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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46코스 제2부
관음포 이순신 순국공원-구포미산-월곡마을-감암항-충렬사-남해대교-노량육교
20220112
1부에서 이어짐
1.노량해협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관음포펜션을 지난다. 고개를 넘으면 고현면 차면리다. 남파랑길 46코스는 남해군 서면 중현리 회룡마을에서 출발하여 남해대교를 건너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남해대교 교차로 육교 옆 해안도로에서 끝난다. 지금까지 남해군 서면 중현리(회룡마을, 중현마을), 서면 정포리(우물마을), 고현면 포상리(선원마을, 천동마을), 고현면 대사리(언머리마을)를 거쳐, 이제 고현면 차면리 순국공원으로 향한다. 남은 구간은 고현면 차면리(차면항, 이락산), 설천면 덕신리(구포미산, 월곡마을), 설천면 노량리(감암항), 남해대교를 건너는 것이다.
이순신 순국공원은 크게 관음포광장과 호국광장으로 구분된다. 관음포광장 앞길을 따라 걸으며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 입구에서 안내도만을 살피고 그냥 통과한다. 예전에 와봤던 곳이고 시간에 쫓겨 통과할 수밖에 없다. 이순신 순국공원은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을 제외하고는 모두 최근에 새로이 조성한 곳이다.
거북선 모형의 이순신영상관을 지나 호국광장 '순국의 벽'으로 향했다. '순국의 벽'은 노량해전의 내용을 대형 아트타일 벽화로 재현해 놓았다. 그 벽 중앙의 '칼의 빛' 공간으로 들어가면, 보물 제326호로 지정된 이순신 장군의 칼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칼의 빛' 영상관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벽에 기록하여 몇 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충무공 이순신'의 기록들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관음포를 바라보는 호국광장 끝에는 이순신 장군이 조선 수군을 진두지휘하는 이순신 순국공원 상징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락산 방향으로 관음포 해안을 돌아나가면 해안에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글판들-구국희생 정신, 백의종군 정신, 공도(公道)청렴 정신, 효제충의 정신, 공명정대 정신, 필사즉생 정신, 신상필벌 정신, 유비무환 정신, 어적보민(禦敵保民, 적과 싸우면서도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보호) 정신-이 설치되어 있다.
이락산 임도로 올라서서 뒤돌아보면 '관음포 이충무공유적' 곶(串)과 오늘 아침에 그 자락을 걸어온 망운산이 멀리서 오후의 햇살에 은빛으로 반짝인다. 이순신 명언이 적힌 글판들이 이어지고 대숲 임도를 벗어나면 오른쪽으로는 녹두산 아래 차면마을이 살폿하게 자리잡고 있다. 왼쪽 바다 방향으로는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하동화력발전소와 그 뒤로 멀리 지리산 앞 산줄기들이 들어온다.
임도를 계속 따라가면 남해대로로 나가는 지점에 이르러 남파랑길은 왼쪽으로 꺾어 임도를 따라간다. 고현면 차면리에서 설천면 덕신리로 넘어가는 구포미산으로 들어가 편백숲을 통과하여 월곡마을로 내려갔다. 월곡마을을 빙 돌아서 바람이 거칠게 부는 해안공원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주민들은 보이지 않고 고양이 녀석들이 어슬렁어슬렁 기웃거린다. 바람이 무섭게 불어대서인지 녀석들은 농가의 햇빛 따스하게 내리쬐는 담벽으로 가서 가지런히 배를 땅에 붙인다.
월곡마을 고개를 넘어 월곡해안으로 나갔다. 노량해협과 하동의 금오산이 멋지게 들어온다. 그리고 맞은편의 설천면 노량리의 감암항과 노량대교가 손짓한다. 노량해협 건너편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의 신노량항이 해안을 동그랗게 돌아가며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월곡해안을 빙 돌아서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감암항으로 들어섰다. 아낙들이 해산물을 파는 노점들이 늘어서 있다. 남해군수협 감암위판장과 감암회관을 지나 노량해협의 노량대교와 남해대교를 지나 노량유람선 매표소 앞에서 남해바래길 14코스 '이순신호국길'은 끝나고 남파랑길 46코스는 왼쪽 위로 올라가 남해대교를 건너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남해대교 교차로에서 끝난다. 이곳에서 남파랑길을 벗어나 남해 충렬사를 참배하고 되돌아와서 남해대교를 건넌다.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서 남해대교로 노량해협을 건넌다. 남해군 서면 정포리 우물마을 출신의 고두현 시인의 작품 '해금(海琴)에 기대어-노량해협의 밤'이 생각났다. 비록 밤은 아니지만 1박2일로 길게 걸어온 남해바래길을 끝내고 노량해협을 건너는 마음에 해금 소리가 울려오는 듯하다. 물굽이 치는 아픔의 소리가 마구 쿵쾅이는 듯하다. 끝없는 슬픔의 깊이, 상처에 소금 적시며 걸어온 길, 그 슬픔과 상처 위에 미래의 희망을 담은 물결소리가 해금의 소리로 들려온다. 노량해협은 물살 센 긴 고통을 넘어가는 것 같다.
그리움 깊은 밤엔/ 해금을 듣습니다./ 바다 먼 물소리에/ 천근의 추를 달아/ 끝없이 출렁이는 슬픔의 깊이/ 재고 또 잽니다.//
유난히 풍랑 많고 한류 찬 물밑 길/ 상처에 소금 적시며 아득히 걸어온 그대/ 물살 센 한 생애가/ 이토록 쿵쾅이며/ 물굽이 쳐 아픕니다. - 고두현(1963~)의 '해금(海琴)에 기대어-노량해협의 밤' 전문
*시인의 말 : 해금(海琴)은 '바다의 거문고'를 의미하는 조어. 전통 악기 해금(奚琴)과도 통한다.
남해대교를 건너며 동쪽을 바라보면 사천시 서포면 비토리섬이 가까이 있고 바다 건너편에는 사천시 와룡산과 주산이 또렷이 보인다. 거세게 불어대는 바람에 남해대교에 돛처럼 달린 '2022년 남해군 방문의 해' 깃발은 펄펄 끓어오르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삶의 역동하는 소리처럼 힘차게 울린다.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남해대교 교차로를 지나 노량육교 옆 해안도로 입구에 남파랑길 47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이곳에서 길게 걸어온 남파랑길을 끝낸다ㅏ
해안도로를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노량해안 언덕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의 노량 앞 바다와 관음포 앞을 내려다 보고 있다. 그가 순국한 지 423년 세월이 흘렀다. 그의 정신은 아직도 이곳에 남아서 겨례의 마음을 바로잡아 준다. 충무공의 동상 아래 해안은 남해섬으로 유배가는 유배객의 나루터였다고 한다. 나룻배에 부딪히는 물방울이 이슬방울로 보였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노량(露梁)'이 되었다고 설명안내판에 적혀 있다. 그 이슬 같은 물방울은 눈물방울로 흘렀을 것이다. 남해섬으로 유배가는 자암 김구 선생의 마음과 그로부터 79년 뒤 노량해전을 진두지휘한 이순신 장군의 마음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하나일 것이다.
2.걸은 과정
이락사와 첨망대까지 가고 싶었지만 시간에 쫓겨 그냥 진행한다.
노량해전의 내용을 대형 아트타일 벽화로 재현했다.
조선 수군을 진두지휘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
관음포 해안에는 구국희생 정신, 백의종군 정신, 공도(公道)청렴 정신, 효제충의 정신, 공명정대 정신, 필사즉생 정신, 신상필벌 정신, 유비무환 정신, 어적보민(禦敵保民, 적과 싸우면서도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보호) 정신 등 충무공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글판들이 설치되어 있다.
왼쪽 구포미산 방향으로 진행, 이곳이 고현면 차면리에서 설천면 덕신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듯
바람 몹시 부는데도 강태공은 노량 바다에서 낚시질에 여념이 없다.
남파랑길 46코스는 왼쪽 위로 올라가 남해대교를 건너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남해대교 교차로에서 끝난다. 이곳에서 남파랑길을 벗어나 남해 충렬사를 참배하고 되돌아오기로 한다.
남해 충렬사 참배
내부를 관람하지 않고 충렬사 앞으로 진행
위당 정인보 선생이 쓴 충렬사碑 - 로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니라
남해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노량충렬사라고도 한다.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 ‘충열’이란 현판을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 왔으며 인조 때 지어졌다. 충무공이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한 때 이곳에 모셔졌는데 인조 10년(1632) 유림들이 옛 터에 작은 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최초의 사당이다.
충무공이 순국한 지 60년이 되던 효종 9년(1658)에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다. 그 후 현종 4년(1663)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려준 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기록한 '충무이공묘비'가 사당 곁에 있으며, 비문은 현종 2년(1661)에 송시열이 썼고, 1663년에 박경지 등이 세운 것이다.
옛날에는 이 사당 곁에 호충암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화방사의 승려 10명과 승장 1명이 번갈아 와서 사당을 지켰다고 한다. 또한 공이 죽은 후 자운이란 승려가 공을 사모하여 쌀 수백섬을 싣고 와서 공을 위해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자운은 원래 충무공의 밑에 있던 승병이었다. 충렬사는 충무공의 노량 앞 바다를 지키고 있는 수호신의 사당이라 할 수 있다. 경내에는 비각·내삼문·외삼문·관리사 등이 있고 사당 뒤의 정원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임시 묻었던 자리에 묘가 남아 있으며, 1948년 정인보가 쓴 충열사비가 있다.
-문화재청
충무공의 5대손 이태상이 진주병마사로 재직 중 건립했다. 헌관들이 제를 올리거나 준비하는 재실(齋室)인 듯
'하늘을 메우고 해를 목욕시키다' 위대한 공훈을 세운 것을 비유하는 말이라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비문 머리에 '統制使贈諡忠'(통제사증시)까지 적혀 있다. 1660년 우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비문 머리에 武李公廟碑(무이공묘비)가 새겨져 있다.
1633년 남해인 김여빈과 고승후가 한 칸짜리 초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자 현령 이정건이 충민공비를 세웠다. 1643년 충무공 시호가 내려지고 1658년에 사당을 신축하면서 충민공비를 매몰하였다. 충민공비는 1973년도 사적 재정비사업을 하면서 발견 다시 세웠다.
충렬사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충렬사 참배를 마치고 충렬사를 내려오며 남해를 예찬한 노래 '화전별곡'을 지은 김구 선생의 유허비를 살핀다.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의 한 사람인 자암 김구 비(自庵 金絿 碑). 김구는 중종 때 조광조에게 발탁되어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이곳 남해에서 1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남해 유배 중에 지은 경기체가 '화전별곡'이 있다.
광산 김씨 24세로 휘는 구(絿), 호는 자암(自庵), 시호는 문의공(文懿公), 조선 4대 명필. 문경공 에몽(禮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공 성원(性源)이고, 아버지는 대흥현감(大興縣監) 계문(季文)이며, 어머니는 이겸인(李兼仁)의 딸이다. 거주지는 서울 인수방(仁壽坊)이었고, 충청도 예산에도 근거지가 있었다. 벼슬은 홍문관 부제학으로 중종 14년(1519년) 삼암(정암 조광조, 충암 김정, 자암 김구)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남해에 유배되어 1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곳에 공을 추모하여 세운 유허비이다.
일찍부터 성리학 연구에 전념해 학문 실력이 조광조(趙光祖), 김식과 겨눌만했다 한다. 예산의 덕잠서원(德岑書院)과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암집 自庵集≫ 유품으로는 ≪자암필첩 自庵筆帖≫·≪우주영허첩 宇宙盈虛帖≫과 예산 소재의〈이겸묘지李謙墓誌〉 등이 있다. 또 단가 3수와 〈화전별곡 花田別曲〉이 그의 문집에 전한다.
경상남도 남해군 보호문화재 제2호라고 한다.
머리에 自庵金先生謫廬遺墟追慕碑(자암 김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라고 새겨져 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과 '戒我萬年子孫'(계아만년자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이 새겨져 있다.
충렬사 관람을 마치고 되돌아오니 25분이 소요되었다. 이곳에서 남파랑길을 계속 이어간다.
앞쪽은 사천시 서포면 비토리섬인 듯. 맨 뒤 중앙의 산봉은 사천시의 와룡산과 주산(오른쪽)
노량육교 옆 해안도로 입구에 남파랑길 47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해안 언덕에 노량 앞 바다를 바라보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다.
노량해전의 노량 앞 바다와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관음포 앞이 내려다 보인다. 바로 아래는 남해섬으로 유배가는 유배객의 나루터였다고 한다. 나룻배에 부딪히는 물방울이 이슬방울로 보였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노량(露梁)'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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