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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귀향길은 전주 쪽에서 논산 공주 쪽으로만 잡아왔기 때문에 이번엔 계룡산 동쪽에 소재한 동학사를 찾기 로 했다. 국도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꽤 먼 곳같이 느껴지게 해준다. 계룡대를 넘어 1번국도 구도로를 이용해 들어서니 막바지 단풍객들로 만원이라 주차장이 꽉찬 바람에 두바퀴나 돌다가 조금 비싼 주차료를 지불하고 들어선 시간은 오후 4시가 넘어 서이다. 복잡하기만 한 상가를 지나 옛날 삼거리 주차장부터 걸어올라 꽤 힘들었던 기억을 되삭이며 일주문을 들어선다. 동학사는 나라 최초의 비구니 승가대학으로 잘 알려져 있는 사찰이다.
동학사에 대해 역사를 알아보면 충신들의 넋을 위로하는 비구니 수행도량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숙종45년 임신초에는 세조가 동학사에 거동하셔 세상에 전하기를, 절의 승려가 재를 베풀어 원통하게 죽은 혼령들을 위로하였고, 이른바 초혼기라는 것이 아직도 보존되고 있는데, 이것은 여러 신하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전하여주었다" 고 적혀있다 전한다. 그래서 인지 동학사 들어서는 계곡엔 홍살문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고 또 향교나 제당같은 곳이 있어 의아해 하였는데 이곳이 조선 충신들을 추모하는 곳이라 한다.
[동학사 입구 삼거리에서 올려다본 계룡산자락의 멋진 암릉...]
[주차장앞 상가에 예쁘게 들어선 음식점...]
[주차장위 돌려나가는 다리를 바라보는 단풍나무...]
[계룡산 동학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
1999년 11월 11일 일연스님의 원력으로 불사가 이루어진 일주문은 세속의 세계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이다. 일주문에 들어서면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는 의미로 기둥 두개를 일직선으로 세워 옆에서 보면 기둥이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부처님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문을 들어서면서 커다랗게 올려진 일주문의 규모에 압도된다. 일주문에는 계룡산 동학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계곡길 좌측에 무명의 작품이 눈길을...]
[조금더 오르면 또하나의 작품이...]
[계곡길을 오르다 보면 많은 세월을 사찰과 같이 했을 것 같은 고목들이 즐비하게...]
[벚나무가 많은 이 계곡엔 단풍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아...]
[계곡 건너는 다리와 외로운 빨간 단풍나무 하나...]
[동학사 계곡 중간에 자리한 동학사 불교문화원...]
[입구넘어 첫 번째 만나는 관음암 이라는 암자...]
[관음암 건너편엔 부도군이...]
[관음암 입구 계단과 담장의 조화...]
[뒤이어 길상암이라는 암자도...]
[길상암 입구와 멀리 산세가 느껴지는 산봉우리가...]
[길상암 담장끝엔 멋진 단풍이 한자리...]
[규모가 제법큰 미타암이라는 암자도...]
[미타암 우축편을 보면...]
[미타암 끝자락에서 멀리 동학사 건물들이 보이고...]
[얼마를 걸어올랐을까 홍살문과 세진정(洗塵亭)티끌 만한 번뇌도 이계곡에 닦고...]
[내가 좋아하는 굴뚝과 또 어울리는 돌담...]
[다리끝에도 멋진 구조물이...]
[인재문(仁在門)이란 현판이 걸린 숙모전의 외삼문...]
세조에 의해 왕위를 강제로 빼앗겼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참형을 당한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456년(세조 2)에 처음 마련된 제단(祭壇)으로, 그로부터 2년 후에 왕이 친히 이곳에 와서 단종과 금성대군(錦城大君) 등의 종실과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 당시 죽음을 당한 280여 위패를 모신 초혼각(招魂閣)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초혼각지(招魂閣址)는 충청남도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뒤 1466년(세조 12) 김시습(金時習) 등이 증축하여 매년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오다,
1728년(영조 4) 화재로 타버린 것을 1827년(순조 27)에 다시 세웠다. 그 후 1864년(고종 1) 만화(萬化) 스님이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초혼각 북쪽 벽에 단종의 위패를 모시고, 동쪽 벽에는 고려말 충신인 삼은 삼상 엄흥도 등 7위를, 서쪽 벽에는 사육신과 김시습 등 7위를 모셨다. 고종 41년(1904)에 이름을 숙모전(肅慕殿)으로 바꾸고 단종의 비 정순왕후를 함께 모셨다. 숙모전은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재문안쪽 숙모전과 동, 서량무가 자리하고 있고...]
[동계사(東鶴祠)와 삼은각...]
동계사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충신 박제상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입니다. 고려개국공신 유차달이 고려태조의 원당인 동학사를 유람하던 중 사중에 모셔진 박혁거세 및 박제상의 영정을 보고 박제상의 충열을 사모하여 경내에 동계사(東鶴祠) 라는 사당을 창건하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은각은 고려말 이성계에 저항 죽은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 야은 길재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초혼제를 지낸 단에 세운 각이다. 현재 삼은각에는 세분 이외에 금알 유방택, 도은 이숭인, 죽헌 나계종의 위패가 모셔져있다고 한다.
[좌측엔 숙모전 우측엔 삼은각과 동계사...]
[이제 계단을 오르면 동학사 대웅전이...]
[동학사 감로수...]
[동학사 염화실은 현재 주지스님이 주석하고 계신...]
[동학사 범종루...]
1872년 주지 옥봉스님이 건립하였고, 1974년 수현스님이 범종을 새로 조성하였으며, 법고와 운판과 목어는 2000년 일연스님이 불사하였다.경내 입구에 면해서 위치하고 있는 범종루는 하층에 1칸씩의 기둥만을 세워 올린 2층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획하여 그 내부에 범종을 달았다. 공포는 주간에 내, 외 2출목으로 구성된 주간포를 1구씩 배치한 다포식이나 정교하지 못하며, 기둥내부로 낙양을 달았고 지붕은 사모지붕을 올렸다. 시멘트 골조로 지어진 아래층에는 동학사 관광용품을 판매하고 있다.
[동학사 대웅전...]
경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대웅전은 1980년 당시 주지였던 봉민스님의 원력으로 개축된 건물인데, 대웅전으로서는 지나치게 왜소한 느낌을 주며 건물 자체가 큰 특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대웅전의 무사석으로 쌓은 석단 위에 세워졌으며, 이 무사석에는 불기 이천구백육십이년(1935) 을해 오월일준공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무사석 석재들은 풍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으며 년대가 상당히 경과된 것으로 엿 볼 수 있다. 대웅전은 이러한 석조 기단 위에 복연판주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워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으로 2익공 팔작지붕으로서 남향하여 건립되었다. 공포의 구성은 내출목, 외3출목으로 하여 내부공간을 한층 더 장엄하고,
화려하게 구성하였고 외부 돌출된 쇠혀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었고 내부는 운궁형으로 되었다. 지붕가구는 불단 앞에 서있는 내고주에 대량을 걸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결구하고 있는 2중량가구로 종량 상부에 우물천정을 가설하였고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렸다. 그리고 동벽에는 신장탱화와 약사회탱이, 서벽에는 미타회탱과현왕탱이 걸려 있는데 목각탱을 제외한 불화들은 모두 1898년(광무2)에 제작되었다. 전각 내외에 화려한 단청을 그려 장엄하였고, 외벽에는 팔상도가 그려져 있다.
[대웅전 삼존불과 뒤에는 목각으로 만든 후불탱이...]
대웅전 삼존불중 가운데 계신 석가여래는 소불의 좌상이다. 머리는 나발의 형태이며 육계가 커서 그의 형태가 뚜렷하지 못하다. 또한 머리에는 계주가 2개 있는데 정상계주는 상투형태의 것이며 전면계주는 반원형의 것이다.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부분에 군의 자락이 조각되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목조대좌 위에 봉안되었으며 무릎 폭은 70㎝ 이다. 아미타여래는 소조로 만든 불좌상으로 머리의 형태는 나발이며 육체의 모습이 뚜렷하지 못하다. 계주가 2개 있는데 정상 계주는 상투형태이며 전면 계주는 반원 형태이다. 양미간에 백호가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3도가 뚜렷하다. 법의는 통견으로서 가슴에는 군의가 조각되었다. 약사여래는 소조로 만든 불좌상으로 머리는 나발의 형태이며 육계가 뚜렷하지 못하다. 계주가 2개 있는데 정상 계주는 상투 형태의 것이며 전면 계주는 반원 형태의 것이다. 양미간에 백호가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3도가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에 군의주름이 조각되었다
[동학사 대웅전내부...]
[동학사 삼층석탑과 대웅전 산수화 문살...]
동학사 대웅전 앞에 위치한 높이 1.85km의 조그만 탑이다. 이 탑은 동시대, 동일한 치석의 방법으로 조성한 것이 아닌 여러 돌을 석탑의 부분적 재료로 사용하여 만든 것인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전각골의 절터에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대웅전 앞에 위치한 탑의 구조를 보면 지대석은 2매의 자연석으로 조성되었고 기단석도 2매로 이루어졌으나 1매석은 자연석으로 보완하였고, 나머지 1매석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갑석은 부분 파손을 입고 있는데, 그 윗면에는 옥신 괴임을 높게 조각하였다. 초층탑신은 1매석으로 되었으며,
문비(자물쇠)와 우주를 모각하였다. 초층 옥개석과 2층 탑신은 1부재로 이루어졌으며, 2층옥개석은 1석으로, 3층 옥개석은 탑신과 붙어 하나의 돌로 되었는데 전각은 약간 반전되었고 노반이 또한 1부재로 이루어졌는데,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3단이며, 낙수면은 완만하다. 초층탑신 2층 탑신은 우주가 표현되었으며, 3층탑신은 망실되었다. 상륜부는 노반 이상이 모두 망실되었다. 이 탑의 현재 높이는 167㎝로 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건립으로 추정된다.
[동학사 삼층석탑...]
[동학사 대웅전 옆...]
[많은 신도들의 염원이 담긴 동자승들이...]
[卍자는 뚜렸한데 밑의 글은 알아보기가...]
[동학사 삼성각...]
대웅전 좌측에 인접하여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삼성각은 장대석을 외벌대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워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앞면 3칸에 모두 닫이 띠살문을 달았는데 오른쪽 앞칸에도 외여닫이문을 달아 평상시에는 출입에 이용하고 있다. 대웅전 좌측에 인접하여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삼성각은 장대석을 외벌대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워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앞면 3칸에 모두 닫이 띠살문을 달았는데 오른쪽 앞칸에도 외여닫이문을 달아 평상시에는 출입에 이용하고 있다.
[좌측엔 동림당 우측엔 조사전 그리고 뒤엔 강설전과 실상선원이...]
[알 수 없는 석조물이...]
[동학사 강설전(講說殿)입구...]
수행 중이라 민간인의 접근이 금지된 강설전외 다수건물들이 있는데 강설전에 대해 알아보면 목조 2층 건물로서 앞면 5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며, 띠살문 4분합문이다. 처마 밑의 단청이 곱고 사방벽에 외벽화가 그려져 있다. 전각은 1985년 당시 일초스님이 원력으로 신축하였다. 1층은 도서관으로 이용되며 내과와 외과에 관련된 논문과 자료집 등을 열람하고 복사하거나 대출할 수 있다. 한글대장경과 신수대장경 및 고려대장경 등 모든 경전을 갖추었다. 큰 스님의 설법과 고승전, 염불테잎과 자료 CD 등을 대출할 수 있다. 2층은 서예와 사군자 및 컴퓨터 특강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동학사 화경원으로 화엄실 이었던 건물로 요즘엔 스님들의 연구실로 쓰인다고...]
[향아교(香牙橋)라고 쓰인 다리...]
[화경원 밑으로 설법당쪽 내림길...]
[늦은 장미꽃이 힘없이...]
[올라올 때 와는 달리 한전한 내림길...]
[계곡엔 물은없고 단풍만 소복히 쌓여...]
[역시 빨간 단풍은 눈을 즐겁게 해주고...]
[물에 비친 나뭇가지는 음산함을 주고...]
[봄 인가 착각을 일으키게 해주는 나무...]
[다시 불교문화원 앞을 기나고...]
[단풍을 감상하며 내려가는 길목엔...]
[늦은 시간이라 인적도 드물어 쓸쓸함 마져 느끼게 해주고...]
[하늘을 쳐다봐야 계룡산의 규모를 느낄 수가 있어...]
[다시 찍은 일주문 근처엔 들어설 때와 달리 인적이 없고...]
김시습이 단종과 사육신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초혼제를 지낸 단 이라는 설명은 들은 세조는, 원통하게 죽은 280여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서 주며 토지를 내리고 초혼각을 건립하라고 명하면서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고 한다. 또 동학사란 사찰명도 세조가 내렸다고 한다. 인재문을 닫아놓아 들어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아기 자기한 동학사의 기억과는 달리 이제 커다란 건물들이 잔뜩 들어선 강원으로써의 동학사를 보는 눈은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직시하게 해준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