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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야기 | <조선시대>- 제17대 효종, 소현세자의 독살 의문성
| > 소현세자의 독살 의문성
이 의문사에 대해 학자 이식은 소현세자 묘지문에 '환궁 이후 계속해서 한증과 열기가 있었는데 의원의 시술이 잘못되어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고, 인조실록에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에 집을 지어 단청을 하고 포로된 조선 사람들을 모아 밭을 일구어 곡식을 쌓아놓고 진기한 물건들은 사들여 세자가 머무는 관소가 시장과 같았다. 임금이 이를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임금이 총애하는 궁녀 조소용(귀인 조씨)이 예전부터 세자와 세자빈을 미워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임금 앞에서 세자빈이 임금을 저주 했다거나 몹쓸말을 했다는 따위로 헐뜯었다. 세자는 환국한지 얼마 안돼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지 며칠 만에 죽 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죽은 세자의 얼굴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의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때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이, 그의 아내가 인조의 전비인 인렬왕후의 동생인 관계로 염습에 참여해 그 광경을 보고 나와서 남에게 말한 것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할 때 소현세자는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추론의 증거는 사건에 대한 사후 처리와 소현세자의 장례식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의술을 잘못 사용하면 의관이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인조는 의관의 추고에 대한 논의 자체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대사헌 김광현이 인조의 주치의 이형익이 연일 세자에게 침을 놓은 잘못을 따져야 한다고 말하자 인조는 이 형익을 옹호하면서 김광현에게 몹시 화를 냈고, 나중에 그가 세자빈 강씨의 조카사위라는 이유로 좌천시켜버린다. 또 소현세자의 장례식도 일반 평민의 장례에 준하는 절차를 밟았을 뿐만 아니라 기일을 단축시켜 초상을 치르게 하였고, 참관 인원을 일부 종실로 제한하기도 했다. 게다가 인조는 묘지를 홍제동으로 하자는 신하들의 중론을 무시하고 멀리 고양의 효릉 뒤쪽에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다. 더욱이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지 3개월 후에 갑자기 대신들을 불러들여 자신은 병이 깊으니 새로운 세자를 책봉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첫 아들 석철로 하여금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하다 고 했으나 인조는 열살밖에 되지 않은 세손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 하며 왕실의 관례를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이 후 소현세자의 주변 세력과 세자빈 강씨의 친정 오빠들을 모두 귀양보내고 마지막 남은 세자빈마저 후원 별장에 유폐시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인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죽게 하고, 나머지 셋째 아들은 귀양지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해 그의 가족과 주변 세력을 모두 제거해버렸다. 인조의 이같은 일련의 행동들은 그가 소현세자를 독살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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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쏠쏠한 재미 좋은글 사랑합시다.
전주향교/鶴田/옮김/한문희총대장 감사합니다.
본래의 마음,자유인 한문희총대장, 백두대간의 전설 자유인 백두대간종주대한문희총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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