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고 울며 사랑하노라니…
- 부산 원도심 문화사랑방 뒷이야기(6)
화려한 등장, 쓸쓸한 퇴장…목마화랑다실
지난 1970, 80년대는 ‘광포동’으로 나가야 문화시민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책과 레코드를 사고 영화를 보고 다방에서 커피 한 잔 마셔야 문화시민인양 어깨를 으쓱했던 것이다. 1972년 1월 광복로가 최초의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됐는데, 이른바 ‘문화예술 거리’의 시작이었다. 광복동에는 한 집 건너 하나 꼴로 다방이 있다시피 했는데, 특히 60년대의 음악다방들에 뒤이어 70년대 중반에는 화랑다실이 등장하여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각광을 받았다.
1974년 여름, 광복동 외국서적골목 입구 모퉁이 건물 2층에 부산 최초의 개인화랑인 ‘목마木馬화랑다실’이 문을 열었다. 전시작품을 돋보이게 한 벽면과 특수조명 시설로 일반 다방과 다른 품격을 갖춘 데다 고전음악의 아름다운 선율도 넘쳐나 단번에 예술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때까지 주로 미술작품전이 열리던 광복동 ‘보리수’나 ‘희’다방의 전시 환경과 비교하면 큰 변화였다.
이 화랑다실의 주인은 화가도 화상도 아닌, 시인 임명수林明秀여서 더욱 화제가 됐다. 그는 부산대 재학생이던 1963년 제1회 부대문학상 시부문 당선하는 등 시작활동을 해왔으나 중앙문단의 등단 절차 밟기를 거부, 부산에서만 시를 발표해왔다. 1978년 주위 인사의 성화에 못 이겨 『시문학』 천료 과정을 밟기는 했지만, 그는 사회의 인습이나 관습에 억매이지 않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삶을 구가했다.
목마화랑다방을 열기까지 임명수는 직장에서 일하는 대신 음악을 광적으로 사랑하면서 시를 쓰고, 시와 음악,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를 나누고 화랑과 공연장을 찾는 것이 생활의 전부라고 할 만큼 ‘직장’을 감당할 수 없는 체질을 타고 났는지 모른다. 그는 ‘부산시보’ 창간작업에 4개월여 참여했는데, 그것이 직장생활의 전부였다. 물론 그는 교복점이나 유명제과회사 대리점을 열기도 했지만, 손해만 보고 곧 문을 닫은 전력이 있다.
임명수는 복잡하고 계산적인 이 세상의 시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게는 만인이 다정한 이웃이요, 친구였다.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도 상냥하게 대화를 나누는 등 그는 언제나 다정다감한 인품의 ‘낭만 시인’이었다. 그의 얼굴 표정에는 어떤 가식도 억지도 없다. 그저 순진무구한 소년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래서 시인 임명수는 나이를 먹지 않는 ‘홍안의 소년’으로 불리기도 했다.
- 최화수 논픽션집 『양산박』, 지평. 1990년.
목마화랑다실은 개관기획전으로 ‘김종식 서양화 초대전’을 열었다. ‘목마’ 이전에도 부산에 두세 개의 화랑이 있었지만, 미술작품전은 주로 일반다방에서 열렸다. 화랑은 대관료를 내야 하는데 화랑다실은 공짜인데다 예술인과 예술애호 고객들이 항상 넘쳐나는 것이 금상첨화였다. ‘예술인들의 쉼터’를 표방한 목마화랑다실은 문을 열고부터 6개월 동안에 19차례의 작품전이 열리는 큰 성과를 올렸다.
목마화랑 주인은 임명수 시인이었지만, 계산적인 문제는 그의 부인 H여사가 도맡아서 했다. 한국은행에 오래 근무한 재원으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그녀는 계산이 질색인 임 시인의 부족함을 잘 메워주는 배우자이기도 했다. 목마화랑다실은 차를 마시려는 일반 손님들도 많이 찾았는데, 사람들과 어울려 얘기 나누기를 좋아하는 임 시인이 얼굴마담(?) 역할을 하고, H여사는 주로 계산대를 지켰다.
1974년 목마화랑다실은 시쳇말로 대박을 터트려 단박에 부산문화예술계의 사랑방이자 명소가 되었다. 그 다음해 봄에는 목마에서 두어 집 건너 원다방이 있던 자리에 공간화랑다실이 문을 열었다. 서울신문 미술기자로 일하다가 건강 관계로 낙향해 있던 신옥진(辛沃陳)이 차렸다. 목마와 공간은 같은 화랑다실이지만 운영방식은 약간 달랐다. 목마가 문화계의 마당발인 주인 임명수의 안면으로 많은 전람회를 유치했다면, 공간은 전람회 횟수보다 그 내용에 방점을 찍는 자체기획전에 비중을 두었다.
- ‘화가 주정이의 부산 미술이야기’, 부산일보, 2008. 1. 30.
목마화랑다실은 미술작품전만 열었던 것이 아니다. 주인이 시인이었으므로 당연히 시인이나 시동인들의 시화전도 열렸다. 요즘의 현실은 시화전이 학생들의 학예회 메뉴로 전락해버렸지만, 그 때는 이름난 기성 시인들도 시화詩畵를 만들어 전국을 순회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발표 지면이 없다시피 했고, 익명의 독자와 만나거나 죽이 맞는 글동무를 사귈 수 있는 등으로 시화전이 많이 선호되었다.
1975년 어느 날, 대학을 졸업하고 방위병으로 복무하던 강영환은 동아대 출신의 시 동아리 ‘자정동인’의 일원으로 목마화랑다실에서 시화전을 열고 있었다. 시화전을 보러 갔던 이윤택(李潤澤)은 실내를 빼곡히 채운 자정동인의 시를 일별한 뒤 주최 측에 다가가 대뜸 이렇게 물었다. “강영환씨가 누구요?” 강영환과 이윤택은 이렇게 만났고, ‘열린시’ 동인의 불씨는 거기서 지펴졌다. 그로부터 이런저런 과정을 겪은 끝에 1980년 1월 말 강영환, 엄국현, 이윤택, 박태일의 ‘열린시’ 동인이 탄생한다.
- ‘시인 최영철의 부산 문학이야기’, 국제신문 2005. 9. 12.
‘목마시동인’의 생일은 1976년 2월 27일이다. 동인은 처음 강남주(姜南柱), 이문걸(李文杰), 임명수, 이승하, 이아석(李亞石), 원광(圓光) 등 6명으로 출발했다. 첫 이름은 ‘핵(核)’이었다. 그러나 어감에서 오는 경직성 때문에 다시 상의해서 ‘목마(木馬)’로 결정을 보았다. 이 목마라는 이름은 동인들이 처음 모임을 가졌던 장소가 임명수 동인이 경영하던 광복동의 목마화랑다실이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 원광, ‘목마 시동인지의 발자취’
목마화랑다실은 1년 뒤 동광동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명문화랑다실이 들어선다. 목마, 공간, 명문화랑다실은 부산 원도심을 ‘미술의 거리’로 불리게 할 만큼 많은 미술작품전을 열었다. 하지만 ‘명문’은 76년 말, ‘목마’는 78년 문을 닫았다. ‘공간’은 77년 잠시 쉰 뒤 광복동에 ‘다실’ 이름을 뺀 ‘공간화랑’을 개관한다. 그로부터 용두산 둘레에 전문화랑이 잇달아 등장, 항상 10개 화랑 이상 문을 열었다.
목마화랑다실이 문을 닫으면서 임명수 시인 또한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그의 아내와 가족들도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런저런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임 시인은 모습을 감춘 지 1년을 훨씬 더 넘기고서야 슬그머니 나타났다. 모든 의문도 함께 풀렸다. 그는 자기의 모호한 생활자세에 절망한 부인과 이혼을 하고, 그 충격과 실의를 견디고자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재산을 아이들과 부인에게 양보해버린 그는 빈주먹뿐이었다. 잠자리는커녕 당장 끼니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 ‘신태범의 부산문화 야사’, 국제신문 2001, 3.
‘광복동 백작’과 ‘백혈병 천사’의 사랑
부산에서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며 피난생활을 하던 화가 이중섭李仲燮은 1953년 7월 구상具常 시인이 얻어준 선원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6일간 체류한 뒤 귀국했다. 그는 그해 11월 부산에서 통영으로 이주했는데, 이듬해 5월 박생광朴生光 화백 초청으로 진주로 옮겨간다. 두 화가는 함께 야외 사생을 다녔는데, 5월말 이중섭은 진주 카나리아다방에서 작품 10여 점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때마침 진주에 갔던 부산의 사진작가 독보 허종배獨步 許宗培가 이중섭의 초상을 찍었다.
「담뱃불 붙이는 이중섭」, ‘불멸의 20세기 초상사진’은 이렇게 탄생했다. 혹독한 피난생활의 고난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천재화가의 고독한 내면을 깊이 담아낸 작품에 만인이 탄성을 자아냈다. 이 사진은 1967년 『공간』 10월호에 처음 발표된데 이어 1972년 3월 현대화랑 간행 『이중섭 작품집』 속표지에 실렸다. 또한 2014년 출간된 돌베개의 『이중섭 평전』 표지사진이 됐는데 ‘인물사진 걸작 중 걸작’으로 사진작가 허종배의 진가를 입증한다.
독보 허종배는 광복동의 이른바 ‘베레모 4인방’ 가운데 1명이다. 불문학자 양병식梁秉植, 독립운동가 한형석, 사진작가 허종배, 시인 정영태 4명 중에서 눈만 뜨면 광복동과 남포동을 누비고 다니는 이는 양병식, 허종배 두 사람이었다. 거구의 양병식은 한손에 원서를 들고 다른 한손에 지팡이를 든 채 폼 나게 걸어다녔는데, 허종배는 체구가 작고 몸이 가벼워 광복동 거리를 재빠르게 헤집고 다녔다.
독보 선생은 날이면 날마다 광복동 거리를 쏘다녔다. 그는 희다방, 보리수다방, 로댕다방, 백조음악다실에 앉아 있다가 어느새 전화국골목의 카메라 수리가게에 나타났고, 또 태종대 자갈마당이나 범어사 계곡에서 찰칵대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어깨에 라이카(독일산 카메라)를 둘러메고 또박또박한 걸음걸이로 광복동 거리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누비고 다녔다.
- 판화가 주정이 산문집 『적막』. 도요, 2009.
허종배는 바람처럼 살다 간 사진작가다. 그는 아무 할 일도 없이 나날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눈만 뜨면 광복동과 남포동을 빠른 걸음으로 쏘다니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는 이 술집 저 술집을 기웃거린다. 아는 얼굴이 있으면 문을 열고 들어가 앉는다. 누구나 그를 반긴다. 가진 것 없으나 너무나 소탈하고 사 됨이 없는 그의 표정과 말투에 호감을 갖기 때문이다.
-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그 사람들』
독보는 1914년 경남 삼천포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통학교 시절 생일선물로 받은 카메라에 홀딱 빠져버린 그는 일본 나라(奈良) 오리엔트 사진예술전문학원에서 수학했다. 귀국하여 삼천포에서 사진관을 열고 작가의 꿈에 부풀었으나 첫 부인과 이별하는 아픔을 겪는다. 그는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창립된 한국사진작가협회 창립전 특선 영예를 안은 것을 계기로 훗날 부산에 정착하게 된다.
독보는 부산에 정착했으나 여전히 이렇다 할 수입이 있는 생계를 꾸리지 못했다. 더구나 여간해서 타협을 모르는 성품이라 기성 사단(寫壇)이나 그 인맥들과도 상종하길 꺼려했다. 그의 처신이 그토록 제한적이고 고고하다 보니 절로 그의 주위는 쓸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투대로라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다 작가냐” 하는 냉소주의가 한 시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60, 70년대의 사단 풍경은 작가적 양심과는 달리 개인적 실리와 명예 얻기에 급급하여 꼴불견이 많았던 시절이다.
- 시인 김규태의 위의 책.
독보는 기존 사단이나 시류와는 무관하게 외롭게 자기세계를 고집해온 사진작가였다. 그는 평생을 무직자로서 사진기 하나에 자기를 걸고 살아왔다. 사진을 눈으로 찍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찍는다는 그는 1962년 프랑스 국제사진살롱에 입선하는 등 작가적 독창성이 높이 평가받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늘 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는 자기의 어려운 사정을 조금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독보 선생은 항상 말쑥한 양복 차림에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담배를 비스듬히 문 채 카메라를 옆구리에 끼고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광복동과 남포동을 활보해 ‘광복동 백작’이라 불리기도 했다. 기실 그의 옷이나 베레모, 파이프 담배 등은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한 친구가 제공한 것이었다.
최선희(가명)라는 천사가 그 앞에 나타난 것은 1983년 가을, 그가 칠순에 접어든 해였다. 무역회사 사원으로 처음 사진을 배우고 싶다며 다가온 소녀는,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폈다. (중략) 그러던 중 소녀는 나타날 때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 홀연히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만 3년만의 일이었다. 놀랍게도 소녀는 시한부 생명의 백혈병 환자였다.
- ‘신태범의 부산문화 야사’, 국제신문 2001. 7. 1.
독보가 말년에 사진작가 지망 소녀와의 만남을 이어간 것은 청빈과 무소유로 일관한 그에게 마지막으로 타오른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불꽃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심지어 제자들과 동료들도 의혹의 눈길을 보내며 수군거렸고, 차츰 그들을 경원하기까지 했다. 독보는 소녀가 숨지자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견고한 자기 껍질 속에 파묻혀 생애의 마지막을 보냈다.
독보는 대연동 못골시장 건물에 딸린 2층 다락방에서 혼자 기거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병마까지 덮쳤다. 시장 해장국집 아주머니가 새벽마다 거르지 않고 오던 그가 나타나지 않자 거처로 찾아갔다. 그녀는 몸져 누워있는 독보를 발견하고 입원을 시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화가 주정이는 부산일보 박정인朴政仁, 이진두李鎭斗 기자와 아동문학가 강기홍姜基洪과 역할 분담을 하여 ‘허종배 돕기전’을 추진한다.
88년 6월 22일 광복동 유화랑에서 열린 ‘허종배 돕기전’은 많은 문화계 원로들이 발기인이 되고 40여 명에 이르는 화가들이 작품을 희사했다. 전람회가 끝나고 주정이 등은 유족에게 성금에다 묘비 종자돈까지 전했다. ‘광복동의 파수꾼’이자 ‘광복동의 바람’이었던 독보는 그해 세상을 떠났고, 금강공원에는 부산 첫 ‘허종배 사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시인 김규태, 비석 디자인은 조각가 문신文信 작품이다.
청추회, “가을도 푸를 수 있지 않은가”
2003년 10월, 부산의 문화계 원로인사들이 동인지 『청추靑秋』 창간호를 펴내 눈길을 모았다. ‘청추회’는 부산 원도심 문화사랑방을 한결같이 지켜왔던 원로 문화인사들의 모임으로 50년대 말에 시작된 연륜이 무려 반세기에 이른다. 하지만 ‘가을도 푸를 수 있지 않은가’란 뜻을 지닌 ‘청추회’란 이름은 동인지 발간 1년 전에 지었다. 이들은 그 오랜 세월을 모임 이름 따위는 생각조차 않고 어울려 왔다.
청추회 멤버는 부산 원도심 문화사랑방, 특히 목로木爐에서 출범한 오랜 주붕酒朋들로 그 면면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부산 문화를 가꾸고 이끌어온 문화 주역들이기도 하다. 동인 문집 『청추』를 창간한 청추회 회장 구철회(의사)는 “시인 묵객, 의사, 교육자, 언론인이 한데 비빔으로 어울려 허물없이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참 아름다운 만남이었다.”고 흘러간 날들의 추억을 떠올리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30대의 만남이 70을 넘어서까지 이어진다. 우정에 금이 가는 일도 없이 청춘의 주흥(酒興)이 고희를 넘어서도 변치 않는다. 취중의 실수나 추태도 없이, 이런 만남과 술의 정취와 우정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노년을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이 부산에 있다. 그 얼굴들은 언론인, 교육자, 의사, 문인 등 다양하다. 이들은 처음엔 매일 만났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매주 목요일 만나다가, 이젠 격주 목요일에 만나고 있다. 만남의 장소는 광복동 남포동 중앙동 동광동 거리의 목로주점. 해질녘이면 만나서 주흥을 돋우며 세간사 인생사를 논하고 때론 거센 논쟁도 불사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 누구도 어떤 가치관을 강요당할 만큼 단순한 경륜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진두, ‘천수천안’, 불교신문 2003. 11. 26.
청추회의 역사는 곧 부산 원도심 문화사랑방 역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황량했던 저 1950년대 말, 부산에는 민주신보, 국제신문, 부산일보가 있었다. 이 3사 일간지의 문화부 기자들인 최계락, 최봉경崔鳳卿, 김규태, 송재근宋在根 등이 주멤버였던 ‘삼각회’가 시발점이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부산 문화인들이 ‘광포동’ 목로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낭만을 잉태했고, 크고 작은 여러 일들을 도모하기도 했다.
부산문화계의 어른들이자 쇠락한 중앙동의 마지막 낭만객들. 세속의 나이가 일흔을 훌쩍 넘기고 여든 줄에 들어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천연덕스럽게 청춘이라며 뽐내고 살아가는. 지금도 광복동 거리를, 중앙동의 대폿집 골목을 휘적휘적 순례하고, 돋보기 속의 원고지 칸 속에 당신의 가슴을 또박또박 새기고, 그걸 모아서 책을 엮어 펴내는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의 어른들. 당신들의 모임이 ‘청추회’이자 당신들의 가슴을 담아낸 그릇이 『靑秋』지이리라.
- 주정이, ‘부일시론’, 부산일보 2004. 6. 2.
청추회 멤버들은 부산 원도심 문화사랑방에서 술을 마시며 담론만 펼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큰 업적은 이들이 ‘낙동강보존회’ 탄생의 산파역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소설가 요산 김정한樂山 金廷漢과 함께 수많은 현장 답사를 다니며 낙동강을 사랑했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최계락 시비詩碑, 유치환 시비를 세웠고, 2003년 3월에는 을숙도문화회관 화단에 박현서 시비를 세웠다. 그래서 청추회는 단순한 술 모임이 아니라 선비의 얼과 같은 게 묻어있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1977년 광복동 중심가에 성형외과의원을 열었던 구철회具鐵會는 청추회의 오랜 모임을 이끈 사실상의 주역이라고 할 만하다. 서울대 의대 출신의 그는 의사였지만 부산의사문우회장이자 부산수필가협회원으로 활동한 수필가였다. 또한 그는 1970년 기술등반 전문산악회 부산알파인클럽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1980년에는 대한산악연맹 부산시연맹 회장으로 선임되어 4년 동안 부산산악운동을 이끌었다.
구철회는 취미가 다양하여 수석壽石도 무척 좋아했는데 취미 차원을 넘어 전문인 경지에 이르러 한국수석연합회 부회장과 부산연합회장을 맡았다. 성형외과 원장으로서도 인기가 높아 그는 병원에서 격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루 종일 온갖 미녀들의 시중(?)을 들다가 산수경석 山水景石과 마주앉으면 산정을 넘나드는 바람소리와 계곡물소리까지 들리는 듯하여 피로가 말끔히 풀린다.”고 했다.
청추회 멤버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민간인들로 구성된 환경단체인 ‘낙동강보존회’의 탄생 산파역을 했다. 1978년 창립될 당시는 군사정권의 일방통행식 강권으로 시민사회 활동에 상당히 제약이 있었지만, 낙동강 하구둑 건설을 저지하고자 모임을 결성하여 정부에 건의문을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청추회 멤버 김규태 시인이 ‘낙동강보존헌장’을 썼으며, 참여 회원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구철회는 1987년 낙동강보존회장을 맡았는데, 당시 인기 신사복 ‘캠브리지멤버스’의 신문광고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그는 광고료를 받는 대신 이 신사복의 부산지역 판매수익 1%를 ‘낙동강 살리기 기금’으로 내기도 했다. 낙동강보존회장을 맡아 다양한 캠페인 등을 벌여온 그는 “강변에서 어린이들이 미역 감고 물놀이하던 생명력이 넘치는 그 옛날의 낙동강을 꼭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청추회 핵심멤버였던 언론인들의 파워도 막강했다. 민주신보 이후 부산 양대 신문 문화부장들이 그 가운데 있다 보니 그들을 중심으로 ‘문화권력(?)’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모임 합류는 문화예술 각 부문의 엘리트로 인정받는 인사들만 가능했다. 그래서 이들이 누렸던 주붕 천하 세력은 대단하고 견고하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밉보였다가는 신문 지면에 이름조차 올릴 수 없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청추회는 청끼 있는 가을사람이 절로 모인 작은 공화국”이라 한다. 회원 글모음 ‘청추’ 첫 호에는 이 나이에 무슨 부끄러움이 있으랴 식의 진솔담백한 글이 있는가하면 정부시책에 일침을 가하는 것도 있다. “젊은 날 술에 취해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머리맡의 요강인줄 알고 깔고 앉은 게 아내의 머리통이었다.”가 있고, 담뱃값 올리기에 앞서 흡연 경고문의 ‘폐암 원인…’을 ‘발기부전’으로 하는 게 더 금연효과가 높아질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진솔하여 아름답고 여유 있어 부러운 청추. 그 청추를 지닌 사람들이 어디 부산에만 있으랴.
- 이진두, ‘천수천안’. 불교신문 2003. 11. 26.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는 우리의 몸짓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푸른 몸빛이 배어 있다. 그것을 제가끔 발견하고 가꾸는 것이 청추의 정신이다”고 선언했던 청추회원들, 하지만 가는 세월이야 어떻게 막으며, 나이 앞에 장사가 어디 있다던가. 너무나도 늦게 창간된 『청추』는 2005년 제3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청추회 회원으로 이름을 드날린 구철회, 김규태, 이창우李昌雨, 박응석朴應奭들도 그 사이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움직이는 주소록’ … 문화 전령사 영감님
국제신문 대교동 사옥 시절이던 1970년대 10년 동안 필자는 날마다 두 영감님과 얼굴을 마주쳤다. 신문사 안에선 ‘한글만 쓰기 운동가’ 오창은 옹, 신문사 밖에선 ‘문화 전령사 영감님’ 김상수金尙洙 옹이었다. 한글운동가는 부산 중심가 회사 사무실들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며 ‘한글만 쓰기’ 팸플릿을 나눠주었고, ‘문화 전령사’는 부산 원도심 다방과 술집을 쓸고 다니다시피 하며 전시회 소식 등을 알렸다.
한자나 영어를 섞어 쓰는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적지 않다. 그들에게 ‘한글만 쓰기’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운동을 50년 동안 줄기차게 펴오고 있는 이가 부산 동구 초량 3동에 사는 오창은 옹이다. 그의 나이 7순, 기력이 쇠진할 때도 되었지만, 그가 한글운동을 위해 하루 종일 부산의 거리와 기관단체를 찾아다니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는 27세 때 조선어학회의 출판물 보급을 맡으면서부터 오늘까지 오로지 ‘한글만 쓰기 운동’에 몸과 마음을 바쳐왔다.
- 최화수 논픽션집 『양산박』, 지평 1990.
그는 말과 글로써 한글만 쓰기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에 옮긴 것이 다른 이와 구별된다. 이른바 ‘한글파동’ 당시의 문교부장관이 1954년 10월 24일 경남고교 교정에서 강연을 할 때였다. 오창은은 장관 앞으로 다가가 “당신은 만고의 역적이다!”며 벼락같은 호통을 쳐 놀란 장관이 당황하여 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는 한글만 쓰기 진정서에 서명하지 않은 인사를 찾아다니며 혼내주기도 했다.
오창은과 정반대로 김상수는 언제나 눈 가장자리에 웃음을 달고 다니는 인자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두고 남과 싸워본 일도, 화를 내어본 일도 없는 그야말로 무골호인無骨好人이었다. ‘때묻지 않은 순수’가 그의 인품이자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는 낮 시간엔 주로 광복동 보리수다방에서 신문을 뒤적이며 문화계 인사들과 어울렸고, 네온이 켜질 저녁 무렵이면 남포동 대폿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광복동 입구 보리수다방에는 먼구름 한형석, 문화통 행정가 오재정(吳在正) 등이 앉아 청초(靑艸)의 한국화 군무(群舞)가 진짜 우리 것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청초를 앞에 두고 얘기하다보면 윤제(潤齊)가 왔다. 그는 모란 그림이 특이하다. 그가 모란을 그려놓으면 주위가 환해진다. (중략)
저쪽 자리 사람과 무슨 얘기가 끝났는지 김상수가 그제야 우리들 쪽으로 온다. 그는 조그만 캡을 쓰고 항상 겸양에의 너그러운 웃음을 담고 꾸부정한 허리로 이 다방 저 대폿집으로 구애없이 다녔다. 그럴 때의 그에게는 가방이 쥐어져 있었다. 그 속의 것은 문화계의 갖가지 소식이 스크랩된 것이었다.
- 최해군, ‘남포동 그 사람들’, 부산일보 2003. 9. 22.
1m57㎝의 작달만한 키에 언제나 마도로스 캡을 쓰고, 두툼한 큰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고 부산 광복동과 동광동을 총총걸음으로 다니는 그, 부산의 문화계, 특히 미술계 인사들은 모르는 이가 없는 김상수 영감님이다. (중략) 그가 하는 일은 부산의 문화행사 팸플릿과 안내장을 발송하기 위한 수취인 주소 성명을 쓰는 일이다. 그는 이 일을 40년 가까이 해왔고, 그의 손을 거쳐 간 안내장 팸플릿이 줄잡아 2백여 만 장에 이른다. 그는 문화행사를 알려야 할 사람들의 주소를 누구보다 많이, 또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의 수첩 속에 들어있는 주소록은 줄잡아 2천여 명에 이른다.
- 최화수 논픽션집 ‘위의 책’
김상수 옹은 붓글씨를 잘 쓰고 사인펜 글씨도 달필로 빠르게 썼다. 그는 자신의 명함도 일반명함 크기 용지에 손수 붓으로 주소, 성명, 전화번호 등을 적어 나눠준다. 그는 문화행사 안내장을 발송하는 일뿐만 아니라 문화계 인사들의 길흉사 자원봉사를 도맡아 했다. 그것이 그의 직업 아닌 직업이었다, “상수 영감님 있는 곳에 문화행사 있고, 문화행사 있는 곳에 상수 영감님 있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김상수 옹은 대구가 고향으로 1945년 대구에서 창간된 이름난 시동인 ‘죽순竹筍’ 의 산파역을 맡았던 문학도이기도 했었다. 당시 그는 시인 박목월朴木月, 이영도, 이윤수와 같은 쟁쟁한 인사들과 그 동인지를 창간한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피난행렬을 따라 혈혈단신 부산으로 옮겨왔다. 아미동에 거처를 마련한 그는 ‘광포동’에서 문화인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뒷바라지를 자청해서 도맡아 한 것.
김상수 옹은 부산으로 옮겨온 뒤에도 동인지 『죽순』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지 자신이 사는 아미동 뒷산에서 ‘죽순제(竹筍祭)’를 열기도 했다. 이 죽순제는 당시 대밭이 우거져 있던 아미동 뒷산에서 이른 봄 실제로 죽순을 따서 그것을 안주 삼아 문화예술인들에게 소주 파티를 열어주는 것이었다. 이 죽순제에 즐겨 참석했던 인사로는 소설가 이주홍(李周洪), 서양화가 양달석(梁達錫), 문학평론가 양병식들이었다.
- 최화수 논픽션집, ‘위의 책’
김상수 옹은 ‘문화 전령사’이자 ‘부산문화복덕방’으로도 불렸다. 그는 문화행사 안내장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문화계 인사들 근황이나 안부를 죄다 꾀고 있었다. 그에게 문화계 인사 아무개의 안부를 물으면 “일본에 한 달 전에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든가, “며칠 전에 대학병원에 입원했다”는 식으로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사진작가 ‘허종배 돕기전’이 열린 것도 그가 입원 사실을 알려 이루어졌다.
문화계에는 이런저런 말이 많기 마련이다. 뒤에서 헐뜯고 비방하는 것도 비일비재하다. 부산 문화계를 손바닥처럼 꾀고 있는 김상수 옹은 온갖 소문이며 떠도는 말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알음이 많았지만 누구를 헐뜯는 비방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김상수 옹에게는 제각각의 개성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문화계 인사 모두가 선인善人이었다”는 것이 한 소설가의 말이다.
시인 홍두표(洪斗杓)가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는 제 자신의 단칸방에서 손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가며 모셨다. 그게 그가 가진 희생적 인생관에서 오는 인품이었다. 바로 때묻지 않은 순수였다. 그가 어려운 고비에 이를 때마다 부산의 미술인들이 그를 위해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고 그 수익금으로 그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게 한 것도 그가 가진 폭넓은 인품을 기리는 정의(情誼)였다.
- 최해군, ‘남포동 그 사람들’, 부산일보 2003. 9. 22.
김상수 옹은 한때 남포동, 광복동에서 예술인들이 술을 마시고 가다가 불량배에게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하면 ‘문화 전령사’가 아니라 ‘구세주’ 역할도 했다. 당시 부산 밤거리의 주먹왕 박아무개가 그의 대구공업보통학교 동창이어서 그 덕을 본 것이다. 오랜 세월 단칸방에서 홀로 가난하게 살았던 그는 쉰 나이가 되어 옷가게를 하는 여인을 맞아들였다. 하지만 그토록 부지런했던 그이도 세월은 이겨내지 못하고 1998년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