능에 대한 고찰
이선국
1. 호태왕릉(太王陵)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 여산(如山)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의 기단식(基壇式) 돌무지무덤[積石塚].
현재는 분구의 대부분이 무너져내린 기단부와 그 위층의 방단부(方壇部) 일부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90년 이래 중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결과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무덤 기단의 한 변은 약 63m이며, 너비 약 1.75m, 높이 6m가량의 대형 석재 5개가 받치고 있다. 기단 위의 각 방단 내부는 막돌과 장돌로 채워졌다. 분구 정상부 가까이에 설치된 매장부(埋藏部)는 굴식 돌방[石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돌방의 방향은 서향이며 널길[羨道]은 널방[玄室] 서벽 한가운데에서 시작된다. 널방의 천장부는 3단의 평행굄으로 짜여졌으며, 천장은 지름 4.55m, 두께 0.8m의 대형 화강암 판석으로 덮여 있다. 널방의 동서길이는 2.82m, 남북너비는 3.16m이며 지면에서 분구 정상부까지의 높이는 16m 정도이다. 분구 정상부에서 명문전(銘文塼)과 와당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원래의 분구 위에 작은 사당이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명문전 중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돋을새김된 문장이 있어 '태왕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덤 주위에는 자갈이 깔리고 그 바깥으로는 무덤구역을 알리는 흙담이 둘러져 있다. 무덤의 남방 180m 지점에서 기와·전돌과 함께 건물의 초석이 발견되어 무덤의 피장자를 위해 제사지내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의 동북 500m 거리에는 유명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가 있다. 명문전의 내용, 무덤의 규모, 근처의 건물터, 광개토왕릉비 등을 근거로 광개토왕의 능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 우리 사학계의 정설은 없고, 다만, 중국, 일본의 사학계에서는 광개토태왕 능으로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2. 광개토태왕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375∼413)은 (永樂元年) 18세의 나이로 즉위.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로서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 그의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생존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약칭이고, 그가 쓴 영락(永樂)이란 연호는 한국에 알려진 최초의 연호.
2005년 인터넷에서 발견되었다가 사라진 고구려 연대기 자료에 의하면
광개토태왕은 391년 즉위 초부터 대방(帶方) 탈환전을 개시하여 백제의 북쪽을 진격하여 석현(石峴)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이듬해 신라 내물왕의 실성을 고구려에 보내 화친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7월 백제, 왜, 가야 신라공격 징후가 보이자 4만 군사로 백제의 대륙 영토인 요서군과 진평군 일대 공격하였다.
이로써 한수(황하) 이북의 여러 부락을 빼앗았다. 그러나 거란이 변방에 침입하여 1만의 백성이 거란에 붙잡혀 가는 수모를 당했다.
이에 주둔군을 남겨두고 북진하여 契丹의 본토 공격하여 거란군은 도망가고, 거란인 500명과 고구려인 1만을 환국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왕은 즉위 3년에 사후를 위해 한반도내 길지(吉地)를 찾아 수능(壽陵) 축조를 시작했다. 그것은 고국원왕이 환도성에서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과 어머니와 왕비를 북방 전연(前燕)의 모용황에 빼앗겼다가 다시 찾아오는 수모를 당한 후 백천과 신계에 왕릉을 구축하고 그곳에 부왕의 시신을 다시 모시고 자신의 수릉도 만들게 되면서 왕릉의 길지를 찾고 보호하는 것이 고구려 왕의 중요한 역사(役事)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광개토태왕 역시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제도를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에게 큰 강을 건너 생명을 구하고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 준 거북이의 형상을 닮은 지형을 반도 내에서 찾아 화진포 거북섬에 수능(壽陵)을 축조하고 한반도 부족들을 평정하게 된다.
왕은 다시 남진하여 백제 관미성(강화도)을 공격 20일만에 함락시켰다. 관미성 함락으로 백제는 요서군을 상실함으로써 하수(황하) 남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393년 백제에게서 총 11개성 획득함으로써 2여년간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백제와 교전을 벌였다.
395년 8월 백제의 재침에 7천 군사를 직접 지휘하여 패수에서 백제군 8천명을 물리쳤다. 돌아오는 길에 북상하여 거란유목민의 본거지 흥안령산록 시라무렌강 유역의 거란부족 일부인 비려(稗麗)를 정벌하고 북풍(北豊) 등 요동 일원의 접경지를 순시하면서 말과 소금 확보하고 잡혀간 백성 환국시켰다.
396년 봄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상륙작전을 시도하여 백제의 일팔성을 비롯 58성과 7백개 촌을 고구려 영토에 편입시키고 아리수의 이북을 차지하자 백제 아신왕은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보내 화친을 제의함으로써 영원한 신국맹세를 받았고,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였고, 하평양을 설치하여 한반도의 교두보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397년 5월 백제 아신왕 태자 전지를 왜(倭)에 보내 원병요청 7월 대대적인 군사사열을 하고 그 이듬해 3월 고구려 정벌의 전초기지인 쌍현성을 쌓았다. 그러자 광개토태왕은 숙신을 정복하고 백제의 백성 300명 포로로 잡아 백제가 아리수 이북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399년 왜(倭)은 대선단을 파견하여 신라공격하자 광개토태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신라에 보내 별 피해 없이 왜관(倭寇)를 격퇴하여 물리치고 구원하는 동시에 임나가야(任那加羅), 안라(安羅) 등 가야의 여러 나라를 복속시켜 내물왕의 조공 약속을 받았다.
402년 광개토태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2년 전 연에게 빼앗긴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성을 회복하고 후연의 평주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대능하(大凌河)유역에 진출하여 후연(後燕)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였다.
또한 대방고지에서 왜구 침임을 격파하고, 후연 모용희의 목제성 침입을 격퇴하여 요하 이동 지역을 확실하게 장악했다.
여세를 몰아 후연의 도성을 공격하였으나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백제와 왜의 연합군의 공격으로 다시 평주와 신성 남소 등을 모두 잃고 요동성까지 밀리게 되었다.
백제와 왜의 연합군은 산동에 백제군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고구려 대방지역을 공략하자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후연군에도 밀려 요동성이 함락 위험에 처하자 광개토태왕 중앙의 정예군을 대방에 투입하여 연합군을 격퇴시켰다.
한편, 요동성을 에워싼 연군(燕軍)도 고구려군(高句麗軍)의 수성전(守城戰)에 밀려 퇴각 하지만 고구려의 국력소모도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다시 405년과 406년 후연(後燕)의 모용 희의 침입을 두 차례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모두 격퇴시켰다.
407년 2월 후연의 침입에 대비하여 평양 동황성과 평양성을 증축하고 수리하여 전쟁에 대비했다. 한편 보병과 기병 5만을 동원하여 백제의 후방을 공략하여 소구성(沙溝城) 등 6개성 함락시켜 백제군 전체가 초토화되었다.
후연을 붕괴시키고 이를 계승한 북연왕 고운(高雲)에게 광개토태왕은 종족의 예(禮)를 베풀어 이후 북연은 고구려의 종속국이 되었다.
409년 변방의 안정으로 거련(巨連:巨璉)을 태자로 삼고 평양의 백성들을 동쪽의 독산 등 새로 쌓은 6개성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왕릉의 축조기술자를 집단이주 시키고 그해 화진포 거북섬 수능 축조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격려했다.
이듬해 국력이 쇠약해지던 동부여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철령(鐵嶺:安邊) 이북의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편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해주 일원을 정복하는 한편, 남하하여 한강선 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재위22년에 왕은 숨을 거두고 만다.
장수왕은 이듬해 9월에 부왕의 시신을 화진포 앞 거북섬에 안장하고 왕릉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남하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잦은 시비가 벌어졌고, 결국 신라 북쪽의 장군이 광개토왕릉 수비대장을 살해함으로써 신라를 응징하려 했으나 신라 눌지왕이 사자를 보내 사죄함으로써 용서하였다.
그 후 고구려 왕족들의 광개토왕릉 참배로 신라 북변은 잦은 소란이 있었고, 468년 장수왕은 낙랑부(최리 낙랑국구지)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광개토왕릉을 참배했다. 신라 북방의 잦은 소란을 수습하기 위해 신라 소지왕이 화진포의 광개토왕수비대를 시찰하고 수비대에 군복을 하사해 화친을 구하기도 했다. 495년 문자명왕은 선왕 문묘에 참배하기 위해 화진포를 찾아와 광개토태왕릉에 망제를 지냈다고 전한다.
3. 재야 사학자의 주장
재야 사학자인 고구려 연구가 고 오종철씨의 저서 ‘다시 찾은 고구려 정사(正史), 1993, 을지서적’와 ‘고구려본기 신주해(하), 2000, 구미서관’의 자료에 의하면 옛 지명 중 “○○忽“이라는 지명은 고구려의 왕릉 또는 왕비능이 있는 지명이라고 밝히고 이를 근거로 고구려 왕릉을 직접 확인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
이 지방의 옛 지명인 ‘가라홀(加羅忽, 加阿忽)’, ‘달홀(達忽)’에는 왕릉이 있고, 그곳이 바로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산1번지 거북섬(金龜島)이라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 양호하게 남아있는 석성의 잔해는 능의 보호벽(城)과 방파성(防波城)의 흔적이며, 산정부근의 와편과 주초석의 잔해는 능의 사당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섬 기슭의 인위적인 환도형상은 이곳이 왕능의 형태를 보여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화진포 거북섬의 광개토태왕능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몽의 건국기와 광개토태왕비문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거북이의 도움으로 큰 강을 건너 고구려 건국의 동력이 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어 거북이는 일종의 고구려 수호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을 전연(前燕)에 빼앗겼다가 다시 찾아와 백천과 신계에 왕릉을 구축하고 그 곳에 부왕의 시신을 다시 모시고 자신의 수릉도 만들게 되면서 반도 내에서 왕릉길지를 찾고 보호하는 것이 고구려 왕의 중요한 역사(役事)로 인식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비정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 역시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제도를 재정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즉위 3년에 반도내 길지에 수능(壽陵)의 축조를 시작했고, 광개토태왕이 서거한 이듬해 장수왕2년에 화진포 거북섬에 안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4. 문화유적 지표조사
199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행한 <<문화재총람>>에는 화진포 거북섬을 금구도성지(高城金龜島城址)로 표시하고 있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초도고성(草島古城)'으로도 명기되어 있다고 한다.
『일제 때의 조사자료인<<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현내면 초도리 국유 초도리 마을의 동방 약 이백간(368m)의 해상 금구도에 있다. 연장 약백이십간(218m) 대부분 토축 불완전'이라 되어 있다. 이 조사에서 확인한 성의 구조는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섬의 정상부인 약 45m 높이의 고지를 중심에 두고 해안선의 자연 지형을 따라 화강암을 이용 석축으로 축조하고, 성벽 상단은 삭토하여 환도를 개설한 흔적이 200여m 가량 뚜렷이 남아 있다. 이와 연하는 북쪽의 암석 저지대는 잔돌끼움 쌓기의 협축법으로 석축한 불연속의 (추정)외성이 3개 구간에 남아 있다. 현재 잔존하여 있는 길이는 약 60m, 높이 170~230㎝, 협축벽간 거리 약 350㎝이다. 해송의 군락이 있는 부근에서 확인된 건물지(建物址)는 전죽이 우거져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으나, 건물의 주초석(50cm× 50cm)과 기와편, 토기편들이 확인되었다. 유물 및 성벽의 축조기법으로 보아 북방 세력의 남하, 빈번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열산현(烈山縣)의 수성처(守城處)로 추정된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석성의 외벽이 육지를 향하고 있어 왜구의 침입을 방어한 것이라는 것 보다는 내륙 침입자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석성으로 보는 것이 옳다.
5. 결 론
조선시대의 각종 사료에 의하면 현재 거북섬은 ‘초도(草島)’로 표기하고 있고, 1942년도 일제시대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처음으로 ‘금구도(金龜島)’라는 표기가 나타나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현장답사 과정에서 강원대학교 유재춘 교수는 거북섬을 고려 항몽 유적지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고, 지표조사 결과, 고구려 광개토태왕능으로 볼 수 없다는 보고도 있으나 현장답사 과정에서 발견된 석성 잔해물의 형태로 보아 고구려 또는 고려시대의 축성법인 협축법에 의한 축성의 형상이 곳곳에 남아 있고, 축성의 외벽이 동편을 향하지 않고 내륙으로 향하고 있는 점 등은 왜구의 침입을 방지할 목적으로 설치했다고 볼 수 없으며,서편 하단부에서 발견되는 인공석축 형태와 섬 기슭의 인공적인 환도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시대적으로 사대주의적인 토양 위에 작성된 ‘삼국사기’ 또는 ‘삼국유사’사료를 중심으로 정립된 학계에서는 새로 발견된 고구려 연대기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한 주체적인 상고사와 고구려사 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 왕능과 광개토태왕 능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가장 광활한 대륙의 영토를 지배했던 고구려의 기상과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선양하고 그 뜻을 기리는 것은 후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본 자료는 2009. 8. 1. '아! 가라홀' 공연행사에서 발표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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