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과대학원에 재학중이던 박과장을 스카웃한 것은 당시 인사권을 행사하던 MB사장이었다. 박과장을 비롯해 홍보조직을 장악한 젊은 시절의 MB사장은 중동특수에 편승해 재계의 기린아로 성장했다.
그러나 일약 37세에 사장으로 수직상승하던 MB에게 10.26과 박 정희의 죽음은 어두운 터널의 시작이었다.
박정희는 용의주도하게도 재벌오너와 전문경영인을 상호견제속 에 경쟁하게 함으로써 전문경영인의 입지를 넓혀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 5공정권의 등장이후 전문경영인들은 일개 과장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통령과의 독대기회가 없어진 것이었다.
전문경영인들은 청와대에 민원을 하소연할 수 없었고 H그룹내 에서 기관리능력과 해결사역할을 독점하던 MB사장은 후배 경영인의 부상과 로열패밀리들의 득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대외이미지관리를 도맡아 MB를 재계의 풍운아로 포장해주던 홍보조직에 대한 장악력도 현저하게 감소되었으며 이러한 와중에 방대하던 홍보조직은 맥없이 축소되는 수모를 겪은후 살아남은 몇몇은 회장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만 했다. 박과장도 철저한 시각교정을 겪은후 회장맨이 되었다. 물론 자신을 챙겨주던 MB를 의식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런데 드디어 1987년 6월 정동 성공회대성당에 모인 민주인사들을 중심으로 최초의 전국을 대상으로한 최초의 민주화요구운동인 6월항쟁이 터진 것이다.<계속>
< 1987년 그리고 박종철 >
박종철은 나의 고교 5년 후배였다.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당할때 나는 모자라는 학점을 채워 대학을 졸업하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의 호헌선언이 터지자 나는 다시 고질적인 학습의욕저하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기실 나의 이 고질병은 10.26으로 고착된 것이다. 처음 대학 2년동안 거의 기말고사없이 휴학의 연속으로 전공지식습득에 실패한후 공부는 단절되고 생활은 고단함으로 나를 몰아부쳤다.
그렇게 졸업과 사회진출이라는 작은 고민에 청춘이 병들어 갈무 렵 6월항쟁의 발발은 돌파구가 되어 주었다. 교수를 찾아다니며 학점을 구걸하고 써머스쿨까지 활용한후에야 종암동 하숙촌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졸업을 하고 재벌회사인 H그룹에 입사하여 홍보실근무를 자원했다.
동문회를 통해 나는 박종철이 나의 고교후배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박종철후배에게 빚을 진 셈이었다. 그가 죽지 않았으면 나는 대학졸업장을 챙겨들고 고향으로 갈 수 있는 명분을 영원히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 균열1>
"홍보담당자 올라오라고 해" 명예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회장은 요즘 자꾸 홍보책임자를 불러댄다. 사실 9백여명이나 되는 그룹 중역들의 얼굴이나 제대로 기억하 고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노회한 회장 아닌가?
어떤 백화점 회장은 사무실에 백이십명쯤 되는 직원들 사진을 붙여놓고 매일 눈에 익힌다는데 매장 여기저기 짱박혀 있는 직원들과 밀려드는 고객들을 구별하기위한 고육지책이리라.
명예회장이 아마 이름과 얼굴을 정확히 매치시키고 있다면 <김 상무 혹은 이전무 아니면 누구누구 불러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매번 <무슨담당자 혹은 무슨 책임자>를 찾는다. 그러다보니 불려가는 사람도 진짜 회장이 자신을 알아서 찾는 것인지 그냥 막연하게 불려가는 것인지 불안하고 헷갈리는 것이다. 더군다나 명예회장의 발길질에 회사를 그만둔 중역이 어디 한둘인가?
이러다보니 당연히 비서실장의 훈수가 굉장히 필요해지는 것이. 다. 회장과 독대하기전에 비서실장의 자문겸 코치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몇몇 창업공신들은 예외일 것이다.
회사가 조용하고 사업이 잘 될 때는 이러한 이야기도 하나의 재미잇는 에피소드감이겠지만 1990년 전후의 기업사정이라는 것이 반정부운동이 반재벌운동으로 전환되어가는 재벌기업사에 일대 위기상황이었다.
소소한 요소들이 모두다 조직내 갈등의 요소가 되는 분위기였다. 이른바 창업공신들과 소위 비서실출신 가신들과의 갈등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회장과 젊은 시절을 함께 현장에서 뒹굴며 입신양명한 공신들은 비서실의 스크린을 무시하며 회장과의 독대를 성사시킬 수 있었고 그것을 즐겼다. 비서들은 자연히 공신들과 등을 돌리고 회장과 로열패밀리의 이 익을 비호하는 쪽으로 움직여 갔던 것이다.
노련한 회장이 이 모든 것을 위에서 파악하지 못했을리는 없었 겠지만 사람은 나이가 들면 귀가 엷어지고 가까이 있는 것들에게 애착을 두는 법이다.(계속)
< 균열2>
회장맨들사이에선 명예회장을 <멍 에 회 장>이라 불렀다. 자기자신은 자리를 물리고 싶은데 마땅한 인물이 없어 억지로 무거운 명패를 짊어지고 산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보들의 거짓말이다. 한국경제는 위기관리경제이다. 불법적이고 방대한 재벌조직 특성상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법적인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 명목상 명예회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방패막이로 삼고 실질적으로는 지배권을 더욱 강화해 온 것이다.
지배권강화란 재무와 인사파트의 핵심인력을 회장맨일색으로 갈 아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기 조직을 해체시키고 자신의 조직을 부식시키는 것은 기업의 꼴새를 망가뜨려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외부언론을 이용해 적당히 포장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촌지를 아낌없이 뿌려 기자들의 손목을 꺽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회장과 그의 추종자들 입장에선 압구정동 아파트특혜분양사건으로 여론의 집중포화에 노출된 후 사장에게 넘겨준 인사권을 넘겨받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이러한 경영전략을 실현가능케 하기 위해선 맨먼저 홍보조직을 접수해야 했을 것이다. 판단이 여기에 이르면 꼬투리잡는 것은 일이 아니지 않는가?
< 악마의 음모 3당야합>
6월항쟁으로 인한 민주화의 불길은 전국을 달궜다. 5공정권하에서 권토중래하던 MB와 공신들은 또한번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전문경경인들도 통일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학벌과 지역으로 양분되고 얽혀있는 복잡한 역학관계의 실타래 같은 것이다. 회장과 로얄패밀리의 입장에서는 대졸 출신 전문경영자들이 갈등하고 분열할수록 관리하기 편한 것이다. 사람사는 곳에 정치논리가 있다. 마키아벨리식 분할통치(DIVIDE AND RULE)기술이 통하지 않는 곳이 있는가? 그리고 중화문명권에는 삼국지 경영학이 또한편 힘을 발휘한다. 천하를 삼분하여 정립케하는 제갈공명식 황금분할은 유일 독재권력이나 재벌회장에게는 매우 효율적이고 안전한 관리를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대격변은 절대권력자의 모든 의도를 흔들어 놓고 마는 힘이 있는 것이다. J회장은 10년동안 맡았던 전경련회장자리를 내던지고 다시 회장실로 새벽출근을 시작한다.
그가 가장 먼저 손대기 시작한 것은 그동안 별관의 한쪽에서 한가하게 직장생활을 하던 홍보조직을 자신의 사무실 바로 아래로 차출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경련회장실을 출퇴근하면서 그러니까 국회가 있는 여의도기행을 통해 더욱 능숙해진 경륜을 발휘할 기회를 엿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주도로 정치권의 여소야대구도를 깨고 3당야합을 추진한 것이다.(계속)
< 신화의 실상 >
한국경제의 견인차로써 공과가 분분한 재벌의 역사상 과연 전문경영인들이 긍정적 기여만 했다고 할 수 있을까?
J회장의 신화가 과장된 만큼 MB사장의 신화도 과장되었다. 30대 중반 일약 우리 나라 최대재벌의 사장이 되어 스폿라이터를 받은 MB신화에 대한 구설수는 몇가지가 있다.
가장 흔한 소문이 회장의 아이들 즉 지금 로얄패밀리를 구성하고 있는 오너경영인들의 가정교사로써 인정받았다는 설이다.
이것은 정확히 말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회사실무를 맡고 있던 대졸사원들이 회장 직계자손들의 유학수속을 밟아주거나 최소한 비행기 티켓팅등을 도맡아 한 사실은 이러한 소문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문화의 가장 큰 문제는 주머니돈이 쌈지돈이라는 사실이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MB자신이 직접 힌트를 주는 그의 성공신화의 배경은 5월혁명세력내 소장파인 S등과의 인연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입사과정에서의 하나의 해프닝처럼 알려져 있다. 학생운동전력으로 입사거부당한 대졸실업자 MB가 당시 혁명지휘부의 누구를 찾아가 담판했다는 것인데 왠지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이런 경우 진실은 MB반대파도 친MB세력도 아닌 제3자에게 물어 봐야 한다.
자살한 MH와 소설가 C는 Y대 국문과 동기생이다. 학창시절 창작보다 학문에 몰두한 MH는 과수석졸업생이었다. 별들의 고향등으로 출세한 대중소설가 C는 MH가 회사의 홍보담당 중역이 되자 많은 문인들을 소개하게 되고 그중 라이벌 K대출신 소설가 K등이 있었다.
내가 종암동 하숙촌에서 알게된 L선배는 이들과 같이 대학을 다녔고 공교롭게도 졸업후 H건설에 입사한 후 K의 소개로 회장아들인 MH를 알게 된 것이다.
L선배야 말로 K대 출신으로서 MB와 그 최대라이벌인 Y대 출신인 로얄패밀리 MH사이에서 양쪽 정보를 공유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양쪽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L선배는 양쪽으로부터 소외되어 지방현장을 전전하다 지하철공사장 관리직으로 여의도에 숨어 회사에서 그 존재를 이어가고 있었다.
" MB의 진짜 백그라운드는 박통의 장조카 P의원이야 "
P의원은 K대 법대시절 MB를 알고 있었고 졸업후 빌빌거리는 그를 취직시킨후 MB를 소위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키워 전문경영인이라는 허울좋은 일본식 조어로써 젊은 신입사원들을 유혹해 오직 일만 열심히 해서 출세했다는 MB식 신화에 물들게 함으로써 재벌신화의 부속품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J회장의 초등학교신화역시 허실이 있다. 그시절 초등학교는 상류층의 전뮤물이었다. 서민은 그저 서당공부라도 감지덕지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가기전에 공맹을 깨우쳤으며 그의 모친은 원산의 수피아여고 출신 인텔리여성이었다.
젊은 시절의 J회장은 이미 쌀장사로 동생들을 유학보낼 정도였으며 20대 후반의 그는 육법전서를 옆구리에 끼고 종로거리의 고시학원을 기웃거리던 고시생이었다. 그는 생판 무식한 자본가가 아닌 굉장히 어려운 전문서적을 탐독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왜 무식을 가장하는 것일까?
그는 대졸자들을 거꾸로 매달아보기위해 짐짓 그의 초등학교 졸업장을 흔들며 혈기 넘치는 젊은 샐러리맨을 유혹하는 노련한 투우사였는도 모른다. 그의 지식허무주의는 조직을 긴장에 몰아넣어 조직을 휘몰아가는 관리방식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명예회장이 서산농장에 모내기하러 내려갔다는 소문이 돌면 H건설의 중역들은 초비상상태에 빠지게 된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조직을 한번 크게 흔들어 변화를 모색하기전에 그는 반드시 모내기쇼를 벌였던 것이다.
신화의 이면에는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벌거벗은 한 인간과 그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계속)
< 서울 1986년 겨울>
박과장의 전임은 D일보의 해직기자출신이었다. 아직도 현직으로서 D일보 논설실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전기자가 홍보과장을 할때만 해도 홍보실은 재미있는 직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기자의 장형은 매력적인 허스키보이스로 일세를 풍미했던 가수 배호노래의 대부분을 작사한 시인 전우로서 그 역시 가수 최희준과 마찬가지로 S대 법대출신이었다.
서울대 국문과에 도전했다 고배를 마신 전기자는 형에 대한 열등감으로 대학시절 기자시험에 몰두하다 국내 굴지의 D일보에 수습기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강단있는 젊은 기자로서 성가를 날리던 전기자는 80년 신군부의 칼날아래 해직당하고 하루아침에 거리의 기자로 전락하게 된다.
이때 전기자를 H그룹 홍보실로 스카웃한 것이 젊은 사장시절의 MB였다.
현역기자들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던 전기자는 방어홍보와 대학선배 MB의 이미지관리에 일조하게 되지만 그는 소설가를 지망하던 문학도로서 신춘문예에 늦깍기도전하는 모험을 통해 작가로의 변신을 꾀한다. 그예 1987년 그는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당선되게 되는데 그의 소설 제목은 한때 기독교인이 되어 월간지를 떠들석하게 했던 작가 김승옥의 <서울 1968년 겨울>을 패러디한 <서울 1986년 겨울>이었다.
1980년 초반 열사의 중동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노동자폭동과 독직사건으로 쫒겨난 H건설은 대규모인원감축과 서산물막이공사를 통한 중장비유지관리를 통해 위기탈출을 시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해직당한 한 샐러리맨의 좌절을 소재로 한 소설이었다. 후배였던 전기자가 선배 MB의 아픈 곳을 건드린 셈이었다.
이때 인사권을 행사하며 인원의 1/3을 해직시킨 MB사장은 조직내 많은 반대파를 양산하게 되어 샐러리맨의 우상으로서 그의 이미지에 결정적 손상을 입게 된다.
전기자는 이러한 MB의 퇴조와 5공정권의 이완을 틈타 다시 언론계로 복귀하게 되고 그 후임으로 사보팀장을 하던 박과장이 홍보업무의 실무핵심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평가는 전임에 비해 낮은 영향력으로 인해 유동적이었으며 그는 업무를 독점함으로써 조직내 장악력을 확보하려 과도한 일욕심을 부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조직내 갈등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될 법도 한 것이었다.
신문사처럼 자유롭고 재량권이 풍부하던 전과장시절을 그리워 하던 홍보실 직원들의 불만은 안으로 내연하고 신임 박과장은 입사동기인 회장 비서실장의 후광을 업고 홍보실장마저 무시하는 월권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다소 욕심이 많았을 뿐 재벌기업 홍보과장이라는 자리는 탐낼만큼 매력적인 기업의 노른자위였던 것이었다.
< 한화 20억원과 영국차관 20억불 >
2004년 봄 우리는 촛불시위와 검찰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소동을 겪는 와중에도 4.15총선을 무사히 마쳤다.
언론은 진보여당이 최초로 국회를 장악했다며 대서특필했다. 이제사 우리는 1987년 정동에서 깃발을 높혔던 6월항쟁의 결산을 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와중에 여당 사무총장출신 국회의원까지 정치자금 20억을 배달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무혐의로 풀려나는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13년만에야 H그룹 J회장등을 필두로 보수세력이 쇠말뚝을 박아놓은 3당야합의 주술이 해체되는 것을 보는 듯 하다.
총선이 끝난후 4월의 마지막주 재무부장관이 영국으로부터 20억달러의 차관을 승인받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20억달러는 한화 20억원의 1천배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민주화를 축하하는 세계의 축의금 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13년전 나는 서류봉투에 1천3백개의 만원짜리지폐를 쓸어담고 검정색 세단을 탄채 C일보로 향하고 있었다.(계속)
< 환멸의 리쿠르팅>
매년 2천명이니 3천명이니 가을이 되면 일간신문 1면을 장식하던 대기업 채용공고는 재벌의 차관따먹기 전략의 일환일뿐 조직에 어떠한 새로운 기풍도 진작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 피의 수혈이 기업문화에 쇄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차단되어 있었다.
미국이 주도한 對韓國 경협차관은 주로 매출액과 직원수를 기준으로 지급되는 것이었다.
매출액 1위와 2위사이에는 거의 배이상이나 되는 차관지급액의 격차가 있었다.
그래서 S그룹과 H그룹은 연말이 되면 피를 말리는 매출액경쟁을 벌여 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4년 영국의 對韓차관 20억달러의 의미는 매우 질적인 전환이 될 것이다.
즉 민주화가 잘되고 기업문화가 자유로운 국가와 기업에 돈을 더 많이 싼 이자로 빌려주는 것이다.
이러니 신입사원채용은 거의 형식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재경부(경제기획원)의 눈치를 보며 숫자를 주물러 대는 것이다.
1980년 광주이후 한국경제는 성장의 활로를 국내외적으로 차단당했으며 그때부터는 메인터넌스(현상유지)속에서의 국내시장 쟁탈을 위한 암투의 나날이었다.
이미 판은 짜였졌는데 신입사원의 입지가 원활하게 보장될 리 없었고 소위 오너들은 다만 형식적인 투자와 계열사불리기를 통해 이자가 싼 외자를 끌어오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경제가 사람보다 돈을 우선시할 때 생산성은 답보하게 되고 부동산과 사채놀이가 극성을 부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70년대 후반 H종합상사는 드디어 S물산을 매출에서 추월하게 되는데 아침 면도중 이 소식을 들은 돈병철회장은 깜짝놀라 면도날에 목을 다쳤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런식으로 해서 재계의 금메달선수가 된 H그룹이 80년대 대규모 차관을 끌여들여 만든회사가 바로 최근 주가 1,2백원대를 왔다갔다하는 H반도체인 것이다.
사주들은 차관을 사적인 용도로 빼돌려 명동사채시장을 통해 개인재산을 불리기도 했다. 가지급계정이라는 회계상의 편법은 모든 불법적 도적질을 합리화해 주었고 저명한 변호사들은 법률고문을 맡아 오너경제를 견고히 지켜주었다.
대기업 신입사원들은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오로지 개미처럼 벌처럼 일만하다 3,4년후에 진이 빠져 퇴사하거나 혹은 좋은 선배만나 조금 작은 회사로 옮기며 진급하거나 확실한 끈(소위 가신들) 을 잡고 죽이면 죽으리라 메달리며 고속승진의 가도를 달리거나 이 셋중에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인재사관학교라며 고상하게 포장된 S그룹 인사의 적나라한 현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후발 H그룹은 내부 관리기법상의 제일주의를 표방한 S그룹의 허망한 노하우를 전수받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나는 셋중 하나에도 속하지 못하였으나 세가지 경우 모두를 꿈꾸며 봉급쟁이가 되어가던 중 기가 막힌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 씨크릿가든의 유령들>
첨성대는 왕의 우물이었다.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에는 궁극적인 관심이 없는 법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괴로운 환상을 키워가는 것이다.
J회장의 다섯번째 아들 MH가 투신자살한 H그룹의 계동 사옥 왼쪽끝에는 경주의 첨성대를 닮은 관천대가 있다.
그리고 길하나 건너 조선의 비원으로 알려진 창덕궁이 자리잡았는데 H그룹의 사옥자리는 옛 휘문고터로서 휘문은 궁내학교였던 것이다.
JMH는 선친인 J명예회장 사후에 가끔 관천대우물을 보며 상념에 잠기는 나르시소스였을지도 모른다.
첨성대와 관천대는 모두 왕궁터에 자리잡아 왕의 우물이었음을 기념하기 위해 말라버린 우물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복원시킨 기념물인 것이다.
우물이 말라버린 원인은 아마도 역사지리학을 따져 역사환경적인 원인을 추적해보면 알수 있겠지만 그것의 이름이 왜 관천대니 첨성대니 하는 명칭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아마 일본의 한국전문가들이나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 것이다.
지금도 H건설 직원들은 세종로 사옥시대를 그리워 한다. 1982년 계동으로 사옥을 옮긴후 H그룹에는 바람잘 날이 없었다.
광화문의 세종로에 본사가 있을 당시 직원들은 해외근무 복귀시 아파트 한채씩을 집에 사둘수 있었으며 귀국길에는 런던의 헤롯 백화점에 둘러 최고가의 쇼핑을 즐길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중동진출을 통해 유가폭동으로 인한 국가부도사태를 회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H그룹은 국가로부터 강남북의 노른자위땅을 헐값으로 불하받았는데 H그룹은 옛 경희궁터와 휘문고땅등 4대문안의 금싸라기땅들을 독식함으로써 라이벌 S그룹을 압도했다. 그 땅은 S그룹의 L회장이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이던 왕궁터였다.
L회장은 왕궁터에 고급 백화점체인을 만들어 스스로 현대판 황궁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꿈을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H그룹내에도 왕궁터에 눈독을 들이는 세력이 있었다. 바로 H그룹의 스테프조직의 핵심을 이루었던 전주이씨들이었다.
그들은 문중인 총무이사를 중심으로 단결해 MB의 영향력을 활용해 서울시로부터 조상의 땅을 불하받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MB에게는 싯가 수백억의 강남의 요지를 상납했다.
MB는 그 재산을 활용해 서울시장에 당선되었고 2006대선을 통해 샐러리맨신화를 되살릴 야심을 지금도 키우고 있는 것이다.
< 뻐꾸기둥지위로 날아간 가신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는 청권사라는 곳이 있다.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을 빙자한 사당이라는 곳인데 한쪽에 5층짜리 대형 슬라브 양옥이 들어서 있다.
이 곳이 바로 L씨들의 총사령부역할을 도맡아 사회각계각층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이다.
한때 바이코리아 열풍을 일으키며 성가를 높이다 하루아침에 MH에게 비수를 들이댄 H증권 L회장같은 사람들을 키워 왕조를 복원할 수 있는 입헌군주제개헌 같은 것을 집요하게 획책해온 곳이다.
J회장의 비서실주위는 주로 L씨들이 진을 치고 인의 장벽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괴팍한 회장이 가하는 어떠한 수모와 요구도 감내하면서 오로지 왕조의 자존심을 세우는 그날을 보기위해 절치부심한 것이다.
그들은 수양대군의 가신 정인지의 후예인 하동정씨 J회장이 일구어낸 H그룹이라는 노고지리둥지에 알을 낳고 도망가는 뻐꾸기같은 존재들인 셈이다.
J회장의 정치참여도 사실은 J회장의 기력을 도태시키고 H그룹을 차지하여 왕조복원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전주 이씨들의 노림수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을 다룬 소설 大望의 열독자들이 꾸며낸 음모였다. 즉 일본의 쓰모처럼 튀는 존재들을 정치판쪽으로 밀어낸 뒤 망신당하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제거하는 야비한 일본식 관리기법인 것이다. 망국의 왕족들이 일본에 끌려갔다 돌아온뒤 써먹는 신종 지배방식인 것이다.
몰살당해 마땅했을 왕조의 후예들은 백성들의 애족적 저항에 힘입어 살아남은 은혜를 다시 배신으로 갚는 배반의 장미에 불과했던 것이다.
< 2000년 성수대교 >
聖水大橋 =-=-=-=-=-=-=-=
토요일 오후 2시 주중 가장 삼삼한 시간
29번 버스를 타고 차창밖으로 스치는 한강을 보며 한가롭게 강바람을 호흡해 보던 것이 팍팍한 서울생활에서 거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무너졌다 다시 세워진 다리위로 버스는 망각을 달래며 달리고 승객들은 무심히 서로를 스쳐보며 자신을 확인한다.
마치 강건너 육지를 향해 바다를 건너듯 조심조심 턱밑 가슴속 긴 한숨을 숨긴듯 조금씩 토해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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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종삼은 모든 것을 가졌다>
그룹 입사후 6개월동안은 직장생활을 할 만 했다. 한 학기 대학등록금과 맞먹는 월급봉투를 받았을 땐 이 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불만마저도 불손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했는가? 행운마차의 그림자는 불행을 잔뜩 포장한 채 언제나 행복의 뒤를 쫒는 것이다.
H건설 서정의납치사건과 울산의 노동투쟁 그리고 5공청문회등 폭주하는 민중의 요구는 홍보업무에 과부하를 가져왔다. 8가지에 불과했던 일간종합지는 20개로 늘어났다. 매일아침 신문은 H그룹관련 기사로 도배질을 해대기 일쑤였다.
물론 서울 종로 3가를 중심으로 한 4대문안에서의 직장생활은 선망의 대상이기는 했다.
서.종.삼은 욕망의 신비로 전국의 청춘남녀를 유혹한다. 지식욕과 권력욕 그리고 육체의 욕망까지 포함해 (서)울 (종)로 (삼)가에는 없는 것이 없다했지 않는가?
그러나 인사동을 지나 종로를 걷곤 하던 나에겐 서울생활은 왠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해 보였다.
그당시 는 어쩌면 인사동 거리에서 시인 구상을 만나고 귀천에 들러 천상병시인을 구경하고 종로나 여의도 KBS앞에서 영화배우나 탈렌트를 만 나는 재미로 회사생활을 했는 지도 몰랐다.
< 압구정동은 비상구가 없다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출발해 동호대교를 건너 남산 1호터널을 지나 광화문까지 소나타세단을 타고 논스톱으로 출퇴근하는 계층에 포함되는 날 당신은 이 땅의 소위 출세한 부류에 등록되는 것이다. 세상에 강남의 노른자위땅에서 강북의 요지까지 단 10분에 주파하는 스스로를 상상해보라. 그 길은 신 주작대로요 남한식 주석전용도로라 할 것이다.
새벽 5시경 먼저 대기업의 비서실장들이 이 길을 탄 후 연이어 청와대와 정부청사 1급이상 공직자들이 뒤를 잇는다. 그리고 오전 10시경 전날 야간업소를 휘돌았던 연예인들이 맨마지막으로 교통경찰의 에스코트를 받는다.
공식적이 아니지만 우리사회에도 관습적이고 비공식적인 특수층 전용도로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운전기사가 딸린 검은색 세단을 타고 신호등에 구애받지 않고 지하철3호선과 평행으로 달리는 이 땅의 정복자들 2,3천명의 손에 의해 이 나라는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주위에 이권을 노리는 파리떼가 여러겹의 동심원을 둘러치는 형상이 강남불패신화의 실체인 것이다.
이러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2,30명의 핵심만 물갈이하는데도 2,3백억의 정치자금이 소요되는 것이다. 구세력은 아파트값을 양껏 올려놓고 프리미엄겸 전별금삼아 뜯어챙기고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다.
행정수도이전은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의 분산이며 그 성공의 핵심키워드는 강남을 해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홍보실전용 소나타세단을 타고 내가 먼저 들른 곳은 국회 의원회관의 J의원 사무실이었다. 비서관에게서 1천3백만원짜리 지폐다발을 받아들고 C일보 정치부장에게 전달하는 것이 그날 나의 소임이었다. C일보의 정치부장이었던 주기자는 소위 YS장학생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경우 흔히 수표를 백봉투에 넣어 회사사보사이에 끼워 몰래 전달하는 것이 예의에 속하나 현금다발을 숨길 방법이 결코 마땅치 않았다. 1만원짜리 지폐 1천3백장이라 해봐야 월간지 1권 부피밖에 되지 않지만..
정치부장대신 코리아나호텔 커피숖에 나타난 C일보 주간지부장은 돈봉투를 받으며 알 수 없는 말을 남겼다.
" 몇십만원은 우리 부서 회식비외다"
나는 속으로 아까운 돈 날렸네하고 생각하면서 회사로 돌아왔지만 그 돈 1천3백만원이 일으킬 엄청난 사태를 예감할 수 없었다.
H중공업 노동자들을 착취한 잉여금임이 확실한 그 돈은 3당합당의 빌미가 된 동해보궐선거 후보매수자금의 일부였던 것이다.
6.29이후 양김분열로 2,3등으로 낙선한 YS와 DJ는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면서 정치적 재기를 노렸고 연이어 계속된 보궐선거들은 양김의 결사적 대결장으로 비화되었다.
DJ를 비토하던 전경련은 YS를 지원하기 위해 4대그룹으로부터 1천3백만원씩을 받아 5천만원을 채워 후보매수자금으로 활용케 했던 것이다. 13 X 4 = 52 그리고 나머지 2백만원은 정치부기자 들의 술값으로 날린 것이다. 기자들을 통해 정치자금을 마련하 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것을 YS는 경험을 통해 간파하고 있었을터이다.
그런데 누군가에 의해 이 사실은 집권세력에게 알려졌고 통일민주당 사무총장이 YS대신 구속되는 결과를 가져 왔는데 이 일로 귀공자출신 YS는 감옥살이를 피해 3당합당에 합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동해후보매수사건에서 3당야합으로 가게된 전말일 것이다.
http://porgynbess.com.ne.kr
< 입 속의 검은 잎>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 요절시인 기형도 시집에서 -
서소문 J일보 사옥은 이태리산 대리석으로 지어진 그야말로 조각같은 건물이다. 이병철회장이 생전에 S전자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후 석유화학등에 대규모투자를 하기 위해 당시 1천억이라는 어마어마한 內資를 제일은행에 쌓아놓고서도 군사정부의 양해를 얻지못하자 홧김에 저축한 돈을 몽땅 쏟아부어 지었다는 곳이 바로 동방플라자와 J일보사옥이었다.
89년당시 기형도가 그 비싼 건물의 5층에 자리한 J일보 편집국에서 詩와 씨름하고 있을때 나는 촌지와 기사를 들고 역시 대리석으로 지어진 수위실앞을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었다. 당시 J일보에도 조가 있었지만 내가 들락거린 편집국에는 낮에도 볼펜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강산이었다.
S그룹이 업계 최고대우를 보장하며 구성원들에게 요구하는 가장 굴욕적인 옵션은 바로 침묵이었던 것이다.
그 양들의 침묵에 속터져 심장마비死한 시인이 바로 기형도였다. 게오르규는 소설 25시에서 시인을 잠수함속 토끼라 했던가? 민주항쟁이라는 약간의 텀(Term)을 사이에 두고 독재와 야합이 교차하는 시대적 허무앞에 우리의 청춘도 시들어갔다.
문제는 언론이었다. 입속의 검은 잎은 무엇인가? 바로 썩은 언론을 비유한 것이다.
기형도가 고발한 검은 잎은 썩어버린 한국언론의 검은 혓바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언론은 민중의 붉은 혓바닥이 아니라 양들의 침묵에서처럼 연쇄살인범의 마수에 걸려 무참하게 살해당한 여인의 목구멍에 걸린 죽은 나방벌레인지도 모른다.
<정감록>
1. 동래구 명장동 월성 박씨제실앞에서
원래 정감록이란 정씨가 우리나라를 구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 아니다. 고려 조선 양대 왕조가 민심을 한눈 팔게 하는 수단으로서 활용한 것이다.
2. 삼국사기는 사서가 아닌 왕가의 족보책이다.
왜 백제와 고구려는 뻔질나게 천도를 했는데 신라는 경주에서만 도읍했다 하는가?
그것은 신라 귀족출신 김부식이 통일신라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야료(헛소리)를 부린 것이다.
경주는 서라벌,새벌 즉 신도시이다. 천도를 했다. 어디서 월성에서...
토함산은 월성이 아니다.
3.박혁거세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편서풍이 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래(부산)이나 울산쪽에 맨먼저 닻을 내리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4.김,이,박,정,최,백,설은 월성 한마을에 살았더래요?
웃기는 이야기다. 삼국사기는 신라멸망후 이백년이상이 지난후 쓰여진 사서(史書)가 아닌 詐書일 뿐이다.
고려왕의 중앙집권적 의지가 투영된 것이다. 몽고지배이후 왕권의 권위를 되찾기 위한 어떤 여론조작아니었을까?
혹은 신라세력의 중흥을 꿈꾼 김부식의 야망이 배여 있을 수도 있다.
왕씨들은 고려후기 신라귀족출신들에게 무제한의 사성(賜姓)을 배풀어 힘을 분산시켰지만 효력은 보지 못했다.
원래 김이박등은 따로국밥이었던 것이다.
신라 초기 박석김이 교대로 왕을 했다는 것도 수도가 여러군데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5.박씨의 묘였을지도 모르는 하마정
우리나라 풍수1번지라는 하마정은 동래정씨 제실이 있지만 월성박씨들은 지금도 그곳이 월성박씨들의 터전이었다고 주장한다. 명당을 도둑질 한 것이다. 전국의 명당마다 뼉다귀들이 산적해 있다 한다.
근데 누구맘대로? 고려왕이 시킨 것이다.
신라의 뿌리를 뽑아야 왕실이 온존할 수 있으므로.. 그리고 정감록을 만들어 정씨들도 왕이 못되게 한 것이다. 정감록의 존재는 정치판에서 정씨가 항상 경계대상 1호가 원인제공을 해온 것이다.
6.머리통 터지게 싸우는 대성바지들.
정감록(정도령)에 대한 시비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치의식에 꽤 오랫동안 안주거리였다. 대성바지들의 전쟁에 양념거리였다.
정씨들은 대성바지의 꼬래비요 소성바지들의 우두머리행세를 해왔다. 소위 정치판의 성씨전쟁에 기여해온 것이다.
허위와 가식이 난무하는 거짓의 역사는 현대정치판까지 띠를 이어 온 것이다.
7. 통일의 중심이었던 부산
부산신항이 들어선 용원에는 망산도가 있는데 허황옥이 돌배를 타고 왔다 한다. 석주(石舟)란 돌배가 아니라 쌀석자이므로 쌀을 싣고 온 것이다. 일석이석,한섬두섬 아직도 쓴다.
쿠데타세력 김춘추와 김유신이 통일한 것이 아니라 쌀생산으로 인한 군량혁명이 통일의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자 중심은 부산이었다.
< 어떤 시골 동네에서의 주사파 논쟁 >
P는 이번 선거에 녹사당후보로 사하갑에 나와 여당후보를 흔들어 놓은 서울대 사회과출신 운동권 긴조파( 긴급조치피해자)로써 이번에 당선된 E 의원과 부산 K고 동기동창이다.
그는 유독 "THE ONE"이라는 존재에 대해 콤플렉스가 많았다. 뭐 하나님, 독재자, 수령, 종정,교황 등등을 싫어하는 사회학도 였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주사파란것이 실체가 있는 것이었던가? 내가 경험한 주사파란 어떤 추상의 적이었다.
87년 소위 386들이 사회에 진출했을때 기존의 보수적 기득권층은 긴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사회에 길들이기 위한 방책으로 나왔던 것이 소위 <주사파이론>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주사파는 소위 사회주의붕괴이후 <색깔론>을 대체하기 위한 변종으로써 황장엽이란 잘 알려지지 않은 철학자을 스카웃 해와서 급조한 <불후의 명작>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주사파의 배경이 있다면 남로당출신으로서 북한정권에 대해 가장 강한 야당이자 북정권의 국제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준 북조선 러시아대사 손성필일 것이다. 황씨는 수상한 사람이다.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 빨갱이을 빙자하여 젊은 이들을 순치할 수는 없으니까 이미 모두 월북해버리거나 장기수가 된 토종 빨갱이의 변종을 유전자변형시킨 것이 아닐까.
그리고 소위 남한의 주사파 연구가들의 원계보는 유신헌법작성자들과 맥이 닿아 있다. 이들이 70년대 후배 법조지망생들을 현혹했듯이 20년후엔 그 후배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쯤 재차 철학적 사기극을 기획한 것이다.
물론 배고팠던 대학생시절 후배들은 선배들을 반신반의하면서 가끔 데모대앞에서 돌도 던지곤 했지만 이제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할 가장으로서 사회를 안정시켜야할 사회인으로서 자신도 모르게 혹은 뻔히 알면서도 그 마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19세대와 386은 어쨋든 권력주체의 항복하는 모습을 보고 사회에 진출한 승리자들이지만 또한 망아지기질들이 있었다.
이제 아무도 주사파란 말을 서울에서 더이상 쓰지는 않는다. 386이 그 말을 대체한지가 꽤 된 것 같은 어느날 에덴공원 앞에서 들은 P선배의 주사파타령은 왠지 내가 주사파배경으로 몰려 서울에서 밀려나던 10년전의 사슬같은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그때는 나도 정말 주사파가 우리를 아프게 하려고(주사로?) 대기하고 있는 줄 알았다
< 친일청산법과 대동여지도 그리고 강토부활>
옛날 밀양군 수산읍에는 수산제라는 유명한 큰 저수지가 있었다 합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그 크기가 영도보다 크고 가덕도와 어림잡아 비슷한 규모였습니다. 수산제의 기능은 저수기능보다는 염분조절로 봐야 합니다.
서산간척지에서 나는 쌀은 짭짤한 맛이 있어 사람들이 처음에 싫어 했습니다. 우선 착종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염분과다로 기존 통일벼는 전부 모내기후에 녹아버리는 통에 수원농대 연구진의 큰 고민거리 였답니다. 그런데 통일벼이전의 우리의 전통 재래수종이 염분을 이겨내는 저항력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은 얼마전의 일이었습니다.
통일벼는 일본의 벼를 개량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에는 큰 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바닷물과 해일을 방지해 강에 방죽을 쌓고 대비해야 했습니다. 일본벼는 그래서 싱겁습니다. 그런 연유로 일본에는 염전이 매우 발달해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 거대평원마다 벽골제니 수산제니 하는 저수지가 있어 염분을 적절히 조절해가면서 백성들 몸속의 염분을 조절했기에 염전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금은 주로 땅속에서 채굴된 깨끗한 것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이후 일본인의 대량이주로 이러한 쌀 생태시스템에 일대 혼란이 초래된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우리의 짠살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전국의 저수지를 없애 버리고 둑을 쌓아 역류하는 바닷물과 염분을 봉쇄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류의 늪지대에 흙을 부어 거대 평야를 더욱더 넓혀 자신들의 군량미를 갹출해 갔습니다. 영남의 깊은 산골에 거주하던 많은 백성들은 강제 이주를 당해 늪지대와 평지로 끌려나와 보국대에 편입되었으며 침략전쟁의 군수요원화 되어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냉철히 파악하고 있던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의열단장 김원봉이었습니다.
많은 밀양청년들은 김원봉과 함께 수탈의 현장을 탈출하여 만주로 가는 경부경의선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일경의 감시가 심할 때는 밀양경찰서를 폭파해 경찰조직을 긴장시켰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일본으로 가는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을 것입니다. 나의 할아버지도 그 중의 한분이었을 것입니다.
아직 우리는 일백년전 일본이 우리 땅에 어떤 작난질을 쳐놓았는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오늘날 모든 성인병인 당뇨,고혈압등 혈관계 질환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인지도 모릅니다. 오염된 바닷가 염전에서 나온 더러운 소금은 피를 더럽힙니다.
하구언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며 혹은 고향 밀양을 왕래하며 광활한 김해평야를 보면서 상념에 젖어보면 과연 이 시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첫댓글 현대그룹과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이야기들을 길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잘 읽었습니다.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것을 민족기업으로써 현대가 달려가고 있습니다. POSTMAN님의 동참이 있다면 더욱 빛날 것입니다. 카페에도 자주 들려주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