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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60년 음력 7월 9일 백제의 수도 소부리(所夫里), 곧 사비성(泗城城)의 마지막 방어선인 황산(黃山) 연봉.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 5만명은 우세한 병력으로 달솔 계백(階伯)이 이끄는 백제군 결사대 5천명을 일시에 짓밟아 돌파하고자 총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초반 네차례의 교전에서 신라군은 백제군의 강력한 저항과 뛰어난 기동작전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고 기세가 꺾이게 된다.
신라 최고의 명장으로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김유신은 화랑들의 희생을 통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고자 했고, 이러한 김유신의 뜻에 따라 관창(官昌)이 단신(單身)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좌충우돌(左衝右突)하다가 백제군의 포로가 되어 참살당하니 신라군 병사들은 분기가 치솟아 일제히 백제군을 포위하여 전멸시켰다. 백제 멸망의 비극적 대서사시는 이렇게 황산벌전투(黃山筏戰鬪)에서 시작된다.
쓰러져가는 나라의 잔병 5천여명으로 5만 대군을 맞아 선전(善戰)을 펼쳤지만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계백 장군. 비록 패장(敗將)의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됐지만 조국의 운명과 함께 가겠다는 일념으로 전쟁터로 나가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그의 태도는 참된 군인의 자세이자 충신의 모범으로 후세에 길이 존경받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의하면 계백 장군은 출전에 앞서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살해했다고 전한다. 당시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의 백성은 적국의 포로가 되어 노예로 전락해 비인간적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손수 처자를 죽인 계백의 처사는 가혹한 게 아니라 당시의 윤리적 가치관으로는 오히려 뜨겁고 지극한 가족애(家族愛)요, 인간애(人間愛)의 발로였다.
계백은 또한 절박하고 극한상황인 전투 중임에도 적장의 무용(武勇)을 아끼고 사랑하여 소년 화랑 관창을 살려 보냄으로써 도량 넓은 덕장(德將)의 풍모를 보였으며, 죽을 때와 자리를 바로 찾아 비장한 최후를 맞은 진정한 무인(武人)이었다.
1300여년 전 만고 충신 계백과 결사대 5천 군사가 순국의 붉은 피를 뿌리며 장렬하게 숨져간 슬픈 역사의 무대 황산(黃山)은 이제 쓸쓸한 농토로 변했지만, 수락산 기슭에 잠든 계백의 무덤은 이 벌판과 백제 망국의 한 서린 역사를 말없이 일러주는 듯하다.
● 죽음을 각오한 전투.
백제의 마지막 도성 소부리에서 동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황산벌에 계백 장군이 이끄는 백제군 결사대 5천 병력이 다다른 것은 660년 음력 7월 9일 새벽이었다. 어제 오후 늦게 도성을 떠나 밤새 달려온 것은 최후의 방어산이요, 절략적 요충인 황산의 관문을 침략자인 신라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연봉을 이룬 야산의 능선과 골짜기들 너머로 희부옇게 동녘이 터오고 있었다. 밤새 한잠도 못 자고 행군해온 5천여명의 장병은 저마다 핏발 선 눈을 들어 훤하게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쳐다보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숯고개를 넘어 진격 중이라는 5만 대군의 신라 군사는 아직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백제 군사들은 누구나 이곳이 바로 최후의 전쟁터가 되고, 그리하여 단 한사람도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무덤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워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어쩌다가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운 판국에 빠져들긴 했지만 한때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하게 만들고, 한때는 멀리 중원대륙까지 건너가 북위(北魏)의 수십만 대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면서 종횡무진(縱橫無盡)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과시하던 백제가 아니었던가. 그런 긍지와 자부심 속에서 연마 단련해온 전통의 백제군인지라 비록 신라군이 5만 대군이라 해도 겁날 것은 없었다.
황산벌은 300~400미터의 야산들로 둘러싸여 20만평의 분지로서 북쪽에 황산성(黃山城), 동쪽에 황령산성(黃嶺山城)과 깃대봉, 남쪽에 국사봉(國師峰)과 산직리산성(山直里山城), 모촌리산성(茅村里山城) 등이 감싸주고 있는 사비성 외곽 방어의 마지막 요충이다.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천험의 요새인 숯고개를 장악하지 못하고 이미 적군에게 넘겨준 지금, 이 황산벌의 최후 방어선조차 무너지고 만다면 신라군은 일사천리로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듯 소부리로 밀고 들어갈 터였다. 드디어 산등성이 위로 7월의 아침 해가 눈부신 햇살을 내쏘며 떠오르자 5천 결사대의 기치와 창칼과 투구가 마지막 아우성이라도 치듯 무섭게 번쩍거렸다.
좌우에 부장(副將)들을 거느린 마상(馬上)의 계백 장군이 군사들 앞에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하기 시작한다.
"백제의 자랑스런 용사들아! 우리는 이제 마지막 전쟁터에 다다랐느니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도다! 오늘 한판의 싸움에 우리 모두, 그리고 그대들의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처자, 경각에 달린 우리 백제의 운명이 걸려 있는 것이다. 군사들이여, 이 사실을 명심하라! 적군은 우리보다 열 배나 많은 5만 대군이라 한다. 그대들 각자가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을 다해 싸우지 않으면 물리칠 수가 없으리라. 그렇지만 백제의 용사들이여! 두려워할 것은 조금도 없도다. 신라 군사 따위를 겁내는 백제 군사는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있을 수 없다! 옛날 옛적 춘추시대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지금 우리와 똑같은 5천 군사로써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70만 대군을 쳐부순 적도 있었느니라! 그뿐이랴, 불과 15년 전 요동전쟁(遼東戰爭) 때도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수십 배가 넘는 당나라 오랑캐를 물리친 사실은 그대들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하건대, 우리 5천 백제군이 한사람당 신라 군사 10명씩만 당해낸다면 능히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나라의 위기를 구할 수 있으리라. 그것이 곧 우리 모두가 살 길이요, 그대들의 가족을 살리는 길이 되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죽을지언정 결코 물러나지 않는 것이 우리 백제군의 전통임을 명심하고 분발 감투하라! 모두 알아들었는가?"
계백 장군의 호령에 이어 5천 결사대가 목청을 합쳐 피를 토하듯 내지르는 대답 소리가 우렁하체 황산벌과 능선의 골자기를 타고 울려퍼졌다. 계백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 작전 지시를 하고 군사들을 배치했다. 계백 자신은 중군을 지휘하여 산직리산성에 머물고, 좌군은 황령산성을, 우군은 모촌리산성을 지키도록 했다. 적은 수의 군사로 열 배의 적군을 평지인 황산벌 너른 들판에서 정면으로 맞아 싸운다는 것은 병법(兵法)의 병자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나 하는 짓이므로 지형지물을 교묘히 이용하여 신라군이 산마루 좁은 관문을 타넘고자 할 때 일시에 협공하여 승리를 거두려는 상승장군(常勝將軍) 계백다운 탁월한 전략이었다.
● 5천 결사대로 5만명의 신라 대군과 맞서
군사들이 좌, 우, 중군 3영(三營)으로 포진을 마치자 전부터 산성을 지키고 있던 수자리 진수병(鎭守兵)들이 급히 주먹밥을 만들어 나누어주었다. 장졸들이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침밥을 먹을 동안 계백은 잠시나마 쉬라는 부장들의 권유도 마다하고 군막을 나서서 산성 주변을 거닐었다. 계백은 장검(長劍)을 짚은 채 우뚝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또한 살갗 아래 붉은 피가 뜨겁게 흐르는 인간이었으니 어찌 감회가 없었으랴. 한평생을 전쟁터로 떠돌며 숱한 전투를 치르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온 강철 같은 의지의 사나이였건만, 계백도 남들처럼 가정에서는 한 여자의 지아비였고 자식들에게는 둘도 없는 아버지였다. 적어도 어제 오후까지는 그랬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하는 아내도 귀여운 자식들도 모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어찌하랴! 계백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치밀어 오르는 고뇌를 억누르며 오열을 삼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느리라! 이제 곧 저승에서 다시 만날 터.....'
어제 아침, 임금으로부터 출전 명령을 받기 전부터 계백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대세를 만회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늦었다는 사실을...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져버릴 정도로 허약한 나라가 아니었는데 이 지경이 도고 말다니, 생각할수록 분하고 원통한 노릇이었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고 해도 아니 싸울 수는 없었다. 그저 팔다리를 묶고 앉아서 적군에게 운명을 내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힘을 다해 싸워서 막아내야만 했다. 하루 종일 사군부(司軍部)의 무독(武督), 좌군(佐軍), 진무(振武) 등 무관(武官)들을 거느리고 사비성내 상(上), 하(下), 전(前), 후(後), 중(中), 5부(五部)의 5항(五巷)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불러모았다. 가까스로 5천여명의 병졸을 끌어모은 것은 뉘엿뉘엿 해가 기울어갈 무렵이었다.
계백은 출전에 앞서서 마지막으로 집에 들렀다. 하지만 그것은 처자식의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고 그들에게 안전한 살 길을 일어주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라가 망하고 도성이 함락되면 적군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와 1만호 5만여구의 소부리 온 저자를 무참히 유린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찌 처자식을 침략자들의 손에 노예로 내줄 수 있으랴. 어찌 신라와 무자비한 당나라 군사들의 더러운 발 아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짓밟히게 버려둘 수 있으리요! 계백은 칼을 뽑아 처자식을 차례로 베어 목숨을 끊어주었다. 그리고 온 집안에 불을 질러 시신조차 적군의 손에 닿지 않게 만든 다음 성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던 것이다.
●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황산벌로 출전
"적군이 나타났다!"
"신라 놈들이다!"
군사들의 외침 소리에 계백은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뜨고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마지막이군. 좋아! 올 테면 얼마든지 와보라. 이 계백이 백제의 마지막 정신을, 마지막 힘을 후회도 유감도 없이 보여주리라! 계백은 칼자루를 힘껏 움켜잡았다.
아마도 계백 장군은 무왕(武王) 때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무예와 병법과 학문을 수련하여 장성하자 신라와의 전쟁에 참전하여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계백의 출신 가계와 성장 내력에 관해서는 현존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그의 성명조차도 분명하지가 않아서 본성(本姓)이 왕족인 부여씨(扶餘氏)라는 설도 있고, 백제 귀족으로 8대 성씨의 하나인 해씨(解氏)의 음이 와전되어 계(階)가 되었다는 설도 있고, 심지어는 본래 성명이 고승(高升)이었다는 믿을 수 없는 설까지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1965년 말 백제문화 되찾기운동을 꾸준히 벌여오던 고(故) 홍사준(洪思俊) 전 부여박물관장 등의 노력에 의해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수락산 기슭에서 황폐한 계백장군 묘가 발견된 데 이어 1980년 초에는 백제사적연구소에 의해 부여군 충화면 천등산 일대에서 계백 장군의 출생지이며, 계백, 성충(成忠), 흥수(興首) 등 8충신의 수련터로 추정되는 건물터 3개소가 발견되어 백제사(百濟史)와 만고 충신 계백의 비장한 생애를 재조명할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그가 인용한 해상잡록(海上雜錄)에는 계백이 오늘의 괴산으로 비정되는 가잠성(假岑城)의 성주로 있었다고 한바, 당시 백제의 큰 읍성은 왕족으로 지키게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그의 성이 어저면 부여씨가 맞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비운의 임금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한 것은 641년 3월. 무왕의 태자인 그는 결단성이 있고 효성이 지극하며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즉위 이듬해에 신라의 김유신이 가잠성을 공격할 때 의자왕은 정병 1만을 윤충(允忠)에게 주어 대야성을 함락시키게 하고 신라의 서쪽 변경 40여개 성을 빼앗았는데, 그때 대야주 도독은 김춘추(金春秋)의 사위 품석(品釋)이었다. 사랑하는 딸 고타소와 사위가 백제군에게 살해당했다는 흉보를 들은 김춘추는 종일 기둥에 기대어 슬퍼하다가 이빨을 갈며 기필코 백제를 멸망시키겠노라 맹세를 하고는 대국인 고구려로 당으로 쫓아다니며 원수 갚을 일에 여념이 없었다. 647년 신라에서는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죽고 사촌인 승만(勝曼)이 즉위하니 진덕여왕(眞德女王)이다.
● 삼국통일의 첫번째 표적이 된 백제.
648년에 김춘추는 셋째 아들 문왕(文王)을 데리고 당나라에 건너가 태종(太宗) 앞에 꿇어앉아 군사를 내어 백제를 쳐달라 간청하고, 중국의 의관을 가져다 입고 쓰며, 법흥왕(法興王) 이래의 신라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쓰는가 하면, 아들들을 인질로 남겨두는 등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화 사대주의의 병균을 이 땅에 퍼뜨리기 시작했다.'
654년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죽자 51세의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김춘추의 부인 김문명은 김유신의 작은 누이동생으로 두 걸물은 처남 매부간인데, 즉위 이듬해 60세의 김유신이 상처하자 무열왕은 셋째 딸 지소를 후취로 주어 사위로 삼기도 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 정벌군을 발진시킨 것은 660?m 5월 26일. 무열왕은 대장군 김유신, 장군 김진주(金眞株), 김천존(金天存) 등과 더불어 5만 대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떠나 6월 18일 오늘날의 경기도 이천인 남천정으로 북상했다. 서라벌에서 소부리로 가는 직선거리를 택하지 않고 3배나 먼 길을 돌아서 간 이유는 첫째, 출병을 고구려 침공으로 위장하려는 양동작전이요, 둘째는 국경을 수비하는 백제의 정예군을 우회하여 배후를 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한편 당황(唐皇) 고종(高宗)의 명령을 받은 소정방(蘇定方)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13만 대군을 이끌고 산동반도를 출발, 황해를 건너 6월 21일 덕적도에 상륙하니 무열왕은 오늘의 충북 음성인 금돌성(今突城)에 머물며 태자인 김법민(金法敏)을 보내 당군을 영접하고 양군이 수륙으로 진격해 7월 10일 백제의 도성 소부리를 총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면 그 동안 백제는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는가. 즉위 이듬해 윤충(允忠), 의직(義直) 등 장수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켜 위세를 떨친 의자왕(義慈王)은 그 뒤에도 계속하여 의직, 은상(殷相) 등 장수들을 보내 신라를 침공하게 하고, 655년 8월에는 상좌평 성충(成忠)을 보내 동맹을 맺은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쳐서 빼앗았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는 바로 그해부터 매사가 빗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그해 2월 태자궁을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하고, 궁궐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는데, 그 이듬해 3월에 '궁인(宮人)과 더불어 음란하고 탐락하며 술 마시고 노는 것을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극간하니 국왕은 노하여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뒤부터는 감히 간하는 신하가 없어졌다고 한다.
● 내정문란, 국론분열이 백제 망국의 원인
성충이 의자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된 것은, 단재의 주장에 따르면 김유신의 모략전(謀略戰)의 재물이 된 때문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신라 17관등 중 제9관등인 급찬(級贊) 조미압(曺味押)이란 자가 있었는데 백제군의 포로가 되어 좌평 임자(荏字)의 가노(家奴)가 되었다가 탈출하였다. 김유신이 조미압을 첩자로 이용하여 임자를 포섭하고 금화(錦花)라는 무녀(巫女)를 여간첩으로 침투시켜 의자왕의 총애를 얻게 하자, 기회주의자인 간신 임자와 요녀 금화가 의자왕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충신들을 멀리하게 만드니 마침내 백제 국정이 어지럽게 되었다고 한다. 좌평 성충(成忠)과 장군 윤충(允忠)을 동일인물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단재는 다 같이 왕족인 부여씨로서 형제간이라고 해석했다. 그리하여 임자와 금화의 요망한 이간질로 국왕의 배척을 당해 윤충은 울화병으로 분사(憤死)하고, 성충은 임자와 금화 일당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미움을 받아 옥에 갇혔다고 했다.
성충은 옥중에서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하므로 한 말씀 더 드리고 죽으려 하나이다. 신이 항상 시세(時勢)의 변화를 관찰한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듯합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는 그 자리를 살펴 늘 상류에 처하여 적을 맞아 싸운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겠사오니, 만약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숯고개를 막고 수로로는 기벌포(技伐浦)를 지켜 그 험난한 곳에 의지해 막아 치는 것이 옳겠나이다.' 하는 글을 올리고 28일간을 굶다가 한을 남기고 이승을 버렸다. 이보다 앞서서 또 다른 충신인 좌평 흥수(興首) 또한 의자왕의 미움을 받아 오늘의 전남 장흥인 고마미지(古馬彌知)로 귀양 가 있었다.
의자왕(義慈王)은 657년 정월에는 41명이나 되는 왕자들을 모두 좌평으로 삼고 식읍을 주었다는 믿기 힘든 말을 김부식(金富軾)이 기록했는데, 그토록 영특하고 총명하던 의자왕이 재위 20년중 무슨 까닭으로 마지막 4~%년간 급작스럽게도 황음무도한 폭군(暴君)으로 전락했다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려니와, 의자왕이 나라를 망친 무능하고 무도한 임금이라면 어떻게 하여 백성들이 당나라로 끌려가는 군왕을 바닷가까지 울며불며 뒤다라가 애통하고 절통해했으며, 또 당연히 망할 왕국이었다면 백제 유민들이 4년간에 걸쳐 피어린 항쟁을 벌일 턱도 없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렇게 하여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 18만 대군이 동서 수륙 양면으로 침공해 온다는 급보에 접한 백제 조정은 그제야 국왕의 정무소인 남당에서 대책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의견이 분분했다. 좌평 의직(義直)은 "당나라 오랑캐들은 바다를 막 건너와 피곤하고 지쳤을 테니 상륙할 때 바로 치면 이내 깨질 것이요, 오랑캐 군사가 무너지면 신라군은 겁을 먹어 저절로 물러갈 것입니다."고 했고, 좌평 상영(常永)은 "당군이 도착한지 오래되지 않아 전의가 식지 않았을 터이니 기진맥진할 때까지 기다렸다 쳐야 하고, 먼저 만만한 신라를 침이 옳습니다."고 주장했다. 용단을 내리지 못한 의자왕은 귀양살이하는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계책을 물었다. 흥수가 말하기를, "탄현과 기벌포는 국가의 요충이라 장부 1인이 칼을 들고 막으면 만인을 막을 수 있는 곳이니 수륙의 정병을 봅아 두 곳을 지키게 하고, 대왕께서는 도성을 방비하다가 되받아치면 백전백승(百戰百勝)하리다."고 했다. 성충이 죽어가며 올린 말과 같았으나 임자 일당이 극력 반대했다.
"흥수가 오랜 귀양살이로 대왕을 원망하며 늘 해치려는 마음을 먹고 있을 테니 어찌 그의 말을 따르겠나이까? 당군은 기벌포를 지나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게 하여 치면 항아리 속의 자라를 잡듯이 양 적군을 일시에 격살할 수 있으리다."
● 우왕좌왕하다가 금쪽같은 시간만 허비
의자왕이 들어본즉 저 말도 옳고 이 말도 옳은 것 같아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다시 금쪽같은 시간만 허비하였다. 변경의 수비군이 연달아 들이닥치고 마침내 신라군이 숯고개를 넘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듯 소부리로 쳐들어온다는 보고에 당시 백제 16관등 중 좌평 다음 2품관인 달솔로 있던 계백으로 하여금 나가 막으라고 했던 것이었다.
김유신의 5만 대군이 넘어선 숯고개(탄현)는 대전 동쪽 석장산의 자무실고개라는 설과 전북 완주의 탄치(炭峙)라는 설이 대립되어 왔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신라군의 진격로가 영동, 금산, 황산, 반조, 원리, 부여라는 점에서 금산군 진산면과 복수면에 ?獵? 숯고개가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천험의 요새 숯고개를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쉽사리 타넘은 김유신은 마침내 계백이 진치고 있는 황산의 연봉 앞에 나타났다.
백제군의 대장기가 산식리산성에서 펄럭이는 것을 본 김유신은 맞은편 곰티산성에 본영을 두고 이내 공격명령을 내렸다. 전고(戰鼓)가 우렁차게 울리고, 군기가 펄럭이고, 돌격의 사나운 함성이 산과 하늘을 진동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창과 칼이 허공중이 무수한 무지개를 그렸다. 백제군이 불과 수천으로 보잘것없다고 여긴 김유신이 우세한 대병력으로 일거에 짓밟으려고 돌파하려 했던 것이었으나 그것은 오산이요, 오판이었다.
목숨 따위야 이미 초개 같이 버리기로 작정한 채 일당백의 투혼으로 맞받아 쳐내려오는 백제군 5천 결사대의 무서운 기백을 김유신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허약해 보이는 적군도 과소평가하는 것은 금물인 법. 게다가 백제군은 세 군데 산성에 의지하고 고리처럼 연결되어 좁은 산길을 올라오는 신라군을 밀어붙이니 아무리 10배의 대군이라도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리고 또한 결사대의 지휘관 계백이 탁월한 전략과 무서운 용맹을 갖춘 맹장(猛將)이라는 사실을 김유신은 67세의 노령 탓이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가.
● 4차의 공격 실패하고 치욕을 당한 김유신
예전에 백제군을 상대로 한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둔 바 있는 김유신이었지만 그 숱한 전공(戰功)은 어찌된 노릇인지 전후 4차에 걸쳐 공세를 취했으나, 5만 대군으로 5천 군사를 당해내지 못하여 아군 1만의 사상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는 신세가 되었다. 소정방과의 약정 기일은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참 큰일이다 싶어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가고 속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다. 4회의 교전에서 뜻밖에 타격을 받고 군사들은 기세가 꺾이면서 전의가 떨어지니 김유신은 이튿날 아침 모촌리산성을 치던 좌장군 김품일(金品日), 황령산성을 치던 우장군 김흠춘(金欽春) 두 대장을 곰티산성 본영으로 불러 작전회의를 열었다.
"우리가 열곱의 대병으로 이기기는커녕 벌써 전사자와 부상자가 1만 가까이 이르는 손해만 보았으니 어찌 면목을 세울 수 있겠소? 오늘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적군을 깨뜨리고 대국병(大國兵)과 합류해야 하오. 약조를 어겨 소 장군 혼자 싸우다 패하기라도 하면 우리 신라군의 체면은 어디 가서 찾으며, 또한 그들이 홀로 싸워 이기더라도 그 수모를 어찌 당할 것인가 그 말이오!"
이에 김흠춘이 아들인 화랑 반굴(盤屈)을 불러 이르기를,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을 다해야 마땅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다해야 마땅하거늘, 오늘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목숨을 내걸지 않고서 어지 충효를 다할 수 있겠느냐?" 하니 반굴이 긴 대답 소리도 없이 "네이!" 한마디만 남기고 이내 자신의 낭도들을 거느리고 백제군 진지로 달려들어가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러자 김품일 또한 아들 관창(官昌)을 불러 세우고 장졸들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내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여섯이나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도다! 너는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느뇨?" 하였다. 관창이 역시 "네이!" 하는 대답 소리 한마디 끝에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백제 진중으로 달려들어가 창을 휘두르며 분전(奮戰)을 펼쳤으나 백제 군사들에게 에워싸이며 사로잡히고 말았다. 계백이 사로잡혀 온 장수의 갑옷과 투구를 벗겨본즉 아직 어리디 어린 소년인지라 차마 죽이기 아까운 마음이 들어 "어허, 네 용기가 가상하구나!" 길게 탄식하며 살려서 돌려보냈다.
관창이 제 아비 품일에게 돌아가 말하기를, "소자가 적진 중에 돌입을 하였으나 적장의 목을 베고 대장기를 빼앗아오지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나이다!" 하고 맨손으로 곰티제 아래 샘물을 떠 목을 축인 다음 말을 달려 창을 비껴 들고 뛰쳐나갔다. 그리하여 다시 백제군과 어울려 싸우다가 생포되니 계백은 "이 소년이 죽기를 작정하였으니 어찌 그 장한 뜻을 받아주지 않겠는가!" 하고는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김품일이 줄줄 피가 흐르는 아들의 머리를 쳐들고 울부짖었다. "보라! 내 아들의 얼굴이 산 것과 같도다!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내 오히려 즐거워 하노라!" 이에 신라군 병사들이 하나같이 잃었던 용기와 죽었던 힘을 불러일으켜 북치고 함성을 울리며 성난 파도같이 밀고 들어가니, 일세의 용장인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한 채 전투에 임했던지라 마침내 기력이 떨어져 물밀듯 총공세를 펼치는 신라군을 당하지 못하고 산성의 요새로부터 산 너머 황산벌로 밀려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 반굴과 관창의 죽음으로 전세 역전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전쟁의 원리. 일당백의 투혼과 기백으로 버티던 결사대도 중과부적으로 밀리고 밀려 벌판 여기저기에서 살점을 베이고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목이 잘리고 팔다리가 떨어져나가고 오장을 쏟으며 백제군은 5천명이 3천명으로, 3천명이 1천명으로, 1천명이 1백여명으로 줄어들어갔다. 좌군은 황령산성에서 밀려 시장골에서 전멸되고, 우군은 모촌리산성에서 밀려 충곡리에서 전멸되고, 계백이 직접 인솔하는 중군은 황산벌을 가로질러 청동리산성 아래서 전멸되었다.
7월 10일 온종일 계속된 싸움에서 5천 결사대는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계백 또한 충장산으로 불리는 수락산 아래에서 수십, 수만의 신라군에게 포위된 채 혈투를 벌이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니 계백의 최후는 곧 백제의 최후나 마찬가지였다. 5천명 중에서 가까스로 참살을 면해 포로가 된 자가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 등 20여명이라고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전한다. 돌이켜보건대 신라 소년 화랑 반굴과 관창의 용기도 가상하지만, 전투 중인 그 같은 시급하고 절박한 극한상황 아래서도 적장의 용장한 기상을 사랑하고 아겨서 살려 보낸 계백 장군이야말로 참으로 뜨거운 인간애를 실천한 도량 넓은 대장부요, 민족의 거인이라 하겠다.
또한 황산벌전투(黃山筏戰鬪) 하나만 두고 볼 때에도 계백이 김유신보다 탁월한 장수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전투는 결과적으로 계백과 백제군 결사대의 패배로 끝났지만, 이름만 결사대였지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허약한 5천명의 군세로 5만명의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신라의 대군을 맞아 초전에서 네번이나 격퇴한 사실만 보더라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김유신이 반굴과 관창 등 어린 화랑들을 희생시키는 교육책을 쓰지 않았고, 계백에게 만일 군사들을 보충할 여유가 있었다면 전쟁의 결과는 틀림없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아무 소용도 없으니 어찌하랴.
이 황산벌전투(黃山筏戰鬪)가 계백과 백제군 결사대의 장렬한 전몰로 끝나고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123년간의 영화를 자랑하던 백제의 도성 사비성은 맥없이 함락되고 낙화암, 대왕포의 한 맺힌 전설을 남긴 채 7백년 백제사(百濟史)는 허망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소정방의 13만 대군은 좌평 의직의 방어군을 격파하고 백강(白江)을 거슬러 올라와 7월 11일 김유신의 신라군과 합류하여 사비성을 포위하니, 의자왕과 태자 효(孝)는 웅진으로 달아났다가 7월 18일 투항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백제는 5방 37군 200여 성 70만 호를 거느린 국세로 능히 몇 달은 버틸 수 있었을 것을 어찌하여 단 일주일 만에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치러보지 못하고 멸망당하고 말았던가? 그것은 허약하고 무능한 지배층이 불러온 무비유환(無備有患)이었을까, 국왕과 귀족들이 비굴하게 삶을 이어가고자 한 생존본능이었을까?
그해 660년 음력 7월 13일 사비성이 무너지자 신라군과 당군이 백제 사람들을 무지비하게 학살했고 아비규환의 피바다 속에서 도성은 7일 낮 7일밤을 철저히 불타고 무지막지하게 파괴당해 지상에 남은 것이라고는 소정방의 군공(軍功)을 새긴 오층석탑 뿐이었다. 8월 15일 석탑에 자신의 공적을 새긴 소정방은 9월 3일에 의자왕과 왕자 4명, 대신 93명, 그밖에 백성 1만 2천여명을 포로로 이끌고 바다를 건너갔다.
●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교훈 되새겨주는 백제 망국의 비극
부여군 양화면 원당리(元唐里), 백마강변의 유왕산(留王山) 또한 일명 원당산(怨唐山)이니 망국의 유민들이 오랑캐 땅으로 끌려가는 부모 형제 처자식의 이름을 목이 메어 울부짖으며 단장의 이별을 하던 곳이다. 미어질 듯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외치고 또 외쳤건만 물결 따라 바다로 바다로 흘러가는 배는 잠시 잠깐이나마 멈출 줄을 몰랐다. 뱃전에서 피를 토하듯 애타게 절규하는 아버지 어머니, 또는 형과 아우, 아내와 누이와 딸들의 서러운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희미해져 드디어는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자 사람들은 소리높여 통곡을 했다. 그리고 피눈물을 쏟았다.
역사는 흘러가도 산하는 남는다. 부소산 아래 백마강은 되풀이되는 역사의 흐름처럼 여전히 흘러갔다. 바다 건너 끌려가는 국왕과 대신과 혈육들을 피눈물로 울부짖으며 떠나보낸 망국의 유민들은 어찌 하늘 아래 같은 사람으로서 사람을 이토록 무참히 학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절규하며 나라를 되세우기 위해여 용감히 일어섰으니 그곳이 곧 백제의 부흥운동이었다.
단재가 "김춘추, 최치원 이래 모화주의의 결정(結晶)"이라고 매도한 자칭 '신라의 후예'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끝내면서 이렇게 평했다.
'백제는 말기에 이르러 소행이 도리에 어긋남이 많고, 또한 대대로 신라와 원수가 되고, 고구려와 친해 신라를 침략하여 이에 당나라 황제 고종은 두번이나 조서를 내려 그 원한을 풀도록 했으나, 겉으로는 ?摸8庸? 속으로는 어겨 대국에 죄를 지었으니 그 멸망은 또한 당연하다고 하겠다.'
과연 백제는 김부식의 평론처럼 대국인 중국에 죄를 지었기에 망해서 마땅한 나라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