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내선 투어(5)
- 풍납토성
13년 전 구리시에 이사 왔을 때, ‘고구려의 기상 대한민국 구리시’ 라는 현수막이 여기 저기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교문동에 광개토대왕 동상과 복제 비가 있고, 아천동에는 배용준이 나왔던 태왕사신기 촬영 세트장인 대장간 마을이 있었다. 심지어 아파트 외벽에 고구려 수렵도까지 그려져 있었다.
아차산 정상에는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보루 20여개가 복원돼 있다.
보루는 30명에서 100명이 주둔했던 작은 진지로 요즘 군대의 GP 같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아차산은 남한에서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된 고장이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팀에서 유물 발굴 작업을 했던 일을 그 팀의 일원이었던 큰 딸 율리안나로부터 들어 그 사실은 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70대 초반에는 아차산을 몇 번 올라갔었다. 대장간 마을도 가보고 고구려 보루도 보았다. 산 정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동서남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여기에서는 적들의 움직임을 사방으로 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이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각축을 벌였을 때 이곳이 군사 요충지였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차산에 고구려 군이 진을 치고 있었을 때, 남쪽의 강 건너 아파트가 즐비하게 있는 동네는 백제 땅이었을 것이다.
오늘은 별내선을 타고 남편과 같이 그 백제 땅을 찾아 가 보았다. 풍납토성이었다.
장자호수공원 역에서 3 정거인 천호역으로 갔다. 10번 출구로 나오니 토성이 보였다. 우리는 좌측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울타리 안에 수 백 년은 됐음직한 은행 나무들이 노란 단풍에 물들어 있었다. 토성 주위에 산책길과 황토길이 있어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울타리 앞에는 벤취가 몇 개 있어 노인들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이었다. 상점과 주택들, 자동차들이 있는 길을 따라 걷다가 뒤 돌아 나와 동쪽 인도를 따라 걸은 후 다시 천호역에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좌우로 돌아 밖에서 잠깐 바라본 토성의 길이는 엄청 길었다.
풍납토성의 넓이는 35만 3,589.1㎡이다. 본디 둘레가 4km에 달하는 큰 토성이었으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로 남서쪽 일부가 잘리고, 이후 서울이 개발되는 와중에도 특별한 보호 없이 방치되는 등 잡다한 사유들로 말미암아 현재는 2.7km가량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건축 추정 연대는 252~346년이다.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이라는 것이 정설. 발굴조사 성과를 보면 단순 방어성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어머어마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풍납토성이은 판축기법으로 세워짐이 밝혀졌다. 판축기법이란 황토, 모래 등 여러 종류의 흙을 정사각형의 판에 넣고 단단하게 다지면서 하나하나 쌓아올라가는 방법이다. 이는 흙의 물성을 이용한 상당히 과학적인 방법이며 풍납토성 정도의 성을 쌓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인력과 물자가 동원 되어야 했다. '토성' 이라는 이름의 어감 때문에 오해할 수 있는데, 그냥 애들 흙장난 수준으로 성벽을 쌓으면 높이 쌓지도 못하고 몇 개월 버티지도 못한다.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은 삼국시대 이후 약 1500년의 시간을 버텨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성벽이 깎여나간 부분이 많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오늘날까지 버티고 있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다. 그나마 몽촌토성은 공원화되면서 훼손을 비교적 잘 막기라도 했지만, 풍납토성은 아예 지역 주민들이 농경지를 일구기도 하는 등 대놓고 훼손을 해댔음에도 이 정도로 버티고 있다.(출처 나무위키)
한 나라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하게 되었을 때 해모수와 유화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주몽은 부여 왕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왕자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부여를 떠난다. 그 때 아내와 아들 유리를 부여에 남겨 놓았다. 부여를 떠나 우여곡절 끝에 연타발의 딸 소서노를 만나고, 소서노와 함께 고구려를 세운다. 소서노에게서 비류와 온조가 태어났는데, 부여에 남겨 놓고 온 주몽의 첫 번 째 부인과 유리가 주몽을 찾아온다. 그러자 소서노는 아들 둘을 데리고 떠나는 데 큰 아들은 미추홀(인천)에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터를 잡는다. (드라마 주몽을 본 기억을 떠 올리며)
비류가 자리잡은 터는 바닷가라 물이 짜서 도읍지로 자리 잡는데 실패하였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서 백제를 세운다. 그러다가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해서 백제왕의 도읍지 한성(현재 서울)을 점령한 후 백제왕 부여경(백제 21대왕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생포해서 돌아갔다. 그 후 백제는 웅진성(공주)로 도읍지를 옮기에 된다.
풍납토성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돌아왔지만 머릿속은 아득한 먼 옛날의 삼국을 넘다들며 그 시절을 살았을 백성들의 아픔과 노고가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