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촐라체』의 어디쯤일까
- 박범신의 '촐라체'를 읽고
이 동 호(시인)
1.
어느덧 늦가을이다. 저녁 날씨가 벌써 겨울 같다. 이 겨울은 내가 오르고 있는 촐라체의 어디쯤일까. 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겨울은 또 촐라체의 어디쯤 되는 걸까.
삶을 오르다보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때가 있을 것이다. 당신의 몸이 무거워지고, 정신도 무거워져서 몸도 정신도 내팽개치고 싶어질 때 즈음이라면 당신도 이제 겨우 빙벽뿐인 ‘촐라체 북벽’을 한번쯤 바라본 것이 된다.
피켈 피크와 아이젠도 없이, 다시 말해 아무런 준비도 도구도 장치도 없이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오를 것인가.
그저 멍하니 햇살에 산산이 눈이 부신 촐라체 빙벽 앞에 서서 경외감만을 가슴에 품다가 조용히 뒤돌아 설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삶을 피켈 피크처럼 날카롭게 만들어 등정이 불가능할 것 같은 촐라체의 단단한 빙벽에 힘껏 박고 한 발짝 올라설 것인가?
‘촐라체’가 인생의 비유라면,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촐라체는 오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소설 『촐라체』에는 수동적으로 ‘촐라체’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촐라체’를 찾아가서 그것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운명이 눈보라처럼 펼쳐져 있다.
굳이 그들이 촐라체를 직접 찾아간 이유가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무엇이 그들을 ‘촐라체’라는 극한 상황으로 내몬 것일까? 박범신은 ‘촐라체’에 그들을 모두 구겨 넣고, 그들을 통해 인생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걸까?
작가가 진정한 프로라면, 독자를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또 ‘촐라체’와 인과적으로 복잡하게 묶여 있는 운명의 인물들을 내세워 독자들에게 자신의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 무엇이 무엇이건 간에 박범신은 『촐라체』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것은 ‘촐라체’라는 묵은 해를 통해 새 해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일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정상’을 밟고서야 그 속된 욕망을 비울 수 있는 계기를 얻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어떤 것이든 인생은 ‘크레바스’와 ‘업보’ 가득한 ‘촐라체’라는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촐라체’에 오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사랑이 운명적으로 질투와 아픔을 수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처럼, 삶의 ‘촐라체’가 혹한과 고통과 실족의 세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촐라체에 오를 수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촐라체를 오르기 싫어하지만, 촐라체에 대한 경험 없이는 삶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촐라체』의 등장인물들 또한 ‘정상’에 오르기 이전의 삶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촐라체’에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진정한 촐라체를 깨닫는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소설 속에서 ‘촐라체’라는 허상을 오른 것이다. ‘촐라체’를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촐라체’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2.
『촐라체』에는 상처 받은 사람들이 간다. 그들은 서로 다투고 반복하고 싸우면서 ‘촐라체’처럼 견고해진다. ‘나’든, 현우든, 상민이든, 영교든, 모든 상처 받은 사람들의 ‘길’은 ‘촐라체’로 이어져 있고, 그것은 외길이어서 그들은 반드시 촐라체에 묶일 수밖에 없다. 또 ‘촐라체’는 모든 아픔의 막다른 길이어서 어떻게든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죽음과 결말’의 공간이다.
촐라체를 만나면 삶은 두 가지 방식을 취한다. 그 자리에 주저앉든지, 아니면 촐라체를 넘어야만 하는 것이다. ‘촐라체’를 넘어도 죽음이요, ‘촐라체’를 안 넘어도 죽음이라면, 차라리 약한 희망일지라도 품는 것이 좋다. 작가는 주인공들이 ‘촐라체’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사건을 전개시키고 있다.
『촐라체』는 정상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과거의 삶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죽인다. 불순한 기억들을 죽인다. 그러고 보니 ‘촐라체’에 오르는 길은 마치 천로역정 같다. 등장인물들은 미망에 사로잡혀 불완전하고 불온전한 자기를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정상에 나란히 오른다.
등산을 하는 사람들에게 신체의 일부는 전부와도 같다. 일부처럼 비칠지 몰라도 그들에게 손가락이나 발가락은 등산가로서의 삶의 전부이다. 이처럼 촐라체는 제 몸을 온전히 내어준 자들에게 정상을 열어준다.
촐라체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그들이 진정 오른 것이 산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그들이 오른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며, 동생은 형을, 형은 동생을,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은 아버지를 각각 오른 것이라고 봐야 한다. 각각 그들을 오르고나서 얻은 보상은 아름다운 설산의 경치가 아니다. 바로 인간성의 회복이다.
그러고보니 ‘촐라체’는 ‘죽음’만을 의미하는 공간이 아니라 ‘재생’까지도 의미하는 ‘죽음’을 통한 정화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등장인물에게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작가는 ‘촐라체’를 넘기를 포기하는 자들에게도 ‘촐라체’가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작가자신은 촐라체에 가고서도 촐라체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그것이 작가 자신의 한계라면, 촐라체 앞에서 자신은 일단 한번 죽은 사람이 된다. 작품을 쓰는 일련의 과정이 촐라체 정상에 오른 사람을 따라가 보는 자의식의 행위이며, 그들을 통해서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서야했던 자신의 죽은 정신을 서서히 일깨우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촐라체’정상이나 그 너머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하는 문제보다는 왜 혹은 어떻게 ‘촐라체’를 넘어야 하는가에 더 중점을 두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촐라체는 혼자서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함께 올라야 한다. 그것이 사람이어도 좋고, 기억의 일부나 전부이어도 좋다.
역시 촐라체는 죽음과 재생의 공간이다. 하필이면 시간적 배경도 12월이다. 문학에서 12월은 ‘혹독한 공간’을 암시한다. 박범신이 택한 시간과 공간이 ‘죽음’과 상통하는 이미지라는 것은 큰 상징성을 지닌다. 그에게 있어 이 ‘죽음’은 ‘재생’이라는 말과는 동의어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 또한 자신의 촐라체를 올라서서 혹한의 묵은 12월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뛰어넘어 빛나는 ‘새해’에 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촐라체 앞에 서기까지 그 동안 그는 삶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의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삶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촐라체를 오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촐라체를 오른다는 것은 삶의 본질을 파악하는 행위이다.
3.
작가의 말대로 “그 어떤 그림자나 얼룩에 방해받지 않고 본성을 똑바로 꿰뚫어보는 것이 정견이”라면, ‘촐라’체는 인생의 본질에 가닿기 위한 하나의 시험장인 셈이다. ‘혼돈’의 공간이 바로 촐라체인 셈이다. ‘본성을 똑바로 꿰뚫어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촐라체’는 필연의 공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삶이 비틀려 있거나 가슴에 응어리가 박힌 그들은 필연적으로 촐라체에 오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작가는 그들이 촐라체라는 미망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그들 내면의 진정한 촐라체를 찾아 얽혀있는 그 줄들을 하나하나 풀어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촐라체는 고유명사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촐라체 같은 사람들도 있고, 촐라체 같은 사건들도 있고, 촐라체 같은 시간(늙음)들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촐라체일 수도 있고, 작가 자신이 모든 등장인물일 수도 있으며, 그 모든 등장인물이 작가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만났던 집약된 촐라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있어 소설 『촐라체』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동안 풀지 못했던 자신의 운명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시험의 장이 아니었을까? 그가 굳이 인터넷을 통해 많은 독자들과 함께 작품을 공유하고자 했던 것도 자신의 작품에 대한 그들의 댓글을 통해 자신의 삶의 본질과 의미를 시험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그들의 댓글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소설 『촐라체』는 결말을 내지 못하고 도중하차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작가에게 『촐라체』가 ‘촐라체’일 수도 있을 것이고, 작가 자신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독자들이 ‘촐라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오늘도, 지금 이 사간에도 촐라체의 북벽 어디쯤에서 하켄 서너 개에 위태롭게 몸을 매달고 촐라체를, 독자를, 늙은 나이를, 나태해진 자신을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첫댓글 나에게 촐라체는 무엇일까?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합니다.... 시의 혼돈속에 서성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