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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隊이야기
大韓民國의 健壯한 成人 男子라면 軍隊生活은 職業으로 삼기 위함이든 義務를 다하기 위함이든 피해갈 수 없는 選擇이 아닌 必須的으로 거쳐야 하는 삶의 重要한 過程이다.
軍隊란 것이 敵國의 侵略으로부터 國家와 國民의 財産과 國民의 生命을 保護하는 근본 目的을 達成하기 위해 人間을 殺傷하는 것을 가장 基本的인 手段으로 삼는 組織이다.
軍人이 所持하는 物件의 大部分은 直接的으로는 잘못다루면 生命을 앗아가거나 身體에 致命的인 傷處를 남기는 총칼 등의 武器類이거나 설사 直接的인 威脅은 아니더라도 軍에서의 모든 物品이 結局 軍의 殺傷手段을 强化하거나 支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 친 말이 아니고 보면 실상 軍隊 物件치고 危險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해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大劍만 하더라도 그 파란 날이 보기보다는 예리하단 것을 經驗한 사람은 안다. 대검을 만질 때마다 그 날카로움에서 베어져 나오는 섬뜩함에 소름이 돋던 기억이 난다.
예전의 殺傷武器의 主流가 검, 果刀이고 보면 그 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는 대검은 現代技術의 힘을 입어 예전 보다 더 예리하게 만들어졌을 것은 當然한 일이다.
이렇듯 軍隊는 心覺한 危險性이 상주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子息을 軍隊로 보내며 謹審하지 않은 父母님이 없었고, 男子 親舊가 軍隊로 떠난지 불과 몇 달안에 數年의 질긴 정을 헌신짝 버리듯 내던지고 고무신 거꾸로 신는 일은 뒤로 미루더라도 愛人을 軍隊로 보내며 적지 않은 期間 동안의 生離別에 눈물빼지 않은 女人이 없었다.
入營列車가 떠나는 汽車驛은 마치 돌아올 수 없는 生面不知의 곳으로 떠나는 듯한 사람들과 보내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의 탄식과 심지어는 痛哭의 소리도 가끔씩 들리는, 그 애절함과 沈痛함이 가히 凡常치 않은 생생한 離別의 現場이었다.
하지만 入營列車의 車窓은 안과 밖을 軍隊와 社會로 엄연히 區別하며 이미 무엇으로도 除去할 수 없는 帳幕이 되어 있다.
入隊할 當時 壯丁을 輸送하는 軍用列車의 窓門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창 안밖의 靜境을 볼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軍人도 아니고 社會人도 아닌 當時의 身分은 호로 덮은 軍需品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窓門을 가린 검은 천과 혼을 빼 놓았던 助敎들의 號筒과 몸짓은 창밖에서 哀絶하게 손을 흔드는 父母님과 親舊들과 愛人에게 무모한 作別의 손짓을 겁없이 行動으로 옮기려는 壯丁들을 强力한 威脅으로 制止했는데 떠나는 자들에게는 그 狀況의 難堪함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고마운 면도 오히려 없지 않았다.
한번도 가본적 없던 남쪽으로 그렇게 海軍用 LST 乘船 처음 到着한 곳은 濟州道 西歸浦 제 1訓練所의 身體檢査場이었다. 그 곳에서 軍醫官 高等學校 先輩님을 만났다. 누군지 이름도 모르는 先輩님이었지만 壯丁인 나를 따뜻한 웃음으로 대해주던 그의 모습이 65년이 되어 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大韓民國 男子의 人生에서 빠뜨릴 수 없는 重要한 歷程中의 하나인 國防의 義務를 다하기 위하여 내가 濟州道 訓練所에 入所한 것은 1956년 2월이었다.
入所後 수용연대에서 待期하다가 訓練所에 팔려간것이 2일이되니까 全國에서 모인 壯丁들이 受天命이 모이는 수용연대에서, 제일 가까이 지내던 親舊는 줄을 잘못서는 바람에 生離別하고 아는 사람도 없이 팔려간 곳이 제 1 訓練所 26聯隊였다.
처음 濟州道 1訓練所에 入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호쌓기 事役을 본관쪽으로 간적이 있었는데 깔끔한 服裝과 軍靴에 노란 작대기 하나를 단 二等兵들이 빗자루를 어깨에 매고는 列을 맞추어 軍歌를 부르며 손을 흔들고 걸어가던 모습이 아직 정식軍服을 입지 못한 상거지 차림의 訓練兵이었던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부럽게 보이던지.
그 노란작대기는 訓練兵들에게는 정말 커다란 선망의 對象 이었다. 部隊에 들어가자, 練兵場에 集結시커 놓고 左右로 情熱부터 시키고는 나서 이리저리 任意的으로 잘라서 小隊를 編成을 한다. 그리고는 器幹兵들을 다라서 100여명이 들어가는 內務班으로 인솔되었다.“
예~!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다.“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齊州 1 訓練所에서는 제일 빠세다는 26聯隊다. 이곳에서 너희들은 社會의 때를 벗고 人間改組가 되어서 배출되는것이다. 말끝마다 絶倒있는 액센트를 줘가면서 恐怖雰圍氣로 만들었다.
모두들 쥐죽은듯 듣기만 했다. 이제부터 4週間 新兵訓練을 받는데 있어서 內務班長의 統制에 따라 일사분라하게 움직이면 편할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4 주동안이 地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고한다.
지금부터 各自의 주머니에 있는 所持品을 하나도 남긴 없이 自己앞에 꺼내놓는다. 實施!!! 다시 한번 복창한다. 實施” 實施~ 이~“이후 萬若에 하나라도 주머니에서 所持品이 나오는 경우는 覺悟해라~~“
그리고 깊이 숨겨놓은 돈이 자리에서 모두 꺼내 놓는다. 돈을 감춘 곳은 팬티고무줄사이, 바지단, 윗옷의 칼라, 돈을 접어놓고 감은 실패꾸러기.... 等等, 모두 꺼내 놓는다. 알겠나! 늘 다루는 能熟한 솜씨라서 新兵의 心理를 아예 꿰 뚫어 버린다.
겁에 질린 新兵들은 하나하나 감추었던 돈을 끄집어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暫時後 한번더 强調한다. 다 꺼냈나? 네, 모두들 對答한다. 그리고 新兵의 눈을 하나씩 마주치면서 눈치를 살핀다.
그러다가 한사람이 指目된다. 너 이리나와 넵, 訓兵 陳平洙 한명이 불려나갔는데, 몸 수색을 시작했는데, 윗옷 下段에 깊이 돌돌말아 숨겨놓은 紙幣가 發見되자. 귀씨데기가 날라간다.
分明이 말했는데, 이렇게 어리석은 놈이 있다.“한번 더 期會를 준다. 이후 돈을 감춘 사람이 發見되면 容恕치 않겠다. 한명이 귀싸데기 맞는것을 보자 모두 공포분위기로 변하고 숨겨 놓은 紙幣를 뽑아내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新兵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回收해서 모두 이름과 額數를 노트에 記錄한다. 이후 回收 해간 돈은 一人當 2萬원만 保管하고 나머지는 故鄕으로 모두 送金해버렸다.
그리고 5千원은 쿠폰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訓練所 退所할 때 돌려주었다. 訓練所에서 일어나는 盜難 事故와 不條理를 막고저하는 趣旨에서 했다고 하는대 나중에 생각해보니 必要한 措置인듯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여러분들이 訓練을 받는 동안에 모든 衣食住를 軍隊에서 解決해 주기 때문에 돈이 必要 없을뿐더러, 社會에서 사용하던 모든 것이 必要없다” 이렇게 해서 각자가 가지고 있던 所持品들도 몽당 빼앗기고 나서 마음이 허전하다.
이제부터 本格的으로 軍隊生活이 시작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情神이 든다. 잠시후 간단하게 속옷과 수건을 支給하고 나서, 이제부터는 社會에서 묻었던 떼를 말끔하게 씻고 새로운 마음으로 大韓民國의 勇名스런 軍人이 되는 것이다.” 身體檢査결과가 良好하여 2 일후 정식으로 濟州道 1訓練所에 入所하였다.
입소첫날, 點心時間은 1 분이 주어졌고 그 1 분안에 食事를 마쳐야 했는데 말이 1 분이었지 助敎들이 말하는 1 분은 너무 짧았다. 한 30초 정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 助敎의 "食事 끝" 하는 소리와 함께 호각이 울리고 食堂 옆의 練兵場으로 集合한 우리는 先着順과 얼차레를 받으며 그날 午後 내내 理由 모를 얼차례를 받으며 뻉뺑이를 돌았다.
그후 聯隊, 中隊, 小隊가 編成되다. 軍隊서, 특히 新兵訓練所에서 命令에 따라 웅덩이를 파고 웅덩이를 묻는 것은 요즘 어느 개그맨의 말처럼 "아무 理由가 없었다." 2월 추위에 흙과 땀으로 뒤범벅이된 訓練服을 걸친 訓練兵이 목불 인견의 地境에 이르게 된 것은 말할 必要도 없었다.
그때 호각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先着順으로 야외풀장으로 뛰어들어"라는 助敎의 命令에 뜀박질 잘하는 訓練兵 누군가가 풀장에서 하늘높이 점프하여 다이빙을 하였고 暫時 후 들려오는 소리는 차디찬 물로 落下하는 "풍덩"하는 소리가 아니라 "쿵"하는 소리와 연이어지는 "으악"하는 悲鳴소리였다.
그 곳은 물마른 풀장이었다. 삼청 敎育隊의 참상은 요즘도 드라마나 映畫의 소재로 많이 活用되고 있다. 그 때마다 全身을 감아 오르는 용문신을 새긴 健壯한 사람들이 거대한 暴力에 制壓당한 無氣力한 모습으로 목봉 體操를 하는 場面은 빠짐없이 登場한다.
그런데 그 목봉 體操란 것이 新兵訓練所에서도 活用되고 있었다는 것을 軍隊를 갔다 온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무지막지한 木棒體操는 비록 힘들긴 했지만 强하게 기억에 남는 新兵訓練所에서 겪었던 所重한 追憶의 한토막으로 내게 남아있다. 助敎가 처음 木棒體操를 시킬 때는 軍隊는 오와 열 그리고 키 순이라는 기본을 벗어나 제멋대로 木棒을 들게 했으므로 中間에 끼어 있던 나는 그 때 처음으로 키 작은 것이 눈물나게 고마운 일이 될 수 도 있다는 經驗을 하기도 했다.
키 큰 訓練兵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까치발을 하고는 나름대로 용을 썼지만 무슨 큰 도움이 되었으랴.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침내 無秩序의 弊端을 깨달은 助敎는 木棒을 내려 놓게 한 다음 키 순서대로 헤쳐 모여 하더니 木棒의 굵은 쪽을 키작은 訓令兵들이 들게 하여 목 봉체조를 시키는게 아닌가.
키작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惠澤이란 것은 그리 오래가는게 아니었던 것이다. 낮은 곳으로 미치는 重力의 特性像 그 이후의 키작은 자의 悲哀를 굳이 적어 무엇할까. 濟州道 1 訓練所에서 訓練을 받은 사람이라면 手榴彈 투척練習帳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눈물고개를 잘 알고 있으리라.
눈물고개는 머리위에 개머리판을 거꾸로 한 小銃을 잡고는 오리걸음으로 걷는 訓練兵들에게 助敎들이 父母님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게 하여 눈물께나 짜게 했다는데서 由來된 이름이다.
무슨일에도 苦悲는 있는 法이어서 이상하게도 이 눈물 고개를 넘은 날 以後의 訓練은 日常이 되어 그리 큰 어려움 없이 받아 낼 수 있었다.
內務班 生活을 하면서 내의 옷(衣)에는 이(슬.蝨)가 많아서 발진티푸스나 몸이 오슬오슬 춥고 괴로운 症勢, 몸이 떨림과 함께 高熱이 繼續되다가 땀을 냄과 함께 解熱하고 1週日 후에는 또 다시 發作을 일으킨다.
回歸熱이라고도 한다. 같은 傳染病을 전파시킨다고 매일 밤 空甁에다 이(蝨)를 잡아넣어야만 就寢을 할 수가 있었다. 어떤 때는 오징어뒷다리를 조그맣게 떼어서 똘똘 말아 蝨이라고 속여서 공병에 넣어도 電氣불이 어둡던 時節이라 그냥 속아 넘어 가곤 하였다.
化粧室에 앉아서 用便을 볼 때는 머리에 쓰고 있는 訓練帽를 훔쳐가는 바람에 항상 꼭 잡고 있어야만 했다. 野外 訓鍊場에서 用便을 보고 있으면 移動主婦들이 물건을 들고 쑥 내미는 데는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 할 지경이었다.
이런 정경들은 제주 1訓練所 入所後 4週間의 基礎訓鍊을 받은 후 한달 보름만의 家族들과의 對面을 자못 쑥스럽게 하는 바가 있었으니 軍隊란 그리 못갈 곳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드는 요즘이다.
거꾸로 매달아도 時間은 가는 법, 어찌됐던 國防部 時計는 돌고 돌아 마침내 우리들에게도 그 偉大해 보이던 노란줄 하나, 二等兵 階級章을 다는 날은 왔고 일주일 후 訓練所를 退所하게 되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出所하는 날 아침에 물 한모금마시면 10초도 지나지 않아 그만큼의 양을 배설하는 至毒한 설사를 만난 일이었다. 아픈 몸으로 더블백을 매고 訓練所를 出發하여 병아리 二等兵들이 타고 갈 LST軍艦이 있는 西歸浦에 倒着한 것은 그 날 오후 2시쯤이었다.
將兵들을 실은 軍艦이 出港 移動하면서 助敎의 呼名에 3팀으로 분류 1팀은 江原道 補充隊, 2 팀은 光州 尙武臺, 3팀은 釜山 9補充隊로 6時間 후 倒着한 곳은 釜山 제 2埠頭에 碇泊하다.
補充隊란 訓練所에서 出所한 兵士들이 配置되기 전에 잠시 待期하는 곳 이었는데 1週日이나 2 週日안에 自隊로 配置되어 가는게 普通이었다. 一週日간을 待期中 補充隊 軍醫官을 찾아가 診療를 받고 藥을 받아 먹을 수 있었는데 나을 때가 되어서였는지 씻은 듯이 泄瀉가 나았다.
정말 至毒한 泄瀉였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한 겨울 좋지 못한 環境에서 移動하던 중에 걸린 이질이 아니었나 싶다. 그 狀態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一週日이나 버틸 수 있었던 내가 신기하기도 했다.
아픈 사람은 第 1 訓練所에서 退所를 못한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어 그 事實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危險千萬한 尾聯스러운 行動이었다. 그렇게나 訓練所 내 生活이 지긋지긋했었나 싶다.
退所 準備中 高等學校 卒業이라는 理由 하나만으로 몸무게 48㎏이었던 내가 42名의 小隊員을 항상 앞장서 引率을 한다는 것은 無理 중에서 上 無理였다. 無學歷 者가 있는가 하면, 國民學校 4學年의 子息을 둔 중늙은이도 있었으며, 양아치까지도 있어서 그들의 不平을 다 들어준다는 것은 나의 能力에 限界가 있었다.
더구나 아침 8 時부터 午後 5時까지는 訓練을 받아야 하니 虛弱한 나의 身體로는 不可한 일이어서 몇 번이나 先任下士에게 辭意를 表해도 아니 되기에 精神力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每日 돈을 잃어버리는 兵士, 內衣나 양망 등을 紛失하는 등 하루도 조용히 지나갈 날이 없는 訓練所 生活이었다. 그러다 訓練所를 卒業하고 輩出隊에서 며칠을 놀면서 時間을 보내니 정말 무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른 兵士들은 두꺼운 담요로 된 누런 防寒服을 支給받고는 最前方으로 轉出되어 죽을 像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中學校 卒業 이상의 學歷 所持者로 色盲이 아닌 者, 獨子가 아닌 者, 밤눈이 어둡지 않는 者를 가려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訓練所 助敎를 選拔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11中隊 출신 향도 4명이 PX로 逃亡을 가서 그곳 基幹士兵에게 情報 蒐集을 부탁하니 조금 있다가 돌아와서 “地上의 王子 Tank兵을 募集하고 있으니 빨리 가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그 士兵에게 質問을 하였다.
地上의 王子인 Tank兵이 무엇이 그렇게 좋으냐고 그가 말하기를,
첫째, 訓練을 할 때 다른 兵士들은 다 걸어가는데 Tank兵은 탱크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힘든 줄을 모른다.
둘째, 다른 兵士들은 M-1이나 Carbine 小銃을 메는데 비해 Tank兵은 拳銃을 차기 때문에 무겁지도 않고 폼(form)이 난다.셋째, 訓練을 할 때는 겨울이라 날씨가 매우 춥지만 Tank兵은 따뜻한 탱크 안에 있기 때문에 추위를 모르고 아울러 뜨거운 Muffle爐 위에다 고구마도 구워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정말 좋은 兵科이니 지금 빨리 內務班으로 가라고 하여 우리 一行은 돌아왔는데 늦게 參席을 하였다고 뺨을 몇 대씩 두들겨 맞았다. 우리 一行은 夜間 軍用列車를 타고 機甲學校가 있는 光州로 가면서 목이 터져라 軍歌를 부르고 있으니 가슴에 戰車部隊의 象徵인 번개를 金실로 수놓은 Mark를 달고 있는 戰車兵이 우리에게 “어떤 部隊로 가는데 이렇게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르고 있느냐 ?”고 물었다.
“우리는 先輩님과 같은 戰車兵이 되기 위해 陸軍 機甲學校를 가고 있습니다.”라고 答을 하니 그 戰車兵이 무엇이 그렇게도 좋으냐고 물어서 나는 訓練所에서 들은 대로 이야기를 하니까 그는 그의 손바닥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약 1주일을 待期中 차출되어 기자를 타고 내린 곳이 光州步兵學校 內 尙武臺 있는 機甲學校 機甲 主特技生을 養成 배출하는 戰車乘務과정, 戰車整備과정. 裝甲兵과정 등 敎育 12주를 를 이수하는 동안 멘토 역활을 해주신 擔任敎官님 德分에 무사히 과정을 이수 軍에 갓 들어온 二兵에께 高價裝備인 戰車操縱을 맡끼고 있는 實情이어서 機甲部隊 사고 負擔이 컸으며 특히 戰車를 조종하는 兵士 心理的인 증악감도 無視할 수 없었다.
매끈하지를 않고 곰발바닥처럼 갈라져 있지 않은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苦生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경경열열 하지만 渴而穿井인 일을 이제 와서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자기 힘이 미치지 못할 때 하는 歎息한들 도로 애를 써서 이루든 일이 한 瞬間의 失手로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이 되었으니 비로 머리를 감고 바람으로 머리를 빗는다는 것으로 모진 苦痛을 참아가며 일한다는 뜻을 하는 수밖에 없는 우리 一行은 그렇게 힘차게 부르던 軍歌를 멈추고 機甲學校로 갔다.
機甲學校 戰車兵 志願兵 基本過程 18期로 入校를 했는데 光州의 2月은 왜 그리도 춥고 또 바람은 어찌나 强하게 부는지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記憶이 생생한 것을 보면 確實히 苦生은 많이 한 모양이다.
江原道의 가을은 빨리 찾아 왔다. 江原道 軍部隊의 周邊 山野는 아주 깊은 가을이었다. 補充隊 練兵場 가에는 플라타너스를 비롯한 落葉樹들이 많이 심겨져 있었는데 補充隊에서 하는 일은 허리까지 쌓이는 落葉을 치우는 일이 거의 전부였다.
이곳으로 온지 一週日 이 곳에서 內務班 生活에 必要한 個人補給品을 支給받아 더블백에 담고 待期中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눈썹이 짙은 마른체격을 한 중키의 40대의 准尉는 人事 擔當官, 우리를 引率해 갈 상사는 우리 中隊의 人事係였다.
같은 部隊에서 勤務할 同期 3명과 함께 트럭을 타고 春川補充隊의 정문으로 빠져나온 후 약 50 분정도를 달리니 어느 외딴 部隊의 僞裝用 그물망이 덮힌 衛兵所가 멀리 보였다.
마침내 自隊配置를 命令 받게 곳이 京畿道 抱川 指捕里 位置한 10탱크 創設部隊의 頂門衛兵所를 通過하는 瞬間 충~성하는 衛兵의 敬禮소리가 귀를 울리는데, 흙먼지 날리며 練兵場을 지나 大隊本部 앞에 차가 도착, 마침내 집 떠난 2월 以後 약 8個月 보름에 달하는 訓練과 移動이 反復되는 不安하고 고단했던 放浪生活에 終止符를 찍고 앞으로 3年間 服務할 自隊에 倒着한 瞬間이 온 것이었다.
이 部隊는 創設部隊로 偏在改編 陸軍 10戰車隊隊는 中隊당 14戰車로 編成, 部隊는 말 그대로 機動力과 火力의 强化를 위하여 戰車로 編成된 戰鬪部隊로 나는 整備小隊에 配置되었다.
中隊長이 아버지라면 人事係는 服務하는 3년동안 우리 兵士들에게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어머니와 같은 存在라는 것을 아는데는 그리 오랜 時間이 걸리지는 않았다.
같이 倒着한 2월 軍番 同期 셋과 함께 中隊本部에서 간단 한 入所節次를 마친 후 寢食을 할 內務班으로 내가 引導되어 간 곳은 2小隊였다. 우리 中隊는 戰車整備와 輸送 整備部 구성되어 같이 일하는 戰友들과 함께 生活하는 2小隊에 配置되었던 것이다.
이 戰車整備班에서 3년동안 내가 손때 묻히며 管理하던 補給 카드란 것이 一般會社의 帳簿란 것과는 많은 差異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 根本은 같은 것이어서 어쩌면 軍에서의 補職이 지금 밥그릇으로 삼고 있는 社會에서의 職業으로 까지 連結된 境遇라 할 수도 있겠다.
계급 二等兵에서부터 兵長까지의 先任들이 午後勤務를 마치고 官物整理를 하거나 구두를 딱고 있던 內務班으로 더 블백을 매고 들어가 경례를 하며 "二兵 金興壽는 1956 년 10월 xx일부로 10機甲中隊 整備小隊에 勤務를 命받았으므로 이에 신고합니다.
"큰 소리로 自隊配置 報告 겸 人事를 하고는 軍紀가 바싹들어 뻣뻣이 차렷자세로 서 있으니 한가롭게 구두에 광을 내고 있던 어느 兵長이 "너 거기 우두커니 서있지 말고 이리 내 옆에 와서 앉아라" 하며 多情하게 손짓으로 불렀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포근한 목소리에 금방이라도 緊張感이 풀리려는 自身을 抑制하며 다가가니 故鄕이 어딘지 軍에 오기전에 한 일이 무언지 이것저것 물었다.
큰 소리로 "예 二兵 김흥수 故鄕은........."對答을 하니 "아따 귀청 떨어지겠다. 자~ 자~ 緊張풀고 便安하게 목소리 낮춰서 對答해라"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따라 목소리 톤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이 녀석, 어디서 군기가 빠져 가지고 서는, 목소리 좀 봐라 너 누구와 軍隊生活 오래할 것 같애? 이렇듯 士兵生活은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國民의 生命과 財産을 保護하기 위하여 같은 배를 타고 共同運命體인데 兵士들의 人格은 완전히 무시되는 점이 특히 견디기 어려운 점이었습니다.
제일 괴로운 것은 毆打였다. 잘못이 있거나 軍隊의 規律에 違反하면 應當 處罰받는 것은 當然하나 사사로운 感情에 의해서거나 또한 不當한 指示에 순응 않다고 때리는 등 理由없이 毆打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人格的으로 侮辱하는 辱說과 事役 아닌 事役 등 아무리 軍隊 말단의 士兵이라 하지만 兵士들에게도 人格이 있고 自尊心이 있는데 그것이 無視되는 것 같아 卒兵身世가 恨歎스럽기도 해서 士兵生活 면하고 싶었다.
그 兵長님은 머지 않아 곧 집으로 돌아가실 분이야 "하며 號筒을 치는 목소리에 精神이 번쩍 들어 다시 큰 소리로"예 이병 김흥수는....."하자 처음 나를 불렀던 兵長이 겸연쩍은 웃음을 지우며 "어이 그 참... 李兵長, 나 軍隊生活 4개월이나 남았는데 벌써 屍體 取扱할거야" 하면서 "김흥수 너 나랑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하며 食堂으로 데려 갔다.
그는 나와 같이 밥을 먹고는 PX로 가서 고량주 3병과 오징어 한마리를 사서 補給倉庫 뒤로 가더니 한잔하라고 권하였다. 술을 잘 못먹는다 했더니" 너 생긴거는 제법 할것 같은데 술을 못한다고? 그래, 그럼 한잔만 해라"고 한다.
더 拒絶을 하다가는 진짜 경을 칠 노릇이었다. 自隊配置 받은 날 술마신 卒兵이 몇이나 될까, 아니 있기나 할까 생각이 드는데 새삼 異色 經驗을 하게 해준 그 古參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그 古參은 더는 아무 말 없이 병채로 입으로 가져 가더니 그 자리에서 2홉이 소주병만한 고량주 3병을 비워버리는게 아닌가. 그러고도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고 걸음도 흔들림이 없었다. 뒤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가도 군기가 빠졌다며 졸병 목을 발로 밟으며 물을 먹이는 상당히 暴惡한 性格의 所有者였는데 나에게는 왜 그리 잘 대해 줬는지 모를 일이다.
그 이후로도 團體 氣合때를 除外하고는 그가 나에게 毆打를 하거나 氣合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는 故鄕이 昌原인 權 xx라는 사람이었는데 社會에서는 술집 從業員으로 일 했었다고 했다.
체격이 中間 정도인데도 不具하고 힘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는데 속된 말로해서 통뼈였다. 65년의 歲月이 흘렀는데도 그의 이름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그때의 記憶이 강하게 남았던 탓이 아닌가 싶다.
잊을 수 없는 또 한사람은 내가 自隊에 配置를 받아 오기 전 저녁 點呼時間인 줄도 모르고 초저녁부터 野積場 호로 밑에서 잠을 자다가 脫營한 것으로 誤解를 받아 온 中隊가 발칵 뒤집혔던 事件의 主人公이었다.
중대에서 顧問官으로 알려진 이른바 돌아이 기질이 있는 3 月軍番 일병인 古參이었는데 평소 나를 못마땅하게 보았는지 事事件件 是非를 걸고 까다롭게 굴더니 自隊에 配置를 받고 어느 程度 軍隊生活이 몸에 조금은 익어 가던 두달이 지났을 어느 날, 步哨를 다 서고 난 그가 밤 1시 쯤 나를 깨워 예의 창고 뒤로 데려가더니 "차렷, 열중 쉬어! 야 김흥수 너 똑바로 못해"하면서 쪼인트를 까는게 아닌가. 몇대를 맞고 나니 오기가 생겨 "차렷! 열중 쉬엇, 차렷! 열중 쉬엇 "하는 그의 구령에 짝발을 짚고는 動作을 하는 둥 마는 둥 그냥 서있었다.
열 받은 그가 약 1時間 동안을 발과 주먹으로 때렸는데 나는 그런 姿勢로 끝까지 固執을 굽히지 않고 때리는 대로 매를 맞았다. 그날 以後로는 그가 特別히 나만 괴롭히는 일은 없었는데 아마 그때 내 태도에 조금은 질린게 아니었나 싶다.
역시 오기를 부릴 때는 確實히 부려야 하는 模樣이었다. 대신 2月 軍番 同期들과 함께 氣合을 받는 團體集合은 부쩍 늘었다. 軍隊에서는 1月에 入隊한 兵士들을 1月 軍番, 2月에 入隊한 병사를 2月 軍番하는 식으로 同期를 정하였는데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날씨가 추운 1월, 2월에 入隊한 군번들의 사람들이 조금 강한 氣質을 가진 것 같았고 3월, 4월 軍番은 그 보다는 유했지만 조금 깐깐한 면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5, 6月 軍番과 7, 8月 軍番은 訓練받을 때의 날씨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무르고 약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9월에서 12월까지의 軍番에 대해서는 별로 記憶나는 게 없는데 아마 이 時期에는 入營하는 兵士가 적고 部隊에 배치되어 오는 兵士 또한 거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2 월軍番 同期들은 막내같은 氣質을 가진 유한 기질의 戰友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더 윗 同期들의 표적이 되어 자주 기합을 받지 않았나 싶다.
한창 피끓는 젊은 時節에 거친 男子들끼리 모여사는 兵營生活이고 보니 氣合을 주는 사람이나 氣合을 받는 사람이나 그때 뿐 아픔은 記憶으로 남지는 않았다. 어찌됐던 65년의 歲月이 흐른 오늘까지 그들이 잊혀지지 않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낼까 생각나며, 지금 다시 만나면 그 때의 感情들은 다 잊고 소주라도 나누어 마시며 그 때의 일들을 떠올리며 밤을 새워 얘기 나누고 싶어지는 것을 보면, 亦是 세월은 當時에는 그렇게 밉던 사람도 보고 싶어지게 만들 정도로 강한 忘却의 美德을 가지고 대인의 寬大함을 불러 일으키는 妙藥인게 分明한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江原道의 겨울은 엄청추운 것이어서 밤중에 小便을 누면 映畫에서 보는 北極에서 처럼은 아니 었지만 김이 나는 몸쪽의 것과는 달리 흘러가는 물줄기의 끝은 이미 얼어가고 있었고 洗滌場에서 밥을 먹고 난 후 食器를 딱으면 물기가 닿는 瞬間 强力본드 이상의 강한 接着力으로 食器에 손이 쩍쩍 달라 붙었다.
에스키모들이 짓는 얼음집은 분명 콘크리트집 以上으로 堅固할 것이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았는데 浪漫으로 보는 즐거움은 잠시뿐 겨우 내내 치워야 하는 눈은 苦役일 뿐이었다.
쌓인 눈이 練兵場 한쪽에 치워져 햇볕 난 따스한 날에는 녹았다 다시 눈이 와 쌓이면 치워져 한쪽에 쌓여 있다 다시 녹고 다시 쌓이고 하였다. 겨울이 한창인 어느 눈오는 날 예의 그 古參이 마시다 버린 술병이 막사 뒤쪽 뜰에 버려진 것을 中隊長이 發見 했는데 전 中隊員이 集合命令에 따라 팬티만 입고 눈오는 練兵場에서 허수아비 姿勢로 서서 술병을 버린 사람이 스스로 걸어 나올 때까지 서있어야 하는 氣合을 받았다.
밤 1時에 時作된 氣合은 그 古參이 自身이 마셨음을 밝히고 난 밤 3時가 되어서야 끝이 났고 그제서야 빼치카를 땐 따스한 內務班으로 들어가 쪼개진 짧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물론 술을 마셨던 그 古參은 完全軍裝을 하고 다음 날 오전내내 練兵場을 돌아야 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조금 疲困하기는 했으나 몸은 멀쩡했다. 그렇게 酷毒한 날씨에 팬티만 입고 눈오는 練兵場에서 2 時間을 가만히 서 있었는데도 感氣하나 걸리지 않은 것은 그 무엇으로도 식힐 수 없는 뜨거운 젊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 月에는 入隊 후 8個月만에 첫 休假를 가게 되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첫 休假를 나가는 卒兵의 구두를 古參이 광이 나도록 딱아서 신기고, 베일 程途로 목깃을 빳빳히 다린 戰鬪服을 입혀서 "故鄕 앞으로" 休假를 보내는 게 그 時節의 軍隊美風良俗이었다.
광내고 때빼고 중대정문을 나오는 瞬間에 느끼는 解放感은 무엇에도 비유할 수 없는 爽快함이었다. 그 길로 抱川市內의 시외버스 터미날로 가서 龍山驛에 내려 三角紙에 위치한 陸軍本部 副監監室에 찾아가 紹介하는 사람, 아는 사람 그곳을 찾아가 兵籍擔當者를 만나 카투사에 가는 試驗이 있는지 問議하니 없다하면서 釜山에 있는 陸軍印刷工廠에서 技術工 募集이 있다하면서 試驗應試願書를 받아 陸軍本部에서 當日 試驗에 應試하고서 龍山驛으로 찾아가 12열차에 乘車 釜山驛에 내려 故鄕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초가을 10月 軍用列車를 타고 하염없이 北으로 올라 온 때가 그저께였는데 벌써 季節이 겨울이 머지 않은 봄으로 바뀌어 있었다. 故鄕에서 보내는 5박 6일의 休假는 親舊들과의 만남의 連續이었다. 그렇게 6日間의 時間은 흘렀고 軍人에게 社會에서의 6日이라는 時間은 그리 길지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저 집에서 잠자고 親舊들 만나 술마신 일이 전부였는데 그 때는 休假라는 單語가 왜 그리도 懇切함으로 다가 왔었던지. 별로 한 일도 없이 아쉬운 休假가 끝나고 다시 釜山으로 내려와 釜山鎭驛에서 12軍用列車에 搭乘 抱川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豫程보다 빨리 抱川에 倒着하여 혼자서 茶房에서 커피도 마시고 하며 단 1분의 어김도 없이 주어진 時間을 다 소모한 다음에야 歸隊를 하니 저녁식사 準備가 한창이었다.
中隊本部에서 休假 歸隊報告를 하고 식판을 들고 食堂으로 향하니 고참이 "김 일병 休假는 잘 갔다 왔나? 사제밥 먹다 짠밥 먹겠어? 너 社會生活 며칠하더니 아주 社會人이 다 되었구나. 休假도 다녀 오고 했으니 이제부턴 군기부터 원위치 해야지" 하는 소리에 한층 軍歌소리의 톤을 높혔다.
軍隊에서 移動中에는 恒常 구령을 붙이거나 軍歌를 부른다. 食事하러 갈 때도 마찬가지다. "보람찬 하루일을 끝 마치고서 두다리 쭉 펴면 故鄕의 안방 얼싸 좋다. 金一兵 신나는 어깨춤..... "그렇게 그 해 겨울이 지나갔다.
이듬 해 때는 1958년 10月에 光州步兵學校 尙武隊內 機甲學校 敎育 命을 받았다. 機甲學校 12週間 敎育期間의 初盤期에는 機甲制式訓練부터 時作해서 各種 군기敎育을 통하여 强忍한 精神力을 길러주는 地上의 王者 無敵 戰車兵을 養成한다.
하루의 일가는 모든 行動 하나하나에 군기를 暫時도 잊을 수 있도록 매서운 눈초리로 監視를 한다. 初盤期에는 理論敎育을 위주로 하지만 中盤期에 접어들면 直接 戰車에 乘車하여 操縱裝置와 無電機 操作法 그리고 포사격 戰術等을 손으로 직접 操縱하면서 實戰訓練에 들어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後半期에 접어들면 실제 戰車를 操縱하는 訓練을 받는다.
거꾸러 매달아 놓아도 國防部 時計를 돌아간다는 名言을 마음에 세기면서 敎育訓練으로 힘든 하루하루를 마음에 慰安을 삼는다. 마지막 단계로 後半期에는 戰車操縱 敎育을 받는다. 操縱敎育場은 장성의 飛蛾敎育場이라고 하는데, 그곳애서는 酷毒한 訓練을 받는다. 黃土길 比包場 道路는 탱크가 지나가면 뽀얗게 먼지가 일어서 앞이 보이지 않고, 비가 내리면 黃土가 軍靴에 달라붙어 발이 빠지지 않을 程度다. 操縱敎育場은 自動車 運轉學院처럼 各種코스를 通過하고, 平地 走行도하며, 특이한 指向地物인 障碍物 通過와 江을 건너는 渡河訓練까지 한다. 戰車操縱敎育은 初盤期 받은 精神敎育에 主特技 理論敎育 그리고 實習訓練을 綜合的으로 應用해서 마지막으로 하는 敎育이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實題로 操縱敎育場 敎育이 實施된다” 戰車는 操縱手 한사람의 失手로 國防部 財産의 損失과 人命被害를 가져올 수 있기때는에 精神 똑바로 차려야 한다“ 먼저 1차적으로 주지를 시킨다.
”左右로 정열“ ”앉아“ 일어서” 앉아“일어서.”저쪽에 보이는 障碍物들을 돌아서 先着順으로 集合“ 이렇게 精神을 빼놓고 時作한다. 그리고 나서 乘下車訓練을 실시한다. ”操縱手는 다른 乘務員보다 특히 신속한 行動을 要하며, 乘車! 라는 口號와 함께 乘車를 한다.
“乘車” ‘하차“ 그래도 無盡藏 빠르 速度로 뛰어서 戰車에 올라가서 햇지를 열고 操縱席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마음에 안든다고 하차 시킨다. 하차” 이번에는 連屬으로 지시를 한다. “승차” “하차”“승차”“ 하차" 戰車에 뛰어올라 操縱席에 들어갈만 하면 下車하라고 하고 下車하면 乘車하라고 한다. 이렇게 1段階 乘車하자 訓練을 하면서 숨이 차서 벌써 핵핵덴다. 다음 操縱訓練이다.
먼저 戰車에 오르면 핼맷을 쓴다음 構內電話를 開放해라,” “그다음에 助敎의 指示에 따른다. 萬若指示에 따를지 않는 兵士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 “알겠는냐? 助敎말한마디 한마디마다가 편한말이 하나 없이 恐怖雰圍氣를 조성한다. 그리고나서 順序를 정하고 몇대의 戰車에 나누어서 助敎 한명에 操縱手 한명씩 1 : 1操縱訓練을 時作한다. “김일병 승차” “냅! 승차” 하면서 복장을 하고 超高速으로 궤도를 밝고 戰車에 올라 선다.
어허! 動作봐라~ 다시下車“ ”乘車“이렇게 다시한번 乘車를 하고나서 햇치를 열고 操縱席에 앉아서 가뿐숨을 몰아쉰다. 핼맷을 쓰고 나서 바로 構內電話를 開放해여한다. 그렇지 않으면 엔진소리가 왕왕대기 때문에 전혀 들리지 않는다.
정신이 없어서 핼맷만 쓰고 構內電話 開放하는것을 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후 無電機 안데나를 뽑아들고 핼맷의 머리통을 후려 갈긴다.“야! 이 ×× 어디에 精神을 팔고 있어 양” 砲탑위를 처다보니 助敎가 構內電話 開放하라고 손짓을 한다.
얼런 핼맷의 構內電話 스윗치를 操作하니 그때서 부터는 핼멧의 핸드폰으로부터 욕지거리가 솥아진다. “精神 똑바로 안차리면 죽어버리다” 事實 처음으로 시동걸린 탱크 操縱席에 앉으니 戰車가 왜그리도 커보이는지 “操縱手! 出發準備 됐나?”
“넵! ”그럼 出發한다“ 주자브레이크를 들고 변속레바를 드라이브로 옮긴다. 다음 操縱핸들을 잡고 加速페달을 밟으면 前進한다. 하지만 그게 쉬운게 아니였다. 핼맷을 쓰고 있으나 머리가 멍하고, 엔진소리는 왜그리 크게 들리는지 왕왕내니 精神이 없다.
그리고 平素에 시동걸지 않고 操作만 해보다가 始動걸린 狀態로 出發하려니 하나도 記憶이 안난다. ”뭐하나 야! 이새 ×× 야 出發하란 말이야“ 瞬間 갑자기 加速페달을 쿡! 밟으니 덜거덩 戰車가 뛰어 나간다.
"야! 뭐하나 야! 이 개 ×× 야 操縱 똑바로 않해! 양!” 그러나 自動車 運轉을 배울때는 누구나 그렇지만 助敎가 慾하고 소리 지르면 주눅이 들어서 못하는것 처럼, 벌벌 떨면서 戰車의 핸들을 잡고 있으니 底節로 操縱이 될리 없다.
加速페달을 밟았다거 놓았다가 하니까 連信 戰車가 옮컴댄다. 그리고 操縱핸들도 살포시 잡고서 가법게 操縱하면 되지만 不安해서 꼭잡고 操縱을 하니 50톤이나 되는 戰車가 먼지를 풍기며 지그재그로 왔다갔다 하면서 操縱 實力이 엉망이다.
이것이 初步 戰車操縱手의 特徵이다. 暫時도 끊지 않도록 질러되는 말소리는 指示가 아니고, 아예 慾지거리로 고함을 잘러대니 귀가 아풀 정도다. 나중에 助敎가 戰車丈席에서 밖으로 나와 操縱手 머리에 아예 서있다. 똑 바로 가란말이야 개 × × 야“ 점점 不安해서 탱크가 제대로 갈리가 없다.
비틀비틀 가다가 여기저기 障碍物도 스치고 지나가기도 한다. 잠시후 쾅! 하면서 벼락이 내리친다. 助敎가 軍靴발로 핼맷쓴 머리통을 내려 밟았다. 깜짝 놀라 모가지를 빼고 비틀비틀 戰車가 먼지를 풍기면서 앞으로 나간다.
그러나 언제 또 軍靴발로 머리통을 내려 밟을지 몰라서 조마조마하다. 이렇게 初步者의 操縱은 시작되고 軍靴발로 머리를 몇번 밟히다 보니 얼떨결에 서너바퀴 走行을 했다. 이렇게 初步者의 操縱은 時作되고 軍靴발로 머리를 몇번 밟히다 보니 얼떨결에 서너바퀴 走行했다.
이런 現狀은 나혼자만의 現狀이 아니였다. 여가저기 지나가는 初步操縱手들의 操縱 實力은 한마디로 엉멍이다. 어떤 初步者는 산으로 기어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어떠멍청 超寶操縱手는 施設物을 들어 받아 事故도 發生한다. ‘操縱手 스톱“ ”하차“ 이렇게 平地走行 서너바퀴 들면서 下車하여 戰車를 처다보니 어떻게 저렇게 큰 덩치를 操縱했는지 알수 없었다. 暫時후 下車후 助敎는 初步操縱士의 失手를 그대로 덮어두지 않았다.”야! 이 개×× 들 그만큼 시켰는데, 그따위로 밖에 못해, 앙.“ 助敎가 잡아먹을 듯이 앙칼지게 말을 내 뱉는다.
1개조가 操縱敎育이 끝나고 모두 集合하니, 이제부터는 助敎의 指示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것에 댓가를 치루어야한다. ”戰車操縱 잘했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스스로 罪를 印藏하는구나“ 지금부터 戰車밑을 通過하여 先着順으로 集合한다”“實施” 瞬間的으로 우루르 뛰어서 戰車밑으로 기어들어간다. 戰車 바닥이 낮기 때문에 最大한 낮은 포복으로 기어 通過할수 있다. 납짝 업드려서 낮은 포복으로 기어나온다. 그런데 탱크가 크다는 생각은 했지만 바닥의 길이가 이렇게 긴줄은 에전에 미쳐 몰랐다.
팔꿈치와 다리를 허우적 대면서 通過한다. 그러나 한번만에 끝나는게 아니고 야속한 助敎는 3番까지 戰車의 바닥으로 기어나오게 만들었다. “김일병! 저 원수덩어리, 社會에서 만나면 죽어 바릴꺼야” 혼자만의 獨白을 하면서 禍를 푼다.
그리고 軟弱하던 사나이들이 매일같이 악을 쓰다보니 깡다구가 길러지고 있었다. 강한 訓練이 지속될수록 戰車兵들은 저 큰 덩치의 戰車가 내 손으로 움직이고 있다니 대견스럽기만하다. 이렇게 惡魔같은 助敎들 밑에서 철저한 訓練과 氣壓을 받아가며 자상의 王者 無敵戰車病으로 태여난다. 이제 黃色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얼룩무늬 베래모를 쓴 戰車兵으로 誕生되어 前方으로 올리간다.
機甲學校 入校하여 徹底한 군기교육부터 배우기 時作하여 地獄같은 生活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과정이 몸에 익으니 어느새 自身도 모르는 사이에 節度있고 軍紀가 바싹들어 눈알이 똘방똘방하게 돌아가 强忍한 專差兵이 되었다.
12週 敎育이 끝날무렵 日課를 마치고 內務班에 있는데 機甲學校 人事擔當 將校가 찾아와 專屬命令紙를 보이면서 本隊歸隊 準備하란다. 서둘러 個人補給品을 챙겨 더블백에 담고 人事 擔當將校를 찾아가 歸隊 命令紙를 받고 光州驛으로 찾아가 汽車를 타고 大田驛에 倒着, 서울행列車를 바꾸어 타고서 서울 龍山驛에 내려 京畿道 抱川 指捕里가는 버스로 本隊에 歸隊申告를 하니 人事係가 1959년 1월 30日부로 陸軍印刷工廠으로 命令이 났다하면서 내일 出發申告를 하란다. 中隊 本部에 찾아가 人事將校에께 出發申告 陸本人事(兵)命令을 수령하니 1월 28일 出發 1월 30일까지 六軍印刷工廠에 轉入申告도록 되어있었다. 10 탱크部隊에서 힘들게 同苦同樂을 같이한 將,兵 中隊要員의 부러움을 뒤로하고 先輩, 同期와 서로 부등켜안고 남은 軍隊生活을 최선을 다하고 故鄕가까운 곳으로 간다면 아쉬운 離別을 考하다. “잘있거라 抱川 지포리 쪽을 보면서 오줌도 안눈다. ‘이런 생각들었다. ”야호! 드디어 故鄕 가까운 釜山으로 떠난다. 마치 軍隊生活을 다한것 마냥 신났다.
抱川을 出發 서울 龍山驛에 到着하여 12列車에 몸을 싣고 釜山에 倒着 南區所在 陸軍印刷工廠 정문에 到着하니 衛兵所 入口에 들어서자 衛兵所에 待期하던 中士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면서 中隊本部에 案內되어 轉入申告를 마치고 곧바로 所屬中隊에 配置되지 앉아서 臨時的으로 本部中隊에 머물게 되었다.
그곳에서 人事擔當 상사님의 모든 案內를 받으며 하루동안을 生活하게 되었다. 그는 말소리가 부드러웠으며 차근차근 說明도 잘해주면서 全軍에서 差出해 온 印刷技術工이 8名이라며 說明을 해주신다. 陸軍印刷工廠 偏在는 中隊本部, 管理部, 平版部, 活版部, 製本部로 細分되고 大隊兵力으로 全軍이 必要로 하는 印刷物을 平版印刷, 活版印刷하여 製本部에 製本하여 出庫하는 일을 하다.
나는 活版部 庶務係로 補職을 받게 되어 工場 內部을 들러본봐 全紙 揷紙機 7대 全紙班 揷紙機 16대 옵셋 印刷機 15대로 倒合 印刷機 30대로 終日 짤각짤각하는 機械소리를 듣고 事務室 5평정도에 防音裝置가 되는곳에 補職을 받아 들러가니 선임 兵長 庶務가 반갑다하면서 握手를 나누니 일주후 除隊 歸隊하다면서 業務忍界 하기에 業務를 引繼 받고서 다음날부터 印刷된 用紙를 全紙換算하여 一日報告書를 作成하여 副長에께 決裁를 得하고 일가가 끝나면 內務班 生活도 上兵進級 干涉받지 않는 生活로 1년동안 生活하면서 土曜日면 外泊申請하여 故鄕에 자주 갔고, 당시 시내 뻐스는 軍人에께는 惠澤주어 無料로 外出證을 받아 釜山市域 전곳을 다녔다.
國防 義務時計는 36個月 4個月이라는 歲月이 지나 除隊 命令 받게 되다. 除隊하면서 軍에 支給받은 모든 것을 반납하고 새로운 出發을 위하여 故鄕으로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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