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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매화신검(梅花神劍)
- 내가 살아 있다면 그분 또한 살아 있습니다.
유수아는 이층에 나타난 사람들의 행색을 보고 두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세 명의 인물들 중에 키가 작은 노인에게 다가서더니 포권을
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후배 유수아가 화산의 매화신검(梅花神劍) 해서령 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유수아의 한 마디에 이층은 정적으로 굳어졌다.
해서령은 유내육존 중 한 명으로 화산의 신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해… 해서령!
풍백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노인을 보면서 한 말이었다.
설마 저 볼품없는 노인이 매화신검 해서령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있을 때,
단 두 사람만은 그다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현 방법엔 큰 차이가 있었다.
해서령이란 이름을 듣고도 사공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단지 자리에서 일어었고 해서령을 향해 돌아섰을 뿐이었다.
그는 이미 해서령이 들어오기 전에 그 기운만으로 상대가 우내육존 중에
한 명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해서령일 줄은 사공운도 짐작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 본다면 해서령은 그에게 가장 큰 적일 수도 있었다.
신룡각이 마교와 관련이 있다면, 화산 역시 마교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현재 신룡각의 각주인 신기자 용화성은 바로 해서령의 외손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해서령이 자신을 찾아온 용건은 무엇일까?
사공운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을 해보았지만 뚜렷한 결론을 얻진 못했다.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어차피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궁금한 것은 사공운 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신룡각과 마교, 화산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공운의 일행들은 모두
해서령의 방문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우내육존에 대한 동경심이 먼저였다.
사공운이 해서령을 향해 돌아설 때 관패는 이미 두 자루의 도끼를 뽑아
들고 있었다.
흐흐, 해서령. 그럼 우내육존 중 한 명이 아닌가? 이게 웬 떡이냐?
어이 늙은이, 나랑 한판…
관패, 무례하게 굴지 마라.
사공운의 나직한 말에 관패의 입은 저절로 닫히고 말았다.
비록 나직했지만 사공운의 목소리엔 절대적인 힘이 있는 듯 했다.
관패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해서령의 시선이 사공운을 향했다가 다시 유수아에게 돌아왔다.
사공운을 볼 때 해서령의 눈이 마치 깊은 바다처럼 가라앉아 있었다면
지금 유수아를 볼 땐 마치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너는 나를 어찌 해서령이라 생각하느냐?
유수아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해서령의 오른쪽에 서 있는
노인을 보며 말했다.
당당한 체구에 아름다운 흰 수염 그리고 허리에 찬 매화단검(梅花短劍)
을 보고 이분이 바로 화산의 대호법이신 미염공 백진화 어른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진화 어른을 옆에 세울 수 있는 분이 바로
그분의 사형이신 해서령 선배님 뿐임은 세상에 다 아는 일입니다.
해서령은 조금 감탄한 표정으로 유수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유령문의 제자답다. 저 청년이 바로 영환 호위무사라는 사공운
이겠지?
유수아가 대답하려 할 때 사공운은 이미 그들 앞에 와 있었다.
사공운입니다. 선배님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해서령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공운이 포권으로 인사를 했다.
필요 이상 정중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은 인사였다.
사공운이 앞으로 나서자 유수아는 그의 뒤에 섰다.
유수아가 사공운의 뒤에 서자 마치 그의 그림자가 된 듯 했다.
또한 다른 모든 일행들 역시 사공운의 뒤에서 호위하듯이 늘어서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사공운을 자신들의 대표로 인정하고 은연중에 사공운의
위치를 알리는 모습이었다.
해서령 역시 가벼이 여기지 못하고 포권을 하며 대답했다.
해서령일세. 이렇게 만나게 되어 참으로 반갑네. 자네를 꼭 한 번 보고
싶었네. 이 늙은이의 방문이 실례가 아니었으면 좋겠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선배님이라면 그 누구도 감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네. 그리고 여기는 내 사제인 백진화일세.
쓸데없이 수염만 예쁘다고 하여 미염공이라 불리고 있지. 아주 오래
전엔 제법 이름이 있었네.
해서령의 소개에 백진화가 앞으로 나서며 빙긋이 웃었다.
사형은 참으로 요상하게 소개를 하십니다. 허허, 이 늙은이가 바로
화산의 백진화요. 사공운 대협께 인사드리오.
화산의 백진화라면 우내육존과 동시대의 인물이었다.
사공운의 사조인 유령대제와 같은 배분의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백진화의 입에서 대협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그 말 한 마디로 현재 사공운이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능히 알 수
있었다.
진충과 유수아, 용취아의 얼굴에 기쁨과 자랑스러움이 가득 떠올랐다.
그 모습을 흘깃거리며 바라본 풍백은 충심과 사랑은 비슷한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들만 기쁨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공손명 등도 마치 자신들의 지위가 올라가는 듯한 기분과 그런 사공운에게
선택되었다는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었고 풍백도 사공운과의 친분을
생각하며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몰론 관패도 마찬가지였다.
관패는 자신의 주인이 우내육존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의 동급의 배분을 가진 백진화가 사공운을 대협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자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입이 가로로 크게 찢어졌다.
우내육존의 한 명인 해서령과 겨루어보고 싶어서 두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다시 허리에 차며 백진화에게 딴에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 작은 소리에 지붕이 조금 들썩하긴 했지만.
하하하, 늙은 선배, 선배는 과연 사람을 볼 줄 아시오. 내가 아주 크게
감탄을 했소. 사실 우리 주공이야말로 능히 대협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
이오. 대협은 대협을 알아본다더니 당신이야 말로 대협이오. 그럼 노대협
과 젊은 대협이 만났으니 이제 축하할 일만 남았소이다. 으하하하.
관패의 주책 앞에 막 백진화에게 인사를 하려던 사공운은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으며, 유수아와 풍백 등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관패를 보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관패에게 모아졌지만 그 정도엔 미동조차 안 하는
관패였다.
말 한 마디 속에 늙은 선배, 대협, 당신, 선배, 노대협 등등으로 한꺼번에
불린 백진화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관패를 보았다.
굳이 누가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나 천살마부 관패요, 라고 얼굴에 쓰여
있으니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백진화가 웃으면서 관패에게 인사를 하려 할 때,
사공운이 관패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백진화에게 다가서며
인사를 했다.
미염공 백진화 선배님의 명성은 언제나 듣고 있었습니다. 사공운입니다.
사공운과 백진화의 인사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관패가 앞으로 나서며
도끼 두 자루를 비스듬히 교차시킨 채 해서령과 백진화에게 인사를 했다.
관패요. 자고로 무인은 주먹으로 인사를 해야 제격인 법…
관패.
한번 붙어봅시다 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던 관패는 사공운의 말 한 마디
에 찔끔해서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근래 들어 자신의 무공이 한 단계 발전한 것을 느끼고 있는 관패였다.
누군가와 한바탕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사공운의 냉엄한
표정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해서령과 백진화 그리고 해서령의 왼쪽에 있던 장년인은 사납고 안하무인
으로 유명한 관패가 사공운의 한 마디에 기가 죽는 모습을 보고 조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관패에 대한 소문이라면 한때 귀가 닳도록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에서 그때 들은 관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소생, 우보라 합니다.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공운의 시선이 자신을 우보라고 밝힌 사람을 향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예기가 심상치 않았다.
사공운입니다. 아주 오래전 화산에 해서령 선배님의 뒤를 이을 만한
기재가 있어 그를 일컬어 화산의 용이라고 부른다던데, 혹시 화산용검
(華山龍劍)이라 불리는 바로 그분이 아니시오?
부끄럽게도 이 우 모가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풍백이나 공손명 등은 화산용검이란 별호를 처음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산용검 우보는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화산에서조차 아는 사람이 몇 안 되는 인물로 해서령이 비밀 리에
거두어 키우는 직전제자였던 것이다.
과연 유령의 제자는 놀랍구려. 화산용검을 아는 자는 우리 화산에서조차
몇 안 되는데.
백진화가 감탄한 얼굴로 사공운을 보았다.
사공운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한데 세 분은 아무래도 저를 만나러 오신 듯 합니다.
그렇네. 우리는 자네를 찾아왔네.
해서령은 흔쾌하게 대답하며 사공운을 보았다.
사공운 역시 시선을 해서령에게 돌렸다.
그들을 보는 사람들은 잠시짐나 이층 안이 차갑게 경직되는 기분을
느꼈다.
우린 무인이 아닌가? 일단 자네의 실력을 한번 보고 싶네. 여러 가지 할
이야기가 많지만 역시 칼밥을 먹는 사람들이 만났는데 이 행사를 빼놓을
순 없지 않겠는가?
사공운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층 안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용취아는 걱정스런 시선으로 유수아를 보았다.
유수아는 가볍게 웃음을 머금고 그녀의 등을 감싸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해 선배님은 신룡각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다지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구나. 그리고 사형은 충분히 강하단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 말에 용취아는 조금 안정이 되었다.
과연 해 선배, 당신은 멋진 사내요. 암 사내란 그렇게 하는 것이 원칙
이오. 암 그렇고 말고.
아무래도 제일 신이 난 것은 관패인 듯 했다.
태평객잔은 별관 뒤쪽으로 제법 높은 산을 끼고 있었으며
그 산을 약 이십여 장 정도 올라가면 사방 십 장 정도의 제법 높은 공터가
나타난다.
이 공터는 별관에 머무는 무인들의 연공을 위해 만들어놓은 일종의 연무장
으로 태평객잔에 묵는 무인들에겐 제법 유명한 곳이었다.
공터의 사방은 대나무로 가득해서 세상과 차단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공터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앞으로 나온 것은 화산의 젊은 기재라
일컬어지는 우보였다.
먼저 우 모가 한 수 겨루기를 청합니다.
우보가 앞으로 나서자 관패와 풍백이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둘은 이미 각자 자신의 무기를 뽑아 들고 싸울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선배, 나에게 양보하시오.
앉아라! 내가 먼저다.
선배는 무식해서 싸우다 상대를 죽일지도 모르오. 그러니 내게 맡기쇼.
내가 살살 다뤄줄 테니.
말이 많군.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한번 겨루자.
그거 좋은 생각이오.
우보는 그만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자신은 화산의 용이라 불리며 천하의 기재 소리를 듣던 인물이었고,
우내육존의 제자로 그 자부심은 능히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그의 눈엔 사공운 이외의 사람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신보다 젊어 보이는 사공운이 우내육존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던 그였다.
그래서 기회가 오면 반드시 겨루어 보리라 얼마나 다짐을 했던가.
한데 사공운과 겨루기도 전에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자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우보의 얼굴이 굳어 있거나 말거나 관패와 풍백은 당장이라도 겨룰 듯한
기세였다.
관패와 풍백이 조금도 지지 않고 말싸움을 할 때 사공운이 유수아를 돌아
보며 말했다.
그동안 너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사형.
관패와 풍백은 멍한 표정으로 사공운을 보았다.
무척 서운한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사공운은 단호했다.
이미 유수아는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우보는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관패나 풍백이 아니라 그들보다도 더 약해 보이는 여자라니.
사공운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히 불쾌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는 명가의 제자답게 참을 줄 알았다.
모든 것은 실력이 말해 줄 뿐이다.
그는 빨리 이 여자를 밀어내고 사공운과 겨루고 싶을 뿐이었다.
우보의 생각이 어떻거나 유수아는 그의 앞에 선 채 검을 들어올렸다.
유령문의 유수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보입니다.
둘은 일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섰다.
간편한 차림의 유수아는 날렵하고 길지 않은 장검을 들고 있었다.
검의 차가운 예기와 유수아의 단아한 모습이 하나가 되어 잘 어울렸다.
그녀의 모습은 다시 보기 어려운 미모와 함께 한폭의 그림처럼 우아했다.
우보는 그 모습이 늦가을의 차가운 서리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몰랐는데 볼수록 눈이 시리게 아름다웠다.
언젠가 백진화 사숙이 여자에 대해서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극상품의 여자란 처음 볼 때 아름답고, 두 번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세 번 볼 땐 눈이 부셔서 감히 마주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여자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만나기 어렵다.
왜 갑자기 사숙의 말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의 여자가 바로 사숙이 말한 극상품의 여자란 사실이었다.
우보는 피식 웃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그는 천천히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유수아의 모습이 서리 같다면, 조금 긴 장검을 들고 선 우보의 모습은
마치 선비 같았다.
고요하고 장중하지만 언제 태풍이 불지 모르는 바다를 닮은 모습이었다.
둘의 기세가 일어나 조금씩 상대를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의 경중이 비슷해 어느 한쪽이 우세를 차지하지 못하고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며 맴돌다 사라졌다.
우보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유수아의 나이를 보아 결코 자신을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오만함을 버렸다.
작은 충돌이었지만 상대의 실력을 아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해서령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지만 백진화는 조금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허, 과연 유령의 제자들은 대단하구나. 저 나이에 벌써…
백진화는 가볍게 찬탄을 하며 다시 한 번 유수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아가씨로다. 그 실력 또한 미모에 뒤지지 않으니
앞으로 여중 제일 고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구나.
중얼거리듯이 한 말이지만, 조용한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듣기에 충분했다.
이는 유수아를 칭찬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우보에게 유수아를 얕보지 말란
충고의 의미도 있었다.
우보가 어찌 그것을 못 알아 들으랴.
지금까지 오만으로 가득 했던 그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대신 들어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팽팽한 긴장감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모두들 백진화의 말에 동감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을 때,
우보가 오른발을 앞으로 천천히 내디뎠다.
꿀꺽 누군가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찰나 우보의 신형이 질풍처럼
앞으로 튀어나가며 장검을 대각선으로 내리그었다.
그었다 싶은 순간 이미 그의 검은 수평을 이루며 찔러가고 있었다.
매끄럽고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아주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그의 검에서 매화를 닮은 검화 십여 송이가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이십사수 매화검법 중 직인매요(直引梅妖)라는 초식이었다.
보기엔 평범해 보였지만, 그 안에 숨은 검리가 괴이하고 신랄해서 배우기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진 초식이었으며, 이십사수 매화검법 중에서도
후 사식에 포함된 절기 중의 절기였다.
직인매요와 함께 펼친 신법 역시 제운종의 절기였다.
처음부터 강수로 나가는 것으로 보아 속전속결을 생각한 듯 했다.
유수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의 서리 같은 기상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백진화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감탄했다.
유수아의 검이 수평으로 누인다 싶은 순간 다시 아래위로 흔들리며 그녀의
신형이 마치 안개처럼 흩어졌다.
순간 유수아의 검에서 뿜어진 무형의 검기는 마치 뱀이 나무를 타고
오르는 것처럼 우보의 검기를 타고 그의 목을 노렸다.
그 기이함이 뱀처럼 신랄하고 표독스러웠다.
이는 구환유령검법 중 유령사로, 뱀이 닭의 부리를 피해 목을 무는 듯한
초식이었다.
우보는 유수아의 검에서 뿜어진 무형의 검기가 자신의 검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우보는 앞으로 달리던 속도를 갑자기 줄이며
무려 다섯 가지의 초식을 한꺼번에 펼쳐 유수아를 재차 공격했다.
지인매화(之因梅花), 오이매도(塢이梅道), 직원매도(直院梅刀),
풍운단매(風雲丹梅), 여운매화(如雲梅花)의 오초식은 이십사수 매화검법
중에서도 연환식으로 유명한 초식들이었다.
하지만 현재 화산의 제자들 중에 이 오초식을 한꺼번에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고수는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만큼 까다롭지만 하나하나가 절기라 부르기에 아깝지 않은 초식들이었다.
이십사수 매화검법 중 십육초부터 이십초까지의 이 다섯 초식을
화산에서는 따로 오매연(五梅連)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이 초식들이 연환으로 펼쳤을 때 위력이 배가 되기 때문이었다.
우보가 이 검초들을 한꺼번에 펼치는 순간,
사방이 매화 모양의 검기로 가득해졌으며, 그 검기는 당장이라도 유수아의
몸을 난도질할 것 같았다.
유수아는 유령보법으로 교묘하게 몸을 틀며 상대의 검기를 비켜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검은 우보의 검식과 검식 사이를 비집고 틀어오려 했다.
두 사람의 대결은 팽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우보는 연달아 매화검법을 펼치고도 상대를 어쩌지 못하자 갑자기 검식을
변화시켰다.
수십 송이의 검화가 하나로 뭉치는가 싶더니 하나의 홍매화로 변하여
유수아를 향해 날아갔다.
이십사수 매화검법에 없는 절기였다.
매화신검을 우내육존의 자리에 올려놓은 칠절매화천검(七絶梅花天劍) 중
다섯 번째 초식인 홍매몽강(紅梅??)이란 초식이 펼쳐진 것이다.
풍백과 관패 그리고 진충은 그 검화가 검강의 변형된 모습임을 알았다.
그들의 안색이 변할 때, 유수아의 신형이 갑자기 갈라지며 무려 열여덟
개로 늘어나더니 그녀의 검이 허공에서 천천히 맴을 돌며 우보를 향해
밀려갔다.
유령보법의 정화라 할 수 있는 유령십팔환과 유령검법의 마지막 초식인
유령참인이었다.
우보는 자신의 검화가 마치 얼음판에서 미끄러지듯이 상대의 중심을
피해 가는 것을 느꼈다.
기겁을 해서 뒤로 물러서려는 찰나 무려 열여덟 명의 유수아가 자신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달려들었다.
그는 급히 암향표와 제운종을 번갈아 펼치며 매화천검의 매화분분
(梅花紛紛)으로 몸을 보호했다.
매화분분은 수비와 공격에서 동시에 위력을 발휘하는 검초였다.
대결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번에 승패가 갈릴 것이라 생각했다.
둘은 번개처럼 스쳤다가 떨어져 제자리로 돌아왔다.
유수아와 우보는 천천히 자신의 검을 거두었다.
우보가 포권을 하고 유수아를 보며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 모가 세상 넓은 줄 이제야 알았소. 내가 졌음을 인정하는 바요.
우보의 말에 공손명을 비롯한 용취아 등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사공운이나 관패 등은 전혀 동요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담담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우보에게 나름대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이 대결을 계기로 다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서령은 이 기회에 우보의 자만심을 거두어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과연 유령의 제자답네. 그럼 이제 우리가 해볼까?
해서령이 빙긋이 웃으면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우보가 졌지만 그는 여유가 있었다.
사공운 역시 앞으로 나서고 있었으며,
우보와 유수아는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관패와 풍백 그리고 진충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백진화와 우보 역시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 명은 무림 역사상 가장 강한 인물들 중 하나라는 우내육존이요,
한 명은 무림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사공운이었다.
이미 사공운의 명성은 우내육존의 아래가 아니었다.
지금 그 둘이 마주 서 있었다.
누가 이기든 이들의 대결은 무림 역사의 한 시대를 장식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해서령의 한 손이 들리면서 작은 대나무 하나가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손으로 한 번 훑어내자 대나무는 약 사 척 길이의 대나무 회초리가
되었다.
난 이것으로 하겠네.
대나무 가지 하나로 싸우겠다고 하면 비웃을 일이지만 그것이 해서령이라면
다르다.
아무도 그것을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해서령은 검이 있으나 없으나 큰 문제가 안 되는 경지에 들어선 사람인
것이다.
사공운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전 이 두 주먹으로 하겠습니다. 유령의 절기 중 최고는 바로 이 손입니다.
해서령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말했다.
내 나이 삼십이 되었을 때, 화산의 무공이 부족함을 느끼고 오랫동안
정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 칠절매화천검일세. 그것을 근래 들어 더욱
다듬어 이제 무엇인가 이루어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네. 아직 한 번도
사용해 보지 못했는데 자네를 만났네그려.
사공운은 해서령의 말에서 자신이 만든 무공에 대한 큰 자부심을 느꼈다.
이번 대결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사공운의 일행들 역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사공운이 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공운은 해서령의 말이 끝나자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령문의 절기 중에 칠절유령살수가 있습니다. 본래 유령신공은 이 절기
를 위한 신공으로 사조께서 심혈을 기울였지만,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었습닏. 근래 제가 작은 심득이 있어 이 유령살수의 초식과 두 가지의
다른 초식을 합해 일단 그것을 구황유령천수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것으로 상대해 볼까 합니다.
구황유령천수라, 기대하겠네. 그럼 시작해 볼까?
후배가 선공을 하겠습니다.
허허, 내 체면을 생각해 주는가? 그것도 좋겠지.
그럼.
모두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지켜볼 때,
사공운의 양손이 허공에서 가볍게 앞으로 뻗어 나왔다.
그러자 무형의 기운이 구름처럼 일어나며 해서령을 향해 밀려갔다.
해서령은 대나무 가지를 들어 두어 번 떨쳐냈다.
대나무에서 거센 기운이 일어나 앞으로 밀려나갔다.
그 기운은 사공운이 보낸 기운과 충돌하며 함께 사라져 버렸다.
첫 번째는 사공운이 후배로서 선공을 하며 예를 표한 것이라 별 의미가
없는 충돌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서로 인사로 주고받은 공격이었다.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나자, 둘 사이의 공간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인해
대기가 일그러지는 듯 했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두 사람의 힘에 자신들이 모두 뭉개질 것 같은 압력을 받은 것이다.
사공운이 오른발을 가볍게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둘 사이에 가득했던 긴장감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작은 동작으로 둘 사이에 있던 기운을 흩뜨려 놓은 사공운은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당겼고, 해서령은 대나무 가지를 빙글 돌리며 앞으로
밀어냈다.
둘이 동시에 상대를 향해 공격을 가한 상황이었다.
순간 해서령의 대나무 가지에서 눈부신 매화 송이들이 뿜어지며 사공운을
공격해 들어갔다.
매화꽃들은 무려 서른여섯 송이나 되었다.
어떤 것은 느리고, 어떤 것은 빨랐고, 어떤 것은 직선을,
어떤 것은 곡선을 그리며 날았다.
심지어 갈지 자로 움직이며 날아가는 검화도 있었다.
해서령이 펼친 화우광천(花雨光天)의 초식은 칠절매화천검의 첫 번째
초식이었다.
사공운은 사방이 매화꽃에 완전히 포위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매화 송이 하나하나는 전부 검강이 분명했다.
그중 하나라도 맞으면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사공운이 펼친 것은 구황유령천수의 첫 번째 초식인 십팔선회령(十八線會嶺)
이었다.
그의 손에서 뿜어진 무형의 장력은 열여덟 마리의 뱀처럼 구불거리며
매화 송이들을 쳐냈다.
몇 가닥은 해서령의 복부를 향해 밀려가고 있었다.
매화 송이들을 공격하는 장력은 빠르고 강한 반면에 해서령을 향해
다가가는 장력은 비록 빠르진 않지만, 그 은밀함은 마치 밤안개 같았다.
어찌 보면 쥐를 노리고 은밀하게 다가서는 고양이 같기도 했다.
해서령은 자신의 초식을 한참 펼치다가 무형의 장력이 세 치 앞까지
다가와서야 그 기운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 순간 장력은 갑자기 빨라졌다.
해서령은 비록 속으로는 섬뜩함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좌로
회전하며 선회령의 장력을 흘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선회령은 장력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바로
이기어검과 통하며, 유령천수의 기본이 되는 초식이었다.
사공운이 펼치는 초식이 십팔선회령에서 세 번째 초식인 금령섬인(金靈閃印)
으로 급격히 변화했다.
순간 하나의 섬광이 번쩍하더니 일수유에 해서령의 코앞까지 날아왔다.
해서령의 눈이 차갑게 굳었다.
그의 손에 들린 대나무 가지가 위로 올라가며 좌우로 흔들렸다.
순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우를 보았다.
매화 모양의 아름다운 유성들은 마치 화살처럼 날아가 사공운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 빠르기와 날카로운 기세를 본 사람들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칠절매화천검의 두 번째 초식인 매화탄류(梅花彈流)는 해서령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유성우를 보고 만든 초식이었다.
십여 개의 매화가 금령섬인을 무력화시키고 나머지는 사공운을 향해
쏘아져갔다.
매화꽃 모양의 유성들이 덮치려는 찰나 사공운의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지면서 그의 손이 벼락처럼 앞으로 뻗어나갔다.
유령천수의 네 번째 초식인 귀음환영수(鬼陰幻影手)였다.
거의 동시에 해서령은 자신의 초식을 거두며 매화천검의 세 번째 초식인
매화검룡(梅花劍龍)을 펼쳐냈다.
두 초식은 마주 굴러온 바위처럼 정면으로 충돌했다.
기척도 없고 기세도 없는 귀음환영수와 꿈틀거리며 사공운을 공격해오는
매화검룡의 기세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파파팍 하는 기음이 연달아 들리며 장력과 검기가 엉켰다가 풀어지고
풀어질 듯 하면서 다시 엉키고 있었다.
둘이 어떻게 초식을 펼치고 거두는지 제대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눈을 치켜뜨고 어림짐작해 볼 뿐이었다.
우보는 세상이 자신의 생각보다 넓으며 또한 사공운의 명성이 결코 과장
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일천한 실력을 믿고 사공운에게 덤비려 했던 자신의 오만함이 부끄러웠다.
티리릭 하는 소리가 들리며 사공운과 해서령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사공운의 소매에는 매화 모양의 구멍이 두어 개나 뚫려 있었으며,
해서령의 옆구리에서는 옷의 일부가 먼지로 흩어지고 있었다.
이번 충돌에서 둘 다 손해를 본 것이 틀림없었다.
대단하네. 그 초식의 이름이 무엇인가?
귀음환영수입니다.
멋진 초식이었네.
선배님의 검식도 전혀 아래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펼칠 검식은 매화분분이란 초식일세. 네 번째 초식인데 좀 전에
한 번 견식을 했을 것이네.
사공운은 우보가 유수아와 겨룰 때 펼친 검식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그때 본 검식을 굳이 참조하려 들진 않았다.
어차피 우보가 펼친 검식과 해서령이 펼친 검식이 같을 수는 없었다.
기억합니다. 팔황유령참(八荒幽靈慘)이라면 좋은 적수가 되리라 생각
합니다.
흠, 초식 이름을 들어보니 대충 알 만하네. 그럼.
대나무를 당겼다가 놓으면 그 탄력으로 힘 있게 퉁겨진다.
지금 해서령의 신형이 그러했다.
마치 누군가가 당겼다가 놓은 대나무 가지처럼 해서령은 빠르게 앞으로
다가오며 손에 든 대나무 가지를 휘둘렀다.
순간 매화송이들이 바람에 흩어지면서 떨어졌다.
모두 구십구 송이였다.
수십 송이의 매화가 바람을 날리는 모습은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좀 전에 우보가 펼친 검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누가 그 두 초식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 아름다운 광경을 구경할 때,
사공운이 누군가가 발로 찬 듯 휘청하더니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없이
앞으로 나가며 두 손으로 허공에 기이한 호선을 그렸다.
순간 무형의 장력이 팔방을 점하고 해서령의 검기와 정면으로 충돌해 갔다.
파르륵 하는 소리가 울리며 바닥의 흙이 바람에 쓸려 올라갔다.
그러나 그 이상의 기파는 없었다.
두 사람이 내부에서 차단한 듯 했다.
한동안 충돌의 여파에 휩쓸리는 듯 하던 두 사람의 신형이 떨어지더니
한 송이의 붉은 매화가 사공운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이 또한 유수아와 겨룰 때 우보가 사용했던 홍매몽강이란 초식이었다.
사공운은 마치 개구리처럼 하늘로 뛰어오르며 붉은 매화를 피해 냈다.
동시에 손을 교차하면서 단혼유령참(斷魂幽靈斬)의 초식으로 해서령의
천령혈을 쪼갤 듯이 찍어 내렸다.
무형무음의 기세는 이미 해서령의 머리 바로 위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그 초식을 보면서 유수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사공운이 펼친 단혼유령참의 초식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초식으로는 아무리 높은 경지에 도달해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강력하고 음유하면서도 빠른 장력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이미 사공운의 유령살수는 유령문의 절기가 아니었다.
새로 태어난 듯한 초식의 위력은 보고 있는 유수아가 흥분할 정도였다.
두 사람이 겨루면서 치고 물러서고 다시 공격하는 동작들은 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혔다.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놀라는 경천동지의 충돌은 아니었지만,
초식 하나하나에 숨어 있는 현묘함이나 파괴력은 보는 사람들의 오금이
저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기를 조절하여 내부로 모아 치기에 충돌의 여파가 작을 뿐,
그 하나하나의 힘에 스치기만 해도 먼지로 변해 날아가리라.
사공운의 공격이 날카롭다 여겨질 때, 해서령의 신형이 오히려 앞으로
다가오며 매화천검의 여섯 번재 초식인 구환홍매단강(九奐紅梅鍛鋼)을
펼쳤다.
순간 아홉 개의 붉은 매화가 구궁의 방위를 점하며 사공운을 공격해 왔다.
날카로운 강기가 이미 단혼유령참의 공격을 풀어 헤치고 급속하게
사공운의 혈을 찍어가고 있었다.
사공운은 단혼유령참을 거두며 칠절유령살수의 마지막 초식이자
구환유령천수의 일곱 번째 초식인 빙살수라정(氷殺修羅釘)을 마주
뻗어냈다.
서늘한 아홉 개의 얼음 못과 아홉 송이의 붉은 매화가 하늘에서 치지직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마지막으로 퍽 하는 소리가 울리고 둘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각자 두어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은 우뚝 선 채 서로를 보고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고 두 사람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들로서는 누가 이기고 졌는지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이제 그만 해도 될 듯 싶습니다.
사공운의 말에 해서령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네. 이 정도면 자네의 실력을 충분히 알 수 있네.
그렇다면 별관으로 드시죠. 아무래도 이야기를 나누기엔 거기가 좋을
듯 합니다.
그렇겠지.
해서령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많은 고민이 담긴 웃음이었다.
***
은발이 휘날리는 모습이 마치 북해의 눈보라 같았다.
단아한 표정이나 꾹 다문 입술은 어디로 보아도 아름다웠다.
남자라고 불리기엔 그의 모습이 너무 고혹적이었다.
청년은 바로 북해 빙궁의 현 궁주인 북궁청인이었다.
그의 옆에는 북해 빙궁의 사대장로 중 궁로와 빙운파파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놓인 빙혼관에서는 짙은 매화향이 피어나고 있었다.
북궁청인과 두 노인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어렸다.
궁로, 여십시오.
궁주, 다시 한 번…
시간이 없습니다.
알았습니다.
궁로가 한숨을 쉬며 빙혼관 앞으로 다가섰다.
빙혼관의 뚜껑에 내공을 모은 손을 올리자 북궁청인과 빙운파파는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잠시 후 스르륵 하는 소리가 나며 관의 뚜껑이 밀려 나갔다
반투명한 빙옥으로 만들어진 관의 내부에는 서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한 명의 미녀가 그림으로 그려 넣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생생한 모습은 지금 막 잠이 든 것 같았다.
살결은 빙옥보다 더 희고 투명했고,
허리는 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작은 듯한 얼굴의 윤곽은 붓으로 정성껏 그린 듯 섬세했다.
그 얼굴이 약간 슬픈 듯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모습이 보는 이에게 애잔함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여자가 지니고 있어야 할 아름다움을 전부 갖추고 있었다.
입고 있는 허름한 옷도 전혀 그녀의 미모를 퇴색시키지 못했다.
북궁청인은 표정이 굳은 채 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한동안 정신없이 미녀를 바라보던 궁로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빙운파파와 북궁청인을 보았을 때, 빙운파파는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북궁청인을 보고 있었다.
크흠.
궁로의 가벼운 기침 소리에 북궁청인은 움찔하면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 순간 미녀가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그녀는 눈을 뜨는 순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누운 자리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앞에 서 있는 이남 일녀의 얼굴을 한 번씩 찬찬히 쳐다보았다.
일단 그들이 자신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듯 조금은 안심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녀의 고운 입술이 열리고 박속 같은 치아가 드러났다.
세 분이 저를 구해 주신 듯 합니다. 먼저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행동엔 명문의 자녀가 지녀야 할 기품이 배어 있었다.
아직 기력이 완전하지 못해 목소리엔 힘이 없었고, 서 있는 모습이
몹시 불안했지만, 그녀의 성정마저 죽이진 못한 것이다.
사실 지금 그녀가 얼마나 힘든지는 빙운파파가 잘 알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보통의 여자가 막 빙혼관에서 깨어나 저렇게 서
있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빙운파파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저렇게 침착할 수 있다면 얼마나 굴곡 많은 삶을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게 산 여자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가벼운 목례만으로 기품을
갖춰 인사할 수는 없었다.
빙운파파는 그녀가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여도 속은 바위처럼 단단한
여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침착하고 지혜로운 성정이 겉으로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용설아가 일어서며 인사를 하자 궁로와 빙운파파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마주 인사를 했고, 북궁청인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가 얼른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는 조금 허둥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빙운파파와 궁로가 걱정스런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빙궁의 북궁청인입니다.
북궁청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궁로가 자신의 젊은 궁주의 당황하는 모습을 본 것은 이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의 얼굴이 조금 더 걱정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용설아입니다.
그녀의 말에 북궁청인의 안색이 굳었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정말 그녀일 줄이야.
그는 아득하게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직 그 느낌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궁로 역시 북궁청인의 모습을 보고 불안을 느꼈지만,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빙운파파는 슬며시 용설아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부축했다.
지금 그녀가 몹시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같은 여자인 자신밖에 없었다.
이렇게 새로운 인연은 시작되었다.
***
별관에 자리 잡은 거실 안은 조용했다.
오로지 간간이 들리는 해서령의 가벼운 한숨 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깼다.
설마 했는데 자신들의 짐작이 사실이고 오히려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이야기까지 듣게 된 사공운과 그 일행들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특히 해금영과 풍진 곡야인의 이야기는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너무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해서령에게 해금영은 단 하나밖에 없는 여식이었다.
더구나 무공에 대한 재질과 뛰어난 재지로 인해 해서령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문제는 마교 전쟁이 벌어진 직후에 일어났다.
당시 마교 전쟁에서 이긴 후 해서령은 용공공과 함께 사천으로 마교의
잔당을 소탕하러 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때 해금영은 반드시 쫓아가겠다고 졸라대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꼭 함께 가고 싶단다.
해서령은 위험한 곳에 딸을 데려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해금영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해서령은 그녀를 데리고 사천성 청운산으로 향했다.
해서령은 자신의 무공에도 자신이 있었고, 함께 가는 사람이 자신과 함께
우내육존 중 한 명인 용공공이었기에 별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청운산에는 마교의 장로 중 한 명인 청목마왕(淸目魔王)이 숨어 있었다.
두 고수와 청목마왕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있었지만 일방적으로
청목마왕이 밀리고 있었다.
비록 그가 마교의 장로 중 한 명이었지만,
우내육존 중 두 명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결국 청목마왕의 수하들은 전부 청운산의 고혼이 되엇고,
마지막까지 몰린 그는 청사음연(靑蛇淫宴)이란 독을 해서령 일행에게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청사음연은 마교의 음약 중에서도 지독하기로 유명한 것이었다.
천하의 고수인 해서령과 용공공은 자신의 내공으로 음약의 기운을 억제할
수 있었지만 해금영은 달랐다.
결국 해서령은 용공공에게 해금영을 구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해약을 구하기엔 너무 늦었고 청목마왕이 지니고 있던 해약은 그가
죽으면서 전부 없애버린 터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해금영은 용공공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
해서령에게는 결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영웅이라면 삼처 사첩이 당연했고, 첩이 아니라 세 번째 처였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딸을 영웅에게 시집보낸 후 해서령은 은거에 들어갔다.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던 무에 대한 갈구는 그로 하여금 수십 년이
지나도록 오로지 거기에만 몰두하게 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 해서령은 자신이 몰래 거둔 제자와 자신과 함께 은거에
들어갔던 사제를 대동하고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온 해서령은 화산에 흐르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딘가 변질되어 버린 화산.
친구인 용공공은 이미 실종된 상태였다.
해서령은 천천히 조사에 들어갔고, 그 원인이 바로 자신의 딸에게 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친구이자 해금영의 지아비인 용공공의 실종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한편 화산과 용부의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던 해서령은 몇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외손자라 할 수 있는 신기자 용화성과
증손자라는 냉면신룡 용천우 등이 친구인 용공공을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해서령은 용화사가 마교와 연관이 있는 곳이며 해금영과 마교의
인물이 밀접한 관계이고 신기자 용화성은 마교의 핏줄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민에 고민을 하던 해서령은 같은 우내육존 중 한 명인 소림의 원공대사를
찾아가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원공 역시 해서령의 말에 크게 놀라 나름대로 조사에 착수했고 해서령의
짐작이 옳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진실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때는 아미 너무 늦어 있었다.
화산을 정리하고 싶어도 괜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할까 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사공운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사공운의 소문을 들은 원공과 해서령은 즉각 그를 찾아 나서게 되었고,
그들을 도운 것은 개방이었다.
침묵은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야기가 조금 무거워질 때 유수아는 용취아를 데리고 거실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다행히 이 자리엔 용취아와 유수아 그리고 오호수호룡이 없었다.
사공운은 자신의 딸이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싫었기에 눈치
빠르게 행동한 유수아가 고마웠다.
사공운이 해서령을 보면서 말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상당히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럴 것 같으이. 어떤가, 우리가 손을 잡고 함께 행동하는 것도 좋을
듯 싶네만.
반대할 이유가 없는 제의였다.
***
북궁청인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용설아와 함께 있은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러나 그녀는 사공운에 대해선 한 마디도 묻지 않고 있었다.
북궁청인은 그것이 오히려 초조했다.
차라리 물어온다면 사실이든 아니든 무어라고 대답이라도 할 텐데
그녀는 그에 관해서 끝까지 침묵할 뿐이었다.
결국 며칠이 지나 그녀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고 난 후,
북궁청인은 자신이 그녀를 데리고 온 상황을 설명했다.
그동안의 경위를 들은 용설아가 소리 없이 흐느꼈다.
용설아는 자신을 관에 넣어 지고 다니던 사람이 진충임을 알 수 있었다.
봉성의 성주인 담숙우에게 끝까지 저항하던 진충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눈 하나를 잃으면서도 사공운에 대한 충의를 저버리지 않았던 진충이었다.
그라면 십 년이 지나도 능히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리라.
자신이 관 속에 누워 있은 지 벌써 십 년이라는 것은 믿기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담담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눈물을 훔친 그녀가 처음 물은 것은 진충에 관한 것이었다.
그 젊은 사람은 어찌 되었습니까?
북궁청인은 일단 그것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무엇인가 그녀가 물었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다.
모르겠습닏. 그는 혈향검마와 싸우는 중이었고, 우리는 관을 가지고
그 자리를 피해 왔을 뿐입니다.
말을 하면서 북궁청인은 자신이 미웠다.
자신은 왜 그녀 앞에서 진실하지 못할까?
비단과 종이에 적은 서신도 그녀에게 보여주지 않았으며 진충에 관한
이야기도 일부 숨기고 있었다.
그것으로 인해 그녀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
왜 그런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한참을 주저하던 북궁청인은 결국 자신이 묻고 말았다.
소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공운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까? 벌써 십 년이 흘렀는데 그의 근황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용설아의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머물다 사라졌다.
내가 살아 있다면 그분도 살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있다면
그분은 언제고 저를 데리러 이리로 올 것입니다. 굳이 듣지 않아도
그분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북궁청인의 안에서 무엇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