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의 대한 시 모음
어머니 / 정한모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光澤)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이 광명을 몰아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로 다시 쓰린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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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이창건
할아버지 사셨을 적부터 어머님은 광주리 하나로
살림을 맡았습니다.
설움으로 얼크러진 머리를
손빗으로 가다듬으며
살림의 틀을 야무지게도 짜냈습니다.
봄, 여름은 푸성귀로
광주리를 채우고
가을, 겨울엔 과일로
광주리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그 솔껍질 같은 손으로
광주리 한 구석에
내가 기둥나무로 자라기 바라는
기도를 꼭 담곤 했습니다.
이제 내가 이만큼 자랐는데도
오늘 아침
어머님은
내 기도가 담긴 광주리를 이고
사립문을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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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김준래
봄-여름-가을-겨울 언제나!
어머니는 염색 기술자였습니다.
누이의 옷엔 치자꽃 붉은 열매로 물들여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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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박형준
낮에 나온 반달, 나를 업고
피투성이 자갈길을 건너온
뭉툭하고 둥근 발톱이
혼자 사는 변두리 아파트 창가에 걸려 있다
하얗게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나가버린,
낮에 잘못 나온 반달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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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그릇 / 정일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있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은 깨닭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은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은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 있도록 불러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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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법 / 박진환
어머니는 평생 우산을 받쳐들고 계셨다.
살아 계신 동안 어머니의 계절은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는 우산을 적시고 어머니는 늘 비에 젖어 계셨으나
우리는 한 방울도 비에 젖지 않았다.
무엇인가 비 아닌 다른 것이 우리를 적시고 있었다.
우산 속에서도 젖어 버린 그것은 눈물이었다.
비 대신 우리는 눈물에 젖고 눈물은 가슴에 스며 봇물 같은 것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요즘 종종 비에 젖는다.
우수보다 큰 아픔이 날 세운 못으로 가슴에 와 박힌다.
늘 어머니가 젖던 비일 듯싶다.
누군가가 내게 와 우산을 받쳐준다.
그리고는 양지밭까지 동행하다 돌아서 버린다.
내게는 우산이 없다.
비가 오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받쳐줄 아이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산으로 펼칠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눈물이 사랑임을 알 나이인데도 나는 눈물이 없다.
흠뻑 젖어보고 싶은 계절이다.
그것은 비를 기다림과 같아서 새삼 어머니가 그리울 뿐이다.
울고 싶다. 한없는 눈물로 울고 싶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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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귀로 / 박재삼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 오셨다
선반엔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 커녕
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는데
빛으로 못 갚는 땟 국물 같은 어린 것들이
방안에 제멋대로 뒹굴어져 자는데
보는 이 없는 것
알아주는 이 없는 것
이마 위에 이고 온
별빛을 풀어 놓는다
소매에 묻히고 온
달빛을 털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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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땅 / 공영구
내가 세상에서 태어나 탯줄을 묻은 땅
크면서, 기어다니고 걸어다니며
지렁이와 강아지와 함께 놀던 땅
이땅에서 누나는 파초도 장미도 접시꽃도 심었다.
감나무에 까치밥만 달려 있던 가을날
국화 향기만이 지독하게 깔려 있는 이곳에서
누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시집을 갔다
다음 해에 형님은 싱글벙글거리며 장가도 들었다
그 때는 이땅이 읍내 장터보다 더 좋아 보였다.
세월을 삼키며 잡초를 토해 내던 이곳에서
아버님께서는 쓰러지셨고
만가가 무겁게 울려 퍼지며
지신을 밟아 죽이듯 빈 마당을
몇 바퀴 돌며 상여가 뜨던 날에도
나는 땅속 깊이 스며드는 눈물 자국을 보며
손톱으로 흙의 체온을 내어 보았다
엄마의 손을 잡고 이사 나오던 날
나는 엄마의 애틋한 눈물을 보았다
손때 묻은 문설주와 이땅을
악착같이 지키시려던 가녀린 정성으로
잡귀를 물리치고 액운도 쫓아내려고
대문 앞에 소금을 뿌리시며
헷쉐- 헷쉐- 하시던 땅
가족의 무병 장수를 기원하며
귀신을 찾아 음복을 나누어 주시던
고씨네- 고씨네- 하시던 땅.
마당은 바로 고향의 품이요
언제 보아도 넓고도 포근한
엄마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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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 감(추억찾기 3) / 용 혜 원
명절 날이 다가오면
수정과를 담으려고 사온
단내 나는 먹음직한 곶감이
다락 속에 있었습니다
장난끼가 많던 나는
곶감이 먹고 싶어
입에 군침이 돌기 시작할 때면
참지를 못해
두형과 누나 그리고 누이 동생에게
선심쓰듯 곶감을 하나씩 나누어 주고는
나머지는 혼자 다 먹어 버렸습니다
수정과 담는 날
다락에서 곶감을 찾으시다가
다 없어진 것을 아신 어머니는
형제들을 불러 모아 놓고는
야단을 치셨습니다
"누가 곶감을 다 먹었느냐!"
나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형들 하고 누나하고 다 같이 먹었어요!"
모든 것을 다 아신 어머니는
나보다 큰 형만 야단 치셨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입 안이 달콤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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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지붕 / 이준관
어머니는 지붕에
호박과 무를 썰어 말렸다.
고추와 콩꼬투리를 널어 말렸다.
지붕은
태양과 떠도는 바람이 배불리 먹고 가는
밥상이었다
저녁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초승달과
서쪽에 뜨는 첫 별이 먹고 나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거두어들였다
날씨가 맑은 사나흘
태양과 떠도는 바람,
초승달과 첫 별을 다 먹이고 나서,
성자의 마른 영혼처럼
알맞게 마르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반찬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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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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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이해인
당신의 이름에선
새색시 웃음 칠한
시골집 안마당의
분꽃 향기가 난다.
안으로 주름진 한숨의 세월에도
바다가 넘실대는
남빛 치마폭 사랑
남루한 옷을 걸친
나의 오늘이
그 안에 누워 있다.
기워 주신 꽃골무 속에
소복이 담겨 있는
유년(幼年)의 추억
당신의 가리마같이
한 갈래로 난 길을
똑바로 걸어가면
나의 연두 갑사 저고리에
끝동을 다는
다사로운 손길
까만 씨알 품은
어머니의 향기가
바람에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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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김소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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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야 누나야 /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누나야 강변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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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밭 / 안도현
어머니의 고추밭에 나가면
연한 손에 매운 물든다 저리 가 있거라
나는 비탈진 황토밭 근방에서
맴맴 고추잠자리였다
어머니 어깨 위에 내리는
글썽이는 햇살이었다
아들 넷만 나란히 보기 좋게 키워내셨으니
진 무른 벌레 먹은 구멍 뚫린 고추 보고
누가 도현네 올 고추 농사 잘 안 되었네요 해도
가을에 가봐야 알지요 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위하여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