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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0 편
인간이 만든 정부의 진화
(The Evolution of Human Government)
70:0.1 인간은 생계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하자마자 인간 접촉을 규제하는 일에 직면했다. 산업의 발달은 법, 질서, 사회적 조정을 요구했다; 사유 재산은 정부를 필요로 했다.
진화 세계에서 적대감은 당연하다; 평화는 어떤 종류의 사회적 규제 체제에 의해서만 보장된다, 사회적 규제는 사회의 조직과 뗄 수 없다; 연합은 어떤 통제하는 권한이 있음을 의미한다. 정부는 부족, 씨족, 가족, 개인들의 대립 관계가 조정되기를 강요한다.
정부는 의식하지 않고 발달한 것이다; 그것은 시행착오에 의해 진화한다. 정부는 생존을 위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전통이 된다. 무정부 상태는 고통을 증가시켰다; 따라서, 정부, 곧 상대적 법과 질서는 서서히 솟아나거나 솟아나는 중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의 강압적인 요구는 문자 그대로 진보적인 문명의 길을 따라 인류를 몰아갔다.
1. 전쟁의 유래 (The Genesis of War)
70:1.1 전쟁은 진화하는 사람의 자연적 상태이자 유산이다; 평화는 문명의 발전을 측정하는 사회적 잣대이다. 진보하는 인종들이 사회화되기 전에, 사람은 극도로 개인주의적이고, 지나치게 의심이 많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투기를 좋아했다. 폭력은 자연의 법칙이고, 전쟁은 집단적으로 진행되는 것과 같은 활동인 반면, 적대감은 자연인의 자동 반응이다. 그리고 문명의 구조가 사회의 진보에 따르는 혼란에 시달릴 때는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인간의 상호 관계에서 생기는 거슬림은 항상 폭력으로 해결하는 이 초기 방법들인 파괴적 성향으로 즉시 되돌아간다.
전쟁은 오해와 거슬림에 대한 동물적 반응이다; 평화는 모든 그러한 문제와 어려움을 문명화된 해결책으로 푼다. 산긱 종족들은, 나중에 질이 나빠진 아담 족속, 놋 족속들과 모두 적대적이었다. 안돈 족속은 일찍부터 황금률을 배웠으며, 오늘날도 그 에스키모 후손은 대체로 그 법을 따라 산다; 관습은 그들 사이에 확고하며, 그들은 폭력적인 적대감에서 아주 자유롭다.
안돈은 자식들에게, 각자가 나무를 저주하면서 막대기로 나무를 때림으로 말다툼 해결하는 것을 가르쳤다. 막대기를 먼저 부러뜨린 자가 이긴 사람이었다. 후일의 안돈 족속은 대중의 구경거리를 열어서 싸움을 해결하곤 했는데, 거기서 싸우는 자들이 서로 놀리고 비웃었고, 한편 청중은 박수로 이긴 자를 결정했다.
그러나 사회가 실제로 평화시대를 경험하고 전쟁같은 관행을 허용하기에 충분히 진화하기 전까지, 그러한 현상은 있을 수 없다. 전쟁이라는 개념은 어느 정도의 조직력을 의미한다.
사회 집단의 출현과 함께, 개인의 거슬림은 집단의 감정 속에 파묻혀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것은 종족 간의 평화를 희생시키면서, 종족 안에서 평온을 증진시켰다. 이처럼 먼저 내부 집단, 곧 종족이 평화를 누렸고, 그들은 언제나 바깥 집단, 다른 종족 사람들을 싫어했다. 일찍부터 사람은 다른 종족의 피를 흘리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70:1.6 그러나 이것도 처음에는 효과가 없었다. 초기 추장들이 오해를 풀려고 할 때, 그들은 종종 일년에 적어도 한 번은 부족의 돌싸움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씨족은 두 무리로 갈라져 하루종일 전투를 벌이곤 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재미로 하는 외에 아무런 다른 이유가 없었고, 그들은 정말로 싸움을 즐겼다.
전쟁은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했고 모든 동물이 싸움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속된다. 전쟁의 초기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1. 식량 습격으로 이어진, 굶주림. 땅의 부족은 항상 전쟁을 불러왔고, 이러한 투쟁에서 초기의 평화로운 부족들은 실질적으로 멸종했다.
2. 여성의 결핍― 집안 일꾼 부족을 해소하려는 시도. 여자를 훔치는 것은 항상 전쟁을 일으켰다.
3. 허영심―부족의 용맹을 나타내려는 욕심. 우월한 집단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열등한 사람들에게 강요하기 위해 싸우려 한다.
4. 노예―노동 계급을 위한 새로운 일꾼의 필요성.
5. 한 부족이 이웃 부족의 죽음을 초래했다고 믿었을 때 복수는 전쟁의 동기가 되었다. 머리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애도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복수를 위한 전쟁은 비교적 근대에 이르기까지 당연한 권리로 진행되었다.
6. 오락―초기의 젊은이들은 전쟁을 오락으로 여겼다. 전쟁을 위한 명분이 충분히 생기지 않으면, 평화가 숨이 막힐 때, 이웃 부족들은 거짓 싸움을 즐기기 위해서, 휴일을 이용해 급습하는 것에 참여하며 반친교전에 나가는데 익숙해 있었다.
7. 종교―종파로 전향하는 자들을 얻으려는 욕심. 원시 종교들은 모두 전쟁을 승인했다. 근래에 와서야 종교는 전쟁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보통 초기의 사제들은 군사력과 동맹을 맺었다. 오랜 세월 동안에 큰 평화 운동 중의 하나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려는 시도였다.
70:1.15 이 옛 부족들은 언제나 그들의 신들의 명령을 받고서, 추장이나 주술사의 요청을 받고서, 전쟁을 일으켰다. 히브리인은 그러한 “전투의 하나님”을 믿었고, 그들이 미디안 족속을 침략한 이야기는 옛날에 부족 전쟁에서 일어난 지독한 잔학 행위의 전형적 이야기이다. 모든 남자를 도살하고 나중에는 모든 남자 아이와 처녀가 아닌 모든 여자를 죽인 이 침략은 20만 년 전에 한 부족 추장의 풍습에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모세가 여호와의 명으로 미디안 족속을 쳤다는 이야기 (민수기 31장)
이것은 사회의 진화에 대한 이야기로―인종간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하면서―지구상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그 책임을 신들(gods)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Deity (디어티, 신)이 부추긴 것은 아니다.
군사적 자비심은 인류에게 더디게 찾아왔다. 한 여자 데보라가 히브리인을 통치했을 때에도, 바로 이 대규모의 잔학 행위가 계속되었다. 그 여자 장군이 이방인에게 승리했을 때 “모든 무리가 칼날의 이슬이 되게” 만들었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아주 일찍부터 민족의 역사에서, 독살시키는 무기들이 사용되었다. 온갖 종류의 몸 부분 자르기가 실행되었다. 사울은 자기 딸 미갈을 위해서 내야 할 지참금으로, 다윗에게 블레셋인 1백 명의 포피(包皮)를 서슴지 않고 요구했다.
초기의 전쟁에는 부족 전체가 싸웠으나, 후일에는 두 부족이 싸우는 대신에, 서로 다른 부족에 속한 두 사람이 논쟁을 벌였을 때, 그 두 논쟁자들만 결투를 벌였다. 다윗과 골리앗의 경우와 같이, 양쪽에서 뽑힌 대표자 간의 싸움의 결과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전쟁이 처음으로 개선된 것은 포로 수용이었다. 다음에, 여자는 전투 행위에서 제외되었고, 그런다음에 비전투원으로 인정되었다. 전투가 더욱 복잡하게 되는 것과 발을 맞추어 군대 계급과 상비군이 곧 개발되었다. 그러한 용사들은 여자와 교제하는 것이 일찍부터 금지되었고, 여자들은 오래전에 싸움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언제나 군인들을 먹이고 돌보았으며, 그들이 싸우도록 계속 격려했다.
70:1.21 선전포고 관행은 큰 진전을 의미했다. 싸우겠다는 의도를 그렇게 선언하는 것은 공정한 의식이 도래했음을 가리키며, 뒤이어 “문명화된” 전쟁 규칙이 차츰 발전되었다. 아주 일찍부터 종교적인 장소 가까이에서, 나중에는 어떤 거룩한 날에 싸우지 않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다음으로 망명의 권리에 대한 일반적인 인정이 뒤따랐다; 정치적 도피자들은 보호를 받았다.
이렇게 전쟁은 원시적인 사람 사냥으로 시작하였고 후일에 “문명화된” 국가들의 얼마큼 질서 있는 체계로 차츰 발전했다. 서서히 우호적인 사회적 태도가 적대감을 대체한다.
2. 전쟁의 사회적 가치 (The Social Value of War)
70:2.1 과거 시대에는 격렬한 전쟁이 사회의 변화를 일으켰고, 만 년 후에 자연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새로운 사상의 채택을 촉진했다. 이러한 전쟁의 이점에 대해 지불된 끔찍한 대가는 사회가 일시적으로 다시 야만 상태로 내몰렸다는 것이다; 문명화된 논리는 포기해야 했다. 전쟁은 강력한 약이고, 비용이 많이 들고 가장 위험하다; 어떤 사회적 질병을 가끔 고치지만, 때때로 전쟁은 아픈 사람을 죽이고 사회를 파괴한다.
국가 방어의 계속되는 필요성은 사회에서 새롭고 진보된 많은 조정을 일으킨다. 오늘날의 사회는, 처음에는 전적으로 군사적인 것, 군사 훈련의 초기 형태들 중 하나였던 심지어 전쟁을 위해 춤을 추었던, 오랫동안 목록에 올라간 유익한 혁신들의 이익을 누린다.
전쟁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지난날의 문명에 사회적 가치를 가져왔다.
1. 훈련, 곧 강제된 협동을 부과했다.
2. 사람들이 인내와 용기를 소중히 여기게 만들었다.
3. 민족주의를 육성하고 자리잡게 만들었다.
4. 약하고 부적당한 민족들을 멸망시켰다.
5. 원시적 평등의 망상을 없애고 선택해서 계층 있는 사회를 만들었다.
전쟁은 어떤 진화적이고 사람을 선택하는 가치가 있지만, 노예 제도와 마찬가지로, 문명이 서서히 진보함에 따라서 언젠가는 포기되어야 한다. 옛날의 전쟁은 여행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했는데, 이런 목표는 현대의 수송과 통신 방법으로 지금 더 쉽게 달성된다. 옛날의 전쟁은 국가를 강화했지만, 현대의 전투는 문명 세계의 문화를 파괴한다. 고대의 전쟁은 열등한 종족의 학살을 초래했다; 현대 전투의 최종 결과는 가장 훌륭한 인간 혈통을 골라서 파괴하는 것이다. 초기의 전쟁은 조직과 효율성을 촉진했지만, 이것은 이제 현대 산업의 목표가 되었다. 지난 시대에 전쟁은 문명을 앞으로 나가게 한 사회적 효소(酵素)였다; 지금은 포부와 발명에 의해 더 잘 달성된다. 고대의 전쟁은 전쟁하는 하나님 개념을 지지했지만, 현대인은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해 왔다. 지난날에는 전쟁이 많은 가치 있는 목적에 소용이 되었고, 문명을 세우는 데 필수 발판이었지만, 전쟁은 급속히 문화에 손해가 되고 있다―전쟁을 불러일으키는 데 따르는 끔찍한 손해에 비례해서 어떤 면으로도 사회에 이익을 배당할 수 없다.
70:2.10 한때 의사들은 피를 흘리는 것이 많은 질병의 치료법이라고 믿었지만, 그 이후로 의사들은 이러한 질병에 대한 더 나은 치료법을 발견했다. 그래서 전쟁의 국제적 유혈사태는 확실히, 국가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을 발견하도록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유란시아의 국가들은 이미 민족주의적 군국주의와 산업주의 사이의 거대한 투쟁에 돌입했고, 이 분쟁은 여러 면에서 사냥꾼과 농부 사이의 긴 투쟁과 유사하다. 그러나 산업주의가 군국주의를 이기려면 산업주의에 따르는 위험을 피해야 한다. 유란시아에서 산업이 나타나는데 따르는 위험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영적으로 눈 먼 상태에서, 물질주의로 강하게 흘러가는 것.
2. 부와 권력의 숭배에 따른 가치의 왜곡.
3. 사치의 악덕에 따른 문화적 미성숙.
4. 나태함의 위험 증가에 따른 봉사에 대한 무감각.
5. 바람직하지 않은 인종적 관대함의 성장에 따른 생물학적 저하.
6. 표준화된 산업적 노예의 위험에 따른 personality 침체. 노동은 고상한 것이지만, 고역은 지루하다.
70:2.18 군사주의는 독재이며 잔인하다―야만스럽다. 정복자들 사이에서 사회 조직을 촉진하지만, 정복당한 자를 무너뜨린다. 산업주의가 더 문명화된 것이며, 창의성을 촉진하고 개성을 북돋아 주도록, 산업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사회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창의성을 길러주어야 한다.
전쟁을 미화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 전쟁을 미화하는 것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분별하라. 그래서 문명의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 전쟁을 대체할 것으로 무엇을 제공해야 할 것인지를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적절한 대체품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너희는 전쟁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확신할 것이다.
인간은 평화가 물질적 복지를 위해 최선이라는 것을 속속들이 거듭하여 확신하고, 그리고 인류의 자아 보존 반응에 속하는, 늘 쌓이는 감정과 에너지를 방출하도록 예정된 집단 욕구를 이따금 해소하는 타고난 성향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사회가 평화적 대용품을 지혜롭게 마련하기 전까지는, 인간은 결코 평화를 정상 생활의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70:2.21 그러나 비록 지나는 일일지라도, 전쟁은 거만한 개인주의자로 이루어진 민족을 상당히 집중된 권한―최고 집행자―에 복종하도록 강요한, 체험의 학교로 존중되어야 한다. 옛날 방식의 전쟁은 본질적으로 위대한 사람을 지도자로 뽑았지만, 현대의 전쟁은 이제 더 이렇게 하지 않는다. 지도자를 찾기 위해서 사회는 이제 그가 평화를 정복했는지에 눈을 돌려야 한다: 산업, 과학, 그리고 사회적 업적을 이루었는가이다.
3. 초기의 인간 관계 (Early Human Associations)
70:3.1 가장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집단이 전부이다; 심지어 아이들도 공동 재산이다. 진화하는 가족은 아이를 기르는 일에 집단을 대체하는 한편, 신흥 가문과 부족들은 사회적 단위로 자리를 잡았다.
성욕과 모성애는 가정을 이룬다. 그러나 진짜 정부는 가족을 초월하는 집단들이 형성되기 시작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그 무리의 가족 이전 시절에, 비공식으로 선택된 개인들이 지도자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부시맨은 결코 이 원시 단계를 넘어서 진보하지 않았으며, 그들 무리 안에는 우두머리가 없다.
가족들은 혈연, 일가친척들의 집단에 의해 통합되었다; 이들은 그 후 부족, 영토 공동체로 발전했다. 전쟁과 외부의 압력은 인척 관계를 가진 씨족들에게 부족을 조직하도록 강요했지만, 이러한 초기 및 원시 집단을 어느 정도 결속한 것은 상업과 무역이었다.
유란시아의 평화는 공상적인 평화 계획의 감상에 젖은 어떤 궤변보다 국제 무역 조직에 의해 훨씬 더 증진될 것이다. 무역 관계는 언어의 발달과 향상된 의사소통 방법 그리고 더 나은 교통수단에 의해 촉진되었다.
공통된 언어가 없는 것은 언제나 평화 집단의 성장을 방해해왔지만, 돈은 현대 무역에서 보편적 언어가 되어버렸다. 현대 사회는 대체로 산업 시장에 의해 결속되어 있다. 이득 동기는 봉사하려는 열망이 증대될 때 강력한 문명인이 된다.
70:3.6 초기에는 각 부족이 점점 더 많은 두려움과 의심을 가진 동심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따라서 한때는 모든 낯선 사람들을 죽이고, 나중에는 그들을 노예로 삼는 관습이 있었다. 옛날의 친교 관념은 씨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했다; 씨족의 회원 자격은 죽은 뒤에도 계속된다고 생각되었다―이것은 가장 초기의 영생 개념의 하나이다.
부족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은 서로의 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어떤 집단에서는 피를 마시는 대신에 침을 교환하였는데, 이것은 사교적인 입 맞추는 관습의 옛 기원이다. 그리고 결혼이든 입족 예식이든, 관계를 맺는 모든 의식은 항상 잔치를 벌이면서 끝이 났다.
후에, 적포도주로 희석된 피가 사용되었고, 결국 포도주만으로 입족 의식을 봉인하려고 마셨고, 이 의식은 포도주 잔을 스침으로 상징을 표시하고 음료를 삼키고서 끝냈다. 히브리인은 이 입족 의식의 변형된 형태를 실행했다. 그들의 아랍 조상은 서약을 이용했는데, 서약은 후보자의 손이 부족 원주민의 생식기에 놓인 동안 실시되었다. 히브리인은 받아들인 외국인을 친절하게, 형제처럼 다루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외국인은 너희 사이에 태어난 자와 같을 것이니, 너희는 그를 네 몸처럼 사랑하라.”
“손님에 대한 우정”은 일시적인 친교 관계였다. 방문하는 손님이 떠날 때, 접시를 반쪽으로 깨뜨리고 한 조각을 떠나는 친구에게 주었고, 그것은 나중에 방문하려고 도착할지 모르는 제삼자를 위하여 적당한 소개장으로 사용되곤 하였다. 손님들은 자기의 여행과 모험에 관하여 이야기함으로 방문에 대하여 보답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옛날의 이야기꾼들은 너무 인기가 많아져서, 결국 사냥이나 수확기에는 그들의 활동을 금지했다.
최초의 평화 조약은 “혈맹”이었다. 전쟁 중인 두 부족의 평화 사절들은 만나서 경의를 표한 다음 피가 날 때까지 피부를 찌르고, 그런 다음 그들은 서로의 피를 빨고 평화를 선언하곤 했다.
70:3.11 가장 일찍 있었던 평화 사절단은 적들의 성적 만족을 위해 선택된 처녀들을 데려오는 남성 대표단들로 구성되었는데, 이 성욕은 전쟁의 충동을 퇴치하는데 이용되었다. 그렇게 명예를 받은 부족은 자체가 바치는 처녀들을 데리고, 답례 방문을 하곤 했다; 따라서 평화는 확고히 확립되게 된다. 그리고 곧 족장들 간의 혼담이 승인되었다.
4. 씨족과 부족 (Clans and Tribes)
70:4.1 첫 평화 집단은 가족이었고, 다음에는 씨족ㆍ부족, 나중에는 민족이었으며, 민족은 결국 영토를 가진 현대 국가가 되었다. 유란시아의 나라들이 아직도 전쟁 준비에 막대한 돈을 쓰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도, 오늘날의 평화 집단들이 혈연을 넘어서 국가들을 포함한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은 아주 고무적이다.
그 씨족은 그 지파 내의 혈족으로, 그들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공통의 관심사에 기인한다.
1. 공통된 조상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2. 공통된 종교 토템에 충성한다.
3. 같은 지방 사투리를 말한다.
4. 공통된 거처를 함께 쓴다.
5. 같은 적을 무서워한다.
6. 공통된 군사 체험을 가진다.
70:4.9 씨족의 우두머리들은 항상 부족장들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초기 부족 정부들은 허술한 씨족 연합이었다. 호주 원주민들은 결코 부족 정부의 형태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씨족의 평화 추장들은 보통 모계를 통해서 다스렸다. 부족 전쟁 추장들은 부계를 확립했다. 부족 추장 및 초기 왕의 법정은 씨족의 수령들로 구성되었고, 왕 앞으로 그들을 1년에 몇 번씩 초대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이것은 왕이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의 협조를 더 단단히 확보하게 만들었다. 씨족들은 지역의 자치 정부에서 값진 목적에 쓰였지만, 크고 강한 국가의 성장을 크게 지연시켰다.
5. 정부의 시작 (The Beginnings of Government)
70:5.1 인간의 모든 제도는 시작이 있었고, 시민 정부는 결혼, 산업, 종교만큼이나 진보적인 진화의 산물이다. 초기의 씨족과 원시 부족들로부터, 연속되는 체제의 인간 정부가 차츰 개발되었고, 20세기의 2/3을 특징짓는 사회적, 시민적 규제의 형태까지, 이러한 정부는 생겼다가 없어졌다 한다.
가족 단위가 차츰 나타나자, 씨족 조직에서, 같은 피를 가진 가족들의 집합에서, 정부의 기초가 세워졌다. 진짜 정부 단체의 처음은 원로 회의였다. 이 규제 그룹은 어느 정도 능률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야만인도 지혜와 경험을 존중하였고, 오랜 세월 동안 원로들의 지배가 이어졌다. 나이 든 소수가 이렇게 독재하는 통치는 점차 가부장적 사상으로 발전했다.
초기의 원로 회의에는 모든 정부 기능의 잠재성이 존재했다; 행정, 입법, 그리고 사법이다. 당대의 풍습을 풀이했을 때, 그 회의는 법정이었다; 새로운 양식의 사회적 법을 세울 때는 입법 기관이었다; 그러한 선포와 법령이 집행되는 한도까지는 행정부였다. 그 회의의 의장은 후대 부족장의 선구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어떤 부족에는 여자 회의가 있었고, 때때로 많은 부족이 여자 통치자를 가졌다. 홍인의 어떤 부족들은 “7인 의회”의 만장일치 통치를 따르는 면에서 오나모나론톤의 가르침을 보존했다.
인류가 평화나 전쟁도 토론 사회에 의해 운영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어려웠다. 원시적 “교섭”은 거의 유익하지 않았다. 종족들은 여러 씨족의 수령들이 명령하는 군대는 한 사람이 지휘하는 강한 군대에 맞서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배웠다. 전쟁은 항상 왕을 만들었다.
70:5.6 처음에 전쟁 추장은 군사 근무에만 뽑혔고, 평화시에는 그 권한의 얼마를 포기하곤 했는데, 이때 추장의 임무는 사회적 성질을 더 띠었다. 그러나 차츰차츰 그들은 평화 기간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한 전쟁에서 다음 전쟁이 있기까지 내내, 계속하여 다스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흔히 한 전쟁이 끝나고 다음 전쟁이 생기는 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이 초기의 전쟁 군주들은 평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후일에 어떤 추장들은 군대 근무가 아닌 일 때문에 선출되었고, 특별한 체격이나 뛰어난 개인 능력 때문에 뽑히었다. 홍인은 흔히 두 부류의 추장―총재, 곧 평화 추장, 그리고 세습 전쟁 추장―이 있었다. 평화시의 통치자는 또한 판사이며 선생이었다.
일부 초기 사회는 종종 족장 역할을 하는 주술사 공동체를 다스렸다. 한 사람이 사제, 의원, 최고 집행자로서 행동하곤 했다. 초기 왕실 휘장은 원래 사제 복장의 표시나 상징이었다.
이런 단계를 걸쳐서 정부의 행정부가 존재하게 되었다. 씨족과 부족 회의는 자문 자격으로, 그리고 나중에 나타나는 입법부와 사법부의 선봉자로서 계속하였다. 아프리카에는 오늘날 이 모든 형태의 원시 정부가 여러 부족 사이에서 실제로 존재한다.
6. 군주제 정부 (Monarchial Government)
70:6.1 효과적인 국가 통치는 전적인 행정 권한을 가진 최고 통치자의 등장으로만 이루어졌다. 인간은 한 인물에게 사상을 부여하기 보다는, 힘을 부여해야만 효과적인 정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통치권은 가문의 권위나 부의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족장 소군주가 정말로 왕이 되었을 때, 그를 때때로 “백성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후에, 왕은 영웅들로부터 솟아나온 것으로 생각되었다. 세월이 더 지나서, 왕이 신성한 기원을 가졌다는 믿음 때문에, 통치권은 세습되었다.
세습하는 왕권은 이전에 임금이 죽고 후계자가 선출되는 사이에, 대혼란을 일으켰던 무정부 상태를 피했다. 가족은 생물학상의 우두머리가 있다; 씨족은 자연히 선택된 지도자가 있었다; 부족과 나중에 생긴 국가는 자연스런 지도자가 없었다. 이것은 추장이나 왕의 자리를 물려주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였다. 왕의 가족과 귀족 제도의 개념은 또한 가문이 “이름 소유권”을 가지는 관습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왕의 계승은 결국 초자연의 일로 간주되었고, 왕족의 피는 칼리가스티아 영주의 육체화된 참모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처럼 왕은 주물 성격자가 되었고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왕을 무서워하게 되었으며, 특별한 형태의 대화를 궁정에서 쓰도록 채택하였다. 요즈음까지도 왕의 손길은 병을 고친다고 생각되었고, 어떤 유란시아 민족들은 아직도 그들의 통치자가 신에게서 기원을 가졌다고 여긴다.
초기의 주물 임금은 흔히 은둔 속에 두었다. 그는 너무나 신성해서 잔칫날과 휴일을 빼고는 사람들이 볼 수 없다고 여겼다. 보통 한 대표가 그를 흉내 내도록 선택되었고, 이것이 수상(首相)의 기원이다. 첫 내각의 관리는 식량 관리자였고, 다른 사람들이 곧 뒤를 이었다. 통치자들은 이내 상업과 종교를 책임지는 대표들을 지명했다. 내각의 발전은 집행 권한을 개인적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직접 내디딘 걸음이었다. 초기 임금의 이러한 조수들은 인정받는 귀족이 되었고, 여자들이 전보다 더 존경받게 되자, 왕의 아내는 차츰 왕비의 위엄으로 올라갔다.
70:6.6 양심 없는 통치자들은 독을 발견함으로 큰 권력을 쥐었다. 일찍부터 궁중의 마술은 악마처럼 잔학했다. 왕의 적들은 금방 죽었다. 그러나 아주 잔학한 폭군도 얼마큼 제한을 받았다. 그는 늘 암살당하는 두려움 때문에 최소한 자제했다. 주술사ㆍ마술사ㆍ사제는 언제나 임금에게 강력한 저지 세력이었다. 나중에는, 지주들, 곧 귀족 계급은 억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가문과 지파는 언제나 일어나서 독재자와 폭군들을 전복시키곤 했다. 폐위된 통치자는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흔히 자살하는 선택권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어떤 환경에서 자살하는, 고대 사회의 유행을 낳았다.
7. 원시의 클럽과 비밀 사회 (Primitive Clubs and Secret Societies)
70:7.1 혈연관계는 첫 번째 사회 집단을 결정했다; 연합은 혈연 집단을 확대시켰다. 혼인은 그룹 확장의 다음 단계였고, 그 결과로 생긴 복잡한 부족은 진정한 첫 번째 정치 단체였다. 사회 발전의 다음 진보는 종교 종파와 정치 클럽의 진화였다. 이것들은 처음에 비밀 결사로 나타났고, 원래는 완전히 종교적이었다; 그 후에 그들은 규제적이 되었다. 처음에는 남성 클럽이었지만 나중에는 여성 클럽이 등장했다. 현재 그들은 다음 두 부류로 나눠지게 되었다: 사회정치 부류와 종교-신비주의 부류이다.
이 사회들의 비밀 유지에는 다음과 같은 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1. 어떤 금기를 위반하는 것 때문에 통치자의 비위를 건드리는 두려움.
2. 소수의 종교의식을 거행하기 위해서.
3. 가치 있는 “정신”이나 상업의 비밀을 보존하려는 목적으로.
4. 어떤 특별한 매력이나 마술을 즐기기 위해서.
70:7.7 이 사회들이 지키는 바로 그 비밀은 모든 회원에게, 나머지 부족 사람에 대해서 신비의 힘을 주었다. 비밀은 또한 허영심에도 호소한다. 가입한 자들은 당대에 사회에서 귀족이었다. 입회식이 있고 나서 소년들은 어른들과 함께 사냥했다; 전에 남자 아이는 여자들과 함께 채소를 거두었다. 사춘기 시험에 실패하여 남자들의 거처 바깥에 강제로 여자와 아이들과 함께 남아 있는 것, 여자처럼 여겨지는 것은 최고의 치욕이었고 부족에서 불명예였다. 게다가, 가입하지 않은 자들은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다.
원시 인간은 아주 일찍부터 사춘기 청년들에게 성욕의 자제를 가르쳤다. 사춘기부터 결혼하기까지 소년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관습이 되었고, 소년의 교육과 훈련은 남자들의 비밀 사회에 맡겼다. 이러한 클럽의 주요 활동 가운데 하나는 사춘기의 청년들을 통제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사생아가 생기는 것을 막았다.
이 남자의 클럽이 다른 부족에서 온 여자를 사용하는 데 돈을 치렀을 때, 상업화된 매춘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집단들은 놀랍게도 성의 문란에 빠지지 않았다.
사춘기에 입문하는 의식은 보통 5년에 걸쳐 연장되었다. 많은 자기-고문과 고통스러운 칼베임이 의식 속으로 들어갔다. 할례는 이런 비밀 사회 중 하나의 입회 의식으로서 처음 행해졌다. 사춘기 입문의 일부로서 부족의 표시를 몸에 새겼다: 문신은 그러한 부족원의 표징으로서 시작되었다. 그러한 고문은, 상당한 고난과 함께, 이 젊은이들을 강하게 단련시켰고, 삶의 현실과 그에 따른 불가피한 시련은 그들에게 감명을 주도록 고안되었다. 나중에 나타나는 운동 시합과 육체적 경기가 이 목적을 더 잘 수행하게 되었다.
70:7.11 그러나 비밀 사회들은 사춘기의 도덕성을 개량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사춘기 예식의 주요한 목적의 한 가지는 소년에게 다른 남자의 아내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험한 단련과 훈련을 이렇게 몇 년 동안 거친 다음, 결혼하기 바로 전에, 이 젊은 남자들은 보통, 여가와 자유를 가지도록 잠시 풀려났고, 그 뒤에 돌아와서 결혼하고 부족의 금기에 일생동안 복종하였다. 그리고 이 고대의 관습은 “젊어서 난봉을 피우는” 어리석은 개념으로서 현대까지 계속되었다.
후일에 많은 부족이 여자들의 비밀 클럽을 만드는 것을 승인했는데, 그 목적은 사춘기의 소녀들을 아내와 어머니가 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입회한 다음에 소녀는 결혼할 자격이 있었고 “신부 보이기”에 나가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이것은 그 시절에 사회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 모임이었다. 결혼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 여자들의 계급은 일찍부터 생겼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의 집단과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여자의 집단이 따로 조직되었을 때, 당장에 비밀 아닌 클럽들이 등장했다. 이 사회들은 정말로 처음 학교였다. 남자의 클럽과 여자의 클럽은 서로를 괴롭히는 경향에 흔히 빠졌지만, 어떤 진보된 부족들은 달라마시아 선생들과 접촉을 가진 뒤에, 남녀 공학을 실험했고, 남녀 모두를 위하여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가지고 있었다.
비밀 사회들은 주로 그 입회식의 신비스런 특징으로 말미암아, 사회 계층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 사회의 회원들은 애도하는 의식―조상 숭배―에서 호기심 있는 자를 놀라게 해서 쫓아내려고 처음으로 가면을 썼다. 나중에 이 의식은 가짜 강령회로 발전되었고, 거기서 귀신이 나타났다고 소문이 났다. “새로이 탄생”한 고대의 사회들은 신호를 썼고, 특별한 비밀 은어를 이용했다. 또한 어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맹세했다. 그들은 밤의 경찰로서 행동했고, 그 밖에도 넓은 범위의 사회 활동 분야에서 일했다.
70:7.16 모든 비밀 결사는 선서를 부과하고 신뢰를 강요했으며, 비밀을 지키라고 가르쳤다. 이런 명령은 폭도에게 두려움을 주고 폭도를 통제했다. 그들은 또한 경계를 맡는 사회단체로 행동했으며, 따라서 사형 법을 실천했다. 이들은 부족들이 전쟁할 때 첫 간첩이었고, 평화 시절에는 첫 비밀경찰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양심 없는 왕이 바늘방석에 앉게 만들었다. 그들을 상쇄하기 위해서, 왕들은 자체의 비밀경찰을 길렀다.
이러한 사회단체는 처음으로 정당을 낳았다. 처음 정당 정치는 “강한 자” 대 “약한 자”였다. 옛날에는 내란이 있은 다음에야 행정부가 갈렸는데, 이것은 약한 자가 강해졌다는 것을 풍부히 증명한다.
이 클럽들은 빌려준 돈을 걷기 위하여 상인에게 고용되었고, 세금을 걷기 위해서 통치자에게 고용되었다. 세금 걷는 것은 오랜 투쟁이었는데, 가장 이른 형태 중의 하나는 십일조, 곧 사냥이나 전리품의 10분의 1이었다. 세금은 최초에 왕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과되었지만, 성전 예배를 지원하는 헌금으로 위장했을 때 세금 걷기가 더 쉽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윽고 이 비밀 결사들은 첫 자선 조직으로 성장했고, 나중에는 초기의 종교 단체―교회의 선구자―로 진화했다. 마침내 이 사회들 중에 더러는 부족 간의 사회, 곧 첫 국제단체가 되었다.
8. 사회 계급 (Social Classes)
70:8.1 인간의 정신, 육체의 불평등은 사회 계급이 나타날 것을 보장한다. 사회 계층이 없는 유일한 세계는 가장 원시적 세계와 가장 진보된 세계이다. 새로운 문명은 아직 사회적 수준의 분화를 시작하지 않은 반면, 빛과 생명에 정착한 세계는 모든 중간 진화 단계의 특징인 인류의 이러한 분열을 대부분 없애버린다.
사회가 야만적 상태에서 미개 상태로 변하면서, 그 인간 요소들은 다음의 일반적 이유로, 계층별로 집단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1. 자연스런 이유―접촉, 친척 관계, 결혼. 처음 사회적 구별은 남녀ㆍ나이ㆍ혈연―추장과 무슨 인척 관계인지―에 기초를 두었다.
2. 개인적 이유―능력과 끈기와 기술, 그리고 불굴의 정신을 인정하는 것. 언어의 능숙, 지식, 일반적 지능의 인정이 곧 뒤따랐다.
3. 우연―전쟁과 이민은 인간 집단을 분리하였다. 계급의 진화는 정복에, 승자와 피정복자의 관계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고, 한편 노예 제도는 자유로운 자와 매인 자로, 처음으로 일반적 사회의 구분을 가져왔다.
4. 경제적 이유―빈부. 재산, 그리고 노예의 소유는 한 사회 계급의 유전적 기초가 되었다.
5. 지리적 이유―도시나 시골의 촌락이 생기자 그에 따라서 계급이 생겨났다. 도시와 시골은 각자가 목자나 농부, 그리고 상인이나 산업가로 전문화되는 데 기여했으며, 그들의 관점과 반응은 달랐다.
6. 사회적 이유―다른 여러 집단의 사회적 가치를 대중이 추정하는 데 따라서 계급이 차츰 형성되었다. 가장 일찍부터 생긴 이 종류의 구분에는 사제와 선생, 통치자와 무사, 자본가와 상인, 보통 노동자와 노예가 있었다. 노예는 결코 자본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임금 받는 자는 때때로 자본가의 서열에 낄 수 있었다.
7. 직업적 이유―직종이 늘어나자, 그들은 계급과 조합을 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노동자는 세 집단으로 나뉘었다: 주술사를 포함한 전문가 계급, 다음에 기술 노동자, 미숙련 노동자가 뒤따랐다.
8. 종교적 이유―초기의 종교단체 클럽은 씨족과 부족 안에서 자체의 계급을 만들었고, 사제들의 경건함과 신비스러움은 그들이 따로 된 사회 집단으로 오랫동안 지속하게 만들었다.
9. 종족의 이유―일정한 국가나 영토 단위 안에 둘 이상의 종족이 존재하는 것은 보통 피부색에 따른 카스트를 만들어낸다. 인도 최초의 카스트 제도는, 초기 이집트의 카스트와 마찬가지로, 피부색에 기초를 두었다.
10. 나이―청춘기와 성년기. 부족 사이에서 소년은 아버지가 사는 한, 아버지의 보호 밑에 남아 있었고, 한편 소녀는 결혼할 때까지 어머니의 보살핌에 맡겨졌다.
70:8.13 융통성 있고 변하는 사회 계급은 진화하는 문명에 필수이지만, 계급이 카스트가 될 때, 사회 수준이 굳어질 때, 사회의 안정은 개인의 창의성을 줄임으로 향상된다. 사회적 카스트는 산업에서 한 사람의 자리를 찾는 문제를 풀지만, 또한 개인의 발전을 뚜렷이 단축시키고 사회의 협동을 실질적으로 방해한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사회의 계급들은, 다음과 같은 진보하는 문명의 생물학적ㆍ지적ㆍ영적 자원의 지능적 조종을 통해, 인간이 점진적으로 그들의 진화하는 끝을 달성하기까지 지속될 것이다:
1. 종족 혈통의 생물학적 혁신―열등한 인간 혈통을 골라서 없앤다. 이것은 필사자의 많은 불평등을 없애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2. 그런 생물학적 개량으로 생겨나는 증가된 두뇌력을 교육으로 훈련한다.
3. 필사자가 친척이요 형제라는 느낌을 종교적으로 깨우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미래에 아득하게 천년이 허다하게 지나야 그 참된 열매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의 진보를 가속하는 이러한 요인을 지능적으로, 현명하게, 참을성 있게 조종함으로, 많은 사회적 개선이 즉시 생길 것이다. 종교는 혼란으로부터 문명을 들어 올리는 강력한 지렛대이지만, 건전한 정상 유전에 단단히 기초를 두지 않고는 힘을 쓸 수 없다.
9. 인간의 권리 (Human Rights)
70:9.1 자연은 사람에게 아무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직 생명과 생명이 살아야 할 세상을 부여한다. 자연은 무장하지 않은 사람이 배고픈 호랑이를 원시림에서 만났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면 이를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살 권리조차 주지 않는다. 사회가 사람에게 주는 첫째 선물은 안전이다.
차츰차츰 사회는 권리를 주장했고, 오늘날 이 권리는 다음과 같다:
1. 식량 공급의 보장
2. 군사적 방어―준비를 통해 얻는 안전.
3. 내부 평화의 보존―개인에 대한 폭력과 사회의 무질서를 방지하는 것.
4. 성의 통제―결혼, 가족 제도.
5. 재산―소유할 권리
6. 개인과 집단 경쟁의 육성.
7. 젊은이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준비.
8. 무역과 상업의 촉진―산업의 발전.
9. 노동 조건과 보상의 개선.
10. 영적 동기로 이 모든 다른 사회 활동을 고귀하게 만들기 위해 종교적 관행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
70:9.13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권리가 오래되면, 이를 흔히 자연권이라 부른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는 정말로 자연 발생이 아니다; 전부 사회적이다. 이 권리는 상대적이고 늘 변하고 있으며, 경기 규칙에 불과하다―늘 바뀌는 인간의 경쟁 현상을 다스리는, 인정된 여러 관계를 조정한 것이다.
어느 시대에 권리로 여길 수 있는 것은 다른 시대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수의 장애자와 퇴화된 자가 살아남은 것은 그들이 그렇게 20세기 문명을 거추장스럽게 할 어떤 자연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당대의 사회, 곧 풍습이 그렇게 선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권리 중에 거의 아무것도 유럽의 중세에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때는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속했고, 권리는 국가나 교회가 허락한 특권이나 은혜였다. 이 잘못에 대한 저항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믿음으로 인도했기 때문에, 똑같이 잘못되었다.
70:9.16 약하고 열등한 자는 언제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국가가 강하고 우수한 자에게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고 그밖에 결점을 회복하도록 강요해야 한다고 언제나 주장했는데, 이런 결점은 아주 빈번히 바로 그들의 무관심과 게으름에서 자연히 생긴 결과이다.
그러나 이 평등의 이상은 문명의 소산이다. 자연 속에 평등은 발견되지 않는다. 문화 자체도 문화를 받아들일 사람의 바로 그 능력이 다른 것은 사람이 평등하지 않게 타고난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자연스러운 평등이라 생각되는 것을 갑자기 비진화 방법으로 실현하는 것은 문명화된 사람을 원시 시대의 투박한 관습으로 재빨리 되돌려 보낼 것이다. 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를 제공할 수 없지만, 각자의 다른 권리를 공정하고 공평하게 관리할 것을 약속할 수 있다. 자연인에게 자아 유지를 추구하고, 자아 존속에 참여하고, 한편 동시에 어느 정도 자아 욕구의 충족을 즐기는 공평하고 평화로운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사회의 일이요 임무이며, 자아에 관한 이 세 가지는 모두, 인간의 행복의 총합이다.
10. 공정의 진화 (Evolution of Justice)
70:10.1 자연적 공정은 인간이 만든 이론이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자연에서, 공정은 순전히 이론적이고 완전히 허구이다. 자연은 오직 한 종류의 공정―원인에 대한 불가피한 결과에 따른다.
공정은, 인간이 파악한 대로 자기의 권리를 찾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진보적인 진화의 문제이다. 공정의 개념은 영이 깃든 mind에서 잘 이루어질 수 있지만, 공간 세계에서 존재하는데는 충분히-완전하게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
원시인은 모든 현상을 한 사람에게 부과했다. 누가 죽었을 경우에, 야만인은 무엇 때문에 그를 죽였는지가 아니라, 누가 죽였는지를 물었다. 따라서 사고로 사람을 죽인 것은 인정되지 않았고, 죄를 벌할 때 범죄자의 동기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판결은 입은 손해에 따라서 정해졌다.
가장 초기의 원시 사회에서 여론은 직접 작용했고, 법을 담당하는 관리가 필요 없었다. 원시인의 삶에는 사생활이 없었다. 이웃이 한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졌다. 따라서 이웃이 사사로운 일을 엿보는 권리가 생겼다. 집단 전체가 각 개인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어느 정도 통제해야 한다는 이론에 근거를 두고 사회가 규제되었다.
사람들은 일찍이 귀신이 주술사와 사제들을 통해서 공정이 실행된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이 계급을 최초로 범죄를 탐지하고 율법을 시행하는 자로 만들었다. 범죄를 찾아내려고 그들이 초기에 쓴 방법은 독물ㆍ불ㆍ고통으로 시련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야만스런 시련은 서투른 중재 기술에 불과했다; 그들은 반드시 분쟁을 정당하게 해결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독극물을 투여했을 때, 피고인이 구토를 했다면, 그는 무죄였다.
70:10.6 구약 성경은 이 혹독한 시련 중에 하나, 결혼 생활의 죄에 대한 시험을 기록한다. 한 남자가 그의 아내가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고 의심하면, 아내를 사제에게 데리고 가서 그가 의심하는 바를 이야기했고, 그 뒤에 사제는 거룩한 물과 성전 마루에서 쓸어 모은 것으로 이루어진 혼합물을 준비하곤 했다. 위협하는 저주를 포함하여 마땅한 의식을 치른 뒤에, 고발당한 아내는 그 더러운 약을 마시라고 강요받았다. 아내에게 죄가 있으면, “저주를 일으키는 그 물이 그 여자에게 들어가서 쓰게 될 것이며, 그 여자의 배가 붓고 허벅지는 썩을지라. 그리고 민족 사이에서 저주를 받으리라.” 어쩌다가 어떤 여자가 이 더러운 물 한 모금을 쭉 들이키고 몸이 아픈 징후를 보이지 않으면, 그 여자는 시샘하는 남편이 고소한 죄목에서 풀려났다.
이러한 잔혹한 범죄 탐지 방법은 거의 모든 진화하는 부족들에 의해 한 때 혹은 다른 때에 행해졌다. 결투는 혹독한 시련에 의한 재판의 현대적 생존이다.
3천 년 전에 히브리인과 기타 반 문명화된 부족들이, 공정을 시행하는 그런 원시 방법을 쓴 것에 놀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생각 있는 사람들이, 성스러운 기록을 수집한 페이지 안에 그러한 미개 상태의 유물을 남겨두려 했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의심되는 결혼의 부정을 찾아내고 판결하는 일에 관하여, 어떤 신성한 존재도 그렇게 부당한 지침을 필사 인간에게 결코 준 적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사회는 눈에는 눈, 목숨에는 목숨으로, 복수하여 갚는 태도를 일찍부터 채택하였다. 진화하는 부족들은 모두 피의 복수 권리를 인정했다. 복수는 원시적 삶의 목표가 되었지만, 종교는 그 후로 이 초기의 부족 풍습을 크게 변화시켰다. 계시된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언제나 선포했다, “‘복수는 나의 일이다’ 주가 말씀하신다.” 불문율의 핑계로 행해지는 초기 시절에 복수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오늘날의 살인과 아주 다르지 않다.
자살은 흔한 형태의 복수였다. 사람이 살아서 복수할 수 없다면, 그는 귀신으로서 돌아와서 적에게 노여움을 퍼부을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죽었다. 이 믿음이 아주 널리 퍼졌으니까, 적의 문간에서 자살한다는 위협은 보통 적을 항복시키는 데 넉넉했다. 원시인은 생명을 그다지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찮은 일에 자살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달라마시아 사람들의 가르침은 이 관습을 크게 줄였으며, 최근에는 여가ㆍ편안ㆍ종교ㆍ철학이 합쳐서 인생을 더 즐겁고 바람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단식 투쟁은 이 옛 시절의 복수 방법의 현대판이다.
70:10.11 가장 초기 형태의 진보된 부족 율법 중의 하나는 피의 복수를 하나의 부족 일로 떠맡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설명하기 야릇하지만, 그때에도 남자는 값을 충분히 치르고 아내를 샀다면, 벌을 받지 않고 아내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에스키모는 범죄에 대한 벌을, 살인의 경우에도, 피해자의 가족이 선포하고 집행하도록 맡긴다.
또 한 가지 진보는 금기 위반에 대하여 벌금을 물게 하는 것, 벌칙 조항이었다. 이 벌금은 처음으로 공공 수익이었다. “피의 값”을 치르는 관습은 또한 피로 갚는 복수의 대안으로서 유행하였다. 그러한 손해는 보통 여자나 가축으로 물었다. 실제로 벌금, 돈으로 보상하는 것이 범죄에 대한 벌로서 인정을 받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형벌 관념이 본질적으로 보상이었으니까, 사람의 목숨을 포함하여 모든 것에, 결국 값이 매겨지게 되었고, 그 값을 손해로서 치를 수 있었다. 히브리인은 피 값 치르는 관습을 처음으로 폐지하였다. 모세는 그들이 “사람을 죽인 죄가 있는 살인자의 생명을 속량하지 말라. 그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공정은 처음에 가족에 의해, 그 다음에 씨족에 의해, 그리고 나중에 부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진정한 공정의 행정은 원수 갚는 일을 개인과 친척 집단으로부터 받아서, 사회 집단, 곧 국가의 손에 넘겨주는 것에서 비롯된다.
산 채로 태워 죽이는 벌은 한때 보통 관행이었다. 함무라비와 모세를 포함해서, 고대의 많은 통치자가 이것을 인정하였고, 모세는 많은 범죄, 특히 심각한 성적(性的) 성질을 가진 범죄는 화형에 처함으로 벌을 주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만일 “제사장”이나 다른 유지의 “딸”이 공공 창녀가 되면, “그 여자를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이 히브리인의 관습이었다.
반역―자기 부족의 동료를 “팔아넘기거나” 배반하는 것―은 처음으로 죽을 죄였다. 가축을 훔치는 것은 보편적으로 즉시 죽는 벌을 받았고, 최근에도 말을 훔치는 것은 비슷하게 벌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벌의 무거움은 벌의 확실성과 신속성만큼 가치 있는 범죄 억제책이 아니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70:10.16 사회가 범죄를 벌하지 못할 때, 집단의 분개심은 보통 사적 제재로 죽이는 수단으로서 나타난다; 피신처의 조항은 갑작스런 이런 집단의 분노를 피하는 수단이었다. 사적 제재로 죽이기와 결투는 개인이 사사롭게 시정하는 일을 국가에게 넘겨주기 싫어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11. 법과 법정 (Laws and Courts)
70:11.1 밤이 언제 새벽에 낮으로 이어지는지를 정확히 가리키는 것만큼, 풍습과 법을 뚜렷이 구분하기가 힘들다. 풍습은 형성 과정에 있는 법과 경찰의 규제이다. 오랫동안 확립되었을 때, 규명되지 않은 풍습은 엄밀한 법, 분명한 규칙, 잘 규명된 사회적 규약들으로 구체화되는 경향이 있다.
법은 반드시 처음에 부정적이고 무엇을 하지 말라 한다. 진보하는 문명에서는 법이 더욱 적극성을 띠고 무엇을 지시한다. 초기의 사회는 부정적으로 작용했으며, 모든 다른 사람에게 “너희는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림으로 개인에게 살 권리를 주었다. 개인에게 주는 모든 권한이나 자유는 모든 다른 사람의 자유를 단축시키며, 금기, 곧 원시의 율법이 이 일을 해냈다. 금기라는 관념 전체가 본래부터 부정적인데, 이는 원시 사회가 완전히 무엇을 막으려고 조직되었고, 공정의 초기 행정은 금기를 집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초에 이 법들은, 후일의 히브리인이 보여주었다시피, 오직 동료 부족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히브리인은 이방인을 다루는 경우에 다른 윤리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서약은 달라마시아 시대에 증언을 더 진실하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그러한 맹세는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이다. 이전에는 아무도 자기가 태어난 집단에 불리하게 증언하려 하지 않았다.
범죄(Crime)는 부족의 풍습에 대한 공격이었고, 죄(sin)는 귀신이 규정한 금기를 어기는 것이었다. 범죄와 죄를 구분하지 못해서 오랫동안 혼란이 있었다.
자기-이익은 살인하지 말라는 금기를 만들었고, 사회는 이를 전통적인 풍습으로 신성시했으며, 한편 종교는 그 관습을 도덕률로 신성시했다. 이처럼 세 가지 모두가 인간의 생활을 더 안전하고 신성하게 만드는 데 협력하였다. 권리가 종교의 제제를 받지 않았더라면, 초기 시절에 사회는 함께 유지할 수 없었다; 미신은 오랜 진화시대의 도덕적, 사회적 경찰력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모두, 신들이 조상에게 그들의 오래된 법, 금기를 주었다고 주장했다.
70:11.6 율법은 오래된 인간 체험, 구체화되고 공인된 여론이 법전으로 기록된 것이다. 풍습은 축적된 체험이었고, 이것을 토대로 나중에 유력한 지식인들이 성문화된 법을 작성했다. 고대의 재판관은 아무 법이 없었다. 판결을 내릴 때, 그는 다만 “이것이 관습이다”라고 말했다.
법정 판결에서 선례를 언급하는 것은 재판관이 성문화된 법을 변하는 사회 조건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나타낸다. 이것은 전통이 연속된다는 감명을 주면서, 변하는 사회 조건에 대하여 점진적으로 적응하는 길을 마련해 준다.
70:11.8 재산에 관한 투쟁은 여러 방법으로 처리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1. 싸움에 걸린 재산을 없애 버린다.
2. 무력으로―논쟁하는 자들은 싸움으로 해결했다.
3. 중재로―제삼자가 결정했다.
4. 원로들에게 상소함으로―나중에는 법정에 상소했다.
초기의 법정은 주먹 싸움으로 판결했다. 판사는 단지 심판이나 중재인이었다. 그들은 인가된 규칙에 따라서 싸움이 진행되도록 처리했다. 법정에서 격투에 들어갈 때, 각 편은 다른 편에게 진 뒤에 그 비용과 벌금을 물려고 재판관에게 보증금을 냈다. “실력은 여전히 권리였다.” 후일에는, 말싸움이 주먹싸움을 대신하였다.
원시적 공정 개념 전체가 공정해지기 보다는 논쟁을 해결하고, 이처럼 공공의 무질서와 개인의 폭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것이 원시인에게는 그다지 분개함을 주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을 이기적으로 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도, 어떤 문명의 지위는 법정의 철저함과 동등성 그리고 법관의 청렴성에 의해서 매우 정확히 결정되기도 한다.
12. 국가 권한의 분배 (Allocation of Civil Authority)
70:12.1 정부 진화의 대투쟁은 권력의 집중과 관련이 있다. 잘 조정된 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 사이에 권력의 적당한 균형이 유지되었을 때, 대의 정치 종류의 국가 정부가 사람 사는 세계에서 진화 민족들을 최선으로 규제한다는 것을 우주 행정가들은 경험으로 배웠다.
원시의 권한은 힘, 육체의 힘에 바탕을 두었지만, 이상적 정부는 대의 정치 체계이며, 거기서 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미개한 시절에는 온통 전쟁이 너무 많아서 대의 정치가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없었다. 권한의 분리와 지휘의 통일 사이에 있었던 오랜 투쟁에서, 독재자가 이겼다. 원시 원로 회의가 초기에 가졌던 분산된 권력은 차츰, 절대 군주의 몸에 집중되었다. 진짜 임금들이 나타난 뒤에, 원로 집단은 준 입법 및 사법에 관하여 자문하는 단체로 지속되었다. 후일에 동등한 지위를 가진 입법 기관이 나타났고, 결국에는 판결하는 최고 법정이 입법 기관과 따로 구축되었다.
왕은 풍습들, 곧 최초의 법 또는 불문율의 집행자였다. 나중에 왕은 제정된 법령, 곧 구체화된 여론을 집행했다. 인민 집회가 여론의 표현으로서, 늦게 등장했어도 사회의 큰 진보를 표시하였다.
초기의 왕은 풍습들―전통이나 여론―에 크게 제한을 받았다. 최근에 어떤 유란시아 국가들은 이 풍습을 통치를 위한 근거 자료로 성문화하였다.
유란시아 필사자들은 자유를 가질 자격이 있고, 정부 체계를 만들어야 하며, 헌법, 또는 국가 권한과 행정 절차에 관한 기타 헌장을 채택해야 한다. 이렇게 하고 나서, 가장 유능하고 자격 있는 동료를 최고 집행자로 뽑아야 한다. 입법부에 있는 대표들을 위해서, 그러한 신성한 책임을 완수하도록, 지능과 도덕 면에서 자격 있는 자들만 뽑아야 한다. 고등 법정과 최고 법정의 판사 경우에, 오로지 타고난 능력을 부여받고 충만한 체험으로 지혜롭게 된 자들만 선출해야 한다.
70:12.6 인간이 자유를 유지하고 싶으면, 자유 헌장을 선택한 후, 그것에 대해 현명하고, 지적이며, 두려움 없는 해석을 끝까지 제공해야 한다. 그것은 다음을 예방할 수 있다:
1. 행정부나 입법부가 부당하게 권력을 강탈하는 것.
2. 무지하고 미신을 믿는 선동자들의 술수.
3. 과학적 진보의 지연.
4. 평범이 지배하는 막다른 골목.
5. 사악한 소수의 지배.
6. 야심 있고 머리 좋은, 독재를 꿈꾸는 자의 통제.
7. 공포가 일으키는 비참한 혼란.
8. 양심 없는 자들이 착취하는 것.
9. 국가가 세금으로 시민을 노예로 만드는 것.
10. 사회 및 경제적 공평을 이루지 못하는 것.
11. 교회와 국가의 통합.
12. 개인의 자유를 잃는 것.
이것들을 방지하는 것이 진화 세계에서 대의 정치라는 엔진 위에 있는 통치자로서 행하는 합헌 재판의 목적과 목표이다.
70:12.20 인류가 유란시아에서 정부를 완성하기 위한 투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의 필요에 적응하고, 정부 내의 권력 분배를 개선하며, 그리고 진정으로 현명한 행정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등 행정의 완벽한 경로와 관련이 있다. 신성하고 이상적 형태의 정부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계시될 수 없고, 시간과 공간의 우주들 전반에 걸쳐 각 행성의 남녀가 천천히 힘들여 발견해야 한다.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