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4화 ― 「아버지의 낡은 손목시계」
비가 내리던 목요일 오후였다.
은솔성당 사무실 창문에 빗방울이 조용히 부딪히고 있었다.
김맑음 신부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손목시계를 발견했다.
갈색 가죽줄.
흐릿해진 숫자판.
그리고 유리 가장자리에 난 작은 흠집.
시계는 한눈에 봐도 오래된 물건이었다.
최병철이 시계를 들여다봤다.
“신부님, 이거 고장 난 겁니까?”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 있습니까?”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조금 전에 교우 한 분이 가져다주셨습니다.”
“수리를 부탁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육십 대 초반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신부님.”
“어서 오십시오.”
남자는 김맑음 신부 앞에 앉았다.
“이 시계를 좀 살려주고 싶어서요.”
김맑음 신부가 시계를 바라봤다.
“소중한 물건인가 봅니다.”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유품입니다.”
---
남자의 이름은 김정호였다.
아버지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평생 말수가 적었던 분이었다.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도 거의 없었다.
정호는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의 방을 정리하다가 서랍 깊숙한 곳에서 이 시계를 발견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늘 차고 다니시던 겁니다.”
“언제부터 사용하셨습니까?”
“제가 어릴 때부터 봤으니까…… 적어도 오십 년은 됐을 겁니다.”
정호는 시계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마지막 몇 년 동안은 시계를 차지 않으셨어요.”
“왜 그랬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정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아버지에게 그런 걸 물어본 적이 별로 없거든요.”
김맑음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묻지 못한 질문이 있다.
그리고 너무 늦게 떠오르는 질문도 있다.
---
다음 날.
정호는 시계를 수리점에 맡겼다.
시계 수리공은 뒷면을 열어 내부를 살폈다.
“오래된 기계식 시계네요.”
“고칠 수 있습니까?”
“기계는 손볼 수 있습니다.”
수리공은 작은 드라이버를 들었다.
그런데 잠시 뒤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요.”
“왜요?”
수리공은 시계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리고 작은 핀셋을 꺼냈다.
“이건…… 원래 부품이 아닌데요.”
“뭡니까?”
수리공이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금속 열쇠였다.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작았다.
정호는 눈을 크게 떴다.
“열쇠?”
열쇠 한쪽에는 숫자가 하나 새겨져 있었다.
**27.**
---
그날 저녁.
정호는 열쇠를 들고 은솔성당으로 찾아왔다.
김맑음 신부는 열쇠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바라봤다.
“27이라…….”
오미자 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27이 뭐예요?”
최병철이 말했다.
“주소일 수도 있고, 사물함 번호일 수도 있죠.”
김하늘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옛날 은솔시 시설 중에 27번 사물함이 있었는지 찾아볼게요.”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하늘아, 아직 사건이라고 정해진 건 아니란다.”
“그런데 열쇠가 나왔잖아요.”
“열쇠가 있다고 반드시 사건인 건 아니지.”
오미자가 끼어들었다.
“신부님.”
“네?”
“열쇠가 있는데 사건이 아니면 뭡니까?”
김맑음 신부가 잠시 생각했다.
“열쇠를 열어야 할 문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겠죠.”
장태식이 조용히 말했다.
“27이라면 옛날 은솔역 사물함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은솔역이요?”
장태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역 대합실에 사물함이 있었습니다.”
김맑음 신부의 눈빛이 달라졌다.
안경을 고쳐 썼다.
---
다음 날 아침.
김맑음 신부와 정호, 이도현 형사는 폐역이 된 옛 은솔역을 찾았다.
역사는 오래전에 문을 닫았지만 일부 건물은 아직 남아 있었다.
먼지가 쌓인 대합실.
깨진 안내판.
그리고 벽 한쪽에 남아 있는 낡은 보관함.
장태식의 기억대로였다.
사물함에는 아직 번호가 붙어 있었다.
1번.
2번.
3번.
그리고—
**27번.**
정호가 숨을 멈췄다.
“이거…… 맞는 것 같습니다.”
이도현이 김맑음 신부를 바라봤다.
“맑음아.”
“네.”
“열어봐.”
김맑음 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정호 씨가 여는 게 좋겠습니다.”
정호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작은 열쇠를 꺼냈다.
철컥.
오래된 자물쇠가 열렸다.
사물함 안에는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봉투 하나.
봉투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정호에게.’**
정호의 손이 떨렸다.
---
“아버지 글씨입니다.”
정호는 봉투를 한참 바라봤다.
하지만 쉽게 열지 못했다.
이도현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김맑음 신부도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마침내 정호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정호는 첫 줄을 읽다가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십니까?”
김맑음 신부가 조용히 물었다.
정호가 말했다.
“아버지가…… 제 이름을 이렇게 길게 쓴 게 처음입니다.”
그는 천천히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이 편지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정호에게 직접 건네지는 못했다.
자신이 잘못했던 일들.
가족에게 미안했던 일들.
젊은 시절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냈던 시간.
아들이 학교에 입학하던 날에도 함께하지 못했던 일.
그리고 정호가 결혼하던 날에도 제대로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일.
편지 마지막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표현하지 못했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정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
그런데 편지 뒤에는 또 다른 종이가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날짜 하나와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1987년 10월 14일
은솔역 3번 승강장**
정호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뭘까요?”
김맑음 신부가 종이를 받아 살펴봤다.
“아버님께서 누군가를 만나셨던 날일 수도 있겠네요.”
이도현이 말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남긴 편지 아닐까?”
정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그런 분은 아니었습니다.”
김맑음 신부가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작은 글씨가 있었다.
**‘꼭 전하고 싶었지만, 끝내 전하지 못했다.’**
정호는 다시 침묵했다.
---
그날 오후.
한서윤 세실리아가 옛 지역신문 자료를 찾아왔다.
“1987년 10월 14일 은솔역 기록을 찾아봤어요.”
신문에는 작은 기사가 하나 실려 있었다.
그날 은솔역에서 한 남성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열차를 배웅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사진 한 장이 함께 실려 있었다.
정호는 사진을 보자마자 말했다.
“이 사람입니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낯선 여성이 있었다.
정호는 한참 사진을 바라봤다.
“누구죠?”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정호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한서윤이 말했다.
“기사 원문에는 ‘오래된 친구를 배웅하러 온 남성’이라고만 되어 있어요.”
김맑음 신부는 사진 속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리고 사진의 가장자리를 확대했다.
여성의 손에는 작은 가방이 들려 있었다.
가방에 달린 장식은—
작은 십자가였다.
---
김맑음 신부는 성당 기록을 확인했다.
당시 은솔성당 교우 명단에는 비슷한 이름의 여성이 있었다.
**최영숙.**
그러나 주소는 오래전에 삭제되어 있었다.
한서윤이 추가로 자료를 확인했다.
“영숙 씨는 몇 년 뒤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 기록이 있어요.”
“지금은요?”
“확인은 어렵습니다.”
정호는 고개를 숙였다.
“그냥 아버지가 젊었을 때 알던 사람인가 봅니다.”
김맑음 신부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럼 더 알아볼 필요는 없겠죠.”
정호는 편지를 품에 넣었다.
하지만 김맑음 신부는 열쇠를 바라봤다.
“정호 씨.”
“네?”
“아버님께서는 왜 이 열쇠를 시계 안에 넣으셨을까요?”
정호가 멈칫했다.
김맑음 신부가 말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했다면 서랍에 넣어두셔도 됐을 겁니다.”
“…….”
“하지만 아버님은 늘 차고 다니던 시계 안에 숨기셨습니다.”
정호가 천천히 시계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언젠가 누군가가 이 시계를 열어볼 거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릅니다.”
---
며칠 뒤.
정호는 아버지의 옛 사진첩을 다시 뒤졌다.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던 사진들이었다.
그러다가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뒷면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1987년 10월 14일.
그리고 짧은 문장.
**‘다음에는 꼭 말하겠습니다.’**
정호는 사진을 들고 성당으로 달려왔다.
“신부님!”
김맑음 신부가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젊은 아버지와 최영숙으로 보이는 여성이 있었다.
그런데 사진 뒤쪽에 작은 주소가 적혀 있었다.
주소는 오래전 은솔역 근처에 있던 작은 우체국이었다.
한서윤이 자료를 찾아보니 그 우체국은 이미 폐쇄되어 있었다.
하지만 옛 우편배달 기록 일부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뜻밖의 사실이 하나 발견됐다.
1987년 10월 15일.
한 통의 편지가 발송되어 있었다.
발신인은 정호의 아버지.
수신인은—
**최영숙.**
하지만 편지는 배달되지 않았다.
주소 불명으로 반송된 기록이었다.
---
정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편지를 보내셨던 거네요.”
김맑음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못 갔고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정호는 오래된 시계를 손에 쥐었다.
“그럼 이 열쇠는…….”
김맑음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편지가 돌아온 뒤에도 아버님께서는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정호의 눈가가 붉어졌다.
---
그날 저녁.
정호는 아버지의 시계를 다시 수리점에 가져갔다.
시계는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멈춰 있던 초침도 다시 움직였다.
째깍.
째깍.
째깍.
정호는 시계를 손목에 찼다.
그리고 오랫동안 바라봤다.
“신부님.”
“네.”
“아버지는 왜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김맑음 신부가 잠시 생각했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던 것 아닐까요.”
정호가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저도 아버지랑 똑같았네요.”
“무슨 뜻입니까?”
“저도 아버지께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못 했거든요.”
김맑음 신부가 말했다.
“그럼 지금 하시면 됩니다.”
정호가 시계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아버지, 고마웠어요.”
시계 초침이 계속 움직였다.
째깍.
째깍.
---
며칠 뒤.
김맑음 신부는 사제관 책상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최병철이 들어왔다.
“신부님.”
“네?”
“그 손목시계 사건 말입니다.”
“네.”
“결국 범인은 없었던 거죠?”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범인을 찾는 사건은 아니었으니까요.”
최병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뭘 찾은 겁니까?”
김맑음 신부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전하지 못한 마음이요.”
그때 박복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신부님!”
“네?”
“차만 마시지 말고 밥 드세요.”
김맑음 신부가 시계를 보았다.
오후 한 시 반이었다.
최병철이 한숨을 쉬었다.
“이번 사건도 결국 식사 문제로 끝나는군요.”
박복례가 말했다.
“신부님 사건은 대부분 그쪽으로 끝나요.”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그것도 중요한 사건입니다.”
---
그날 밤.
정호는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방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오래된 사진과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손목에는 아버지의 시계가 있었다.
그는 시계 뒷면을 한 번 더 바라봤다.
열쇠가 있던 작은 공간.
이제는 비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허전하지 않았다.
정호는 사진 속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잠시 침묵했다.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그는 웃었다.
“말하지 못한 것도 마음이었다는 걸.”
창밖에서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째깍.
째깍.
째깍.
오래된 시계는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시간도 함께.
---
다음 날.
김맑음 신부는 아침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하늘이 사무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신부님!”
“무슨 일이니?”
“사건이에요!”
김맑음 신부가 안경을 고쳐 썼다.
“이번에는 또 무슨 열쇠니?”
하늘이 웃었다.
“열쇠는 아니고요.”
“그럼?”
“성당 우편함에 편지가 하나 들어왔어요.”
김맑음 신부가 하늘을 바라봤다.
“누구에게 온 편지인데?”
하늘이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앞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김맑음 프란치스코 신부님께.’**
김맑음 신부가 봉투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는 또 누군가 전하지 못한 마음인가 보군.”
― 제74화 끝 ―
네. 앞서 예고된 흐름에 맞춰 **짧고 궁금증이 생기도록** 하면 좋습니다.
### 다음 편 예고 ― 제75화 「열쇠가 가리킨 곳」
아버지의 낡은 손목시계에서 발견된 작은 열쇠.
그 열쇠가 가리킨 곳에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신부님, 아버지는 왜 이걸 끝까지 숨기셨을까요?”
김맑음 신부는 오래된 물건 하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어쩌면 숨긴 게 아니라…
전할 때를 기다리셨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오래된 사물함에서 또 하나의 봉투가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