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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한 억새의 바다, 천황산, 재약산을 가다
1. 일자 : 2009. 10. 24 (토)
2. 장소 : 천황산 (1189m), 재약산 (1108m)
3. 행로 및 시간
[배내고개(12:40, 해발 700m) -> (임도길) -> 능동산 갈림길(13:14, 천황산 5.5km, 배내고개 2.2km, 능동산 0.4 km) -> (중식 13:40-14:02) -> 1058봉 앞(14:10) -> 샘물상회(14:27, 천황산 1.8km, 배내고개 5.8km) -> (억새평원) -> 얼음골 갈림길(14:38, 얼음골 1.9km) -> 바위 전망대(14:54, 간월산/신불산/영축산 전경) -> 천황산 정상(15:04, 1189m) -> 나무계단길(15:21) -> 천황재(15:30) -> 재약산 정상(15:55, 1108m) -> 나무계단(16:10) -> (우측 소로) -> 고사리분교 이정표(16:16, 표충사 3.8km, 재약산 1.4km) -> 등산 안내도(16:31, 표충사 3.35km) -> 층층폭포(16:35) -> (좌측 암벽과 단풍의 조화) -> 작은폭포(16:45) -> 전망대(16:51) -> 홍룡폭포?(17:02, 표충사 2km, 층층폭포 1.2km) -> 표지기 만장(17:27) -> 표충사(17:33)]
4. 동행 : 홀로, 숲향산악회
< 천황재약산 산행을 준비하여 >
경남 동부지역에 위치한 1000m 이상의 산군들로 이루어진 영남알프스는 산꾼들에게 또 다른 로망으로 자리잡고 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밀양에 위치한 천황산과 재약산을 행선지로 잡았다. 밀양의 지명을 풀어보면, ‘물이 흥건한 벌판’이란다. 물이 풍부한 지역인 만큼 산도 크고 중후하다. 천황재약산은 먼데서 보기로야 그저 멀쑥한 육산으로 보이지만, 덩치가 워낙 큰 이 산 품 안에는 가지가지 경관이 벌어진다. 평균 해발 850m 높이에 125만평 넓이의 망망한 억새의 바다, 사자평 고원이 그 중에서도 압권인 곳이다.
중국과의 역할적인 관계상 ‘皇’자를 쓰는 것을 저어하는 우리의 정서를 비추어 볼 때, 천황산의 이름은 예외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사자봉이라고도 불리고, 아예 혹자는 이곳을 재약산이라고도 한다. 재약산도 수미봉이라고도 불리니 헛갈리기가 쉬운 산이다. 몇 해 전부터 영남알프스를 동경해 온 나도 이 일대의 영축산, 신불산, 간월산, 천황산, 재약산, 능동산, 가지산은 쉽게 구별이 가지 않는 산들이다.
산행 코스를 살펴보니 배내고개에서 능동산을 지나 임도를 따라 걷다, ‘샘물상회’라는 도회지 냄새가 짙게 풍기는 곳에서 억새와 만나 천황산으로 오르고, 이어 천황재 넘어 재약산을 지나 옥류동천 계곡을 거쳐 표충사로 내려오는 긴 코스다. 지도상 표기된 시간을 계산해 보면 5시간 30분 정도다. 일단 임도길을 따라 천황산에 오르고, 천황산만 오르면 높이에 대한 부담이 없다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 희망사항 >
몇 해 전 처음 영남알프스 산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왠지 ‘짝뚱, 사이비’라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유럽의 알프스와 일본의 알프스 산군을 본 따 만든 카피의 이미지가 강하고 장삿속이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그 선입관은 울산과 밀양은 바다와 낙동강의 하류지역이라 고도가 낮을 것이라는 선입관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등산 잡지와 고수들의 산행기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에도 1000m 이상의 산군이 띠를 이루며 한 지역에 밀집해 있음을 발견했고, 그 산세가 제법 크고 웅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수도권과의 거리가 멀어 당일로는 쉽게 도전의 엄두가 나지 않아 마음 속으로만 그리던 바로 그런 산들이 영남알프스에 무리 지어 있다.
오늘은 영남알프스 중 밀양에 위치한 천황재약산에서 사자평고원의 망망한 억새의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산행의 일차 바램이다. 그리고 내 등산 경험을 부산, 울산 지역으로 확장하는 것에 대한 답사의 성격도 부여해 본다. 좀더 넗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계절이 겨울로 들어서면 해가 짧아져 더욱 더 마음을 정하기가 힘든 이곳에서, 늦가을 토요일 오후를 억새와 함께 불사르고 싶다.
< 배내고개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
오랜만에 숲향의 버스를 탔다. 최근 대개 복정역을 이용해 탑승했는데, 오늘은 양재다. 거리도 더 멀고 무엇보다 서초구민회관 앞의 번잡함이 싫다. 7시 20분 버스에 올라 타니, 만원이다. 숲향 대장의 사람 모으는 수완에 놀란다. 아침 대용으로 제공하는 김밥을 기대했는데,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귀에 MP3를 꽂고 이내 비몽사몽 잠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화서휴게소’라는 곳에 정차한다. 최근 경북 내륙과 대구, 부산 방면으로 새 고속도로가 많이 신설되었다. 시간 단축을 기대해 본다.
귀를 통해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눈으로는 아직도 황금색이 주류인 가을 들녘을 감상한다. 출발 5시간이 지나 버스는 울산에 인접한 곳을 지나고, 급한 고개를 한번에 넘지 못하고 빌빌거리더니 우여곡절 끝에 배내고개라는 곳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시간은 예상보다 훨씬 늦은 12시 40분, 해발은 700m이다.
< 배내고개에서 천왕산 정상 >
배내고개에서 고개를 드니 능동산의 완만한 능선이 정면에 펼쳐지고, 좌측으로는 끝간데 없는 산들의 파노라마가 연무에 젖어 이어진다. (나중에 사진을 살피니, 그 파노라마에는 오늘 오른 천황산과 재약산의 모습도 보였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배도 고팠지만 일단 산으로 올라 붙는다. 들머리 우측으로 능동산으로 향하는 나무 계단이 보였지만 일행을 따라 임도로 오른다. 잔돌이 성가신 제법 가파른 임도가 능동산 갈림길 부근까지 30여분간 계속된다. 능동산 갈림길에 이정표에 의하면 배내고개에서 천황산까지는 7.5km, 지금까지 2.2km를 걸었다. 빠른 행보로 왔지만 갈 길도 멀다.
길이 돌 길에서 흙 길로 변한다. 1시 20분경, 전경이 좋은 곳에서 뒤돌아 보니 지나온 능동산이 예의 편한 모습으로, ‘날 찾지는 않았지만 남은 길 잘 가라고 손짓한다’. 능동산 주변은 온통 울긋불긋함 그 자체이다. 남녁땅인 이곳에는 가을 단풍이 한창이다. 진행 방향으로 멀리 천황봉으로 추정되는 우람한 봉우리가 보인다. 그 우측으로 뾰족한 금속 첨봉이 보인다. 생각보다 정상에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곳은 천황산이 아니라 1058봉 이었다)
< 돌아 본 능동산 모습 >
편한 임도길을 걷는데 배가 고파온다. 식당 처를 찾아본다. 길가라 마땅한 곳이 없다. 숲으로 들어가 도시락을 편다. 역시 도시락 반찬으로는 김치가 최고다. 깔끔한 뒷 맛이 입맛을 돋운다. 밥의 힘으로 에너지를 얻고 다시 길을 나선다.
2시 10분경 1058봉 옆을 지난다. 정상이 아니라는 실망감도 잠시, 또 다른 정상이 눈에 들어와 희망이 생긴다. 2시 25분 갑자기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멀리서 보면 폐 냉장고를 방치해 둔 것 같은 생뚱맞은 흰색 기둥 사이로 천왕재약산의 전모가 드러난다. 키 낮은 억새밭 뒤로 보이는 산들의 모습이 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 드디어 사자평 고원 억새밭에 도착했구나 하는 반가움이 앞선다. 억새밭 뒤 편으로 천황산과 재약산의 모습이 보인다. (돌아와 사진으로 구별하는데 어느 곳이 천황이고 어느 것이 재약인지 구분이 쉽지 않았다.)
< 사자봉 평원 초입에서 본 재약산 / 억새에 둘러 싸인 천황산 >
잠시 황홀한 전경에 취했다가, 주변을 살피니 산기슭에 ‘샘물상회’가 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정갈한 분위기다. 주변하고도 잘 조화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점심상을 차리고 있었다. 길가 이정표를 살피니 천황산까지 1.8km가 남았다 한다. 길이 다시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한 30분 힘을 쏟은 후에야 산은 천황의 모습을 내게 보여 주려나 보다.
샘물상회에서 천황산으로 오르는 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두 사람이 마주치며 지나가기가 힘든 소로다. 좌우로 나뭇잎은 떨어진 관목이 촘촘히 서 있다. 10여분을 오르자 얼음골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 길로 1.9km 내려 가면 얼음골 입구가 나올 것이다. 계속되는 소로를 10여분 더 오르자 넓은 평원지대가 나온다. 사자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전방 좌측으로 천황산으로 향하는 완만한 경사가 펼쳐져 있다.
정상 전에 바위 전망대가 있다. 우측 전방으로 또 다른 영남알프스의 산군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의 전경이 눈 앞에 들어 온다. 연무가 끼어 어럼풋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위용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머지 않은 장래에 내가 찾을 산들이다. 들머리에서 능동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던 부부가 다시 보인다. 이곳에서도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여자 분 하는 말, “항상 오늘이 가장 중요한 날이야, 늙어서 추억을 기억하려면 부지런히 사진을 남겨야 해”. 내가 있는 이곳, 이 순간의 중요함을 다시금 확인한다.
< 영남 알프스의 또 다른 산군 전경 / 천황산을 바라보는 사자평에서 >
전망바위를 지나자 길은 목책
길로 바뀐다. 사자평의 억새는 넓게 분포되어 있지만, 키가
작고 밀도가 높지 않아 억새만으로 보면 민둥산의 그것만 못해 보인다. 하지만 100만평이 넘는 그 규모는 모든 것을 압도할 만하다. 정상으로 향하는
언덕 위에 사람들의 모습들이 보인다. 민둥산 억새밭 너머에 있는
산에서는 다른 감각보다도 시각이 가장 먼저 반응한다. 아무리 힘든 길이라도 눈에 보이면 갈만하고, 실제로 오르면 생각보다 금방 그곳에 도착함을 여러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눈 앞에 빤히 보이는 정상을 앞두고 반대편으로 보이는 지나 온 길을 되짚어 본다. 샘물상회의 지붕이 보이고, 그 뒤로 멀리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임도 길도 눈에 띄고, 그 멀리 1058봉과 능동산의 모습도 보인다. 지나온 산의 전모를 볼 수 있는 것도 천황산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라 할 것이다.
< 천황산 정상 / 천황산에서 본 지나온 길 >
언덕 위에 커다란 비석이 서 있는 청황산 정상이 보인다. 평원 위에 높인 작은 언덕이다. 주변은 말 그대로 일망무제다. 평원지대가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붉은 색 기운이 도는 억새와 단풍들이 너무도 넓어 눈이 따라 가기가 버겁다.
< 천황산에서 재약산 >
웅장하기가 이를 데 없는 천황산 주변을 한참이나 구경하다 하산 길로 접어 든다. 초입은 경치 좋은 암릉지대다.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암릉이 넓게 산재되어 보기에도 그만인 풍광을 만들어 주고 있다. 진행 방향으로 가야 할 재약산의 전경도 눈 앞에 보인다. 이제야 샘물상회에서 혼란스럽게 생각되던 천황산과 재약산의 구별이 확실이 된다. 굳이 말하자면 천황산 정상부는 완만하고 재약산 정산부는 굴곡이 많다고나 할까?
< 천황산 정상부의 암릉 / 하산 길에 재약산을 배경으로 >
들머리에서 보았던 여자 두 분이 말을 걸어 온다. 숲향에서 왔냐며, 자신들만 뒤처진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며, 점심 안 먹었으면 나누어 주겠다 한다. 나이가 나보다 너댓살은 많아 보이는데, 피부도 곱고 인상도 선하다. 여행 온 여자들의 개방감이 묻어나는 언행을 거침없이 쏟아 낸다. 거칠은 하산 길 초입을, 묵묵히 그들과 함께 했다. 저 멀리 재약산의 모습이 보이고, 길이 조금 위험하다고 판단될 즈음에 길게 이어지는 나무 계단이 보인다. 마치 지난 봄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 황매산 철쭉 군락을 내려서는 곳의 계단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 날의 좋은 기억이 오늘도 내게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하산 계단에서 바라다 보는 천황재 평원의 붉은 구조물이 인상 깊다. 음식물을 파는 가게지만 제법 산장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인공의 구조물도 자연과 잘 조화될 수 있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3시 30분 천황재에 도착했다. 시간을 확인한다. 재약산에 4시에 도착해서 고사리분교 4시 30분, 표충사에는 늦어도 6시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표충사에서 주차장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도 약속한 6시 30분은 맞출 자신이 있다. 그러나, 천황재에서 만난 여자 등반대장은 (입에 무언가를 잔뜩 넣고), “시간이 촉박하니 표충사로 바로 내려가던가, 재약산으로 가려면 서두르라”고 한다. 자신의 행정편의를 위해 표충사로 바로 내려 갈 것을 압박하는 언사다. 동행이던 두 여자분은 여기서 포기하고 하산하겠다 한다.
< 천황재에서 / 재약산 가는 길에 돌아 본 천황산 >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재약산으로 향한다. 작은 바위 언덕을 넘는다. 억새와는 이제 이별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걷는데 이내 억새평원이 다시 나온다. 뒤돌아 보는 천황산의 전경이 억새와 어우러져 멋지다. 해질녘의 빛을 받은 억새가 천황산과의 이별을 더욱 아쉽게 만들어 준다. 억새밭 한 가운데 있는 작지만 올골차 보이는 바위 위에서 사과 한 알을 베어 물고 한참이나 억새와 바위가 어우러진 사자평의 마지막 전경을 감상해 본다. 몇 해 전 어느 영화에서 본 장면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마치 먼 옛날 내가 이곳에서 한참을 머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계단을 오르며 재약산으로 향한다. 재약산으로 향하는 길은 천황산과는 다르게 암릉지대다. 그 중에는 제법 위험한 구간도 있다. 지금에야 문제없지만 겨울철에는 위험이 따르겠다. 10여분 암릉을 돌아 드니, 재약산 정상이 나타난다. 천황산과는 다르게 정상부가 좁고 바위들로 둘러 쌓여 있다. 과거 여러 문헌에는 천황산보다는 재약산을 먼저 처 주었는데 최근에는 천황산이 먼저인 것은 정상부의 사정 때문이라는 것을 어럼풋이 추측한다. (혹자는 천황봉을 재약산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재약산의 명성에 비해 초라한 정상부의 전경을 감상한다. 다행인 것은 진행 방향은 넓게 트여서 개방감이 크다는 것이다.
< 재약산 정상 / 재약산에서 본 배내고개 방향 >
< 재약산에서 표충사 >
재약산 하산길의 전경은 온통 주황색이다. 해 어스름에 갈대의 짙은 색깔이 온통 붉은 톤으로 다가 온다. 숲향 일행 중 정상에서 만난 남자 한 분이 5시가 넘으면 어둠이 급격히 몰려 와 자기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 표충사로 하산하겠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들었는데 주황색 기운을 보니, 곧 다시올 어둠에 대해 덜컥 겁이 난다. 서둘러 하산길에 나선다. 하산 길 초입은 역시 돌 길이다 제법 험하다. 다행히 위험한 곳에는 계단이 길게 놓여 있다. 계단을 다 내려 서자 거짓말처럼 길은 임도로 변한다. 4시 15분경 이정표를 만난다. 고사리분교는 우측 작게 난 길로 가야 한단다.
큰 길을 버리고 좁은 길로 가려니 마음이 왠지 불안하다. 10여분 내려가니 널따란 평지에 이정표가 서 있다. 고사리분교 갈림길이다. 표충사까지는 3.8km가 남았다 한다. 잠시 망설인다. 고사리분교 방향으로 가다가 지계곡으로 내려 서면 시간이 많이 단축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해가 지는 속도를 가늠하지 못해 고민한다 당초 계획한 층층폭포 방향으로 간다. 길은 널찍한 임도다. 이내 등산 안내도가 보였다. 오늘 산행 중 처음 보는 제대로 된 등산안내도인 것 같다. 그 바로 옆에 우측 편으로 층층폭포로 내려가는 옥류동천 길이 본격적으로 이어 진다. 시간은 4시 30분. 서산 너머로 해가 언제 질는지 걱정이 된다.
걱정도 잠시 하산 길 초입, 참나무 숲의 노란 단풍잎이 지는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다. 질녁의 해의 마지막 빛을 머금은 나무가 제대로 된 색을 발하고 있다. 빛과 색의 조화가 멋지다. 아쉬운 것은 바람이 없다는 것이다. 계곡 초입에 흔들다리 옆으로 층층폭포가 모습을 드러 낸다. 시커먼 수직 폭포다. 수량이 적어 골골거리며 흐른다. 오히려 반대편 암벽 주변으로 보이는 단풍이 더 인상적이다. 온산에 단풍이 제대로 물들어 가고 있다.
층층폭포에서 10여 분 밑에 다시 작은 폭포가 나온다. 역시 출렁다리가 놓여 있다. 홍룡폭포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규모도 작고 지도도 더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의식했던
작은 전망대에서 사진 한 장 찍고, 이내 다시 폭포전망대에 도착한다. 홍룡폭포가 이곳인가 보다. 이제 표충사까지는 2km가 남았다. 다행이 시간은 여유가 있다.
< 옥류동천에서 본 단풍 >
계곡을 끼고 낭떠러지 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어둠이 오려면 아직 여유가 있다. 내려 가면서 보니 옥류동천 길은 명품길이다. 시간을 단축하려고 고사리분교 지계곡으로 하산했으면 후회할 뻔했다. 그만큼 하산 길, 암벽과 어울려진 단풍이 곱디 곱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번 가을 단풍의 진수를 만끽한다. 옥류동천 길은 계곡미도 뛰어나다. 홍룡폭포의 물길은 그 낙차 폭이 제법 크다. 간간이 눈에 들어오는 산세는 흡사 협곡을 연상시킨다. 큰 산 영남알프스가 품은 또 하나의 비경임에 틀림없다.
< 옥류동천 입구 표지기 만장 / 표충사에서 >
고도는 300m 밑으로 떨어졌는데 길은 여전히 돌길이 이어진다. 표충사 1km 이정표가 보인다. 시간은 5시 20분으로 접어든다. 이제 주위에 어둠이 내려 앉는다. 계곡이 끝나 가는 지점에서 계곡물에 세면을 한다. 천황재에서 꺼내 입은 바람막이를 벗을 까말까 하고 고민하다 여기까지 입고 왔다. 덕분에 온몸에 땀이 솟았다. 시원한 물에 얼굴을 씻으니 살 것 같다. 늦게나마 겉옷을 배낭에 집어 넣는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도 실제로는 그리 늦은 것이 아님을 곧 깨닫게 된다.
5시 30분이 다 되어 옥류동천 계곡 초입에 닿는다. 초입 음식점 옆 울타리에 표지기가 마치 의식의 만장마냥 걸려 있다. 내가 이름을 붙여 본다. ‘표지기 만장’. 산에서 이정표 역할을 해 주지만, 때론 빛이 바래 지저분한 느낌을 주던 표지기가 이 정도로 많으면 주변에 볼 거리를 제공해 주는 구나 하는 생각에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모퉁이를 돌아 내려 오니 표충사 절집이 보인다. 정문을 통해 절에 들어 서니 고즈녁한 분위기가 든다. 대웅전 뒤로 여러 구조물이 보이고 그 뒤로 재약산 산 줄기들이 꿋꿋이 서 있다. 어둠이 내리 깔리는 가을, 산사에서 맞는 어둠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시간은 어느덧 출발 5시간을 넘기고 있다. 영남알프스에서의 첫 산행이 이렇게 마무리되어 간다. 또다시 찾을 날을 기대해 본다.
< 에필로그 >
천황재약산은 훗날 색채의 변화로 기억될 것이다. 오전 희뿌연 안개로 아침을 맞았고, 버스 차창에서 바라다 보는 남녘의 산야는 황금색 물결로 넘실댔다. 배내고개에 도착해서 바라본 밀양의 산야는 여전히 연무에 쌓인 희색빛이었으나, 산에 올라 돌아 본 능동산은 비로소 노란색 단풍을 선물해 주었다. 샘물상회에서 시작되는 사자평원의 억새밭은 세상을 온통 금빛 물결로 변화시키더니, 재약산에서 바라보는 초원은 해질녘의 햇살을 받아 주황빛 물결로 변화되었다. 5시가 넘어 하산길에서 본 층층/홍룡폭포는 검은빛을 띄었고, 주변 암벽과 어우러진 울긋불긋한 단풍은 가을의 진수를 알리기에 충분하였다. 하산 후 표충사에서 올려다 보는 산야는 검은빛 실루엣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산을 내려와 출발할 때 기대했던 것들을 되새겨 본다. 천황재약산 사자평 고원의 망망한 억새의 바다를 나는 보았는가? 그렇다. 비록 개개의 억새는 키가 작고 왜소해 보였지만, 함께 군락을 이룬 모습은 평생 기억에 남을 장관이었다. 내 평생 어디에서 다시 이리 넓은 억새를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영남알프스 산행은 오늘이 시작일 뿐이다. 가지, 영축, 신불, 간월 등 또다른 진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