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거울
권 용 철
“언제나 물결이 잔잔한 저녘 바닷가의 숲속에 있대.”
눈이 유난히 맑고 까맣게 빛나는 아이는 곧 그곳을 향해 집을 떠났읍니다.
물거울은 오래 묵은 자작나무와 전나무가 꽉 들어찬 언덕 밑에 있었읍니다.
바로 옆에는 연꽃 속에서 갓 나온 듯한 하얀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읍니다.
은실 같은 머리는 곱게 빗겨 있고, 금방 다려 입은 무명 치마저고리에서는 아직도 풀냄새가 나는 듯했읍니다.
할머니는 풀잎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자 눈을 슴벅 떴읍니다.
아이는 갑자기 가슴이 더 콩콩거리는 것올 느끼며 할머니 앞으로 다가갔읍니다.
할머니는 꼼짝도 않은 채 아이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읍니다.
아이는 할머니의 눈길을 피해 물거울을 바라보았읍니다.
물거울은 하나의 작은 생이었읍니다.
동그란 둘레에는 작은 돌이 박혀 있고, 돌에는 밝은 초록빛의 이끼가 빈틈없이 덮여 있었읍니다.
“할머니, 이 생이 잊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되살려주는 물거울이에요?”
아이는 구름 그림자가 어린 듯한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읍니다.
할머니는 아이를 쳐다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읍니다.
“아, 그럼 할머니, 엄마의 모습을 되살려주세요, 네 ? 제 머릿속에요.”
아이의 눈방울은 눈벌 위에 살아나는 햇살처럼 밝아졌읍니다.
“왜, 엄마가 없니?”
“네, 다섯 살 때 저세상으로 가버리셨어요.”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읍니다.
“엄마의 모습올 잊어버렸니?”
“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요.”
“그럼 사진을 보지 왜 ?”
“한 장도 없어요, 엄마 사진이.”
아이는 먼 하늘로 눈길올 보냈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다고 이야기해줘도 떠오르지 않아요. 왼쪽 이마엔가 있는 검정사마귀밖에 말여요. 얼굴이 가름하고 입술이 도툼하고, 속눈썹이 걸고,
코 끝이 약간 들렸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영 떠오르지 않아요.”
아이의 말소리엔 서러움과 안타까움이 안개처럼 서려 있었옵니다.
“그렇게도 보고 싶니, 엄마가?”
“네, 하늘만큼요, 철없을 땐 몰랐는데 여덟 살, 아홉 살이 되니까 못 견디게 보고 싶어져요.”
“생각나게 해주지.”
할머니는 달걀 같은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나직하나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읍니다.
“고마와요, 할머니.”
아이는 가볍고 빠른 동작으로 물거울을 들여다보려고 했읍니다.
“지금은 들여다봐도 떠오르지 않아. 밤이라야 돼. 밤도 달이 돋는 밤이 좋지. 둥근 달이 돋는 밤은 더더욱 좋고. 오늘밤엔 아주 잘 떠오를 거야. 오늘이 열나흘이니까, 음력으로.”
할머니는 물거울 쪽으로 얼굴을 돌렸옵니다.
“이 물거울은 이세상이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
“그런데 할머니, 정말 엄마의 모습이 떠오를까요?”
“그럼 떠오르지 않고. 그저께도 한 아가씨가 다녀갔는데 아주 잘 떠올랐어.
그 아가씨는 열일곱 살 때 사랑했던 청년의 모습을 잊어버려 몹시도 안타까와 했는데, 이 물거울을 들여다보자 금방 오롯이 되살아났어. 그런 사람이 이때까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아. 그런데 지금껏 잊어버린 엄마의 모습을 되살려 달라고 온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네가 처음이야.”
아이의 눈엔 지는 단풍잎의 그림자 같은 것이 살짝 스쳐갔읍니다.
드디어 밤이 되고, 동녘 숲 사이로 살이 젠 달이 살며시 떠올랐읍니다.
꿈결 같은 달빛이 흐르자 숲속은 더욱 고요해졌읍니다.
아이는 할머니와 같이 물거울가로 다가갔읍니다.
“물거울을 들여다볼 때 다른 생각은 하면 안돼. 엄마 생각만 해야지.”
할머니는 자작나무 막대기로 물거울을 휘젓기 시작했읍니다.
아이는 할머니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물거울을 들여다보았읍니다.
물거울에는 달빛이 내려와 춤을 추고 있었읍니다.
“물뱀이 사라지면 엄마의 모습이 떠오를 거야.”
할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작나무 막대기를 들어냈읍니다.
아이는 엄마의 모습을 생각해 내려고 애를 쓰며 뚫어질 듯이 물거울을 들여다 보았읍니다.
물거울에 비친 거무스름한 아이의 모습은 황금빛의 물맴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읍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물맴은 점점 약해져갔읍니다.
아이의 모든 정신은 두 눈으로만 쏠렸읍니다.
그러나 여섯 시간이나 들여다보아도 엄마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읍니다.
“얘야, 이젠 그만 들여다봐라. 아직 안 떠오르는 걸 보니 안 떠오르려는가 보다.”
할머니는 아이의 팔을 잡아 일으켰읍니다.
아이는 뚝뚝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며 힘없이 일어섰읍니다.
“할머니, 돈은 얼마라도 드릴 테니 엄마의 모습을 떠오르게 해주셔요, 네?”
“그럼 할머니, 이것도 드리겠어요. 이걸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파랗게 보여요. 아주 희한한 거예요.”
아이는 신기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주머니에서 파란 유리조각을 꺼내어 할머니에게 내밀었읍니다.
“그럼 이것도 드리겠어요, 할머니. 아직도 소리가 아주 잘나요.”
아이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만든 지 오래된 듯한 버들피리를 꺼내어 유리조각과 함께 내밀었읍니다.
“그런 건 네가 가져. 그런 걸 안 줘도 떠오르게 해줄 테니.”
할머니는 갑자기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읍니다.
“얘야, 너 지금 사는 곳이 어디니? 고향에서 살고 있니?”
“아예요, 낯선 도회지에서 살고 있어요.”
“음, 그러니까 안 떠오르는 거야. 그러면 지금 곧 가서 네가 태어난 마을과 엄마가 태어난 옛 마을을 둘러보고 오너라. 그 시절 있었던 일과, 그 마을들의 모습을 생생히 머릿속에 찍어 가지고 오란 말이다.”
“그러면 떠올라요, 할머니? 엄마의 모습이 말여요.”
“음.”
할머니는 고개를 한번 끄덕했읍니다.
아이는 그 길로 옛 마을을 찾아갔읍니다.
청솔 연기에 추녀가 까맣게 그을은 옛집은 아직 그대로 있었읍니다. 앞담 밑으로는 여전히 도랑물이 쫄쫄거리며 흐르고 있었읍니다.
도랑가에는 앵두꽃이 환하게 피어 있었읍니다.
“언젠가 엄마는 저 앵두나무 밑에서 앵두꽃비를 맞으며 도랑물로 내 얼굴을 씻어 주었지.”
“뒷거렁으로 빨래하러 가는데 따라가려고 하자 나를 덜렁 안고 가 이 뒷간에 빠뜨리려고 했지.”
아이는 옛집을 한바퀴 둘러보고는 엄마의 무덤을 찾아갔읍니다.
엄마의 무덤은 호젓한 산골짝의 양치 볕에 있었읍니다.
무덤 위엔 초록 잔디가 곱게 덮여 있고, 할미꽃 서너 송이가 할머니 스님처럼 피어 있었읍니다.
아이는 무덤을 찬찬히 둘러본 다음 엄마품에 안기듯 엄마의 무덤 위에 엎드렸읍니다. 꿀벌 한 마리가 아이의 머리 위로 앵 하며 날아갔읍니다.
한참 후 아이는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엄마의 무덤을 떠났읍니다.
엄마가 태어난 마을은 높은 영을 열두 개 너머 있었읍니다.
아이는 엄마가 시집올 때 꽃가마를 타고 온 길을 따라 뛰다시피 걸어갔읍니다.
땀이 나 고무신 바닥이 미끄덩거리면 맨발로 걷기도 했읍니다.
겨울마다 고욤을 한동이씩 담아 이고 오던 외할머니는 아이의 손을 참고 눈물을 질금거렸읍나다.
아이는 쭈글쭈글한 외할머니의 얼굴을 찬찬히 묻어보며 엄마의 모습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읍니다.
“난 엄마한테서 태어났고, 엄마는 외할머니한테서 태어났으니, 잘하면 내 모습과 외할머니 모습에서 엄마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아이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머릿속에 찍어 두기 위해 한참 동안씩이나 눈을 감곤 했읍니다.
그러고는 엄마가 나물 캐러 잘 갔다는 산밭으로 갔읍니다.
산밭 둔덕에는 복사꽃이 그리움의 나라처럼 피어 있었읍니다.
아이는 나무 꼬챙이로 그 옛날 엄마처럼 달래도 캐보고 집창구도 캐보며 산밭을 눈여겨 보았옵니다.
다슬기를 주우러 잘 갔다는 거렁도 둘러보았읍니다.
그래도 엄마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읍니다.
아이는 보름달을 맞추어 다시 물거울 할머니를 찾아갔읍니다.
할머니는 아이에게 옛 마을의 모습을 물었읍니다.
아이는 거름 냄새가 풍기는 옛 마을의 모습올 하나도 빼지 않고 들려주었읍니다.
이윽고 동녘 숲 너머에서 노란 풍선 같은 달이 공실 솟았읍니다.
아이는 물거울가에 기도를 드리듯 꿇어앉았읍니다.
할머니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금빛 별이 드문드문 열련 밤하늘을 한참동안 우러러본 다음, 자작나무 막대기로 물거울을 휘젓기 시작했읍니다.
아이는 물거울 속으로 얼른 눈길을 꽂았읍니다.
물거울에는 수천 만 개의 별똥별들이 찬란하게 반짝이며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읍니다.
할머니는 온몸을 들썩이며 계속 물거울을 휘저어랬읍니다.
엄마가 가 있는 나라의 성문을 열자면 저리도 세게, 또 많이 저어야 되는 모양이었읍니다.
할머니는 더 저올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지자 자작나무 막대기를 들어낸 다음, 물거울가에 조용히 꿇어앉았읍니다.
그러고는 아이가 들려준 엄마의 모습과 옛 마을의 모습을 간절한 목소리로 시를 읊듯 읊조리기 시작했읍니다.
왼쪽 이마엔가
불콩 같은 사마귀가 있는
엄마야!
얼굴이 가름하고
도툼한 입술과
속눈썹이 긴 눈과
끝이 약간 들린 코를
가진 엄마야!
앵두꽃 거울 사이로
떠오르는 해처럼
물거울 속에 오롯이 떠올라라-------
아이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두 눈을 초롱불처럼 켜고 계속 물거울을 둘여다보았읍니다.
그러나 엄마의 모습은 물거울 속에 떠오를 듯하면서도 영 떠오르지 않았읍니다.
물거울을 다시 휘젓고 보기를 일곱 번이나 해도 마찬가지였읍니다.
“할머니, 엄마의 모습을 떠오르게 해주세요, 네? 부디부디 떠오르게 해주세요, 네?”
아이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리며 울음을 터뜨렸읍니다.
할머니는 앞을 멍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읍니다.
“할머니, 이젠 다른 방법이 없으셔요? 엄마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방법이?”
“없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떠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이었어.”
그럼 영원히 볼 수 없단 말이에요?”
“웅, 영원히 볼 수 없어. 너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자기의 엄마의 모습은 볼 수 없어.”
할머니의 눈에는 저녁놀 같은 눈물이 가득 괴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