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harisees fancied that if they kept their hands, and their feet, and their tongues, all was done, but Jesus showed that thought, imagination, desire, memory, everything, must be brought into subjection to the will of God, or else the law was not fulfilled. What a searching and humbling doctrine is this! If the law of the Lord reaches to the inward parts who among us can by nature abide its judgment? Who can understand his errors? Cleanse thou me from secret faults. The ten commands are full of meaning--meaning which many seem to ignore.
바리새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손들과 발들과 혀들을 잘 지키면 모든 일이 된다고 자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생각과 상상과 욕심, 기억,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굴복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율법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깊이 파헤치며, 겸손케하는 가르침입니까! 만일 주님의 율법이 내면에까지 도달한다면 우리 중에 누가 본성상 그것의 심판에 머물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분의 실수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저를 비밀스런 잘못들로부터 정결케 하소서. 십계명은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의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For instance, many a man will allow in and around his house inattention to the rules of health and sanitary precaution, but it does not occur to him that he is trampling on the command-- “Thou shalt not kill,” yet this rule forbids our doing anything which may cause injury to our neighbor’s health, and so deprive him of life. Many a deadly manufactured article, many an ill-ventilated shop, many a business with hours of excessive length, is a standing breach of this command.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 주변에 건강과 위생에 관한 주의의 규정들에 무관심하며 “ 너는 살인하지 말라: 는 계명을 짓밟고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안일어납니다만, 이 계율은 우리가 이웃의 건강에 해를 끼칠수 있는 어떤 일을 행하여 그에게서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어떤 일도 행하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치명적 물품, 많은 환기가 안되는 작업장, 지나친 근무시간의 많은 사업체들이 이 계명의 엄연한 위반 주체들입니다.
Shall I say less of drinks, which lead so speedily to disease and death, and crowd our cemeteries with untimely graves? So, too, in reference to another precept: some persons will repeat songs and stories which are suggestive of uncleanness--I wish that this were not so common as it is. Do they not know that an unchaste word, a double meaning, a sly hint of lust all come under the command,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 It is so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our Lord Jesus.
제가 음료수 좀 문제삼아볼까요? 그것은 매우 빠르게 질병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묘지들을 때되지 못하여 죽은 자들의 묘지들로 가득차게 합니다. 그리고 역시 다른 교훈에 관한 것인데, 어떤 분들은 불결함을 암시하는 노래들과 이야기들을 반복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것이 현재 그러한 것처럼 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알지 못할까요, 부정한 말(성농담의 말), 이중의미를 갖는 말, 정욕을 암시하는 음험한 말이 “ 너는 간음하지 말지어다” 계명아래 속한다는 것을요? 그것이 바로우리 주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렇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Oh, talk not to me about our Lord’s having brought in a milder law because man could not keep the Decalogue, for he has done nothing of the kind. “His fan is in his hand, and he will thoroughly purge his floor.” “Who may abide the day of his coming? for he is like a refiner’s fire, and like fullers’ soap.” Let us not dare to dream that God had given us a perfect law which we poor creatures could not keep, and that therefore he has corrected his legislature, and sent his Son to put us under a relaxed discipline.
오! 인간이 십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보다 온화한 법을 가져오셨다고 저에게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분은 그런 종류의 일을 전혀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그분의 손에 까부르는 부채가 있어 그분께서 그분의 타작 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실 것입니다” (마 3:12) 누가 그분이 오시는 그날을 견디겠는가? 왜냐하면 그분은 제련소의 불과 같고 세탁소의 비누와 같기 때문이라” (말 3:2)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불쌍한 창조물들이 지킬 수 없는 완벽한 율법을 주셨는데, 그러므로 그분께서 자기의 법률을 고치시고 그분의 아들을 보내시사 우리를 보다 완화된 훈육아래 두셨다고 감히 꿈꾸시지 맙시다.
Nothing of the sort. The Lord Jesus Christ has, on the contrary, shown how intimately the law surrounds and enters into our inward parts, so as to convict us of sin within even if we seem clear without. Ah me, this law is high; I cannot attain to it. It everywhere surrounds me; it tracks me to my bed and my board; it follows my steps and marks my ways wherever I may be. No moment does it cease to govern and demand obedience. O God, I am everywhere condemned, for everywhere thy law reveals to me my serious deviations from the way of righteousness and shows me how far short I come of thy glory. Have thou pity on thy servant, for I fly to the gospel which has done for me what the law could never do.
그와같은 종류의 것은 어느 것도 안보이신 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대로 율법이 얼마나 밀접하게 우리의 내면 부분들을 둘러싸고 파고들어가서 우리에게 속의 죄를 비록 우리가 밖으로는 깨끗해보여도 정죄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아! 저에게는 이 율법이 높습니다. 저는 그것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저를 모든 곳에서 둘러쌉니다. 그것이 저를 침대에까지 칠판에까지 쫓아옵니다. 그것이 제가 어디에 있든지 저의 발걸음과 저의 길을 표시해놓습니다. 어느 한 순간도 그것이 저를 통치하고 저에게 순종을 요구하기를 중단하지 않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저는 모든 곳에서 정죄받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곳에서 당신의 법이 의의 길로부터 저의 심각한 이탈을 저에게 드러내며 제가 얼마나 멀리 당신의 영광으로부터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종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왜냐하면 저는 그 율법이 결코 할수 없는 그것을 저를 위해 해놓은 기쁜소식(복음)으로 날아가기 (도망하기) 때문입니다.
“To see the law by Christ fulfill’d,
And hear his pardoning voice,
Changes a slave into a child,
And duty into choice.”
그리스도에 의해 율법이 성취된 것을 보는 것과
그분의 사함의 음성을 듣는 것은
노예를 자녀로 바꾸며
의무를 선택으로 바꾼다.
첫댓글 율법과 복음을 바르게 알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정말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바른 분별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제가 알지못하는 부분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용기있게 말해보자면 구원받은후는 지금까지 우리는 은혜의법 아래 살고있었고
그 은혜의법은= 생명의성령의법이고 율법=죄와사망의법 이므로 은혜의법 이 율법보다 상위에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다른말로 표현하면 주님께서 내안에서 행 하시도록, 항상 나를 죽임에넘기는것. 이훈련이 신앙생활 즉
예수님을 닮아가는것이고 그러므로서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고 소금의역활을 하게되고 주님의향기를
뿜어내고.
그것이 보이지않는 예수님을 세상사람들에게 나타내는 하나님의자녀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의삶 이라고.
그러니까 삶으로 전하고 또 입술의증거로 예수그리스도의대속의죽음으로 우리가 구속함을 받은 복음을 전하고.
그리구 삶에서 받는 모든고난은 기쁨으로 견디며 주님을 바라볼때
우리에게 이김을주시는 주님을 경험하며 찬양하며 감사하며 더욱더 하늘나라에대한 소망을 갖게되며....
위에 스펄젼목사의 결론처럼 의무가아닌 자의적인 노예. 아니, 자녀로서의 기쁜순종.
그러므로 율법을 은혜의법보다 아래로 생각하며 살았답니다.
신약에 서신서에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것들만 가지고도 율법을 능가하는 삶을
사는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더 깊은걸 배울자세는 되어 있답니다
빛의 자녀는 빛으로 나아오길 두려워 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합니다.
아버지앞에 나아오는 자녀가 온갖 지혜와 지식과 화려한 치장으로 나아오면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희망님을 통하여 빛을 보고 빛으로 나아오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것이 은혜의 법이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지요.
희망님은 지금처럼 내주하시는 성령님만을 의지하여 말씀을 상고하셔도 충분히 주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뜻을 깨달으신다고 보여집니다.
아버지께서 너는 사랑하는 내 자녀구나! 하시는데,
굳이 아버지의 속내를 낱낱이 파헤치려 하시는지요^^
제가 드리는 말씀에 오해가 없으시길 소망합니다.샬롬!
가장낮은자님.!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읽고 나간후에 제메일에서 스크랩을 클릭해보니 이곳에 64번 율법과언약의차이(하토브님글)
글이 스크랩되어 있어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가장낮은자님도 다시 읽어보시고 우리가 정확한 단어를 알고있는것이 중요하고 또 책임이라 생각되긴 합니다.
근데 왜 율법!! 하면 이렇게도 알러지현상이 일어나는지 몰겠습니다.
하두 율법아래서 고생하다가 해방된 기쁨때문인것 같습니다.
몽학선생이되어 우릴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공헌이 있음에도, 율법!!하면 저주 사망이 뇌리에 박혀있고
율법에서 해방시켜주신 예수그리스도가 마음속깊이 뼈속까지 녹아있어서 그런것 같습니다.
언약은 새언약으로 대체되었고
새언약과율법이 다르다고 깊이 유념하고 있어야 겠습니다.
율법은 세상끝날까지 있을것 이라고...
ㅎㅎ저는 초등학문이라서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참으로 쉽고 또한 즐겁고 은혜로운데요.
오히려 그것을 지혜롭게 해석하여 놓은 분들의 글을 보면 갑자기 눈앞이 캄캄하여 지고
그동안 묵상했던 말씀마저 다 까묵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은 성경말씀만 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속에서 제가 쉽고 즐겁게 은혜받는 깨우침이면 족하거든요.
못깨우치는 나머지는 나중에 본향에 가서 여쭤보렵니다. ㅎㅎ
오늘도 주 예수의 은혜와 사랑가운데 평강의 하루 되시길 소망합니다.샬롬!
가장 낮은자님
저도 초등학문이래요
동창회 한번 하실까요 ?
ㅎㅎ
제가 이와 같은 동일 취지의 글들을 앞으로 계속 올릴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너무 많이 오해하는 부분들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펄젼 뿐만 아니라, 요한 웨슬레, 드와이트 무디,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아 형제단, 왈덴지안들의 수많은 문헌들이 우리가 몰랐고 오해했던 부분들을 말해줍니다. 그동안 성경 번역마저도 비틀어가며 많은 신자들을 속여온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통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율법아래서 벗어나 은혜아래로 들어오는 것은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출발입니다. 그런 다음 나중에 장성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도전받는 것이 율법으로부터
라는 것인데, 앞으로 요한 웨슬레의 글을 보면 그의 고백 한마디 한마디는 많은 경험들을 통해서 나온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앞으로 더 상술하겠지만, 1) 율법은 폐해지지 않았습니다. 2) 율법이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폐해졌다는 말도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3) 율법의 정죄기능이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사라졌다는 말도 완전 잘못된 말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죄기능이 더 강합니다! 4) 율법은 범죄자들만을 위한 것이므로 신자들에게는 필요없다는 말도 비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도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수많은 오해들이 있습니다만 앞으로 많은 글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토브님의 게시물들이 기대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과 복음을 올바르게 깨닫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
진리가 공표될 때 비진리는 몸둘바를 모릅니다. 지금은 그런 단계를 이 카페는 겪으리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
한 것은 예수님이 분명히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다고 공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그것을 허물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비록 거듭나서 천국에 가지만, 천국에서 지극히 (가장) 작다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여기서 쟁론하시는 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부류의 사람들중 어느 쪽에 속해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머지 수십구절에 대한 오해들은 모두 제가 속시원하게
해명해드리겠습니다.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 문제들을 해명하는 것은 성경 중심으로 풀어갈 때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큰 인물들이 이 문제를 꼭 다루고 지나간 사실들은 주목할만합니다. 다만 그들 중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은 알수 있습니다. 무디의 경우는 안식일과 십계명 준수를 아주 강조한 사람입니다만, 웨슬레는 율법이 자기의 영에 자꾸만 도전을 주는 부분을 잘 다루었습니다. 이런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관에 대해서는 나중에 참조하는 자료 정도로 고려될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기회가 되면, 요한웨슬레의 사상과 찰스스펄젼의 사상을 비교하면 좋을듯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 왜냐하면 모든 곳에서 당신의 법이 의의 길로부터 저의 심각한 이탈을 저에게 드러내며
제가 얼마나 멀리 당신의 영광으로부터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종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왜냐하면 저는 그 율법이 결코 할수 없는 그것을 저를 위해 해놓은 기쁜소식(복음)으로 날아가기 (도망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뿐이지요 (롬3:20)
그리고 율법은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이지요 (갈3:24)
아니 이렇게 성경은 쉽게 말씀하는데
학자들이란 쉬운말도 어렵게 표현하지요
이순님 여기에서도 뵙네요..반갑습니다. 샬롬~ ^^
그리스도께로 돌아간 다음에는 율법은 필요없다는 말씀이지요? 바로 그것이 현대 교회 그중 특히 한국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스로를 믿은 다음에는 율법이 더욱 유용한 수단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평행으로 달려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이탈되는 때가 한번도 없는 사람과 영적 사생아들에게는 율법이 필요없습니다. 죄를 한번도 짓지 않는 신자들은 율법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탈이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항상 큰 도전이 됩니다. 웨슬레의 글을 잠시 참조하십시오.
성경사본 /번역에 132번 성경반역(잘못번역된) 갈3:10 에도 많은댓글들이 달린건 저는 이제야 읽었습니다.
우리를 의의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아버지께서
성경말씀에대해서도 올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여 주실걸 믿고 의지하며 기대합니다.
여기 토론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제가 지금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거나 구원얻은 다음에는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교훈들을 다 섭렵하고 나서 깨닫는 것은 결국에는 성령께서 율법에 있는 내용과 다른 것을 가르치시지 않는 것이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아주 깊은 수준의 진리를 터득하고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최상의 수준에서만 유익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단계에서 깨닫는 사람들이 영적 유아시절 부터 알고 지켰더라면 크게 나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는 것을 많이 보게되는 것입니다.
하토브님은 율법을 지키자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토론을 계속 진행하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