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영에 언제부터 주민들이 거주하였나?
저는 여기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비교분석을 해보았습니다.
2001년 2월에 발간한 <해남우수영지 지표조사용역>지에 따르면
동외리에 최초로 입향한 사람은 김해김씨 김남률 이라고 하고 김남률은 1600년경 우수영이 설치되어 수군이 주둔하게 됨으로써 진도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선두리에 최초로 입향한 사람은 마을내에 다수의 지석묘가 산재하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 이후로 원주민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민들의 성씨및 이주현황을 보면 1800년경 김해김씨 김응기가 문내면 학동리에 이주한 것이 시발이었다고 합니다.
서상리에 최초로 입향한 사람은 1720년경 전주이씨 이치중창씨가 진도에서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우수영의 설치와 더불어 본격적인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마을의 대표 성씨는 전주이씨이다.
라고 지표조사 용역지에는 조사되었습니다.
아래의 명량해전이 일어난 해의 우수영상황에선 우수영성의 밑에 사는 주민들이 일시에 의병이 되어 군세를 북돋았다고 나오고 현지 주민들에게 나라에서 면세은전을 내렸다고 나와있습니다.
다음은 해남문화원에서 발췌한 명량해전 당시의 우수영상황입니다.
<정유년 9월 16일,
조선수군은 불과 12척의 전선으로 200여척의 적선단을 맞이하여
종일 싸운 끝에 100여척의 적선을 격파하였던 것이다.
이때 영성 밑에 사는 전 주민들이
일시에 의병이 되어 군세를 북돋아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당시 체찰사 이원익이 조정에 알려
현지의 주민들에게 면세은전(恩典)을 내렸으니 그 혜택이 조선후기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
명량해전이 1597년인데 동외리 1600년경이라고 나와 있으니 비슷하긴 합니다.
소수의 원주민은 선두리의 지석묘에 나온것 처럼 선사시대이후에 지석묘가 나온 부근의 개펄에서 바다고기를 잡아먹으며 어로생활을 했을걸로 생각합니다.
옛날 그 시절에는 지금의 언둑이 없어서 피섬간척지도 바다개펄이었고, 충무사에서 짱깨(장포)의 사이도 바닷물이 들어오는 개펄이었고, 금산(검산리)에서 선두리,남외리 사이에서 중학교 앞까지 바다개펄이었으니 고기잡이가 용이해서 그쪽에서 원주민이 살았을 걸로 추측이 됩니다.
위의 결과로 보면 우수영에는 전라수영 이전에 다수의 주민보다는 소수의 원주민이 고기잡이가 용이한 지역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생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라수영(1440년,세종22년) 이후에는 우수영에서 가깝고 바다를 잘 아는 진도에서 많이 건너와 터전을 이룬듯 합니다.
필자 작은우물의 조상도 족보를 들춰보면 진도에서 와서 화원으로 예락리로 그렇게 갈라져 나갔습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지금의 우수영에는 선사시대이후에 소수의 주민이 어로생활을 하며 바닷가쪽에 살았을것이고, 정식으로 마을을 이룬것은 전라수영이 설치된 이후인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