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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를 삼킨 고래?
주일학교 공과책을 보면 요나와 관련된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고래처럼 생긴(어떤 책에는 아예 고래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고, 요나는 사흘을 그 안에 있다가 다시 물 밖으로 나옵니다. 사실 성경에 “큰 물고기”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다그 가돌”은 어떤 번역 성경에서도 고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왔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탈리아 작가 카를로 콜로디의 동화 ‘피노키오’가 요나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는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동화 속에서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고래 뱃속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요정에게 “희생정신”을 인정받아 진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본래 이 이미지는 성경에서 차용해온 것인데 오히려 현대에는 피노키오의 이미지가 요나의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약화시켜버렸습니다. 재미있게도 원작 ‘피노키오의 모험’에서 피노키오는 고래가 아닌 상어 뱃속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는 성경과 피노키오 이야기가 뒤죽박죽 섞인 셈 입니다(참고로 피노키오가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고 묘사한 것은 월트 디즈니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를 삼킨 물고기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성경학자들이 상상력과 추론을 동원하여 다양한 학설을 내놓긴 했지만 사실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무엇인지는 성경에서 큰 의미가 없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의 상태에 대한 묘사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다만 본문을 통해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물고기 뱃속이 피노키오 이야기에 나오는 고래 뱃속처럼 넓고 쾌적한 공간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요나 2장을 보면 요나를 삼킨 물고기는 “스올”행 열차와 같습니다(욘 2:2). 고대 근동 문헌, 특히 구약 성경에서 히브리어 스올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세상, 즉 저승을 의미합니다. 단, 이것이 신약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지옥과 동일한 의미는 아닙니다. 신약성경은 스올을 “음부”라고 표현합니다. 요나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된 이유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당시 앗수르의 수도) 백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역을 정면으로 거부한 탓에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의 사건은 요나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따라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고 그 안에서 부르짖는 기도는 요나서 전체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락입니다. 성경에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이 결코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죽음의 길로 가는 것과도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이라고 고백합니다(욘 2:6-7). 요나서 2장에서 결국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죽을 만큼의 끔찍한 경험을 하고 이것이 자신이 초래한 고난임을 깨닫습니다(욘 2:1).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는 가운데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라는 유명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욘 2:9). 즉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는 니느웨 백성이든 이스라엘 백성이든 제한이 없음을 요나 본인의 입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예언자 중에서도 가장 민족주의적인 신앙의 소유자로 하나님의 뜻도 거부하고 달아난 바로 그 요나의 입에서 말입니다. 요나서 본문은 요나의 경험이 스올에 내려간 것에 비할 만큼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완고한 요나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할 때에는 이만한 “심연의 고통”이 있을 때에만 가능함을 시사합니다. 아마 견딜 만 했으면 요나는 결코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서 본문은 만화영화나 동화가 묘사하는 것처럼 한가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요나서의 이야기는 동화가 아닌 요나의 처절한 고통과 회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 오해에 답하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