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해를 보내며
임 인택
향긋한 커피 향을 맡으며 맑고 검은색의 원두 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따뜻함을 느끼고 있다. 커피잔을 감싼 차가운 두 손으로 전해지는 따뜻함에 소박한 기쁨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는 따뜻함을 오래 머금으려 지긋이 입을 다문다.
오후의 햇볕이 창가에 가득한 커피집에 앉아 초겨울의 한가함을 즐기고 있다. 밖의 바람은 찬데, 유리창 안의 따뜻한 햇볕은 환하고 포근하다. 탁자에 놓인 포인세티아의 울긋불긋한 잎사귀와 진한 초록 잎이 햇볕을 받아 유난히 반짝인다. 층층이 자라는 잎 가운데 윗부분 잎이 붉은색을 띠고 있어서 빨강, 초록이 어우러져 크리스마스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 꽃 하나로 감사함과 함께 추운 겨울 따뜻함이 느껴진다.
창밖의 잎 떨군 가로수가 쓸쓸하고 허전하다. 세상의 모든 빛이 회색빛으로 변해간다. 회색은 퍽 을씨년스럽지만 그래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에 평화와 안정을 주기도 한다. 겨울로 들어서는 12월의 회색빛은 모든 것이 조용해지는 침묵 속에서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달력을 말아 들고 종종걸음 하는 행인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다. 나이 들수록 몸은 느려지고 시간은 빨리 간다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닌가 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는 시간의 무심함에 놀라며, 올 한해도 이렇게 가고 마는가. 초조하고 착잡한 마음에 시린 생각들만 발걸음을 바쁘게 한다. 지금의 나는 그 일 년 첫 마음의 몇 퍼센트나 스스로 지켜냈을까. 내가 나에게 묻는 12월이다.
따뜻한 옷을 찾아 입듯, 따뜻한 기억을 꺼낸다. 산타클로스의 수염처럼 풍성했던 젊은 날의 크리스마스는 로맨틱했다. 가는 해와 오는 해의 옷깃 스치는 소리, 펄럭이며 내리는 눈발은 솜털처럼 가볍고 포근하여 세상의 고뇌가 눈보라 뒤로 숨었다. 앙상하게 바람 앞에 서 있던 가로수들도 꽃 전등 달고 제 몸에 하얗게 눈의 옷을 뒤집어쓰고 반짝이며 얼어붙은 겨울밤을 이겨내고 있었다. 으레 크리스마스 때는 눈이 오고 또 올 것으로 기대했었다.
거리에 넘쳐나던 캐럴도 그 많던 눈도 다 어디로 간 걸까?
우리는 지금 코로나 시대를 2년째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 관련 뉴스가 하루도 빠짐없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낯선 용어에도 익숙해졌다. 훗날 역사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기록할 것이다.
코로나는 우리 삶 곳곳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익숙했던 모든 것을 다시금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변화하였다. 소비, 교육, 만남, 업무 등, 사실 변화하지 않은 것들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익숙했던 것들에 충격이 가해짐으로써 세상을 해석하는 우리 사유 체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는 그동안 덜 나가고, 덜 만나고, 덜 소통하며 견뎌왔다. 분명 원하는 바를 참고 덜어내고 견뎌오며, 이제는 코로나와 함께 하는 삶 ‘위드 코로나’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는 표면에 머물고 말았다. 다시 확진자의 숫자가 늘어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감염에 대한 공포쯤이야 하고 변화에 대한 충격마저 익숙해져 가고 있다. 다시 겨울이 두려워진다.
여름이라면 아직 해가 저만큼 남아있을 텐데, 오후 5시 반, 벌써 어둠이 내린다.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어 외투 속에 두 손을 깊이 찌르고 골목을 나선다. 어둑한 거리에 수북이 쌓인 노란 은행잎들이 길을 밝히고 있다. 마지막 짧은 가을의 그림자가 곱다. 가로등 아래 구겨진 신문지 조각이 바람에 쏠리며 바스러지는 소리를 낸다. 은행잎과 함께 뒤채 이는 차가운 종이 위로 하얗게 언 바람이 지나간다. 어떤 설치 미술 같은, 나는 것들이 주는 순간의 아름다움이다.
비우고 버리고 사라져가는 계절, 12월. 세밑이라 그런지 별나게 춥고 돌아보면 다 아쉬움뿐이다. 시간이 물처럼 흐른다 한다. 아니 화살처럼 흐른다고도 한다. 12월은 그런가 보다. 생각과는 달리 괜히 바쁘고 어수선해진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가 문득 맨 마지막 장의 달력을 넘길 때, 그때야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시끄러운 한 해다. 정말 다사다난했던 한 해, 잘 마무리하고 새해에는 건승하기를 서로에게 기원한다. 예전에 연말이면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라고 써서 연하장 아니면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곤 했는데, 요즘은 그런 것들이 없어진 지 오래다. 그래도 삶 하나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으로 누군가에게 손 글씨로 쓰인 카드 한 장 보내고 또 받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연말의 소소한 기쁨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서 눈이라도 내리면 거리의 모르는 사람에게도 다가가 인사하고 싶어진다. 하늘엔 영광, 땅 위엔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