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거룩한 독서의 양성
교부들이 가장 엄격하게 충고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성서를 사변의 대상으로 삼거나 지식을 위한 지식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속화시키지 말라”라는 것이다. 이런 것은 무신론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인은 성서를 펼칠 때 오직 하느님 은총의 빛을 통과할 때만 읽고 있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거룩한 독서는 이러한 은총과 더불어 성서를 읽는 가장 참되고 적합한 방식이다.
랍비들은 ‘토라’ 즉 말씀은 창조계 안에 하느님 현존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인간은 독서와 묵상과 기도로써 이 현존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독서, 묵상, 그리고 기도 바로 이 세 가지가 유대교 신심과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신심에서 거룩한 독서의 근본 요소였다.
말씀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이 유대교적 방법을 그리스도교가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이 방법은 동*서방을 막론하고 모든 교부들에게도 공통된 것이었다. 물론 이 방법론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중세에 가서야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16세기부터 거룩한 독서는 가톨릭 교회에서는 더 이상 실천되지 않았지만, 형태를 달리해서 개신교에서 살아남게 된다. 그들의 체험은 고대 교부들이 정착시키고. 중세 교부들이 풍요롭게 키웠던 방법으로, 거룩한 독서의 목표를 규명하는 데에 분명히 도움이 된다. 그러나 수도승들 사이에서는 이 방법이 중단 없이 간직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다른 형태의 독소에 대해 자주 논쟁하곤 했다. 중세 말기에는 수도승들이 의전 사제 수도자들과 도미니코 회원들을 비판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들의 스콜라식 성서 독서가 독서와 기도라는 최고 가치가 아니라, 질문과 논증을 지향하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그들은 또한 지나치게 심리적이고 내향적인 이냐시오식 묵상 방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수도승 전통 내부에서도 거룩한 독서는 옹호되어야 했다. 특히 12세기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례 기도만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거룩한 독서는 거의 소멸될 지경에 이르렀다 거룩한 독서는 성무일도로 대체되고 말았다. 수도승들은 이런 경향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거룩한 독서의 방법은 오랜 유배 기간에 들어갔는데 이것은 말씀의 유배 기간과 상응하는 것이었다. 결국 거룩한 독서를 우리가 되찾게 된 것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덕분이었다. 공의회는 계시 현장에서 “모두가... 거룩한 독서와 주의 깊은 연구로… 성서와 끊임없이 접촉할 필요가 있다… 독서에는 기도가 동반되어야함을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거룩한 독서는 기도와 함께하는 독서요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며 묵상이 낳은 기도이다. 따라서 이것은 특정적인 방법이다. 이제 그 입문을 위하여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윤곽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카르투시오 수도회 수도승이었던 귀고 2세는 기도에 관한 예수의 한 말씀을 응용하여 스스로 도시화하고 구성한 방법을 그의 저서 <수도승들의 계단>에서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거룩한 독서의 여러 단계를 드러냄에 있어서 이를 원용하고자 한다. 마태오 복음서 7장 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청하시오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귀고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독서 안에서 찾으시오 묵상과 함께 얻을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두드리시오 관상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 귀고는 위의 복음 말씀의 마지막 두 가지 권고를 거룩한 독서의 방법으로 요약하여 옮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덧붙여 제일 처음의 권고, “청하시오 주실 것입니다” 를 이렇게 알아들을 수 있다고 본다. “성령을 청하시오 읽을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도식이 거룩한 독서를 양성하는데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영성 생활에 역동성 안에서 참된 기도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분과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하여, 이 구조는 기도는 물론 독서를 위해서도 효과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임무를 위해서도 교육적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