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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본인이 의식했든 그렇지 못했든 정말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때로는 그 많은 죄들 가운데 몇 가지가 드러나 수치를 당한 경우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은폐하고 감춰서 드러나지 않은 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는 것이 고통이라면, 자신이 저지른 죄를 잊거나 고의적으로 은폐하는 것은 더 큰 고통의 씨앗입니다. 죄는 반드시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드러난 죄로 인해 수치와 슬픔과 갈가리 찢어지는 심령의 아픔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고통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여러 번 맹세도 했었고, 결심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죄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악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배를 드린 다음 죄를 짓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한 다음에도 죄를 짓고, 뜨겁게 찬송한 후에도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이 우리를 죄로부터 지켜주는 파수꾼도 아닙니다. 오히려 죄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극히 연약한 우리의 힘과 능력과 수고만으로는 죄를 거절할 수도, 떨쳐버릴 수도, 이길 수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거절의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악하지 않다면, 그것은 항상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롬6:23a)이라고 말씀합니다. 거듭되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에 거하는 자들에게 지불되는 대가는 사망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17세기 청교도들 가운데 영적인 거인으로 불리 우는 오바댜 세즈윅(Obadiah Sedgwick)은 30세에 옥스퍼드에서 학위를 받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한때 국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직을 당하기도 했었지만 끝까지 참고 견디며 신앙을 지켰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강단에 설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일치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1642년 5월의 금식일,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播種)하지 말라”(렘4:3)는 말씀을 들고 의회에 선 그는 죄악에 오염된 심령들을 일깨우는 것만이 국가의 총체적인 패역을 막을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개혁을 위한 노력들이 무익한 일로 비쳐지지 않도록 성공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는 또 자신의 책 “하나님의 백성들의 은밀한 죄와 거룩”(The Anatomy of Secret Sins)을 통해 “은혜를 받은 사람이 죄를 물리칠 힘을 증진시키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런저런 죄의 실질적인 지배를 벗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거부해야 할 일을 거부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를 지켜 달라는 기도는 그의 솔직한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며, 죄악이 막연해지는 것을 막는 일에 사용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기도하고 헌신하며, 기도하고 인내하며, 기도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기도하고 죄의 기회를 멀리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만으로는 절대로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가장 탁월한 믿음의 사람들의 타락은 우리의 칼이나 창이나 우리 스스로의 힘이 죄를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될 수 없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에만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멀리하십시오. 혐오하십시오. 보거나 타협하지도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결박하여 묶고 저주하십시오. 무엇보다 자신의 연약함과 할 수 없음과 은밀한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다 고백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눈보다 더 희고, 양털보다 더 희게 씻어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죄로 인해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달려드는 죄를 이기고 승리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죄가 부르는 참혹한 저주와 죽음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와 기쁨과 안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쳐죽인 사건은 곧 모든 왕자들이 한꺼번에 몰살당했다는 내용으로 확대되어 다윗에게 전해졌습니다. 30-31절입니다.
“저희가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왕이 곧 일어나서 그 옷을 찢고 땅에 엎드러지고 그 신복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선지라”
여기서 “듣게 된 어떤 것 곧 발표, 뉴스, 보고” 등의 뜻을 가진 “소문”(쉐무아 : sehmooaw')은, “소문”이라기보다는 “기별이나 통보”로 보는 것이 더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긴박하게 돌아갔을 당시의 상황이 항간에 소문으로 퍼질 시간적인 여유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는 사실과는 매우 다른 보고가 전달되었습니다. 이는 미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다급하게 살해 현장에서 도망쳐 나온 자들은 모든 왕자들이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는 짐작 하에 성급한 보고를 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살해하였다는 헛소문이 예루살렘에까지 전해지자, 다윗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견디기 힘든 큰 괴로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왕상21:27),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에4:3)라는 말씀에 의하면, 옷을 찢는 행위는 금식과 굵은 베옷을 입는 행위와 함께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나타내던 히브리인들의 표현 방법이었습니다. 다윗은 깊은 절망 속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의 신하들이 어떤 위로도 건네지 못한 채 거의 부동자세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고대로 다윗의 죄는 잔재를 남겼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엄청난 비극이었습니다. 절대 피했어야 할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범한 죄의 후유성(後遺性) 곧 죄를 짓고 난 뒤에 나타나는 일정한 특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죄는 운석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것이 떨어질지라도 떨어진 자리에는 큰 자국이 남습니다.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깁니다. 뒤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죄는 또 “하나님께서 벌하시거나 대가를 요구하시지는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다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기면,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버리시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자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감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구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선뜻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나름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데도 왠지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기쁨과 평안도 없습니다. 이렇게 한번 넘어진 죄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하고 오래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죄의 후유성은 죄의 용서와는 별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죄와 벗하는 삶을 청산하지 않으면 용서받았다 할지라도 후유성은 오래 남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죄에 대하여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요나답은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다윗에게 오직 암논만 죽었을 것이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습니다. 32-36절입니다.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고하여 가로되 내 주여 소년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저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그러하온즉 내 주 왕이여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생각하여 괘념하지 마옵소서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파수하는 소년이 눈을 들어보니 뒷산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더라 요나답이 왕께 고하되 왕자들이 오나이다 종의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말을 마치자 왕자들이 이르러 대성통곡하니 왕과 그 모든 신복도 심히 통곡 하니라”
여기서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를 직역하면 “압살롬의 입에(으로) 그 일이 결심되어 있었나이다”입니다. “그 일”이란 당연히 암논을 살해할 음모를 의미합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를 “암논을 죽이려는 그의 결심이 굳게 닫친 그의 입술에 잘 나타나 있었다”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암논의 사촌이었던 요나답은, 그로 하여금 이복 여동생을 범하도록 밀실 모략을 제공한 장본인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암논이 압살롬에 의해 살해당하도록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계략을 통해 일어났던 암논 사건이, 압살롬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압살롬의 동정을 가까이 에서 면밀히 추적해 왔습니다.
거기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묘략가(妙略家)였습니다. 당연히 입을 굳게 다문 압살롬의 마음에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인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살해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 사람처럼 정확하고 확신에 찬 말로 다윗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괘념하다”(쑴 : soom)는 “두다, 놓다, 생각하다, 배치하다” 등의 뜻으로, 어떤 일에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계속해서 집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왕자들이 죽었다는 소식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다윗은 다른 것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답은 모든 아들들이 아니라 암논 한 명만 죽었을 것이라는 말로 다윗을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에는 “이번 사건은 생각 없이 무차별적으로 저질러진 만행이 아닙니다. 죽여야할 대상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복수극이었습니다. 압살롬은 단지 정의를 행한 것뿐입니다. 왕께서는 사랑하시던 공주가 암논에게 당한 안타까운 일을 벌써 잊어버리신 것입니까?”라고 책망하는 듯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는 암논이 정욕을 채울 수 있는 책략을 제공했습니다. 압살롬의 암살 계획에 대해서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암논이 자신이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압살롬의 잔치에 초대되어 갈 때, 어떤 언급이나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다읫 왕에게 한마디만이라도 언급해 주었었다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그랬으면서도 절대권력을 가진 왕 다윗을 추궁하듯 말했던 것입니다. 또 우리는 그의 말을 통해, 그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 왔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는 지혜롭고 총명하고 기교까지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사건의 정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까지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그는 출세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종교와 정치의 영역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극히 간사한 부류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빌붙기 위하여 수시로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기생충 같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존재에 불과했음을 의미합니다.
또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위대한 능력을 통해 창조적이거나 책임져야할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자신을 그럴듯한 내부 정보나 소문을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여기도록 행세합니다.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어떤 책임도 지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관여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얻고 입지를 굳히려합니다. 요나답, 그는 압살롬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암논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정작 영적으로 죽어버린 자신은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사람의 마음에 가득한 욕심을 정확하게 꿰뚫어봅니다. 가장 지혜롭고 총명한 것처럼 위장하고 교묘하게 다가옵니다.
사건과 상황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와 해결책을 가진 것처럼 다가옵니다. 마음에 가득한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리를 옮겨도 되는 것처럼 충동질하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죄는 어떤 경우에도 창조적인 활동은 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발생해도 절대 책임지지 않습니다. 아니 책임질 능력 자체가 없습니다. 죄는 죽이고 파괴하는 것에 관한 한 전문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하여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조차 모질게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살리거나 회복하거나 창조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어떤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또 우리의 영을 죽입니다. 무감각하게 합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전혀 감각이 없다는 것은, 죄책감이 없다는 것은 그가 이미 죄에 사로잡혀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부귀영화와 권세와 명예를 가졌다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이미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한 청년이 “무거운 죄의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라. 주께 네 모든 짐을 맡기라”는 설교를 한 목사에게 마치 야유하듯 “죄의 무게가 도대체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목사는 청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여기 우리 앞에 죽은 사람이 누워있다고 생각을 해보세. 그 죽은 사람 위에 100kg이나 되는 무거운 짐을 올려놓았다면 그 사람이 무거운걸 알까? ‘너무 무거우니까 제발 내려 주세요’라고 말할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청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목사님도 참! 이미 죽은 사람이 100kg이 아니라 1000kg을 올려놓는다고 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그렇겠지? 그것과 마찬가지로 영이 죽은 사람은 아무리 무거운 죄가 눌러도 그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네”라고 말했습니다. 죄는 또 은밀히 행동하게 합니다. 다윗이 그랬고 암논이 그랬습니다. 요나답이 그랬고, 압살롬이 그랬습니다. 아니 하와가 은밀히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이후,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죄를 짓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은밀합니다. 그러나 곧 살펴볼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우리의 생각, 의도, 행동 등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계십니다. 죄는 또 두려움을 부릅니다.
암논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왕자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지는 것을 본 압살롬은, 침착하고 주도면밀하게 행동했던 조금 전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자리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 압살롬이 도망쳤다는 표현이 세 번씩(34, 37, 38)이나 반복해서 언급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팔레스타인의 실질적인 패자(覇者)는 아버지 다윗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도망쳤다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아버지 다윗이 마음만 먹으면, 그를 잡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필사적으로 사건의 현장만이라도 벗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의미도 없는 도망이라도 감행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는 그가 당시 정말로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한 교회에 기도할 때마다 말씀으로 하나님께 응답 받는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목사는 아이에게 자신에게는 아무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은 육체의 비밀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기도해 보라고 부탁했습니다. 잠시 후 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는 하나님께서 등뒤에 그려진 두 개의 줄이 목사의 비밀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목사의 등에는 두 줄의 흉터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한번은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한 목사는 다시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여쭤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역시 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는 목사가 가장 아끼는 것은 할아버지께서 보시던 성경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이에게 더욱 흥미를 느낀 목사는 마지막이라며 자신이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은밀한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여쭤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잠시 후 기도하고 돌아온 아이는 하나님께서 “목사가 숨기고 있는 은밀한 죄는 나도 모른다”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鑑察)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洞燭)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1-4)라는 시인의 고백 속에는, “감찰한다, 안다”는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생각도 아시고, 무심코 내뱉은 말도 아시고, 뱉지 않고 마음에 새겨둔 말도 아십니다. 우리의 행동이 무엇을 의도하는 지도 아십니다. 벌거벗은 것처럼 우리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아십니다.
은밀하게 저지른 죄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이에게 목사의 죄를 모른다고 하신 이유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주셨든지, 아니면 목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시기로 작정하셨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리고 둘은 하나같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두려워합니다. 사람을 두려움에 빠뜨리는 것이 죄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를 도무지 빠져 나오기 힘든 깊은 절망의 심연(深淵) 속으로 몰아넣는 죄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까?
처음 모든 왕자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잘못된 보고를 받은 다윗은 혼절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살아 돌아온 왕자들에게서 사건의 정황을 자세히 전해들은 다윗은 자신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우리아를 살해했던 죄를 기억했습니다. 자신이 암논을 엄히 징계하지 못한 결과, 결국 형제간의 살육이란 비극을 초래한 것에 대하여 심한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과 죽임 당한 암논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압살롬에 대한 염려 등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 그는 심히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거기까지 뿐이었습니다. 그는 또 다시 자식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나라와 민족을 절망으로 이끈 엘리의 전철을 밟았습니다. 37-39절입니다.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 아들을 인하여 슬퍼 하니라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한지 삼 년이라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아람 소국들 가운데 하나였던 그술(Geshur)은 이스라엘 북쪽에 인접한 나라입니다. 헐몬 산에서 갈릴리 호수까지 북부 요단강 양편으로 다리처럼 길게 뻗어있어 “다리 땅”(bridge land)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술과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하여 그술 왕 달매(Talmai)의 딸 마아가와 정략 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압살롬이었습니다. 그래서 형 암논을 살해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압살롬은 외할아버지가 다스리는 그술로 도망가 3년을 지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삼 년이란 세월은 다윗이 압살롬의 죄를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애끓기에 충분할 만큼의 세월이 지났음을 시사해 주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더라”는 말씀대로, 벌써 오래 전부터 죽은 암논을 잊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벌써 3년 째 자신의 곁을 떠나 있는 압살롬은 그리워했습니다. 그를 볼 수 없는 현실을 가슴 아파했습니다. 깊은 슬픔에 사로잡혔습니다. 특히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를 직역하면,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가기를 그쳤더라”입니다. 또 “...에게 간다”는 표현은 “...에게 가서 그를 벌하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9a절은 “다윗 왕이 마음속으로 압살롬을 법에 따라 처벌할 의지를 포기했다”가 보다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분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누그러졌습니다. 오히려 압살롬에 대한 연민의 정이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잘못된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말을 범한 암논을 율법에 따라 처단하지 않았던 것처럼, 암논이 처참하게 상해 당한 후에도 살인자 압살롬을 처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만민 중에서 구별하여 세우신 성민(聖民)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야할 그가 아들들의 죄를 묵과한 것은 절대 관대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경건한 자의 슬픔이라고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보다 편협한 개인적인 이익을 앞세운 그릇된 사랑에 불과합니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된 죄였습니다.
결국 증오의 세월 2년과 아버지를 피해 도망가 보냈던 3년 곧 5년의 세월을 허비한 압살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집행했어야할 임무를 소홀히 한 아버지 다윗을 몰아내야 한다는 역모(逆謀)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를 이을 최적의 후계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착각이 자리잡았습니다. 동시에 다윗의 능력을 공공연히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을 몰아낸 그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혁명정부의 수반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주어졌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포기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워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일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감행했습니다. 아들을 향한 다윗의 잘못된 사랑은 하나님까지도 대적하는 결과를 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에게도 잘못을 쉽게 묵과(黙過)하고, 그 결과에 직면하지 않았던 어두운 과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덮어 둔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매튜헨리( (Matthew Henry)는 “다윗의 자녀들이 그의 신앙을 본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잘못된 전철을 밟고 더 악하게 굴었으며, 그러면서도 회개하지 않았다. 부모들은 어떤 경우든 자녀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여주는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제가 두려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의식적으로 행했든, 무의식적으로 행했든 제 아이들은 저의 말과 행동을 보고 그대로 따라 배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미 현실로 드러난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두려운 것은 자녀들은 부모가 행한 것 이상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게 될 가장 슬프고 아프고 우울한 일이 분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자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자녀요, 다른 하나는 영적인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그들 앞에서, 어떤 자세로 죄를 취급하고 있습니까? 그 자세는 바릅니까? 죄를 용납하여 발전하도록 방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녀들의 죄로 인해 큰 상실감을 맛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녀들의 문제로 분노하면서도, 부모 된 책임으로 인해 깊은 동정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어떤 경우든 죄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해야합니다. 그것이 자신은 물론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 특히 사랑하는 자녀들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십시오. 정에 이끌려 방치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마십시오. 호되고 꾸짖고 돌아설 수 있도록 조치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죄가 주는 각종 고통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에덴 동산에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로 가득 채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아담에게 주시며,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b-1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라”(로 : lo)에는 “결코 먹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을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 실과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을 먹고자 하는 의지와 행위에 달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순종과 불순종은 인간의 영원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또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준 절대 명령이자 인간과 맺은 최초의 행위 언약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임을 깨우쳐주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면 영원히 살리라는 약속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언약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할 중요하고 무서운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죄가 죽음을 몰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죽음과 저주가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인류 역사를 통해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죽음을 불러왔다는 사실은 이론상의 교리가 아닙니다. 죄가 죽음을 부른 실제적인 예는 아담의 아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쳐죽임으로써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가인은 그것 때문에 평생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살아야 했습니다. 다윗은 매사에 신중했습니다.
죄에 대한 남다른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통합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가장 크고 결정적인 무기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이라는 죄에 사로잡힌 그의 분별력과 진실함은 죄에 대한 둔감함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죄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없는 무력함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그의 가문에 처절한 죽음을 불렀습니다. 밧세바를 통해 낳은 아들이 죽었습니다. 둘째 길르압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습니다. 첫째 암논이 죽었습니다. 후에 압살롬과 아도니야는 물론 그들을 지지했던 많은 백성들도 죽어야했습니다.
이렇게 죄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부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삶에 죽음과 저주와 절망을 불러오는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은밀한 죄를 씻어야 하는 이유는 은밀한 죄는 씻겨지지 않으면 공공연한 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죄로 인해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려 보았을 것이고, 갈등도 해 보았을 것이며, 자신의 신앙과 구원 문제까지 의심하면서 깊은 회의에도 빠져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증오하고 혐오한다고 해서 물러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비로소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그림자조차 밟지 않겠다고 다짐하십시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죄를 멀리하십시오. 자신 안에 가득한 은밀한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파헤쳐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드러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요일1:9)이라는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 자신 안에 숨겨진 은밀한 죄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파헤쳐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구하십시오.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구하십시오. 죄가 부르는 죽음과 저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와 기쁨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동행해 주심을 구하십시오. 그렇게 은밀한 죄로 인해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루도 빠짐없이 유혹하기 위해 다가오는 죄를 이기고 승리할 뿐 아니라, 죄가 부르는 참혹한 죽음과 저주와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와 기쁨과 안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