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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13 실크로드 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청계산인(홍석경)
9월14일(월) 셀축(에페스)를 출발하여 이즈미르 공항에 간 다음, 다시 국내선 비행기편으로 첫 도착지였던 이스탄불로 갔다. 셀축 오토가르에서 이즈미르 공항까지 버스를 타고 갈까, 기차를 타고 갈까 많이 망설이다가 이 곳 터키에서 기차는 한번도 타본 적이 없고, 또 기차역이 어디있는지도 모르겠고, 열차시간도 모르고 있었기에 그냥 버스를 타는게 비행기 시간을 맞추는데 안전할 것 같다고 아내에게 말하였다. 그런데 아내는 자꾸 기차시간을 알아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차편을 선뜻 결정하지 못한 것은 아내가 블로그에서 읽은 여행기 때문이었다. 셀축에서 이즈미르 공항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 공항까지 데려다 주는 게 아니라 공항근처 고속도로 변에 내려다 주고, 택시를 잡아타고 가라고 하는 바람에 무척 당황했다는 블로그 글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제 에페스 유적지 구경을 모두 마친 늦은 오후에 시간도 남고 해서 호텔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셀축 오토가르에 가서 이즈미르 공항까지 가는 버스편이랑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못하는 영어로 이즈미르 공항까지 직접 가는 버스가 있는지 물어 보니, 버스 티켓 파는 양반이 영어를 좀 하는 오토가르의 터키인을 불러다 통역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공항까지 직접 가는 버스편이 있냐고 물어보니 있다는 것이었다. 오케이! 그럼 내일 버스편으로 이즈미르 공항에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다음 날, 아침 약 3시간 정도 여유를 갖고 셀축 오토가르에 들러 이즈미르 공항까지 직접 가는 버스편 티켓을 달라고 하니, 저거라고 하면서 15인승 승합차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어?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 차 바로 출발할꺼니까 빨랑 타라고 해서 허겁지겁 짐을 뒷칸에 싣고 차에 몸을 실었다. 차는 이즈미르 공항까지 가는 중간에 몇 번 서고 승객이 내리고 타고 했다. 그런데 차는 이즈미르 공항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을 지나쳐 한참 간 다음 다시 유턴을 해서 왔던 방향으로 가다가 어느 정거장에 서는 것이었다. 이 곳에서 나머지 승객이 모두 내리고 차 안에는 나랑 아내랑 둘 밖에 없었다. 어느 덧 시간은 흘러 셀축 오토가르에서 출발한지 1시간을 훌쩍 넘어섰는데, 차는 출발할 생각을 안하고 운전사는 수금한 버스 요금을 한참동안 세고 앉았다.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아서 굉장히 불안했다. 차는 이곳에서 20분 이상을 그냥 서있다가 출발했는데, 한참을 가서 비로소 이즈미르 공항 표지판이 보이는 곳에서 우회전을 하고 공항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데, 이제 비행기 출발시간에 1시간 20분 정도 밖에 여유시간이 없어서 내심 초조했다. 국내선이니까 1시간 정도면 충분할꺼야 하면서... 차가 빨랑 달리기를 바랬다.
그런데 염려했던대로, 승합차 운전기사는 이즈미르 공항이 바라다 보이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더니, 여기서 내려서 저 옆에 대기 중인 택시를 타라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항건물이 코 앞에 보이는 도로변이었다. 도로변 옆에는 허름한 (포장도 안되어 흙바닥이 드러난) 야외 주차장이 있었고 여기에 택시 여러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맨 앞에 있는 택시를 잡아타고 코 앞에 있는 공항으로 갔다. 택시 요금은 정액제로 10리라였는데.. 약간 황당했다. 왜 승합차가 공항까지 들어가지 않고, 공항이 바라다 보이는 도로변에 손님을 하차시키고 택시를 타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됐다. 아마 제도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아뭏든 이 곳은 관광으로 먹고 사는 인구가 많은지라 이렇게 해서라도 골고루 먹고살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했다.
이즈미르 공항에서 이스탄불로 가는 터키 국내선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하늘. 구름이 많이 끼었다.
이즈미르 공항에서도 비행기 출발 (오전 11시20분)이 1시간 정도 늦었던 것 같다. 아뭏든 9월14일(월) 오후에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여 첫날 묵었던 동양호텔에 짐을 풀고, 카리예 박물관 (코라 수도원)을 찾아 나섰다. 어느 덧 날씨는 9월1일 이스탄불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달리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초가을 날씨로 바뀌어 있었다. '프렌즈 터키'란 여행 안내서를 보니, 트램을 타고 이곳에서 가까운 에미뇌뉴 (Eminonu) 역에서 내려 근처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37E, 86번 버스를 타고 에디르네카프에서 하차 후 길 건너 5분거리에 있다고 적혀 있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선명하게 보인다. ^^)
카리예 박물관을 가는 시내버스를 타려면 갈라타 다리 밑을 지나서 맞은편에 있는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가야 한다.
에미뇌뉴 트램 정거장
트램 정거장에서 바라 본 갈라타 다리 부근의 선착장
갈라타 다리 선착장 풍경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가려면 다리 밑으로 해서 맞은편으로 가야 한다. 그걸 몰라서 이곳에서 10분 정도 헤맸다. ㅠ
시내버스 티켓 (이스탄불 카르트)를 파는 매표소.
이스탄불에 도착했을 때 구입했던 카르트에 한 사람당 10 리라씩 충전하였다.
매표소 앞에 있는 시내버스 정류장.
여행 안내서 "프렌즈 터키"에서 알려준대로 86번인가(?)를 탔는데, 운전기사에게 카리예 박물관을 간다고 하니까 내려서 저 앞에 있는 다른 버스를 타라고 했다. 허겁지겁 옮겨 타느라 몇 번 버스를 탔는지 모르겠다 (2x번 아니면 3x번 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카리예 박물관 쪽으로 가는 버스 종류는 무쟈게 많았다.) 이 버스를 타고 가다 손님들에게 '카리예 무제시(박물관)'을 가려는데 어디에서 내리면 되냐고 영어로 얘기하니, 카리예 무제시를 아는 손님이 없었다. 어느 정거장에서 내리라 하여 내렸는데.. 엉뚱하게 카리예 박물관 훨씬 못 미쳐 '파티흐 자미(모스크)' 앞 정거장이었다. 내린 즉시 잘못 내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일단 저 비탈길 위로 올라가 건물을 확인해 보자고 아내에게 얘기하고 가봤더니 상당히 규모가 큰 이슬람 모스크였다. 자미 앞 제법 넓은 공터엔 사람들이 많이 있어 몇 사람을 붙잡고 '카리예 무제시'를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는데 역시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할 수없이 휴대폰의 구글지도를 켜고 카리예 박물관(kariye museum)을 입력하니 여기서 걸어서 대략 20-30분 거리에 있는 것 같았다. 지도를 열어놓고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점점 카리예 박물관 쪽으로 내 위치가 이동하는 것이었다. (스마트폰이 현대판 요술램프의 지니란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 같아 한결 여유가 생겼다. 카리예 박물관에 거의 도착하니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정류장 이름은 아래 사진처럼 Acı Çeşme이었다. (발음이 안된다. ㅠ)
카리예 박물관을 시내버스로 가려면 이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버스 정류장 바로 아래엔 축구장 및 축구클럽 건물이 있었다.
카리예 박물관을 시내버스로 찾아갈 때, 이 축구클럽 이름을 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곳에서 10 m 정도 가면 오른쪽에 내리막 길이 있는데 이리로 내려 가면 아래와 같이 가게 위에 '카리예 무제시(박물관)'라는 간판이 보인다. 간판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좌회전해서 직진하니 박물관 건물이 나타났다.
카리예 박물관 (코라 수도원)
보수 공사를 하는지 수도원 건물 전체를 임시 지붕으로 씌웠다. (몇년 전 사진에서는 이게 안 보였는데...)
입장료는 15 리라 (한화: ~ 6 천원)
중간에 엉뚱한 곳에서 한 30분 헤매고, 또 이곳까지 20여분 걸어서 오느라 오후 5시경에 도착했는데, 다행히 관람시간이 오후 6시까지여서 헛걸음하지 않고 구경할 수 있었다.
코라 수도원은 하기아소피아 성전을 지은 유스티니안 I세 (527-565) 때 건축되었다고 하며, 13세기 제4차 십자군 전쟁(1203-1261년)때 심하게 파괴되었는데, (4차 십자군은 오늘날 중동의 IS와 비슷했던 것 같다. 기독교를 신봉한다는 넘들이 파괴한 기독교 문화유산이 한두개가 아니다. 하기야소피아 성당도 이넘들의 도적질에 첫번째 회랑의 벽면 모자이크 황금 타일이 홀라당 벗겨졌다. 맹신적 신앙심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비쟌틴 황제 안드로니쿠스 2세 (Andronicus II: 1282-1328)가 예술가와 힘있는 정치가를 동원해서 재건을 했다고 한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이 들어선 다음, 1511년에 모스크로 바뀌었는데, 모자이크 성화와 프레스코화는 대부분 건드리지 않고, 오직 일부분만 나무 판자와 회반죽으로 가렸다고 한다. 이슬람 교도들의 문화적 관대함 덕분에 기독교 문화유산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왼쪽에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는 분은 베드로이며, 오른쪽에 성경책을 들고 계신 분은 사도바울이다.
비쟌틴 시대에 그려진 성화에는 이와같이 출입구를 중심으로 좌 베드로, 우 바울 그림이 거의 정형화되어 있었다.
건물 천정과 벽면에 모자이크 성화와 페인팅 성화 (프레스코화?)가 가득한데, 그림의 형식은 하기아 소피아의 그것과 비슷하였다. 후기 비쟌틴 시대에 불어닥친 르네상스 (1261-1350년 무렵)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에서 르네상스적 요소가 가미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기아소피아 성당에서 보았던 딱딱하고 정형화된 기독교 도상체계에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요소가 부분적으로 그림에 가미되었지 않았나 싶다. 따라서, 시기적으로는 하기아소피아 성전의 성화보다는 뒷시기에 그려진 그림으로 생각된다.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비쟌틴 시대에 정형화된 기독교 도상체계이다.
나는 이런 성화에 담긴 세세한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는 지식이 없다.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정도만 구별할 줄 아는지라 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 성화에 대해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다만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이라, 생물학적으로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조상이란게 애시당초 존재할 수가 없는데, 이렇게 예수님의 조상이라며 다윗, 솔로몬, .. 등을 함께 그려넣는 이유가 뭘까? 하는 궁금증은 있었다.
여행 안내서를 읽어보니, 아래 그림은 예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구원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라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말 벽화인데 이런 벽화가 풍성하게 남아 있다는 게 부러웠다. ^^
회랑 끝에 서점이 있길래, <하기아소피아 및 코라>란 제목의 화보집을 하나 구입했다. 이 곳 성화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 있어 언젠가 마음 내킬 때 한번 대충이라도 읽어보려고 구입했는데.. 캐리어에 짐만 자꾸 늘어서 좀 걱정도 되었다. ^^;;
관람시간도 다 됐고, 성화도 다 봤고 해서, 다음 행선지인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찾아 나섰는데, 이 곳 코라 수도원 바로 위 100m 정도 되는 지점에 성벽이 있었다. 멀리 가지 않고 코 앞에 있어서 마치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
그런데 이 곳에는 동로마 시대 때 성벽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고 대부분 후대에 다시 개축한 성벽이라서, 그다지 볼 것은 없었다. 다만 이곳에서 화려하게 핀 무궁화를 다시 볼 수 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대부분 허물어진 성벽이지만 동로마 제국시대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자취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이곳이 아닌 트램을 타고 톱카피 (Topkapi)역에서 하차해서 도보로 5분거리에 있는 성벽을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 성벽은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서 전철을 타고 제이틴부류뉴 역에서 이스탄불 구시가지 (술탄 아흐멧 정거장)으로 가는 트램으로 갈아타고 가다 보면 톱카피역을 지날 때 차장 밖으로 볼 수 있었다. 성벽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풍경을 바라다 보는 것이 관전 포인트로 생각되는데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3중 성벽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으로는 마르마라해부터 골든 혼(콘스탄티노폴리스의 내항)까지 이어진 육중한 성벽으로, 이 성벽 건설의 결과 과거 콘스탄티누스 대제때 건설한 성벽으로 방어할 수 없었던 넓어진 시가지를 방어할 수 있게 되어 더욱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구조를 살펴보면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해자를 갖추고 있는 성벽으로,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가 2미터 높이가 5미터인 외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인 내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 ㎞ 정도만이 앞서 설명한 구조로 되어 있었고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건설된 성벽 방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동로마 제국이 약화되어 수도가 침략을 받았을 때조차 정공법으로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 이 성벽은 그 유명한 훈족의 아틸라가 성벽만 보고서는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퇴각하게 만들었고, 수도를 포위해 쳐들어온 아랍 군대를 모조리 토양의 양분으로 만드는 등 여러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영원히 적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성벽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 대륙에 걸친 신흥 강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자 했던 21살의 젊은 술탄 마흐메트 2세의 야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고, 1453년 4월5일부터 시작된 대 공방전 끝에 마침내 5월 29일 결국 콘스탄티노플도 함락, 2천 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멸망에 이르고 만다. - 상기 내용은 나무위키의 테오도시우스 2세 및 콘스탄티누스 공방전에서 인용한 것으로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대한 내용이 흥미진진하게 소개되어 있으니 이곳을 여행하고자 한다면 한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가면 아래와 같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해군이 골든혼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외벽(왼쪽: 오늘날 구시가지)과 골든혼 맞은편에 있는 성벽 (오른쪽: 오늘날의 신시가지) 사이를 바닷속으로 가로막았던 쇠사슬이 전시되어 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께서 울돌목에서 300 여척의 왜선을 격파할 때 사용했던 전법이랑 비슷한 거였다. 전쟁 당시 비쟌틴 제국의 군대는 불과 7천명 정도였고 오스만 군대는 8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날 이스탄불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가르는 골든혼 방어가 중요했던 이유는 외부로부터 전쟁물자를 조달하고 구원군을 요청할 때 이 골든혼 안쪽에 있는 비쟌틴 해군이 배의 숫자는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해전에 약한 오스만 해군의 해안 봉세를 뚫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만약 오스만 해군이 이 골든혼 안쪽으로 진입하게 된다면, 콘스탄티노플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에 빠지게 된다.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세계 전쟁사에 남을 골든혼 전투 장면
파랑색 배는 오스만 제국 해군의 함선이고, 빨강색은 비쟌틴 제국 (동로마 제국)의 함선이다. 골든혼 입구에 그어진 선이 바로 바닷속 쇠사슬이다. 오스만 해군이 이 쇠사슬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술탄 마흐메트2세는 오늘날 갈라타 타워 뒷쪽의 나즈막한 언덕 위로 함선을 끌어올려 골든혼 진입에 성공하고 비쟌틴 제국 해군을 궤멸시킴으로써 콘스탄티노플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최후의 공성전에서 승리하여 서로마 시대부터 이어진 2,000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바닷속 쇠사슬로 가로막힌 골든혼에 진입하기 위해 야산 위로 오스만 해군의 함선을 끌어 올리는 장면 (상상도)
첫댓글 우리의 옛 조상이 세웠던 오스만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 사촌이 현재 중국 신강지역의 위그르인이라고 하더군요.
위그르인이나 현재 터키인(오스만 투르크)은 생김새가 몽골리안 계통하고는 다르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