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도피여행>
나는 여지껏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항상 도피만 했다. 답답하고 미치겠고 더 이상 버틸수가 없어서, 그저 도망쳤을 뿐이다. 그렇게 도피성 여행으로 훌쩍 떠나온 곳에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지금 돌이켜보자면, 잘 모르겠다. 흔히들 그저 대충 얼버무리기 위해서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스물두어살 무렵인가, 서울에서 정신이 무척 괴로워서 제주로 훌쩍 도망쳤을 시기가 떠오른다. 5호선을 타고 집에서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길에서, 나는 무척 설레였다. 이 서울에서의 모든 짐들을 저 머나먼 땅끝, 제주에서 모두 버려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기분은 김포공항과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점점 부풀어올라 착륙하는 순간 펑하고 터뜨려버렸지.
첫날엔 비가 그렇게 많이 올수가 없었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늦여름, 초가을 즈음에 갔던 것으로 기억하건데 태풍까진 아니지만 폭우가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날씨였다. 나는 그때까지만해도 제주 버스 노선은 커녕 제주버스터미널이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르고, 단지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위치만 알고 훌쩍 제주도로 떠나왔던 것이다. 그렇다. 도피성 여행이 그러면 그렇지. 숙소를 일일히 잡았을리가... 그렇게 나는 느낌상 어디론가 향하겠다는 버스를 무작정 올랐고, 그 버스는 나를 생전처음 들어보는 동네, 바로 “애월”에 내려다 놓았지. 물어물어 떡집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찾고 전쟁통에 피신하듯 방안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서울에서의 짐은 저 김포행 비행기가 서해안을 통해 제주로 날아오면서 남해상에서 기장님이 모두 투하해버리고 온 줄 알았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큰 통창으로 비가 주륵주륵 나리는 애월의 앞바다를 보고 있으노라니, 신선놀음이 따로없고 서울에서의 부담과 생각은 하나도 안떠오르더라니까....
그것은 오산일뿐. 그저 바로 앞순간의 재난에 대처하기 급급해 서울에서의 생각이 미처 떠오르지 않았을 뿐이다. 어떻게 아냐고? 다음날 날이 거짓말 마냥, 해가 쨍쨍 내리 쬐고 나는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그 넓고 파아란 제주 바다를 보자마자 나는 다시 심연의 바다에 잠기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 일주일을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걸었고 또 걸었던 기억밖에... 나는 무엇을 위해 걸었는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는가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눈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제주의 바다 뿐이 었고, 나에게 얹어진 것은 서울에서 가져온 끝없는 부담으로 얼룩진 생각 뿐이었으니까.
그 이후 나는 셀 수 없이 제주를 찾는다. 그 뜻은 셀수 없이 서울에서 제주로 도피를 했다는 뜻이겠지. 도피여행이란 것이 약물같아서,,, 점점 내성이 생기는 것 같다. 제주에 가면 갈수록, 그 거대하고 파아란 바다를 보면 볼수록, 서울에서의 부담으로 얼룩진 생각이 더 깊어지는 것을 보면. 스물셋, 법환포구에서 봤던 그 황홀감으로 한 순간 모든 것을 잊었노라 자신했던 내 자신을 더 이상 발견할 수 없는 걸 보면....
첫댓글 도피성이라고 해도 그렇게 결심하고 타지로 훌적 떠날수있다는것 자체가 용기있는 일 같음
내고향 제주도는 언제 다시 가보냐 코로나라도 끝나야 친구들 보러가지 ㅠ
사진도, 글도 좋네요.
저도 제주도피 한 번 하고 싶네요.ㅎㅎ
감사합니다!!! 굿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