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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삼 회백이 동양적 외모를 살려 그린 아틸라 초상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당나라를 끌어들였다는 점은 우리의 과거사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 중 하나다. 통일에 외세를 개입시킨 나쁜 선례를 남긴 데다,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를 당나라에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 좋아 통일이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아시아 동북부 일원에서 고구려가 막강한 중국에 맞서 수백 년간 영토를 확장하며 위세를 떨쳤기 때문일까. 한국 사람들은 멸망한 대국, 고구려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고구려는 지리적 여건이 불리했음에도 한때 한민족 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광개토대왕(375∼413) 재위 당시 고구려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 동쪽으로는 옥저와 예, 그리고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에 이르렀다.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413∼491) 시대에 고구려가 고조선이 차지했던 영토를 거의 모두 되찾은 것으로 추정한다.
현대의 과학문명은 유럽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 500년경 그리스에 이어 로마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 이후, 세계 역사는 유럽 중심으로 흘러왔다. 로마가 유럽을 지배하던 시대에 몇몇 아시아 민족이 유럽에 진출하긴 했지만, 로마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로마를 멸망시킨 세력은 다름아닌 아시아 민족인 훈족(Huns). 서기 375년, 기마 민족인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와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동고트를 공격했고, 동고트는 서고트를 공격했다. 이에 서고트는 로마제국의 영토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했다.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에서 살게 된 지 100년 후인 476년, 서로마제국은 결국 게르만족의 수장(首長)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게르만족이 서유럽과 아프리카 북부 등 여러 지역으로 갈라지면서 유럽에는 새 국경이 그어졌다. 이때 성립된 국경은 대부분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훈족은 한민족의 일파
그런데 최근 서유럽에서 게르만족의 이동을 촉발시키고 로마제국을 풍전등화의 운명속으로 몰아넣은 주인공인 훈족이 실은 한민족의 일파임이 세계 각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사료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적 주장에 흥미를 갖는 사람도 많지만,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리냐’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훈족이란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 생소할 뿐더러,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서기 4∼5세기경 한반도에 살고 있던 한민족이 어떻게 유럽을 공격할 수 있었겠느냐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훈족이 한민족의 일파라는 역사적 주장이 곧 한민족이 유럽을 직접 공격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훈족은 흉노(匈奴, 북방 기마 민족을 통칭한다)의 한 분파로,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약 700년간 중원 지역을 놓고 중국과 각축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흉노는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했다. 이때 흉노에 속해 있던 한민족 원류 중 일부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한 부류는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진출해 현재의 한민족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프랑스 등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들에게서 몽골반점이 발견되고 있다. 몽골반점은 꼬리뼈 높이의 엉덩이에 나타나는 색소 변색으로 유전학적으로 몽골계통의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신체적 특징이다. 몽골반점이 한민족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지만, 훈족 후예들이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난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한민족과 훈족은 친척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훈족은 그들 특유의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사용했다. 예맥각궁은 만드는 데만 5년, 제대로 쏘기 위해 활을 익히는 데만 10년이 걸리지만, 1분 안에 15발 이상 쏠 수 있다고 알려진 활이다. 훈족이 예맥각궁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아퀼레이아에 자리한 크리프다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가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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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럽 호령한 훈족 수장 아틸라는 한민족 |
유물·유적 통해 추적해본 한민족의 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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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기마인물상 토기. 북방 유목민족의 특성을 지녔다.
이 그림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말을 탄 채 활로 동물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과 똑같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인데, 이 화살촉은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목표물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훈족도 바로 이 도끼날 화살촉을 사용했다.
관습적인 공통점도 발견되고 있다. 훈족의 골상이 편두(扁頭, 납작머리)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몽골지역부터 독일 튀링겐과 오덴발트, 프랑스 칼바도스 지방에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분묘에서 나온 훈족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훈족은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 있었고 머리 둘레에 고랑 같은 주름이 팼으며,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편두라고 알아냈다. 그런데 가야국이 창립했던 경남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됐다. 또 법흥왕 등 신라의 왕들도 편두였다고 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국사 지증대사의 공덕비에 법흥왕이 편두라고 기록했다.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던 관습, 혹은 코카서스 북부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도 알려진 편두는 한민족과 연관성이 크다. ‘삼국지’의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는 ‘진한(辰韓) 사람은 모두 편두’라는 기록이 있다. 또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편두는 중국인과는 구별되는, 동이(東夷)족 사이에 매우 오랫동안 성행했던 풍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은 훈족에게선 편두가 발견되지만, 흉노에게선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럽을 공격한 훈족은 편두 습속을 가지고 있는 특수 부족으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 지역과 친연성(親緣性)이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한편 훈족의 이동경로에서는 대·소형의 동복(cup cauldrons)이 발견된다.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진 동복은 정화 의식(Purification rite)에서 고기를 제물로 바칠 때 쓰는 동제 용기로 대형 화분처럼 생겼다. 이러한 동복은 가야시대 고분인 경남 김해의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동복은 가야국 등의 원류가 북방의 기마민족이라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어 왔다. 훈족은 동복을 말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국보 91호) 토기에도 말 잔등에 동복을 싣고 다니는 모습이 발견된다. 게다가 이 기마인물상의 주인공들도 모두 편두이다.
또한 훈족의 동복 등에서 발견되는 문양은 한민족의 금관 등 머리 장식 양식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나무형상(출(出)자형 장식)과 녹각형상(사슴뿔 장식)이 많다. 이는 북방 민족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풍습으로 북방민족이 한반도로 이동해 정착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전형적인 습속인 순장(殉葬) 또한 가야 지역의 고분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특히 금관가야 유적인 대성동 고분군 1호분에선 우마(牛馬)의 머리를 베어 곽 위에 얹어놓은 목곽(木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훈족을 포함한 북방 유목민족의 동물 희생 행위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훈족이 나무에 빨간 헝겊을 달아 악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기록과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점은 우리 민족이 마을 어구에 장승이나 솟대를 세워 염원을 빌고 곰을 토템으로 삼은 점과 매우 유사하다. 대다수 유목민족들은 곰이 아닌 다른 동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토템 대상으로 가장 일반적인 순록과 수달 등은 지금까지도 몽골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서쪽의 훈족, 동쪽의 한민족
그렇다면 고대 한민족의 원류는 어떤 과정을 통해 아시아 대륙의 훈족과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인으로 갈라서게 됐을까. 이는 진시황제 때부터 중국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흉노의 흥망성쇠와 연계된다.
흉노는 진나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한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장기간에 걸쳐 혈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57년 동과 서로 양분되어 서로 전쟁을 벌인다. 서흉노의 선우(흉노의 왕으로 ‘하늘의 아들’을 뜻함)인 질지(?支)가 동흉노의 호한야에게 패하자 일족을 이끌고 우랄산맥 너머 시르다리아강 중류에 당도한다. 이것이 흉노의 제1차 서천(西遷)이다. 질지는 견곤(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을 수도로 하는 ‘아정(牙庭)’이란 나라를 세웠다. 서유럽은 이때를 흉노 제국 출현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한편 중국에 후한(後漢)이 들어서면서 세가 불리함을 느낀 남흉노는 48년 고비사막 이남의 8개 집단을 이끌고 광무제(BC 6년∼AD 57년)를 찾아가 투항했다. 광무제는 남흉노에게 아예 내몽골 영토를 주어 투항하지 않은 북흉노를 견제하게 했다. 그리고 73년에 이르러 한나라는 남흉노와 연합해 북흉노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패배의 고배를 든 북흉노는 아시아의 북쪽 막북(漠北)으로 이동하는데, 이것이 흉노의 제2차 서천이다. 북흉노는 서역제국을 장악한 후 그 세력을 규합하면서 한나라와의 대결을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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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나라는 화제(和帝, 89∼105) 원년인 89년에도 남흉노를 규합하여 북흉노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치명상을 입고 사분오열된 북흉노는 대부분 동호(東胡)에서 분리된 선비(鮮卑)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일부 북흉노는 천산산맥 북쪽으로 계속 서진하여 페르가나 분지를 지나 발하시호와 아랄해 사이의 강거(康居) 땅에 이르렀다. 이것이 흉노의 제3차 서천이다.
흉노와 훈족을 연결시키는 또 다른 연결 고리는 한나라 왕조가 붕괴될 무렵에 등장하는 남흉노이다. 304년 당시 산서의 태원에 자리잡고 있던 유연(劉淵, ?∼310)은 진(晉)나라 혜제에 의해 남흉노의 왕으로 책봉된다. 그러나 유연은 과거 선조 중에 한나라의 공주가 있었음을 근거로 자신이 한나라의 후예라고 내세우며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다. 그는 308년 태원에서 북한(北漢, 즉 前趙)을 세운다. 318년 석륵(石勒, 274∼333)은 전조를 폐하고 후조(後趙)로 알려진 새로운 흉노 국가를 세웠고, 349년 석민(石閔)이 후조의 정권을 잡았다. 석민은 흉노에게 원한이 많은 한인(漢人)들을 부추겨 대대적인 흉노 토벌에 나서도록 한 뒤 무려 20여 만명의 흉노가 살해되는 것을 방관한다.
흉노로서는 이것이 결정적 패배였다. 중국에 동화된 흉노와 유목 생활을 하던 흉노가 연합했음에도 패배하자, 살아남은 흉노들은 새 삶의 터전을 찾아 서쪽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흉노의 제4차 서천으로, 이들은 이미 1∼3차에 걸쳐 서천했던 흉노와 합류(또는 압박)한다. 설상가상으로 370년경부터 혹독한 한파가 엄습하자 흉노는 보다 서쪽으로의 이동을 단행, 375년 서유럽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한편 한반도에서 훈족과의 친연성이 가장 두드러진 지역은 가야와 신라 지방인데, 중국과의 전쟁 와중에 훈족의 지배집단 중 일부가 동천(東遷)하여 한반도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기서 훈족의 지배집단이란 유목민의 수령(首領)이 속한 부족을 말한다.
학자들은 흉노·동호·선비·오환 등 북방 기마 민족들의 흥망이 가야국의 건립시기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삼국지’의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는 늦어도 1∼3세기까지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삼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3세기 중엽 이후 마한은 백제로, 진한은 신라로 통합되었고, 변한은 3세기 이후 가야란 명칭을 갖게 된다. 이는 3세기말∼4세기 초에 변한이 가야사회로 전환됐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가야란 나라가 신라나 백제와 달리 내부에 다양한 여러 나라들을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가야의 건립시기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중엽까지 무려 5세기의 차이를 보이는 등 논란이 많다.
학자들은 경상도의 가야고분에서 전형적인 북방 기마민족의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 자체가 북방 기마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특히 금관가야는 흉노가 직접 한반도에 들어와 세웠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볼 때 흉노 속에 포함됐던 한민족의 일파가 서천하여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다른 일파가 동천하여 가야 등으로 성장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결혼 조건으로 로마의 절반 요구
가장 넓은 대국을 건설한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면 칭기즈 칸과 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아틸라(Attila, 395∼453)를 들 수 있다.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한 아틸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보다 20년 늦은, 훈족이 서유럽을 침공한 지 20년이 지난 395년에 문주크왕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틸라의 생애는 로마의 역사가 프리스코스와 요르다네스에 의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로마는 훈족에 공물을 주어 화친(和親)하면서 게르만족을 경계했다. 이에 따라 당시 외교 관례대로 아틸라는 410년경부터 서로마 황제 호노리오스가 수도로 삼은 라벤나 궁정에서 자랐다.
434년 왕위 후임자였던 삼촌 루가가 사망하자, 훈족의 전통에 따라 아틸라는 형 블레다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새 왕으로서 자신들의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기회를 노리던 이들은, 동로마가 훈족에게 보내야 할 공물의 납기를 번번이 어기자 435년 동로마로 진격했다. 이에 동로마는 공물을 두 배로 올리기로 약속하고 아틸라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어 아틸라는 서로마로부터 서고트에 대한 경찰권을 넘겨받는다. 이로써 훈족은 로마제국을 제치고 사실상 유럽의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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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게 말해 카리스마지, 결국 지배욕과 잔인성 아닌가. 침탈과 정복의 역사를 자랑스러워 해야 하나. 오히려 저런 호전적 유전자가 우리 민족 피 속에 잠재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선조가 정복한 영토 평수 따라 자긍심이 늘어난다면 자기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거다. 우리 민족은 남을 침략한 적이 없고 방어전쟁만 했다는 설이 더 내 자부심의 원천이었는데... '우린 영적이고 선한 민족'이라는 생각도 결국 또다른 자민족 우월주의고 선민사상일지도.
글을 쭉.. 읽어가다 마지막 댓글이 반전이네요 ^^;
대략 반전이었죠?^^ 오래 전에 제가 우연히 약간의 힌트를 발견했었던 (사학 지식이 얕은 저로서는 처음 알게됐던) 한민족의 고대 혈연에 어느정도 신빙성을 부여하는 흥미로운 글이라 퍼오긴 했는데, 다 읽고 나서 생각하니 이게 영적으로는 신날 일이 아니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