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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시 판 : 바로사 게시판
번 호 : 7455
제 목 : [인용] 화냥년에 얽힌 여인네들의 애절한 사연
글 쓴 이 : 사운더
조 회 수 : 191
날 짜 : 2002/06/08 01:58:29
내 용 :
화냥년에 얽힌 여인네들의 애절한 사연
2002. 6. 8. 사운더
"화냥년"은 통상 정조없이 여러 남자들을 상대하는 여자를 말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를 따라가보면 "화냥년" 말은 조선사대부의 썩어빠진 명분론과 책임질줄 모른는 후안무치에 희생당한 우리의 어머니요 누나이고 동생이고 딸인 것입니다.
청나라와의 패전 책임자들이, 전쟁후 전쟁중에 청나라 군사들에게 정조를 잃거나 잡혀갔던 부녀자들을 화냥년이라고 비판하고 배척한 역사적 과오를 아래 인용글에서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조선의 멸망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백성과 임금(사대부) 간의 상호신뢰가 없어진 것입니다. 믿음이 없더진 나라는 끝장이죠... 즉, 어느 누구도 나라를 지킬려고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명분"에 대한 집착하여 "국가"라는 가치가 없어지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던 시대의 비극입니다.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시에도 왕과 관리가 백성보다 먼저 도망하는 기막힌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사운더 주 아래 글 전문인용에 대하여 출처로부터 사전허락받지 못한점 양해바라오며, 글에 대한 저작권은 출처에 있음을 밝힙니다.
병자호란은 1637년 1월 30일 조선 임금이 청나라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그러나 더욱 치욕스런 일이 그 다음에 일어났다. 청나라 군사가 철수하면서 50여만명의 조선 여자를 포로로 끌고 간 것이다. 청나라는 이들 여성 포로들을 나이와 신분에 따라 값을 매겨 이를 갚으면 돌려 보내 주었다. 돈이 없어 돌아오지 못하는 경두도 많았거니와 값을 턱없이 높게 불러 생기는 비극도 있었다. 청나라 심양을 다녀온 좌의정 최명길은
"제가 심양의 관사에 있을 때 ,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되찾으려고 했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깨고 값을 더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그 처녀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체를 사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값을 치르고 돌아오는 것을 속환이라 했고 속환되어 돌아온 여자를 환향녀라 불렀는데 환향녀의 비극이 속편처럼 잇따랐다. [인조실록]을 살펴보자.
인조 036 16/03/11(갑술) / 신풍 부원군 장유가 포로로 잡혀 갔다 돌아 온 부녀자들의 이혼 문제에 대해 계하다
신풍 부원군(新府院君) 장유(張維)가 예조에 단자를 올리기를 “외아들 장선징(張善)이 있는데 강도(江都)의 변에 그의 처가 잡혀 갔다가 속환(贖還)되어 와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은, 자기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되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한다는 이유로 그의 노복으로 하여금 격쟁하여 원통함을 호소하게 하였다. 형조에서 예관으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족의 부녀자가 한둘이 아니니, 조정에서 반드시 십분 참작하여 명백하게 결정한 뒤에야 피차 난처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부부가 된다는 것은 중대한 데 관계되는 일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좌의정 최명길이 헌의하기를,
“중간생략....
신이 전에 심양에 갔을 때 출신(出身) 사족으로서 속환하기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둥켜 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듯이 하여,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나 남편으로 돈이 부족해 속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차 차례로 가서 속환할 것입니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물정으로 참작해 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한이겸의 딸에 관한 일은 별도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심양으로 갈 때에 들은 이야기인데,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자못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다가 사하보(沙河堡)에 이르러 굶어 죽었는데,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주고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이 심양의 관사에 있을 때,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속(贖)하려고 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위배하고 값을 더 요구하자 그 처녀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체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가령 이 두 처녀가 다행히 기한 전에 속환되었더라면 반드시 자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정결한 지조가 있더라도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렵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을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한이겸이 상언하여 진달한 것도 또한 어찌 특별히 원통한 정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이 뒤로는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라 했다. 그러나 이 날의 일을 기록한 사관은 [인조실록]에다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놓았다.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棟樑)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당시의 전교가 사책(史冊)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미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설령 이런 전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법받을 만한 규례는 아니니, 선조 때 행한 것이라고 핑계하여 오늘에 다시 행할 수 있겠는가. 선정(先正)이 말하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하였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조선의 여성들을 더욱 괴롭힌 것은 오랑케보다도 이 사관의 생각과 같은 유교 문화의 관념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최명길 같은 사람보다는 사관과 같은 생각을 가지 ㄴ사람들이 우세하게 많았던 모양이다. 왕의 명령과 지시가 내려졌는데도 이 뒤로 사다부집 자제는 거의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고 [인조실록]은 전한다.
환향녀라는 말은 세월을 거치면서 오늘날 화냥년이라는 말로 남았는데 국어 사전에는 화냥년을 일컬어 '남편 아닌 사내와 관계를 하는 계집'이라 쓰고 있다. 환향녀들이 억울한 삶을 마치고 죽은지 몇백 년이 지났으되, 이 여인들에 대한 비겁한 사대부들의 생각은 화냥년이라는 말 속에 오늘날 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참으로 서글픈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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