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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은 일제에 의하여 유난히 수난을 많이 겪은 궁궐입니다. 일제는 후원에 있는 춘당대 앞 내농포를 의도적으로 훼손하여 춘당지를 만들고 나중에는 창경궁을 격하하여 창경원이라 부르고 그곳에다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궁궐을 구경거리로 만들었으며 전각과 행각을 모두 뜯어내어 다른 곳으로 반출하였습니다. 근래에 와서 많이 복원을 하였지만 행각과 담장이 다 헐어져 전각이 모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 듭니다. 창경궁을 보면 처연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 양화당과 영춘헌 사이에 있는 너럭바위. 아이들의 좋은 휴식처가 됩니다. 바위 위에 깊이 팬 흔적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 행각이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동궐도를 보면 영춘헌과 영화당 사이에 행각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양화당 앞.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간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청나라에 항복을 하고 환궁을 하여 이곳에 하루 머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삼전도에 나아가 치욕스러운 항복 의식을 거행합니다. 양화당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인조는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이후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나라에 잡혀가게 됩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가서 적개심만 키워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백성들의 삶을 편리하게 할 여러 가지 문물을 수레에 가득 싣고 돌아옵니다.
↑ 그러한 세자의 모습을 인조는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귀국한지 두 달 뒤 소현세자는 창경궁 환경전에서 의문의 급사를 합니다. 그후 조선은 효종이 왕위에 올라 북벌의 꿈을 키웁니다. 패자의 자존심이었을까? 아니면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들의 백일몽이었을까? 그도저도 아니면 북벌의 명분으로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 하려 한 서인들의 정치적인 술수였을까?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자리였습니다.
↑ 통명전 앞의 아이들. 무언가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통명전 앞이니 아마 장희빈과 관계되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 통명전. 용마루가 보이질 않습니다. 이로써 왕과 왕비의 침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실의 전각이라도 보통 5칸을 넘어서지 않는데 이 통명전은 7칸 건물로 그 규모가 아주 큽니다. 이곳 주위에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하여 짐승들의 사체를 묻어 두었다는 말들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이것이 사극의 단골 소재가 됩니다. 숙빈 최씨의 폭로로 결국 장희빈을 사약을 받게 됩니다. 장희빈의 아들이 조선 20대 국왕 경종이 되고 숙빈 최씨의 아들이 21대 영조가 됩니다. 경종은 즉위 4년만에 훙서하고 이어 이복동생인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 분이 영조입니다. 정황이 이러하니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당연히 따르고 이 때문에 영조는 초기에 많은 마음고생을 하였습니다.
↑ 통명전 옆의 연지(蓮池)의 연대 위로 민서가 동전을 던지고 있습니다. 연지 위에는 제법 많은 동전이 떨어져 있습니다. 지금은 동전을 던질 수 있게 편평하게 되어 있지만 조금만 생각을 하면 무엇을 올리기 위하여 만든 석조물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지요. 여기에는 원래 해태가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여기에 동전을 던뎌 올려 놓으면 행운이 온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로마의 트레비 분수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 환경전 옆 연지를 지나 돌계단을 통하여 다시 창덕궁으로 이동합니다. 돌 계단 좌우로 화계(꽃계단)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화계는 궁중의 후원 즉히 왕비의 침전 위에 가장 화려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 여기는 창덕궁 낙선재 영역입니다. 이곳은 헌종이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하여 지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등의 전각이 들어서 있습니다.
↑낙선재의 정문인 장락문 앞 마당에서 아이들이 추위를 이기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 헌종은 여덟살에 왕위에 올라 23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15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11세에 왕비를 맞이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드고 계비를 간택합니다만 3년이 지나도록 후사가 없자 그것을 핑계로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들입니다. 이때 헌종의 나이 스물 한 살, 경빈 김씨는 열 일곱이었습니다.
↑ 낙선재의 정문인 장락문. 현판은 대원군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문 뒤로 상량정이라는 2층 육모 정자가 보입니다.
↑ 헌종은 경빈을 후궁으로 들이면서 자신의 서재 겸 사랑채로 낙선재를 짓고 그 이듬해 낙선재 옆에 석복헌과 수강재를 지어 석복헌에는 경빈 김씨가 거처하도록 하고 수강재에는 할머니인 순원왕후를 모셨습니다.
위 낙선재 현판 글씨는 청나라 섭지선의 글씨입니다. 헌종은 추사 김정희의 그림과 글씨를 아주 사랑하여 추사와 왕래하였던 청나라 문인들의 글씨와 그림을 많이 소장하였을 뿐 아니라 추사의 제자인 허련을 궁중으로 불러 같이 그림을 보면서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헌종은 학문을 사랑하여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지만 서화를 감상하기를 유난히 즐겨 하여 많은 작품들을 수집하여 낙선재 뒤 승화루에 보관하였습니다.
↑ 석복헌.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하여 자신의 처소인 낙선재 옆에 석복헌을 짓습니다. 석복헌을 '복을 내리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름이 무색하게 헌종은 이 석복헌을 지은 다음해 스물 세 살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경빈 김씨도 석복헌을 떠나 궁 밖에 나가 생활하게 됩니다. 헌종의 사랑은 겨우 2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 수강재. 수강재는 석복헌 옆에 있는 건물과 같은 석복헌과 같은 해에 완공되었습니다. 수강재를 석복헌 옆에 지은 것은 경빈 김씨에게 대왕대비를 잘 모시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경빈 김씨에게 실질적인 손주며느리의 역할을 맡긴 것이지요. 기록에 의하면 경빈 김씨는 의복에서부터 사소한 예우에 이르기까지 왕비과 똑 같은 대우를 받았다 합니다.
↑낙선재 별채의 장석과 경첩. 하나하나 아주 정교하고 튼실하게 박혀 있습니다.
↑ 낙선재 여닫이 문살. 평범한 정자무늬이지만 굵기와 규격이 매우 균일하여 많은 공을 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다시 창덕궁 편전인 선정전으로 돌아 왔습니다. 편전은 국왕이 일상적인 정무를 보는 곳입니다. 경복궁의 경우 정전과 편전은 일직선 상에 있는데 반하여 창덕궁이나 창경궁은 정전 옆에 편전이 있습니다.
↑ 편전 옆에 위치한 희정당입니다. 희정당은 정치를 밝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희정당이란 이름은 연산군이 붙였습니다. 희정당은 처음에는 왕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오면서 왕의 집무 공간으로 쓰이게 됩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창덕궁 대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뜯어 옮겨 온 것입니다.
↑ 남쪽 행각의 정문에서 본 희정각. 동궐도에 의하면 원래 희정당 오른편에 연지(蓮池)가 있는데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연못이 사라진 듯합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대화재 이전보다 규모가 많이 커 졌습니다.
↑ 희정당 내부.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희정당 내부를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습니다.
↑ 희정당 뒤 선평문을 들어서면 대조전의 웅장한 자태가 드러납니다. 이 대조전 역시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 온 것입니다. 1910년 한일병탄으로 순종은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격하됩니다. 1909년부터 일제는 순종황제를 위한답시고 창경궁을 헐고 그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웁니다. 그리고 1917년 창덕궁 큰 화재가 나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자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경복궁의 전각을 뜯어와서 다시 짓기로 합니다. 일제의 이러한 조치들은 결국 조선 왕궁의 훼철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결국 1926년 순종은 이 대조전에서 한 많은 생을 마칩니다.
↑ 대조전의 동익각(주건물의 동쪽으로 날개처럼 달아 낸 건물)인 흥복헌. 흥복헌은 복이 일어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원래는 대조전에서 시중을 드는 상궁들의 침소였는데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황제나 왕이 자리를 옮기는 일)하면서 어전회의실로 사용하였다 합니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여기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립니다. 이 회의에서 이완용 일파는 순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병탄을 결정하고 일 주일 뒤인 8월 29일에 선포를 합니다. 대한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날을 경술국치일이라 부릅니다.
↑ 흥복헌을 끝으로 창덕궁 답사는 끝이 납니다. 다섯시가 훨씬 넘어서서 빨리 나가라고 성화입니다. 버스를 타고 내린 곳은 종각 역 옆의 지하상가인 영풍문고. 여기서 아이들이 원하는 책을 한 권씩 골라 사기로 하였습니다.
↑ 책을 한 권씩 사 들고 식사를 하러 갑니다. 여기는 인사동 골목.
↑ 다음날 아침 아이들은 일어나자 곧 어제 산 만화책에 모여듭니다.
↑ 지우의 양푼이 비빔밥이 맛있게 보입니다.
↑ 아이들과 서울 답사를 올 때마다 도움을 주는 지인이 있어서 적은 경비로 알차게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저녁이며 숙소를 마련하여 주었고 게다가 아이들이 춥다고 스카프까지 선물하여 아주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 천도교 본부 수운회관 앞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비에서.
↑ 아침부터 꿀타래 가게 앞에 진을 치는 아이들. 부모님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면 부모님들로 좋아하는 줄 압니다. 부모님 선물도 꼭 자기가 좋아하는 걸로 삽니다.
↑ 인사동 놀이마당 무대 앞에서. 뒤에 있는 그림이 일월오악도입니다.
↑ 인사동 거리를 지나 탑골공원 후문으로 들어가 원각사십층석탑 앞에 섰습니다. 도심의 이산화탄소와 산성비로 탑의 훼손이 심하여 유리보호막을 설치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국보 2호입니다. 이 원각사10층석탑은 불국사의 석가탑이나 다보탑으로 대표되는 신라계 석탑이 아니라 고구려계열의 석탑입니다. 고구려계열의 탑은 탑신의 층수가 높고 육각이나 팔각 모양이 많습니다.
↑ 삼일만세운동의 출발지인 팔각정.
↑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의 팔각정 주위에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타나기로 한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군중들은 당황하여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경신학교 출신인 정재용이라는 사람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이 외침은 순식각에 장안을 흔들었고 수 만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도심의 거리를 메웠습니다.
↑ 삼일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 청계천을 지나
↑ 서울시청 잔디밭 야불떼기에서 잠시 휴식
↑ 11시에 대한문에 도착하여 수문장 교대식을 관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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