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죄송한 마음에 다시 이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실은 김종일님과 der Marschall님 때문에...이렇게 왔습니다.)
더욱 카페가 풍성한 읽을거리로 차 있군요. 저도 이곳에서 미약하나마, 음악에 대한 진솔한 글들을 올리고 싶네요. 아무튼 Come back을 자축하며!!!
그리고 아바도 베를린필 얘기는 전에 객석에서 카페해서 다른 카페(옛 거장들을 기리며 ^^;)에 올린 글인데 다시 이곳으로 옮깁니다.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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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전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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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반트, 클라이버 등과 더불어 이 시대 최고의 지휘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카라얀 사후(89년)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어 그 명성을 더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아바도는 그러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에서 사임한다는 의사를 밝혔고, 베를린 필의 상임으로 2002년부터 사이먼 래틀이 내정되었습니다. 사실 저로선 좀 충격적인데요. 아무튼 니키쉬,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모두 장기간 베를린 필을 이끌었잖아요. 그토록 빨리 임기를 마치는 것도 놀랍고, 더구나 래틀이 그 후임이라는 것이 더욱더 절 놀라게 합니다. 오늘 인터넷으로 객석 뒤지다가 관련기사가 있어서 복사해 올려봅니다. 아바도가 사임하게 된 배경이 좀 나오네요. 여기에서는 로린 마젤이 후임일 것 같이 글이 전개되지만, 이미 래틀로 확정된 상태입니다. 그 점 오해 없으시길...
(여기까진 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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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취재>베를린 필과 아바도의 불화, 그 숨겨진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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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를 거부하는 우리 시대의 방랑자
아바도의 베를린 필 시대가 아직도 4년이 남았지만, 베를린 음악계의 관심은 벌써부터 그를 떠나 있다. 그런 가운데 로린 마젤이 9년 만에 베를린 필 무대에 섰다. 경선 탈락 후 베를린에 발도 들여놓지 않은 그가 아바도의 계약연장 거부가 발표되자 곧바로 스케줄을 조정한 것이다. 베를린 필 지휘봉은 과연 누구에게 넘겨질 것인가? 그리고 아바도의 행보는? 이를 둘러싼 베를린의 분위기는 조용한 가운데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6월 26일 생일을 맞았다. 동안의 소년 같은 수줍움을 아직도 떨어 버리지 못하는 아바도의 나이가 올해로 65세라니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올해 아바도의 생일은 적어도 베를린에서만큼은 아주 조용하게 지나갔다. 1989년 말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후 올해처럼 언론이 아바도의 생일에 무관심했던 것도 처음이다.
지난 3월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2002년으로 끝나는 베를린필과의계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해 독일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특히 베를린 필 당국과 단원들은 내색만 안했을 뿐 상당히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자기들이 아바도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있다. 맘에 안 든다면 지휘자를 갈아치울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푸르트벵글러·카라얀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독일 낭만파 음악의 전통을 자랑하는 이 오케스트라를 자기가 먼저 떠나겠다고 선언한 지휘자도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아웃사이더 아바도의 새 바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사망하고 단원들은 오케스트라 역사상 처음으로 115년 만에 지휘자 선거권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89년 10월 8일 장장 6시간이 걸린 회의 끝에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선택했다. 당시 사람들은 35년간 카라얀의 카리스마에 익숙해져 있어 후임도 카라얀류의 인물이 당선될 것으로 예측했다. 카라얀과 비슷한 기질을 갖고 있는 로린 마젤이나 리카르도 무티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물망에 올랐고, 특히 마젤은 베를린 필 사령탑 진출을 거의 확신하고 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사람 좋고 겸손하다 못해 유약하게까지 보이는 아바도였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아바도의 등극을 무티 파와 마젤 파의 치열한 싸움에서 건진 어부지리로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아바도는 쟁쟁한 카라얀의 황태자들을 제치고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라는 영광을 거머쥐었다. 언론도 밀라노 출신 아웃사이더의 선출을 단원들의 간절한 민주화 염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면서 이 아웃사이더가 몰고 올 새로운 바람에 기대를 보였다.
아바도의 공식 직함은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이지만 스스로는 음악감독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취임 직후 단원들에게 한 첫 마디도 자신을 미스터 마에스트로 내지는 아바도 씨가 아닌 클라우디오로 불러 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지휘자의 요청이 단원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오랜 세월 천재 카라얀의 괴팍함과 독재에 시달려 온 베를린 필에 드디어 민주화의 시대가 도래한 듯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부업에 바빠 늘 베를린을 떠나 있던 카라얀과는 달리 아바도는 연중 40회 이상의 연주회를 직접 지휘했고, 오케스트라의 해외연주도 거의 동반했다. 단원들의 입은 계속 벌어졌으며, 베를린의 봄은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는 듯했다.
아바도는 다른 지휘자들처럼 인터뷰를 즐기지 않는다. 상임지휘자 취임 후 9년 동안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그는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타입이고, 따라서 아바도의 속내는 그의 연주를 통해 유추해석해야 했다. 지난 9년간 베를린 필의 연주회 프로그램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바도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카라얀이 35년간 갈고 닦아 온 베를린 필의 고정된 음색이었다. 베를린 필의 베토벤·브루크너·슈트라우스 연주는 카라얀식 틀 속에 짜맞추어 있었고, 이런 틀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푸르트벵글러에서 카라얀으로 이어지는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영향은 베를린 필의 최대의 강점이기도 하지만 이런 신비주의적 해석이 매스미디어 시대의 천재 카라얀의 상술과 결부되면서 지나치다 싶은 극적 효과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휘자의 스타 의식에서 비롯된 과장된 제스처의 흔적도 역력했다. 아바도는 이런 카라얀의 부작용을 떨어 버리는 데 가장 역점을 두었던 듯싶다.
1995년 ‘벨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바도는 이런 베를린 필의 음색에 대해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아바도는 박자에 맞춰 터져나오는 팡파레식 연주는 미국과 영국 오케스트라의 특징으로 스트라빈스키나 현대 작품들을 연주하는 데에는 적당하지만 베토벤이나 브람스·브루크너 해석에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된다고 말했다. 아바도는 한 음 한 음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철학적·문학적 곡해석을 선호했으며, 이런 그의 음악관을 베를린 필과 조율하기 위해 독창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아바도의 베를린 필 시대는 음악과 문학의 접목시대로 정리된다. 이런 아바도의 시도는 취임과 함께 곧바로 시작됐는데, 그 첫 프로젝트는 프로메테우스였다. 매 시즌마다 한 가지 주제를 정해 그와 관련된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연주하는 아바도의 프로젝트는 고대 그리스 신화, 횔덜린, 방랑자, 파우스트로 이어졌고, 해가 갈수록 베를린의 다른 예술단체들의 호응도 커졌다. 바도가 파우스트를 시즌의 주제로 정하면 연극·영화·무용·오페라 단체들도 이를 따라해 베를린 전체에 파우스트 바람이 일 정도였다.
아바도의 또 다른 시도는 현대음악의 보급과 전파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취임 후 베를린 필 프로그램에 현대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폭 늘어났다. 이런 프로그램 때문에 베를린 필은 단골청중들을 잃어버렸다는 오케스트라 내의 비판도 상당하지만 이는 누가 뭐래도 아바도의 큰 공적이다. 현대음악에 대한 아바도의 신념은 고집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1950년대 초 바르토크의 작품이 음악도 아니라고 매도한 토스카니니를 인용하며, 토스카니니의 분노와 공박에도 바르토크 보급에 앞장섰던 지휘자 귀도 칸텔리에 자신을 비교하곤 했다. 아바도는 베를린 필 청중들이 등을 돌리는 쿠르탁, 리게티나 루이지 노노의 작품이 언젠가는 클래식으로 인정받을 것임을 확신하며 스스로 현대음악 보급과 발전의 사수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민주화의 화신, 정치적인 지휘자라는 두 얼굴의 실체
아바도의 온화한 인상과는 달리 정치적 지휘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것도 강한 사명감과 신념에서 비롯된 고집에 기인한다. 아바도가 1968년 라 스칼라 극장을 노동자와 학생들에게 개방한 것은 그의 정치성을 말해주는 중요한 일화이다. 당시 아바도는 음악이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전유물이 되는 것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음악은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절친한 친구들인 작곡가 루이지 노노,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와 함께 공장을 찾아다니며 노동자들에게 음악을 선사했다. 이런 아바도의 행동은 당시 이탈리아 음악계의 대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바도는 이탈리아식 음악교육 체제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탈리아 음악도들은 모두 하이페츠를 꿈꾸기만 한다. 이런 엘리트 꿈에 젖어 공부하다가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면 연주활동이 일종의 전락처럼 생각되고, 결국 열등감과 피해의식 속에서 40여 년 단원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단원들에게서 아름다운 음악이 나올 수 없고, 타인에게 관대한, 개방된 사고가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 아바도의 의견이다.
아바도의 민주적·철학적 음악관은 그가 자란 환경에서 기인한다. 그의 부친은 바이올린 주자였고, 작가로 유명했던 모친 역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음악을 하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라 스칼라 극장을찾은 일곱 살배기 아바도는 드뷔시의 작품을 듣는 순간 자신의 인생항로를 결정했다. 일곱 살짜리 꼬마의 마음속에는 나도 어서 자라 이런 작품을 스스로 연주하겠다는 바람만이 간절했다. 지휘자여도, 피아니스트여도, 첼로주자여도 상관없었다. 꼬마 클라우디오는 곧바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어머니를 졸라 피아노를 배우고 작곡공부를 겸했다.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하고 빈으로 옮긴 후에는 스바로프스키 문하에 들어가 지휘공부를 시작했다.
여기서 아바도는 주빈 메타와 함께 스바로프스키의 수제자가 됐고, 앞으로의 진로가 결정됐다. 아바도는 이미 베르디 음악원 재학시절 남몰래 지휘자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비올라석이 곡의 전체 흐름을 파악하는 데 최고의 자리임을 간파하고 연습 때마다 비올라 주자 의자 밑에 숨어들어가 있곤 했다. 교수에게 매번 들켜 꾸중을 듣고 쫓겨나도 아바도의 도둑 강의는 그칠 줄 몰랐다. 결국 교수도 아바도의 극성에 굴복, 나중에는 비올라 주자 옆에 청강생 아바도의 자리를 마련해 주기까지 했다.
아바도의 음악인생은 라 스칼라 극장 스캔들 외에 별다른 굴곡이 없었지만 20대 초반 한 번 위기가 왔다. 당시 아바도는 자기가 이것저것에 너무 관심이 많아 결국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에 빠져 있었다. 그는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조부와의 대화를 통해 잔가지들을 쳐내고 한 우물만 파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 한 우물은 결국 지휘자의 길이 되었다.
아바도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었다면,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조부이다. 그의 조부는 언어학 교수였는데, 특히 이집트어, 고대 그리스어와 페르시아 언어에 통달했다고 한다. 조부는 고령에도 5년마다 새로운 언어를 집중적으로 배우곤했는데, 이런 조부의 끊임없는 탐구심은 손자를 늘 감동시켰다. 무솔리니 정권하에서 라틴어로 쓰인 교회강령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핍박을 당한 조부의 굽힐 줄 모르는 신념 역시 손자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한 번 신념을 가지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강한 의지와 아바도의 강점인 민주적 사고방식은 조부가 손자에게 준 최대의 선물이다.
아바도 초기시절 베를린 필의 현악부가 취약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런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그는 새로운 악장을 채용하는 데 마지막까지 물망에 오른 두 후보 중 누구 하나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라이너 쿠스마울과 콜랴 블라허 모두 뛰어난 콘서트 마이스터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바도는 베를린 필 행정부에게 “이것도 베를린 필의 복이다. 두 사람을 모두 채용하자. 나머지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장담하고는 그대로 베를린 시정부로 달려갔다. 그리고 단 하루 만에 두명의 콘서트 마이스터 연봉을 보장하는 서약서를 받아냈다. 정치적 인간(호모 폴리티쿠스)인 아바도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아바도의 해석은 철학적이다. 그리고 작곡가의 요구에 충실한 편이다. 그러나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을 선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베르디의 ‘레퀴엠’ 연주에서 감동에 빠져 쥐죽은 듯 조용한 청중보다는 울음보를 터뜨리는 청중이 곡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할 정도다.
작품의 정확한 연주를 중요시하지만 연주인의 자주적인 해석에도 큰 의미를 둔다. 위대한 작곡가일수록 새로운 해석의 공간이 더욱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바도는 연주가가 어느 문화권 출신인가에 따라 작품해석에 큰 편차가 난다고 본다. 같은 베토벤의 작품이라도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의 차이는 엄청나고, 클라이버와 브루노 발터의 해석도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바도는 이제 한 가지 라인을 세워야 할 때가 됐다고 말한다. 베토벤이 한 악절에 두 번씩 거듭해서 박자를 규정해 놓았다면 그것은 그래야만 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우 작곡가의 의도를 충실히 따라주는 것이 음악의 완성도를 높이는 해석이라고 믿는 편이다.
아바도의 베를린 필 취임과 함께 현악부의 취약함도 보강되었고, 구스타프 말러와 브람스의 해석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 경지에 달했다. 현대음악의 잦은 연주로 단골청중들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대신 젊은 세대 청중들의 관심이 커진 것은 득이다. 카라얀 같은 카리스마가 없다고 하지만 온화하고 겸허한 이미지로 청중들을매료시키고 있는 것은 아바도의 또 다 른 무기다. 그는 스타 의식이 강한 지휘자가 아니다. 소탈하게 단원들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한다. 그의 취임 후 새로 들어온 단원들만 50명이 넘는데 이들이 노쇠한 베를린 필에 몰고 온 활력은 연주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갑자기 베를린 필 무대에 등장한 로린 마젤, 아바도의 지휘봉은 누구에게?
지난 6월 5일 로린 마젤이 9년 만에 베를린 필 무대에 섰다. 상임지휘자 경선 후 자신의 탈락에 크게 실망한 마젤은 그동안 베를린에 발도 들여놓지 않았는데, 아바도의 계약 연장 거부가 발표되자 곧바로 스케줄을 조정한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아바도의 전문인 말러 교향곡 5번을 가지고. 쇼맨십이라면 카라얀에 버금가는 마젤은 자신이 작곡한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10번도 프로그램에 끼워넣고 로스트로포비치까지 대동하고 왔다.
정확히 2002년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의 계약이 만료되는 마젤은 이미 자신이 아바도의 뒤를 이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베를린 필 단원들이 아바도에 대해 갖고 있는 불만, 즉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철학적이라는 점을 교묘하게 자기 선전에 이용하고 있기도 하다. 베를린 필 당국도 마젤의 연주가 끝난 직후를 택해, 아바도가 2002년 후 베를린 필의 초청 지휘도 거부했다고 발표했다. 아바도는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 음악감독직도 사절할 의사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중들은 연주를 통해 지휘자를 평가한다. 아바도는 적어도 말러와 브람스의 해석을 통해 베를린 필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단원들의 지휘자에 대한 평가는 아무래도 연주보다는 리허설을 통하게 되는 모양이다. 아바도의 민주적인 사고와 기애애한 동지애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 단원들은 지휘자의 독재와 카리스마에 향수를보이고 있다. 이런 향수는 특히 상대적으로 아바도의 무관심을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관악파트에서 나오고 있다. 35년간 카라얀 의 독재에 그토록 시달려 아바도를 선택하게 만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이제 거꾸로 현재 가장 민주적인 지휘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아바도를공격하는 무기로 바뀌어 있다. 음악계, 특히 오케스트라 내부의 민주화는 아직도 요원한 모양이다.
아바도의 베를린 시대가 아직도 4년이나 남았지만, 베를린 음악계의 관심은 벌써부터 그를 떠나 있다. 사람들이 고집이라고 비난하는 아바도의 이번 결정은 사실 상대방에 대한 그의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취임 초기부터 자기보다 더 능력있는 지휘자가 나타난다면 언제든지 상임지휘자직을 물러날 의사가 있다고 말해 왔다. 자신 때문에 오케스트라 내부에 긴장이 발생했다고 판단, 베를린 필의 음악적 완성을 위해 자신을 거두는 아바도의 겸허함을 독단으로, 고집으로 치부한다면 마녀사냥과 다를 바가 없다.
베를린 필은 이 시대 진정한 마에스트로를 상처주는 일을 이제는 그만두어야 한다. 적어도 아바도와의 시간이 4년이나 남은 이 시점에서 65세 생일까지도 무시하고 나오는 처사는 경박성과 편협함만을 드러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