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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사에 있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으며 여전히 국가발전의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지역감정’. 지역감정은 그 해악에 대한 수많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선거때마다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오늘날의 정치판도 지역감정의 벽을 극복하지 못한 채 휩쓸려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망국적인 지역감정의 근거로 흔히 고려 태조 왕건이 유훈으로 남겼다는 「훈요십조(訓要十條)」가 거론된다. 훈요십조는 “전라도 지방이 ‘배역의 땅’이니 그곳 사람들을 관료로 등용하지 말 것”을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차별의 내용을 담고 있는 훈요십조에 대해서는 왕건이 당대에 지은 것이 아니라 후대에 조작됐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즉, 현종시대(1109-1031) 권력을 차지한 경주 최씨 집안에서 필요에 의해 제작됐다는 것. 훈요십조 조작의 내막을 알아봤다.
훈요십조의 내용 훈요십조는 고려가 불교 국가이므로 국가의 왕업은 반드시 부처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특히 한국 풍수지리의 시조인 신라 고승 도선(道先)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도선은 ‘차령산맥 이남이나 공주강(금강) 외곽 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즉,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반대방향으로 뻗었고 따라서 인심도 그러하니 그 아래 있는 주군 사람들이 국사에 참여하거나 왕후·국척들과 혼인을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것이요, 혹은 백제를 통합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방 사람들로서 일찍이 관가의 노비나 진(津)·역의 잡척(雜尺)에 속하였던 자들이 혹 세력가들에 투탁하여 자기 신분을 고치거나 간교한 말로서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재변을 초래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방 사람들은 비록 양인일지라도 관직을 주어 정치에 참여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호남의 도움으로 고려 건국 훈요십조는 도선국사를 한국 풍수의 원조로 추앙해 놓고 그가 태어나 살다 죽은 고향(전남 영암)을 ‘배역의 땅'이므로 차별해야 한다는 부도덕한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있다. 훈요십조 제2조는 모든 사원은 도선이 산수의 순역에 따라 개창토록 정해 두었으므로 그에 따르라 하고, 다시 제8조에서 차령 이남 공주강 외는 산형지세가 다같이 배역인심의 땅이므로 사람을 쓰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다. 도선은 신라말기인 827년 전남 영암군 구서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개설했고, 장보고 선단을 통해 체증·현욱 스님 등이 당나라에서 불교를 배워왔다. 도선은 장보고가 살해되던 841년 출가해 장보고 선단을 통해 귀국한 혜철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는다. 도선은 37세에 지리산 섬진강 근처 백계산 옥룡사에 터를 잡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와 같은 고향에서 최형미(846-917), 김경보(868-947) 승이 태어났다. 이들은 모두 왕건의 부름을 받았던 인물고 같은 마을의 최지몽(907-987)은 왕건의 태사에 추증됐다. 그러나 이들 세 승은 공적이나 학덕에 있어 삼국통일을 예언한 도선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그런데 왕건이 도선의 말을 빌어 도선과 세승의 고향을 ‘배역의 땅'이라 한데는 모순이 있어 보인다. 더욱이 왕건은 전라도의 해양세력과 경기만 해양세력의 도음을 얻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호남의 서남해안은 중국의 장강 이남과 교류해오던 곳으로 신라 말기 당나라와의 교역으로 경제력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선진된 문물을 흡수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왕건은 궁예와의 어려움이 생기면 선단을 이끌고 전남의 서남해안일 찾았고, 해양성이 강했던 나주·영암·순천·광양·영광 등지의 토호들의 환영을 받았다. 전남평야의 중심이라 할 나주의 토호 오희는 왕건과 이해를 같이해 그의 딸을 왕건의 제2 부인에 앉히고 영산강 어구의 영암토호 최흔(최지몽의 아버지)을 끌어들여 후백제에 치명타를 주었다. 순천의 박영규 세력은 처음에 후백제에 참여했다가 말기에 왕건편에 가담했다. 결국 왕건은 후백제의 해양세력의 협력을 얻어 후삼국을 통일한 것이고 통일후 후계자를 나주 출신 왕무(2대 혜종)로 삼았던 것이다.
훈요십조 위작의 문제 호남세력은 왕건이 죽은 뒤 정종·광종 대를 거치면서 황주의 황보씨 집안과 충주 유씨 집안, 경주세력 등의 따돌림을 받아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종이 고려를 침범한 거란에 쫓겨 나주로 피신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잡는다. 신라계 인물들은 주로 문반이었으므로 쫓기는 현종을 보살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거란군이 강조를 죽이고 물러간 뒤 현종이 개경에 돌아가기까지 두달 동안 호남사람들의 접대는 어린 나이의 현종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전주에서 박온의 딸을 얻고 훈요십조에서 배역의 땅으로 지목한 공주강 나루터에서 김은부는 세딸을 현종과 동침시켜 개경에 남아 있던 경주계 권신 최항 등을 당황스럽게 했다. 기록에 의하면 최항은 채충순과 모의해 김치양을 역적으로 몰고 드디어는 30세의 목종까지 몰아내고 경주 김억렴의 외증손인 현종을 왕위에 올려세운 장본인이다. 최항과 같은 집안인 최제안은 현종을 만나 태조께서 왕들이 명심할 「훈요십조」를 남긴 바 있는데 그 「훈요십조」가 최항의 집에 있어 가져왔다고 내비친 바 있다. 이 경위는 현종 때 편찬한 <고려사>에 나온다. 그러나 최항이 난리(거란의 침입)를 겪은 3년뒤 새로 짓는 국사(고려사)의 감수국사를 맡아 적어넣었다는 점에서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더욱이 이때 만든 <고려사>가 오늘날 전해오는 것이라해도 「훈요십조」는 나주 출신 왕무를 잘 보필하도록 당진의 면천 출신 박술희를 불러 이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왕가도 아닌 최항의 집에있었다는 기록은 믿기 어려운 대목이다. 태조 왕건 자신이 전라도 연해안 세력과 협력하고 결혼한 입장에서 자식들에게는 경계하라고 했다는 논리를 정사(正史)로 받아들이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유훈을 받은 박술희마저 혜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종에 의해 강화로 유배된 뒤 살해당했으므로 그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최항등은 강조가 거란의 성종에 의해 살해된 뒤 현종이 돌아오자 강조와 더불어 현종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전남 출신 위종정·박승종·탁사정 등을 해도로 유배시켰다. 그리고 경주 출신 최치원과 설총을 문묘에 배향하고 경주를 동경(東京)으로 승격시켰으며 「훈요십조」의 권위를 보완할 목적으로 전남 출신 도선을 대선사로 추봉하느 조치를 취했다. 학계 일각에서 <고려사>가 편찬된 시기와 배경을 두고 「훈요십조」의 위작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 이다. 일본인 사학자 금서룡(今西龍)은 위작의 주동인물로 최항(현종 15년 사망)과 최제안(문종 즉위년 사망)을 꼽고 있다. 박종진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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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농님께서 훈요십조 위조설에 대해서 말씀하시길래 찾아봤습니다.
첫댓글 훈요십조 위조설은 충분히 가능성있는 가설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