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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75)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
본문 : 눅 13:1-9 9 (신 117)
유대인들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현세에서도 그에 상응한 벌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곧 불행은 죄의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타인이 받은 어떠한 재난에 대하여
그들은 당연히 벌 받을 사람들이요,
자신에게는 그런 벌이 없으니
무죄한 자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고통 받는 욥에게
한 친구 엘리바스의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욥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학살 사건>.....
자신들의 생각(사상, 신앙)을
확인이라도 받으려는 듯........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그 당시에 있었던 일을 예로 들어
예수님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1절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이것은 빌라도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학살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총독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보다 원활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도 건설을 제안하고 그 자금조달을 위해
성전에 있는 돈을 쓰자고 제안하였습니다.
한 해 유월절에 26만 마리의 짐승이 바쳐졌으니
성전이 물을 가장 많이 쓰는 곳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획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추진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유대인중 갈릴리 출신들이
성전의 돈을 그릇되게 썼다고
성전에서 봉기를 하자,
빌라도는 군인들에게 진압을 명령하였고
군인들의 과잉 진압으로 인해
죽은 시체의 피가 ....
그들이 드릴 제물의 시체와 섞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 일은 그 당시의 민감한 사건이었고....
그 사건에 대해 예수님의 태도를
물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2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죄 값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가 더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
이에 예수님은 다른 한 가지의
예를 드십니다.
4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실로암에 있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압사한 사건이 발생했고 ....
이 사건은 아직도 백성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기억되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이 인간의 행위에 의해
가해진 사건이라면 .....
이 사건은 자연현상에 의해 일어난
천재(天災)에 의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잔혹한 방법으로
학살당한 갈릴리 사람들이나......
망대에 깔려 죽은 사람들이 ...
죽을 만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예에 모두 똑같은
답변을 하셨습니다.
3절a과 5절a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예수님은 대답은 한 마디로 분명합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교> 요한 9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누구의 죄로 그가 소경으로 태어났는가?
보모의 죄 때문인가?
아니면 그 자신의 죄 때문인가?”를 물었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아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예수님의 답변은 분명합니다.
“아니다”입니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재난은,,,
죄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고,,,,
지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어떤 경우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인과관계가 뚜렷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
알콜 중독자가 가산을 탕진하고 건강마저
잃어버린 것을 볼 때
그것이 죄의 결과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이 화재로 타버렸거나.....
의학적으로 치료 불가능한 병에 걸렸거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었거나....,
기근이나 전쟁으로,......
또는 자연재해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볼 때 ......
그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현재 살아 남아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선한 사람들도 죽은 자 중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 씨랜드 화재사고로 죽은 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악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보응이
실현되는 경우가 있지만
아직까지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선인과 악인이 함께 고통당하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재난 당하는 일에 있어
선악의 구별은 뚜렷하지 못합니다.
완전한 구별은 주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며
그때까지는 유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악인들은 이 유보하심을 비웃지만
그것은 그 날에 진노하심을 쌓을 뿐입니다.
<롬2:4-5 읽어라>
4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절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재난에 대하여
어떠한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3절과 5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어떠한 재난이나 비극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상대적 위로와 만족을 얻고 ....
현실에 여전히 안주하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그러한 재난과 비극이
언제든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회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음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는 것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길을 지금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뿐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
이것을 보다 실감나게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본문 6-9절 읽어라>
6절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절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절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열매가 기대되던 성장한 나무에서
아무런 열매도 얻지 못하게 되자....
포도원 주인은 그 나무를 찍어버리고
다른 나무로 대치하려고 한다.
그러나 포도원 지기는 열매를 맺는가
보기 위해서 일 년만 더
기다려보자고 요구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 속에
‘새 신(新)’이라는 한자어가 생각났습니다.
‘새 신(新)’자는 세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설 입(立)’자 밑에 ‘나무 목(木)’자 옆에
‘도끼 근(斤)’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풀어 해석 하면
‘나무가 서 있는데 그 옆에 도끼가
놓여있다’는 뜻이 됩니다.
오늘 비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도끼에 찍힌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서 활동했던 세례요한도
같은 가르침을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다행히 포도원지기의 간절한 요구는.....
주인에 의해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왜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는 것일까 ?
예, 그 무화과나무는
그냥 무화과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 속에도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6절 말씀을 보세요.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무화과나무는 과수원에 심을 만큼
가치가 있는 나무가 아닙니다.
여기 저기 아무데서나
아무렇게 자라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영어로 <fig tree>라고 하는데,
fig라는 말은 ‘하찮은 것’ ‘시시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시시한 나무를 어디에다
심었다고요?
예, 포도원에 심었습니다.
성도님들 !
포도원은 포도나무를 위한 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특별히 생각해서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
성도님들 !
그 엄청난 의미가 느껴지십니까?
특히 오늘 비유에서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으로 쓰였습니다.
세상 가운데 유대인(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받은 민족도 없습니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사도 바울이
함축한 내용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롬9:4-5 읽어라>
4절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절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그러나 이들에게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열매를
얻지 못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핍박할 만큼 강퍅했습니다.
‘선민의식’만 있었지
‘선민으로서의 삶(열매)’은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 다른 민족의 죄를
캐내는 일에는 빨랐지만.....
정작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는 데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잎사귀는 요란하지만 정작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8b)는
말씀을 잊고 있었습니다.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를 향한 말씀>........
이 비유의 말씀이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말씀이었지만,.....
오늘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우리는 포도원에 심겨질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는 대신
말할 수 없는 은혜로 당신의 품에
안아 주셨습니다.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입니다.
내가 20년 교회 다녔다고 무화과나무에서
갑자기 포도나무로 바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수고하고 봉사하고
많이 섬겼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축복을 당연히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특별한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 때문에,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일 뿐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포도열매가 아닙니다.
포도원에 심었다고 포도열매 맺기를
기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무화과나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잘 알고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도원에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화과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십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무화과열매를 맺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무화과나무의 열매마저
없지는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원지기의 간청을 기억하십시오.
<본문 8-9절 읽어라>
8절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우리 시대에는 우리 주님께서
과원지기가 되어 하나님께 간청하십니다.
‘제발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제발 이번 한해만 더 참아 주십시오.’
간구하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한 번 더 잘 가꾸어 보겠습니다.
제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고 정성스럽게
한 번 더 키워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끼를
거두시고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마지막 유예 받은 기간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비록 아무런 재난이나
고통이 없이 잘 지낸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생활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여기서” 심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의 의 때문인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비극과 재난이 꼭 죄악의 결과나
그 표식이라는 보장이 없듯이,,,,,,,
아무런 재난이나 비극을 당하지 않는
생활이라고 해서,,,,,,
그것이 꼭 의로운 생활의 결과나
표식이란 보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당장에 그 나무를
찍어버리지 않는 것을,,,,,
열매 맺지 않은 사실을 주인이 ,,,,,
그대로 용납한 것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만일 심판이 당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결과이지,.....
결코 하나님이 그것을 그대로
용납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시 한 번
마지막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시는 것뿐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는 모두 일 년 유예 받은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 일 년이 언제 끝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일 년의 유예기간이 다 가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들에게
임하기 전에 회개합시다.
내게 주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고 ,.....
오히려 타인을 정죄하며 교만한 삶을
산 것을 이 시간 회개합시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티끌만 보며
정죄한 것을 회개합시다.
많은 열매를 맺을 만한 환경과
조건을 주셨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
오히려 잎사귀만 무성하게
자라난 것을 회개합시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구한 것을 회개합시다.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한 것을 회개합시다.
저와 성도님들이 !
이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
포도원 주인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무화과나무의 열매,.....
곧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