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란 여인의 역할 같아야 된다' 하는 것이 성경의 주장이다 -
1.
구약 성경 룻기는 <룻>이라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의 비참함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어 피난을 이방 민족이 사는 데까지 가야 했다.'
여기서 그 흉년은 다만 환경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타락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약 성경 시작의 마태복음 1장 1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이렇게 나온다. 기독교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면서도 표현은 늘 <예수>를 믿는 종교다.
이 예수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그 실체, 그 약속, 그 운명, 그 결과의 주인이고 주인공>이다.
이 예수를 소개를 할 때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이 되는 실체로 소개한다. 그래놓고 이제 족보가 나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굉장한 족보다.
그런데 여기 이 족보에 등장하는 <다말> 그다음에 <라합>, 《룻》은 모두 여인들이고, 이 여인들의 삶이 정상적이지가 않다.
또 끝에 가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고 기록되어서, 이 족보는 약간 치사한 족보가 됐다. 특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의 족보>에 치사하게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밧세바)를 뺏아서 족보를 이었다'는 게 왜 들어가야 되는가 하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런 치사 찬란한 기록은 그냥 어물어물 넘어가야 되는데, 왜 성경에, 더구나 예수의 족보에 악착같이 기록되어 살아있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날은 남녀평등이라는 것이 정의와 평등의 큰 증거가 되어 권리로 주장되는 데까지 와 있는데, 성경이 얘기하는 바는, 남자는 남자의 역할이 있고 여자는 <여자의 역할>이 있다고 하는데, ★여자의 역할이 남자의 역할보다 훨씬 치사하다. 훨씬 어렵다.
★남자의 역할보다 훨씬 치사하고 어려운 <여자의 역할을 예수가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남자의 역할을 하지 않고 여자의 역할을 한다>를 말하기 위하여, 이 예수의 족보에 가장 치사한 역할을 하는 여자들이 도입되는 것이다.
남자들은 권위와 명예의 상징이다. 그런데 <남자의 그 명예와 권위가 그의 아내로부터 그 본문을 그 내용을 채운다>고 얘기하는 것이,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고 둘을 합쳐서 결혼을 시키는 이유다.
여자가 해야 되는 역할은 뭐냐 하면 남자가 가지는 권위와 명예와 달리, 현실을 살아내야 된다는 거다. <명예와 영광이라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바쳐 목숨을 걸고 만들어내야 되는 것이라는 것을> <여자들이 책임을 지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여자는 결혼을 하면 누구의 아내가 되는데, 이제 조수가 되는 것이다. 서열상으로는. 치사하지만. 살아보면 남자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어느 남자도 결정을 혼자 내리지 못하며, 혼자를 넘어서 주장도 펴지 못한다. 전부 여자가 한다.
그런데 남자가 그 주장을 자기 것인양 하도록 허락을 받고, 갖은 욕을 다 먹고 여자가 하자는 대로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것은 위대한 비밀이다.
2.
하나님은, 우리가 척 알아도, 신이란 가부장적이어야 한다. 명예요 권위요 권력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하나님인 것을 증거하는 것을, <여자의 역할 같이> - 그 아들을 보내어 그가 마치 <죄인인 것 같이>, 그가 마치 <모든 손해를 그가 당해야 되는 것 같이>, 그리하여 <누구를 살려내는 것 같이>, <여자가 자식을 기르는 것 같이> - 예수는 오셔서 인류를 <섬기고>, 인류의 죄를 <자기 것으로 짐을 지고 해서>,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으로 메시아의 역할을 행한다.
★그래서 <신앙이란 여인의 역할 같아야 된다> 하는 것이 성경의 주장이다.
다른 종교는 다 인간이 자기가 정한 신에게 가서 빌고 어떤 보상을 받을 만한 무엇을 드림으로써 보상을 받아내는 것이라면, 기독교만은 '신이 우리를 만들고 우리의 그 내용을 정하고 우리의 목적을 결과를 만족하시는 분이다'라고 하는 <신의 의지>가 가장 먼저 강조된다. 그 신이 자신의 의지를 동원하여 우리를 만들어내는 그 방법이 말하자면, ★남성적 방법 권력의 방법이 아니라 <여성적 관점>이며 <섬김이더라> 이거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 이것이 예수다.
하나님이 예수를 권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 <그런 수욕을 감당하는 것으로>, <우리의 오해와 분노와 우리의 무지가 만드는 일을 감수하는 것으로> 신이 영광을 받아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보여주는 것은 죽어서 부활하는 거다. 살아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죽고 부활하는 거기에> 기독교의 신비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항복을 하려면 무엇을 넘어서야 되느냐 하면, 우리의 욕심, 우리의 기대, 우리의 방자함, 왜곡, 어리석음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가 그걸 넘어서기를 하나님이 바라신다. 그것을 채우는 것으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욕심내는 것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이는 것이, 우리 현실 속에서 <여자들의 역할이다. 예수가 되는 거다.>
신이 우리를 위하여 죽겠다 그러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는 없다.
우리는 그런 존재이고 그 현실 속에 있다. 그러니 모든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지금 뭔가?
'인간이란 뭐냐'에서 우리가 상대의 고집을 꺾기 위하여 권력을 동원하도록 부름을 받지 않고,
★'우리가 다르게 사는 것으로 저들 앞에 진정한 정의가, 평화가, 기적이, 찬송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라고 우리를 도전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힘의 싸움이다. 경쟁하고 싸우고 이기고 시체 위에 세우는 깃발에 불과하다. 거기는 기쁨이 있을 수 없고, 웃음이 있을 수 없고, 거기는 찬송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찬송을 받아내는 것, 아니 우리가 찬송이 되는 것, 우리가 기쁨이 되는 것, 우리가 만들 수는 없는 그 영광의 자리에 가는 것이다. 그 인생을 우리는 허락받았다. 우리 모두에게 있다. 내 앞에 있다.
우리 오늘부터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행하신 일을 행하는, 도덕과 윤리와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와 가치와 인생이라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의, 여자의 역할을 하는 그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의, 기적을 신비를 이루는 위대한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발췌: 구약성경 다시보기(23) / 룻 1:1-5 / 박영선 목사 / 2024.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