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헤르만 헤세가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쓴 소설『데미안』에 나오는 다섯 반째 단락에 단 작은 제목이다. 그는 그 단락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썼다. jtbc 뉴스룸 앵커를 맡은 손석희도 지난 5일 밤 jtbc뉴스룸 앵커브리핑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라고 말문을 열었다.《데미안》은 헤르만 헤세가 '성장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양면성‘을 다룬 작품이다.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면서 ‘성장에 대한 대담하고 관통하는 듯한 묘사, 휴머니즘적 이상과 고도의 스타일에 대한 전범이 되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쓰기'라고 평가했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는 한 세기 전에 우리의 엉터리 같은 이 현실을 내다본 것일까? 우선 내 마음 속의 존재하는 절망이란 단어부터 깨고 일서서면 그 마음속에 용기가 생기고 그 용기는 곧 우리가 희망하는 꿈을 이루리라.
가톨릭교회가 교리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책을 불사르고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자의 죄목으로 형장으로 내몰았던 기나긴 중세 암흑기를 한 편의 장편시『사물의 본성에 대하여』가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BC99~BC55)에 감동한 볼테르와 홉스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전개한 서양의 근대는 반(反)종교운동과 함께 이성과 합리성을 모든 행위의 원리와 기준으로 삼아 신으로부터 인간해방을 외쳤다. 당시 금서인『사물의 본성에 대하여』사본 한 권이 독일 폴다 수도원 먼지 쌓인 포도주창고에 숨겨져 있었다. 9세기의 어느 날 한 수도사가 그 사본을 필사하게 된다. 그로부터 500년의 긴 세월을 견디고 1417년, 피렌체의 인문학자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hiolini)에 의해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근대사를 바꾼 책은 지금에 이르렀다. 우연의 곡절 끝에 빛을 본『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는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을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작품으로 그의 제자인 루크레티우스가 쓴 총7,400행에 달하는 장시로 오랜 세월 금서(禁書)로 묶여 있었다.
고대 그리스 에피쿠로스학파의 창시자 에피쿠로스는 철학의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데 있다’고 역설했다. “현명하고 바르게, 잘 살지 않으면 행복한 삶을 살기가 불가능하고 행복한 삶을 살지 않으면 현명하고 바르게, 잘 사는 것이 불가능 하다고도 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우리가 고통과 불안이 없는 평온함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통과 불안의 원인을 잘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통과 불안은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불필요한 욕구를 충족하려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는 헛된 갈망에서 오는 욕구를 제한하고 사치를 멀리하면서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소박한 삶에 만족하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즉 사치, 부, 명예, 권력에 대한 욕구에 탐닉하는 것이 해로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기원전 306년 아테네에서 그의 학파가 만남의 장소로 사용했던 ‘정원’(the Garden)을 만들었다.
나는 메추리로부터 타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새의 알을 달걀로 본다. 달걀은 오랜 세월 우리의 식탁을 지배해온 완전식품이다. 그만큼 우리 식단에서 달걀이 차지하는 자리는 확고하다. 부엌에서는 달걀을 잘 구워내고 계란말이와 계란찜을 잘 만드는 엄마의 손맛을 이어받은 아내의 오무라이스를 감싸는 계란후라이를 부치는 솜씨로 이어져왔다. 나는 달걀과 계란을 쓰기에 따라 말과 글의 맛을 다르게 느낀다. 후라이나 찜 등 찬으로 만들 때는 계란이라 해야 제 맛이 난다. 젊은 날 퇴근길에 들르는 선술집에서 정든 주모와 세상을 이야기로 인사를 나누는 동안 주문한 안주가 나오기에 앞서 뚝배기에 조리한 계란찜과 계란말이 나와 출출한 목과 허기를 다스리기에 적당했다. 후덕한 주모가 술상의 전식으로 내오는 계란찜과 계란말이가 그날의 주량을 결정한다. 계란과 달걀을 다른 뜻인 줄 아는 사람과 계란은 사투리, 달걀은 표준말인 줄 알고 있지만 계란과 달걀은 같은 말이다. 계란은 한자어고 달걀은 순 우리말이다.
달걀이라는 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순 우리말 ‘닭의 알’이 원래의 형태다. 그러다가 소유격 조사인 이중모음 ‘의’가 단모음화 되어 ‘이’가 되면서 ‘닭이알’로 쓰이다가 오랜 세월을 두고 변하여 ‘달걀’로 된 고유 토속어다. 계란(鷄卵)은 닭 ‘계(鷄)’ 자와 알 ‘란(卵)’ 자의 두 한자가 모여서 된 단어로 경기도 지방의 고로들은 아직껏 ‘겨란’이라는 사투리를 고집한다. 식품영양학에서는 달걀을 완전식품이라고 일컫는다. 한때 달걀이 콜레스테롤의 주범처럼 인식되어 노른자를 기피하도 했지만 하루에 한두 개의 달걀을 먹는 게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권한다. 연구 결과를 보면 달걀에는 비타민B의 일종인 콜린 성분이 풍부해서 핏속의 호모시스테인이라는 아미노산 농도를 낮춘다고 한다. 호모시스테인은 동맥경화, 심장병, 뇌졸증, 치매 등의 각종 성인병을 예방한다고 밝혔다.
달걀노른자에는 레시틴이라는 물질이 있어 뇌 기능을 활성화 시킨다. 또 노른자에 많이 들어 있는 비오틴은 모발의 영양원으로 탈모 예방에 좋은 식품이다. 이밖에도 달걀에는 양질의 단백질과 비타민, 미네랄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그리고 달걀은 지난날 추억의 음식이다. 소풍 가는 날이면 삶은 계란 한 알과 합동사이다 한 병을 싸들면 더 부러울 게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수학여행 때 불국사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서 꼭두새벽에 역으로 나와서 증기기관차가 이끄는 완행열차를 탔다. 역마다 승객이 타고 내리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열차 속에서 우리는 끓어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홍익회의 이동매점 판매원이 “삶은 계란~, 삶은 계란~”하고 외치던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 하고 초딩 친구들의 들뜬 모습이 새삼 그립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컬럼부스의 달걀과 같은 만큼 아주 큰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완행열차는 시골의 이름 모를 간이역도 빠뜨리지 않고 섰다 떠나기를 반복하며 기적을 울린다. 텅 빈 간이역에서 사랑하는 임을 진종일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그 긴 기다림 끝에 역사(驛舍)에는 간간이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강물되어 흐른다. 최하위 등급으로 분류되는 완행열차는 비둘기호로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면서 사람 사는 사정을 기웃거리듯 살피며 옛 추억을 실어 나른다. 완행열차는 초고속시대에도 평균시속 52km에 최저시속 30km를 고집한다. 나이가 들면서 완행열차가 지키는 멈춘 듯 나아가는 느림의 가치가 고맙다.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완행열차에서는 ‘삶은 계란’이 있어 정겨웠다. 달리는 열차의 철판을 씌운 차창모서리에 삶은 계란을 툭 쳐서 깨면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새하얀 속살을 들어낸다. 덜커덩거리는 동해남부선과 전라선 완행열차에서 삶은 계란을 먹다 목이 메면 한모금의 사이다로 목을 시원하게 뚫었던 기억이 되살아나 오늘의 갑갑하고 답답한 현실을 깨칠 그때의 합동사이다를 목마르게 찾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