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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결정체의 크기는 고작 1천분의 1㎜, 커봐야 몇㎜ 정도입니다. 기본 구조는 육각형입니다. 눈의 성분이 물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물은 두 개의 수소와 한 개의 산소가 결합된 구조입니다. 물 분자의 모양은 두 개의 수소가 결합하는 각도와 물 분자끼리 어울리는 방식에 따라 결정됩니다. 또 물 분자는 매끄러운 면보다는 모서리에 더 잘 달라붙습니다. 주로 각진 모양을 이룹니다. 육각으로 배열될 때 가장 안정적인 모양을 띄게 됩니다. 눈 결정체는 이 물 분자가 안정적으로 배열해 얼어붙은 형태입니다. 형성될 당시의 수증기 양과 온도에 영향을 받아 서로 다른 모양으로 변형됩니다. 결정체의 종류는 수없이 많습니다.
현재 지구상 존재하는 70억의 사람들의 얼굴이 다 다르듯이, 눈의 결정체도 다 제각각입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기본 형태는 육각형입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디자이너라 할지라도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최고로 발전했다는 현대과학으로도 눈의 결정체가 왜 육각형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정도만 “얼음 속에 모양을 만드는 힘이 있어 육각형을 형성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네가) 눈을 쌓아 둔 창고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느냐? 우박 창고를 들여다본 일이 있느냐?”(욥38:22)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이를 통해 당신이 모든 자연 현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눈의 결정체가 왜 육각형인지 압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과 신성으로 그렇게 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물을 육각형의 눈으로 디자인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만물에 당신의 신성과 능력은 물론 당신의 마음과 뜻까지도 담아두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새를 지으실 때는 찬양을 즐거워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담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이 땅 곧 육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날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새 하나를 지으실 때에도 인생들을 향한 당신의 마음과 뜻을 담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새의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수없이 많습니다. 모든 종류의 새를 다 봤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피조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물고기의 종류가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나무의 종류도 모릅니다. 과일과 채소의 종류도 모릅니다.
육축의 종류도 모릅니다. 생물의 종류도 모릅니다.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을 만큼 소중한 존재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모르는 것은 더더욱 당연한 일입니다. 왜 하필 작은 반도의 나라에서 태어나게 하셨는지 모릅니다. 왜 20C에 태어나게 하셨는지 모릅니다. 왜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왜 누구에게는 부를 주시고, 누구에게는 주시지 않는지 모릅니다. 왜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는 주시고,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죄를 짓는 것을 방관하시는지, 당신과 아들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와 당신을 사랑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욕을 먹게 하시는지도 모릅니다. 왜 죄도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 핍박을 받아야 하는지, 순교까지 당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획일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상황 같아도 전혀 다른 뜻과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다양한 섭리를 만났을 때 과연 어떻게 하십니까? 믿음으로 받아들이십니까?
혹 자신의 지식과 신학과 경험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환난과 시험 속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형제를 위로하기는커녕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형제를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아닙니까?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그랬습니다. 아니 그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섭리의 다양성을 인정하십시오. 너무 쉽게 판단하지도 정죄하지도 마십시오. 그것을 통해 누구도 상처주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신의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악인의 기쁨은 잠시 뿐입니다. 4-5입니다.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있어 옴으로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간이니라.”
여기서 “악인”은 “사곡한 사람 곧 외식하는 사람”을, “이기는 자랑”은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외치듯 크게 떠드는 소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사곡한 악인들이 스스로 된 줄로 알고 질러대는 승리의 함성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들의 즐거움은 잠깐뿐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사탄이 들고 있던 축배가 독배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453년, A.D. 330년 이후 천년 이상 동로마 제국의 성도(聖都)였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이슬람 군대에 의해 완전히 포위당했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바로 그때, 교회에 모인 사제들은 놀랍게도 현재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성모 마리아상의 눈을 어떤 색으로 칠할 것이냐, 천사는 남성적이냐 여성적이냐, 성수에 파리가 빠져 죽었다면 성수가 오염된 것이냐, 파리가 성화된 것이냐” 등의 문제로 싸웠습니다. 오래 전, 한 대형 전도 집회에 그 도시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학자가 대표 기도자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예상대로 그는 보통 사람들은 사용하지 않는 각종 미사여구를 총동원해 작성한 훌륭한 기도문을 그럴듯하게 낭독했습니다. 참석한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의 유창한 말솜씨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때 이 사실을 발견한 한 기자는 “위대한 학자의 기도는 아마도 이 도시가 생겨난 이래 하나님이 아니라 청중들에게 바쳐진 가장 웅변적이고 가장 지성적인 기도였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지혜자는 “진실한 말은 영원히 남지만 (외식과 함께 버무려진) 거짓말은 한순간(눈 깜짝할 동안)만 통할 뿐이다.”(잠12:19)라고 외쳤습니다. 말의 진위 여부가 드러날 때 진실한 말은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된다고 말했습니다. 위선으로 가득 찬 말은 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눅20: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자신들은 견고하게 서 있다고 자부하고 있던 타락한 종교 권력들의 종교적인 눈속임을 공개적으로 경고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은 “긴 옷”을 입었습니다. 율법 교사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냈습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이 월등하다는 우월 의식과 함께 자기를 과시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기 위해 일부러 장터로 나갔습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했습니다.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항상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보호해 주어야 했던 과부들의 재산을 착취 했습니다. 이 일은 당시로서는 아주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자신들에게 위임된 율법의 판결권을 남용했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과부들의 재산을 가로챘습니다. 타인의 재산을 관리해 주는 법정 대리인으로서 부당한 이익을 취했습니다. 또 아주 긴 기도문을 장황하게 읽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한 학자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각종 미사여구를 동원했습니다.
떠벌리듯 기도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기도 어디에서도 간절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철저히 외식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그 종을 처벌하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눅12:47-48, 20:47b, 마24:51)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지식과 종교적인 권력을 남용하고, 악용하는 파렴치한 행위는 다른 어떤 죄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백성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악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중한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타락한 종교권력처럼 외식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이렇게 악인이 누리는 기쁨은 잠지잠깐 뿐입니다. 곧 하나님의 징계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또 악인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6-9절입니다.
“그 높기가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던 환상처럼 쫓겨 가리니 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
악인은 교만합니다.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일시적으로 높아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메(E. Dhorme)의 주장에 따르면, “자기의 똥”은 “깔루(gallu) 곧 악귀”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실제로 인간 중심의 명예나 영예는 버려지는 똥처럼 더럽습니다. 악인들은 귀하게 여기지만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쓰레기, 배설물, 똥으로 여깁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눅16:15b)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궁극적 원인입니다. 곧 사탄입니다. 실제로 처음 사람들은 사탄의 교묘한 사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혐오하십니다.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말끔히 소탕해 버리십니다. 누구도 행방을 찾을 수 없도록 흔적까지도 깨끗이 치워버리십니다. 꿈처럼 날아가고 밤의 환상처럼 사라지게 만들어버리십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의 원수인 사탄은 우리가 교만을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신에게는 관심을 가져주지 않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표할 때 괴로워합니다. 뛰어난 재능이나 자질도 없고 인격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상심합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꾸짖거나 굴욕감을 안겨주면 분노합니다. 또 우리는 자신이 조직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결정권자의 입장에 서지 못할 때, 자신의 재능과 교육 수준과 능력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 품위에 어울리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 실망합니다.
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교육이나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때 낙심합니다. 부모의 교육 수준이 낮거나 높은 지위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상심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당하면 우울하고 불행해집니다. 외부 환경을 탓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속마음이 어떤 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분노와 상심과 실망의 뿌리가 교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비판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심지어 “내가 어떻게든 혼자서 이 일을 해결해야만 해!”라는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교만에 사로잡혀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유난히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마음도 사실은 감춰진 교만입니다. 사람들의 평판에 너무 예민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감춰진 교만은 깊이 숨겨진 독과 같습니다. 이 독은 우리의 영적 삶을 죽입니다. 삶의 대부분의 것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속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교만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에게 굴욕감을 안겨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감수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의 성격적 결함, 부족한 교육과 재능, 열악한 가정 형편, 죄인 됨, 결점 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행동들에 대해 “아버지 하나님, 이것이 제 모습임을 인정합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 저를 교만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인도해주시고 낮추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빛에 자신을 비춰볼 수 있어야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벧전5:6a)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어야합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신다.”(잠16:5, 시31:23)라는 지적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겸손한 이들을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들은 “엄중하게, 충분하게, 남김없이”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서로 손을 잡을지라도 놀라울 정도로 기이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에는 멸망이, 거만에는 파멸이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10-11입니다.
“그의 자녀들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그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
악인의 불행은 개인의 급격한 추락과 소멸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① “불의로 재산을 모은 사람은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을 품는 자고새와 같아서 인생의 한창때에 그 재산을 잃을 것이며, 말년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신세가 될 것이다.”(렘17:11)라는 선지자의 외침대로, 악인들의 자녀들은 그가 평소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던 재산들을 돌려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용서와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악화됩니다. 급기야 가산은 양식을 구걸해야할 정도로 처참하게 무너집니다. 악인들이 불의를 통해 얻은 모든 재물은 이렇게 허무합니다.
지혜자는 “나는 세상에서 한 가지 비참한 일을 보았다. 아끼던 재산이 그 임자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재난을 만나서 재산을 다 잃는다. 낳은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이 없다. 어머니 태에서 맨몸으로 나와서 돌아갈 때에도 맨몸으로 간다. 수고해서 얻은 것은 하나도 가져가지 못한다. 또 한 가지 비참한 일을 보았다. 사람이 온 그대로 돌아가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를 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평생 어둠 속에서 먹고 지내며 온갖 울분과 고생과 분노에 시달리며 살 뿐이다.”(전5:13-17)라고 말했습니다.
악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부자들은 그 죄로 인해 평생 편안하지 못하고 각종 비참한 현상들로 얼룩진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생명과 평안과 상관없는 사망과 비극과 불행 속에 살 수밖에 없다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또 “부정하게 모은 재물은 쓸모가 없다, 한순간에 없어질 재물을 주목하지 말아라. 재물은 날개를 달고 독수리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잠10:2, 23:5)라고 외쳤습니다. 불법을 통해 얻은 재물이 일시적으로는 육체적 안락과 감각적인 쾌락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영원한 행복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고 외쳤습니다.
독수리가 눈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가는 것처럼 덧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특히 바울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딤전6:9-10)라고 경고했습니다. 악의 근원인 부에 대한 불의한 욕심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외쳤습니다.
② 또 악인은 아직 청년의 원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연히 사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빌닷은 욥을 향해 “왕골이 수렁 아닌 곳에서 자라나느냐? 갈대가 물 없는 곳에서 자라나느냐? 돋아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벨 때도 아닌데 그것들은 다른 풀보다도 쉽게 말라버린다. 하나님을 잊은 자의 말로도 이와 같으니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는 자의 희망은 부서지리라.”(욥8:11-13)라고 악담했었습니다. 시인 역시 “시온의 원수들아, 모두 망신당하고 물러들 가라. 지붕 위의 풀포기처럼 뽑을 새도 없이 시들어버려라”(시129:5-6)라고 저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의한 이를 탐하는 이들은 이러한 악담과 저주를 받아도 쌉니다.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욥이 악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욥에게 임한 고난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소발의 주장은 백번 옳지만, 욥에게 적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한편, 모든 성장에는 반드시 어두움이 필요합니다. 그는 모처럼 털 장화를 신었습니다. 지게를 지고 눈이 쌓여 있는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곳저곳을 뒤져 땔감을 주워 모았습니다. 금방 반 짐 가량 지게가 채워졌습니다. 그는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게 작대기를 짚고 천천히 비탈길을 내려왔습니다. 도중에 어두움이 모든 공간을 덮었습니다. 동쪽 먼 하늘에는 이미 만월에 가까워진 달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곧이어 별들도 하나 둘씩 제 모습을 드러내고 빛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들에게도, 새들에게도, 멧돼지나 고라니와 토끼 등 산짐승들에게도 어둠이 내렸습니다. 그렇게 내려진 어둠은 족히 열두 시간도 더 되게 그들을 덮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마련해 온 불쏘시개를 잘게 잘랐습니다.
아궁이에 붉을 지폈습니다. 조금씩 더 큰 나뭇가지들을 넣어 불을 키웠습니다. 더 큰 장작을 올린 다음, 제법 굵은 통나무 한 토막까지 집어넣었습니다. 굴뚝에서 뽑아 올린 연통으로 연기가 힘차게 솟아오르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마침내 아궁이의 문을 닫은 그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두움은 더 깊어져 있었습니다. 달빛도 더 커져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이 떠오른 별빛들도 훨씬 더 선명해져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깊은 고요가 임했습니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평화가 임했습니다. 그의 사유의 세계도 더욱 넓어지고 깊어졌습니다.
나무들도 그렇습니다. 늘 두 방향으로 자랍니다. 낮에는 빛을 향해 하늘로도 자라지만, 밤에는 어둠을 향해 땅 속으로도 자랍니다. 그 두 방향으로의 성장이 어우러져 완성됩니다. 어느 하나를 피하거나 지울 수 없습니다. 한쪽으로만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어두움은 더 단단해지고 깊어지게 합니다. 절망이 아닙니다. 더 자라기 위한 준비입니다. 우리 역시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반복해서 얻음과 잃음,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만남과 이별 등 밝음과 어두움을 만납니다. 그것을 통해 더 깊이 자랄 수 있습니다. 욥도 바로 그 과정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소발의 사고는 하나님의 다양한 섭리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지극히 단조로웠습니다.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편협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왜곡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난 속에 힘겨워하고 있던 친구를 판단했습니다.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정죄했습니다.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다양하지 이해하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섭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 그렇게 많은 마음. 각양각색. 십인십색”이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장미는 장미대로, 채송화는 채송화대로, 해바라기는 해바라기대로, 나팔꽃은 나팔꽃대로 다른 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모양과 빛깔과 아름다움과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유한 모양과 빛깔과 아름다움과 향기도 서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진정한 진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최남단은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내민 아굴라스 곶(Cape Agulhas)입니다.
동쪽은 인도양, 서쪽은 대서양입니다. 대서양으로부터는 한류(寒流)가, 인도양으로부터는 난류(暖流)가 흘러와 만납니다. 이러한 해류의 영향으로 해초들과 고기들이 풍성합니다. 미국에는 “감리교인에게는 진실한 생활 태도를 배우라. 침례교인에게는 신앙 간증을 들으라. 루터교인에게는 충성된 교인임을 배우라. 성공회 교인에게는 교인의 긍지를 배우라. 퀘이커 교도에게는 청결한 믿음을 배우라. 유대교인에게는 종교의 고결함을 배우라. 장로교인에게는 기도의 생활을 배우라. 구세군에게는 봉사의 생활을 배우라. 흑인들에게는 열성을 배우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분명 다릅니다. “서늘한 봄과 가을이 옳고, 무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은 틀리다.”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다를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눈의 결정체와 같습니다. 똑같은 부르심은 없습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구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의식구조 속에서 나와 “다른 것”은 곧 “틀린 것”이 됩니다. 각 세대와 입장에 따라 오해와 편견이 생깁니다. 대화의 통로가 막힙니다. “상극(相剋)의 시대가 펼쳐집니다. 끝없이 싸우고 짓밟습니다.
투쟁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양쪽으로 갈라져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들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허무시고, 원수된 것을 없애시기 위하여 당신의 거룩한 몸을 십 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이 둘을 당신 안에서 하나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시고,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13:34)고 명령하셨습니다.
러시아 여행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기념품 가운데 하나는 노부부와 소녀, 개와 고양이와 쥐가 새겨져 있는 무 모양의 나무 조각입니다. 소녀는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어느 주말, 소녀의 부모는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무 하나를 뽑아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제법 큰 무를 발견한 할아버지는 그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무는 잘 뽑히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뽑히지 않습니다. 손녀가 개와 고양이까지 데려와 도왔지만 무는 여전히 뽑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고양이가 “천정에 사는 쥐 놈은 못생기고 나쁜 짓만 골라하지만 약삭빠릅니다. 그 동안의 원한 관계나 체면은 잠깐 덮어두고 도움 빌리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평소 차별 받던 쥐가 등장했습니다. 무의 크기를 확인한 쥐는 곧 땅굴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땅 속에 들어가 무의 몸에 붙어 있던 잔뿌리들을 모두 갉아 끊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거대한 무는 쉽게 뽑혔습니다. 한편, 잔소리 쟁이 노부부와 말썽꾸러기 딸을 피해 여행을 떠났던 부부는 싸움만 하다 돌아왔습니다. 싸우던 중, 두고 온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그들 모두는 서로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 지 깨달았습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Bernhard Schlink)가 운영하는 수도원에는 200여명의 원생들이 함께 생활했습니다. 원생들의 자급자족을 위해 많은 농약을 써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너희들만 먹고살려고 하느냐, 새도 먹고 벌레도 먹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이후, 그는 아무리 어려워도 농약을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벌레가 끼어도 내버려뒀습니다. 그러자 새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새들이 벌레를 잡아먹으면서 농사가 잘되었습니다. 공기도 맑아졌습니다.
무공해 농작물을 먹은 원생들까지 건강해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들은 다 필요합니다. 소중합니다.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형제와 자매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겸손하십시오. 하나님의 다양한 섭리를 인정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힘써 하나 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형제와 자매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다양한 섭리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선하고 아름다운 뜻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