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보다 사후에 더 문명(文名)을 날리는 이가 있다. 여성으론 단연 난설헌이 꼽힌다. 단군 이래 여류문인으로 난설헌 만큼 회자 된 여성은 없는 듯하다. 근·현대에 와 걸출한 여류문인들이 배출됐지만 시대와 사회 환경을 감안해 보면 역시 난설헌의 문학세계는 깊고 광대하다고 하겠다.
이는 한시의 최고 경지라고 인정되는 당나라 시들을 배워 그에 비견되는 시인들이란 의미다. 손곡의 얼굴은 단아하지 못한데다 성격이 호탕하여 절제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세속의 예법까지 익히지 않아 당시 사람들에게 호의를 얻지 못하였다. 고금의 역사와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 애기하기를 즐겼으며 술은 주선 이태백(酒仙 李太白)에게 결코 지지 않을 기호품이다. 그는 세속을 벗어나 풍류천하를 즐겼으며 시로서 위안을 받고 시로 자신을 표현하였다. 그런 그를 반기는 유명인사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이·이황·이산해 등 대학자들과 정사룡·고경명·송상현·정문부 등과도 신불을 떠나 학문을 애기하며 폭넓은 교우생활을 즐겼다.
손곡의 시는 중국에서 더 높이 평가되었다. 명(明)대의 주지번(朱之蕃)은 손곡의 시 《만랑무가》(漫浪舞歌)를 보고 “이 작품이야 말로 이태백에게 견준다 해도 어찌 뒤떨어지겠는가!” 라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석주 권필(石州 權韠·1569~1612)은 《반죽원》(班竹怨)을 보고 “이것을 《청련집》(靑連集·이태백 문집) 가운데 넣는다면 아무리 안목이 높은 사람이라도 쉽게 가려내지 못하리라”고 극찬 하였다. 손곡의 아버지는 고려 문장가 이첨(李詹·1345~1405)의 후손 이수함(李秀咸)이며 어머니는 홍주 관기다. 신분이 다르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이 조선사회다. 학문으로 말하면 중국의 주지번까지 깜짝 놀랄 정도니 출사(出仕)하면 사대부로서 당당한 지위를 누렸으리라...
그의 화려한 문우(文友)가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다. 율곡 이이, 퇴계 이황이 누구인가? 그들이 중국의 성리학을 조선의 성리학으로 한차원 높인 천재학자와 대학자가 아니던가... 그런 손곡의 학문세계가 고스란히 난설헌에게 무지개 빛으로 넘어가 27년 동안 화려하고 장엄하면서도 도도하게 꽃피워졌다.
세기적 천재여류시인 난설헌도 여인임엔 다름이 없다.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상대가 있었으리... 그러나 난설헌은 피를 말리고 뼈를 깎는 절제로 자신을 굳게 지켰다. 그러다가 이제 이승에서 헛된 꿈을 미련없이 떨쳐버리고 떠나가려 한다.
‘이웃집 벗들과 내기 그네를 뛰었지요/
띠를 매고 수건 쓰니 신선놀음 같았어요/
바람차며 오색 그네 줄 하늘로 굴려 오르자/
댕그랑 노리개 소리가 나며 버들에 먼지가 일었지요//
그네뛰기 마치고는 꽃신을 신었지요/
숨 가빠 말도 못하고 층계에 섰어요/
매미 날개 같은 적삼에 땀이 촉촉이 배어/
떨어진 비녀 주워 달라고 말도 못했어요’ 《그네뛰기 노래》다. (시옮김 허경진)
기방(妓房)문화는 있어도 규방(閨房)문화는 희소(稀少)하다는 조선의 남존여비 사회에 난설헌은 천둥같이 나타난 존재였었다.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 허엽의 오문장(五文章) 중 유일하게 여인이기도 하지만 더욱 빛남은 최초 여류시인이라는 데에 있다. 한국 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한세대도 살지 못한 짧은 삶에서 누구도 염두에 두지 못한 큰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훌쩍 이승을 떠나버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추보다 맵다던 고부간의 갈등도 숙제를 다 풀지 못한 학생처럼 아쉬움이 남고 특히 친정어머니 김씨의 처연한 모습이 아침에 불끈 솟은 둥근 해 모양 두둥실 떠올라 가슴이 시리다. 천재들은 그렇게 큰 족적만 남기고 훌쩍 떠나 후세인들이 반갑고 즐거워 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상례인 것 같다. 학문과 풍류로 조선의 사대부들의 가슴에 흠모와 폄훼를 동시에 받는 대상이 되었던 황진이가 고작 40년을 살고 갔다. 난설헌 보다야 13년이나 더 살고 이승생활을 정리했으나 한량들의 가슴엔 영원한 로망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난설헌의 친정집은 건천동(현 명동일대)이다. 이곳은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정인지·노수신, 그리고 임진왜란(1592) 때 큰 활약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유성룡·원균 등도 이곳 출신이다. 난설헌은 여성으론 첫 세기적 천재 여류시인이다. 이처럼 난설헌은 결혼하기 전까지는 환경적 조건 역시 최상류 급에서 살았었다. 가정환경과 유년 시절이 그것이다. 하지만 결혼 후 그 환경은 송두리째 바뀌어졌다. 금지옥엽으로 생활해 왔던 15년의 삶은 신혼첫날부터 바뀌었다. 지옥 같은 별당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시를 쓰고 광상산의 신선세계로 여행이 없었던들 난설헌은 13년이란 결혼생활도 더 짧아졌을지도 모른다. 결국 난설헌은 《몽유기》(夢遊記)를 지은 후 1589년 3월 19일 한 많은 감옥 같은 별당 결혼생활을 청산하였다. 난설헌의 문학세계는 현대에 와서 더욱 빛을 낸다. 소설·영화·드라마·뮤지컬 등 전 문학 장르에서 끝없이 재창조되어 한류(韓流)의 스토리텔링이 되어가고 있다. 문화예술창조 에너지의 화수분이다. 그녀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유택에 먼저 간 아들 희윤과 딸 소현의 묘를 앞에 품은 채 영원히 이승과 인연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