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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작은 영화'로 분류되는 김영남 감독의 <내 청춘에게 고함>이 지난 13일 필름포럼과 강변 및 상암CGV 등 6개관에서 개봉, 주말 서울지역 90% 이상의 객석 점유율을 기록했다. <내 청춘에게 고함>은 마케팅비의 제약으로 인해 제대로 된 홍보도 못한 데다, 블록버스터의 공습으로 스크린 확보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른바 '작은 영화관'을 중심으로 소규모 배급망을 탄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멀티플렉스 영화와는 다른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처럼 대규모 극장체인의 주류 상업 영화들과는 달리 특색 있는 영화들만을 상영하는 공간, 곧 '작은 영화 상영관'들이 늘고 있다. 전국 2천여 개 상영관 중 작은 영화 전용관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소규모지만, 이는 작은 영화 1만 관객을 위한 귀중한 맞춤형 공간이다.
77, 90, 85… 암호가 아니다. 이 숫자들은 인디영화나 작은 영화를 상영하는 통칭 '작은 영화 상영관'의 대체적인 좌석수다. 멀티플렉스 1개관 좌석수가 수백 석에 이르는 걸 감안하면 이는 턱없이 적은 좌석수다. 그런데 최근 이 작고 고요한 공간이 북적대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예술영화 전용관이라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주십시오.” 취재를 요청하자마자 한 극장 관계자는 거듭 ‘예술영화’라는 수식어만은 빼달라며 신신당부를 한다. “우리 극장은 절대 예술영화 전용관이 아닙니다.” 요지는 이렇다. 할리우드영화, 메이저 제작사의 영화가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곧 예술영화는 아니다. 예술영화라는 것이 꼭 흥행과는 무관한 영화를 일컫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멀티플렉스에서 접하기 힘든 좋은 영화들, 대형 배급망을 타진 못했지만 눈여겨볼 만한 작품들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인디영화, 작은 영화이고 이들을 선별 상영하는 공간이 '인디영화 전용관' ‘작은 영화 상영관’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1만 관객'을 대상으로 한 '작은 영화'들만의 시장은 작년부터 끊임없이 화제가 되어왔고, 작은 영화는 대한민국 영화시장에서 하나의 독자적 입지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최근 들어 작은 영화들이 이토록 관객들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뭘까. 작은 영화의 미덕, 그것은 그 흔한 홍보에 열 올리지 않아도 입소문만으로 1만 명을 모을 수 있는 힘, 평론가들만 치켜세우는 작품성이 아니라 관객들이 수긍할 만한 상업성까지 고루 갖춘 특성을 가리킨다. 곧, 멀티플렉스 상업 영화와는 달리 작은 영화들만의 각기 다른 개성, 작품 자체의 경쟁력이 그 어느 곳보다 맹렬하게 경쟁하는 곳이 바로 작은 영화들만의 세계인 것이다. 만일 영화 한 편이 이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다면 할인카드의 유혹이나 찾아가기 불편한 영화관 위치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작은 영화를 찾는 관객들은 그저 시간이 나기 때문에 영화관에 들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영화 위주’로 자신의 시간을 재배열한다.
작은 영화 상영관 명동 CQN에서 <린다린다린다>를 관람한 직장인 박기용 씨는 <박치기!> 관람 후 이번이 두 번째 CQN 방문이다. 집 근처 일산의 극장을 마다하고 그가 명동에 위치한 CQN을 찾는 이유는 CQN 단독상영작을 보기 위해서다. 아직 인지도가 약한 CQN은 이렇게 특화된 작품으로 관객들의 관심을 하나둘 모으고 있다. 최근 독립 애니메이션 <호박전>을 단독 상영한 남산 서울애니시네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호박전>을 계기로, 서울애니시네마를 미처 알지 못했던 관객들이 극장을 찾았으며, 단체관람객도 부쩍 늘었다. 이처럼 누구나 한번 알게 되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작은 영화의 특징이다.
CGV강변 이성준 슈퍼바이저는 “원래 작정하고 작은 영화를 보러오는 관객도 있지만, 다른 영화를 보러왔다 우연히 보고 만족해 다시 전용관을 찾는 관객이 늘고 있다”며 멀티플렉스 내 인디영화 전용관의 효용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한편 스폰지하우스나 시네큐브 등은 확고한 극장 브랜드로 관객의 지지를 얻고 있다. 최근 에릭 쿠의 <내곁에 있어줘>를 3달간 교차 상영한 시네큐브의 경우 초반 CGV, 시네코아 등에서 상영할 때보다 장기상영 후 관객이 배로 늘어나는 경험을 했다. ‘에릭 쿠의 <내곁에 있어줘>'보다 ‘시네큐브에서 보는 <내곁에 있어줘>’라는 인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같이 극장 자체를 브랜드화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작은 영화관들이 살아남는 길이기도 하다. 최근 종로에 이어 압구정에 2호점을 개관한 스폰지하우스는 바로 극장 브랜드를 염두에 둔 온라인 커뮤니티를 적극 활용한다. 회원 신청을 하면 누구나 극장 상영작에서부터 감독, 배우와의 만남 등의 이벤트, 상영작 관련 DVD, 서적 등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다양한 혜택도 얻을 수 있다.
물론, 작은 영화관들의 살림은 그리 녹록치 않다. 극장 이미지 때문에 기밀이라며 최소관객수를 밝히길 꺼려한 한 극장관계자는 관객들의 선별 태도가 아직은 넓지 않다고 말한다. 유럽의 클래식한 영화들을 비롯, 일본 화제작들 일부가 작은 영화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반면, 아직까지 한국 저예산 영화에 대한 선택은 미미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작은 영화관을 또 하나의 상업적 공간으로만 활용하려는 데 대한 내부적 성찰도 이어진다. 배우 등 일부 자극적 요소 위주의 작품 선정, 화제작 위주의 상영에만 급급하다 보면 결국 관객들이 발길을 돌릴 것이란 얘기다. 서울아트시네마 김수정 사무국장은 최근 멀티플렉스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반대로 극장들이 살길을 찾아 작은 영화관을 운용하는 측면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영화를 통한 이윤추구보다 문화적 경험과 바탕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작은 영화관의 의무도 수반되어야 한다”며 쓴 소리를 전한다. 협소한 공간이나 상영 시스템 문제도 작은 영화관들이 고스란히 안고가야 할 숙제로 남겨져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관심 속에 작은 영화관의 진화가 점점 더 기다려지는 것은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화 자체로부터의 만족도에 덧붙여진 또 하나의 문화, 작은 영화 상영관에선 우리 시대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또 다른 희열이 넘실대고 있다.
사진 이휘영, 김병준, 김선아
이화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