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태사 고려화불학술연구소 이사장 월제 스님
700년 숨죽인 고려화불 맥 펄떡이게 한 이 시대 대표 불모(佛母)
유년 때 본 불상에 반해, 불·보살 그리다 출가단행
관세음보살 친견에 ‘환희’, 부처님 조성은 ‘내 사명’
어깨탈골· 눈 핏줄 터져도, 희생각오 붓 놓지 않아
프랑스 루브르 고려화불, 매년 정기초청 최대 성과
불심 녹인 화불이어야, 예불대상 경지의 성보
새하얀 사라(紗羅)가 수월관음을 감싸 안았다.
보관(寶冠), 치마, 요포에 정교하게 수놓인 연꽃·봉황·서운(瑞雲)이
투명한 사라의 틈 사이로 화려한 빛을 발한다.
여러 개의 선을 다중으로 처리한 눈썹, 봄누에 실을 토하듯 부드럽게 그어진 가는 눈,
홍조 띤 엷은 미소. 그리고 섬려하게 내려진 금선(金線). 매혹적이다. 그리고 숭고하다.
지난 3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관에서 월제(月齊) 혜담(慧潭) 스님의
세로 5미터의 대작 ‘수월관음보살 팔부성중상’을 처음 마주했을 때
벅차게 차오르는 환희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중국의 전통 묘법(描法) 18종을 오묘하게 사용하는 신기에 가까운 선묘(線描),
광명·지혜·믿음·자비를 상징하는 적(赤)·청(靑)·황(黃)·백(白)을 입체감 있게
석채(천연안료)로 발현시키는 채색,
극상의 은은함을 표현해 내는
배채(背彩·비단 후면에 안료를 두껍게 칠해서 앞으로 배어나오게 하는 회화법) 등의
고려불화 기법을 완벽하게 창출한 불화였기 때문이다.
고려불화는 고려청자와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민족문화유산의 정수다.
화려함과 정교함에 있어 세계미술사에서도 그 가치를 높게 인정받고 있는데
‘서구의 르네상스보다 200년이나 앞서 꽃피운 세계 종교미술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다.
그러나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과 전란으로 고려불화의 맥은 끊겼고, 불화 또한 유실됐다.
현존 고려불화는 약 160여점. 정작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16점 정도다.
미국과 유럽에 20여점이 있고, 130여 점은 일본이 소장하고 있다.
일본은 고려불화가 자신들의 문화유산이라는 점을 은근히 부각해 왔다.
석굴암, 윈강석굴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으로 꼽히는 호류지 ‘금당벽화’에는
고려불화의 원류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보살상이 그려져 있다.
일본은 미국·유럽인들에게 원작을 그린
담징(曇徵·일본에 채화법과 종이, 먹 제조법을 전한 고구려 승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쏙 빼고 금당벽화의 우수성만 홍보해 왔다.
이와 함께 중외(中外)의 유력 미술관을 통해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오백나한도,
미륵하생경변상도, 아미타팔대보살도 등
일본이 소장한 수십 종의 다양한 고려불화를 전략적으로 전시해 왔다.
문화·미술에 정통한 전문가가 아닌 이상
유럽인들은 그들의 ‘고약한 의도’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왜곡에 맞서, ‘고려불화는 한국 것’이라는 사실을
유럽 사회에 전한 인물이 월제 혜담 스님이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국립예술 살롱전’은
현존하는 세계 살롱전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다.
프랑스 정부 지원으로 매년 12월 개최된다.
월제 스님은 2014년 초청을 받아 루브르박물관에 ‘수월관음도’를 걸었다.
2015년에도 초청 받아 ‘수월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입상’ ‘석가삼존과 16나한’으로
고전부문상을, ‘화두’ ‘참선’ ‘니르바나’로 창작상을 수상했다.
루브르측은 매년 이 살롱전에 고려불화를 초청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2017)
세계 미술양식 측면에서 볼 때 이는 엄청난 사건이다.
현대미술의 성지라 칭송 받는 루브르박물관이
천년 전의 ‘고려불화’를 하나의 장르로 인정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월제 스님은 2018년에도 작품을 출품 전시했다.
고려화불 근본도량 속초 계태사와 수원 포교당을 오가며
고려불화의 맥과 부처님 법을 전하고 있는 월제 스님을 만나러 수원으로 걸음했다.
수월관음보살 팔부성중상’(2m80˟5m)
충남 대전에서 태어난 월제 스님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꽃, 집, 나무 등 시야에 들어온 건 벽, 종이, 땅바닥 어디에라도 그려내야 직성이 풀렸다.
유독 인물화에 능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이웃동네에
초상화 잘 그리는 사람 있어 “배워보고 싶다”고 했으나 “환쟁이 되려 하느냐!”는
집안 어르신들의 꾸지람에 접었다. 어느 절에서 난생 처음 불상을 보았다.
그냥, 좋았다. 하여, 그렸다. 불·보살을 그리고 그리다 산문을 열었다.
1980년대 초반부터 고려불화 복원에 힘써 온 월제 스님은
‘고려불화 재창현전(1999)’을 시작으로 ‘천년 고려혼을 깨우다(2019)’까지
37번의 전시회를 가졌고 그 기간에 30여종 300여점에 이르는 고려불화를 복원했다.
(사)계태사 고려화불학술연구소를 설립(2009) 한 후
12번의 ‘고려불화 국제학술대회’와 27번의 ‘고려불화 국제포럼’을 열며
고려불화의 학술적 토대도 다져왔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루브르박물관에
‘수월관음도’를 처음 전시했을 때의 감회가 남달랐을 터다.
“고려화불을 처음 본 사람들이 제일 많이 던지는 질문이 ‘사진이냐?’는 겁니다.
화불에 좀 더 가까이 가 보라 권합니다.
다음 날 다시 와서는 바짝 다가가 돋보기로 보더군요.”
우아하고 기품 있는 형태와 화려한 색채 미감은 한 걸음 뒤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이중, 삼중의 복층 구조로 응축된 섬세한 필치는 돋보기로 확대해서 봐야 다소나마 실감할 수 있다.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한참 동안을 감상하고는 ‘최고’라며 극찬합니다.”
첫날 전시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런데 월제 스님은 ‘불화’가 아닌 ‘화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불화(佛畵)는 ‘부처님 그림’이고,
화불(畵佛)은 ‘그림 부처님’입니다. 저는 화불이라고 합니다.”
방점이 전자는 ‘그림’에, 후자는 ‘부처님’에 찍힌다. 그림이 아니고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제가 지어낸 용어가 아닙니다.
‘고려사’에는 1310년(충선왕2), 1332년(충혜왕2) 두 차례 왕의 뜻을 받들어
부처님이 조성된 그림을 갖고 원나라에 갔었다고 기록돼 있는데
전달한 정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헌화불(獻畵佛·그림 부처님을 드리다)’”
그렇다! 회화에 무게를 둔 불화에 비해 화불은 성보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말 그대로 부처님이시다. 무상, 무아, 열반의 가르침을 전하는 불보살님이시다.
한국, 일본, 미국, 유럽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불화 61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고려불화대전-‘700년만의 해후’)할 때
최광식 관장이 남긴 명언이 떠오른다.
“고려 불화 한 점만 봐도 불보살이 된다는데,
60여점을 한꺼번에 보면 성불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불화는 중국으로부터 유입됐지만 고려화불은 기법뿐 아니라 화면 구성에서도 독창적이다.
월제 스님은 수월관음도를 예로 들어 보였다.
“중국 작품에는 자줏빛 대나무가 세 그루입니다.
그러나 고려화불 속에는 두 그루의 대나무가 보입니다. 대부분 푸른 쌍죽입니다.
손에 수정 염주를 쥐고 있는 것 또한 중국 작품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용, 암굴 등 역시 고려화불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의상 스님이 지금의 낙산사에서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다는
삼국유사 일화를 도상화한 형식이 고려 전체에 퍼졌던 듯싶습니다.
선재동자 출현 또한 독특한데 이는 ‘40 화엄경’을 수렴했기 때문입니다.”
‘40 화엄경’의 16권 중 선재동자가 관세음보살을 만나는 장면에는
‘60·80 화엄경’에는 없는 즉, 관세음보살이 현세의 제난구제(諸難救濟)는
물론 정토왕생까지 도와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작품에 임하면 하루 17시간씩 엎드려서 세필로 선을 그렸다.
고려불화 한 점 조성하는데 보통 6개월 이상 소요된다.
대작 ‘수월관음보살 팔부성중상’의 제작기간은 3년이었다.
몸무게가 30kg도 나가지 않아 뼈대만 남은 부처님 고행상과 같았던 때도 있었다.
어깨가 탈골되고 안구의 핏줄이 터지는 일도 다반사였지만
가능한 병원 신세는 지지 않으려 했다.
“고려화불 조성은 제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불보살님의 부촉(咐囑)을 이행할 뿐입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면 제 목숨을 이승에 좀 더 남겨두시리라 믿습니다.”
한평생 헌신하겠다는 불굴의 의지 너머의 그 무엇인가가 읽혀진다.
무엇일까? 월제 스님은 잠시 회상에 잠기더니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오백나한(157˟240cm)
1986년 어느 이른 새벽.
절에서 나와 산길을 내려오다 털썩 주저앉아서는 산도 흔들릴 만큼 대성통곡을 했다.
사문의 길을 걷는 수행자가 견뎌내야 할 고독도 버거운데,
고려화불을 조성하며 겪어야하는 고난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울고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루의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태양 속 흑점 같은 게 하나 보였다.
그 흑점, 툭 튀어 나와 점점 커지더니 관세음보살로 나투었다.
그 자리서 경험한 이채로운 환희가 고려화불 조성 의지를 다시 북돋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2007년 세종문화회관 전시를 위해 창작 작품을 구상하던 중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관세음보살 친견도’ 윤곽선을 그려 나가던 중 확연이 알아차렸다.
문수 동자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듯
자신도 정토왕생으로 이끌어 줄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것임을 말이다.
육안으로 본 부처님을 법안으로 보았음이다.
일찍이 이규보(고려시대 시인·철학자)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수월관음을 이렇게 찬했다.
‘관음대사로다. 백의의 청정한 모습은 마치 달이 물에 비친 듯하네.
두 그루 대나무 마른 잎에 향기의 근원을 알고, 죽림에 명상하며 빈 마음 의탁하였네.
동자는 무엇을 구하려는지 무릎을 굽히고 절을 하네.
만약 법을 구한다면 법은 또한 너에게 있다.’
고려화불 조성이 사명임을 명료하게 인식했던 건 그때였다.
고려화불 조성 자체가 수행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체득한 것도 그때였다.
흔들림없이 지켜온 지계를 더욱 더 단단히 세웠다.
자신의 화폭에 투영시킨 불보살을 닮아가려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마음가짐이었을 터다.
그 이후 뇌리에 떠나지 않는 경구 하나를 전했다.
‘삼계윤회 돌고 돌음 우물 두레박과 꼭 같아서 백천만겁 지내오길 티끌처럼 많이 했네.
(삼계유여급정륜 백천만겁역미진·三界猶如汲井輪 百千萬劫歷微塵)/
이번 생을 의지해서 구제하지 못하면 어느 생에 다시 와서 나를 제도할 것인가
(차신불향금생도 갱대하생도차신·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열반상(203˟237cm)
금어(金魚·화승의 존칭)의 길을 가면서도 염불과 선에도 밝은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고려화불을 배우려는 후학을 위한 조언을 부탁드렸다.
“회화 관점에서 예쁘고 멋지게 칠하려고만 한다면 ‘아름답다’는 칭찬은 들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처님 마음이 배어있지 않기에 장엄하다는 평가는 받을 수 없습니다.”
고품격 예술성과 예배 대상의 성보로서의 가치는
오로지 붓을 든 사람의 불심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수행력과 창작열을 올곧이 품은 월제 스님에게 금어(金魚)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천년 전 고려불화의 맥을 다시 펄떡거리게 뛰게 한 이 시대 금어의 사표 불모(佛母)라 해야 옳겠다.
그러고 보니 대작 ‘수월관음보살 팔부성중상’ 앞에서
차올랐던 감정은 환희가 아니었음을 알겠다.
화불에 나투신 관세음보살님이 선사한 법열이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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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제 스님은
- 1975년~현재. 고려불화 재현.
- 1985년~현재. 속초 계태사 주지.
- 2009년~현재. (사)계태사 고려화불학술연구소 이사장.
- 2005년 대통령 표창 수상.
- 2015년 ‘루브르박물관 국립예술 살롱전’ 고전·창작부문 수상.
- 2017년 프랑스 루브르 명예훈장.
2019년 4월 17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