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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年史
작성자:최병원
작성시간:2004.03.22 조회수: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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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溪崔氏七百年史
目 次
□ 畵報
선조들의 얼이 서려 있는 유품·사적지
(예 : 祭閣, 都先山, 孝烈文, 敎旨, 文化財, 기타 遺蹟)
題一部
草溪崔氏 七百年의 삶의 歷程
제1절 序 說
1. 草溪崔氏의 淵源
2. 譜系 辨正
제2절 龍宮 始祖 草溪君의 封爵을 받고 門戶를 열다
1. 始祖 文肅公 諱 龍宮
2. 草溪崔氏의 發祥地 全州
1)全州崔氏의 발상지 전주
2)立枰公의 청주 대율리와 文成公 阿의 완주 소양
3. 草溪崔氏의 發源
1)草溪崔氏의 封地 草溪
2)草溪를 本貫으로 하는 다른 姓氏들
제3절 簪纓世族으로의 발돋움
1. 6世 簪纓이 끊이지 않은 名門
1) 贊成事 徵 선조
2) 參判 稽聖 선조
3) 戶部尙書 德康 선조
4) 三司贊成評議事 成一 선조
5) 禮部尙書 希東 선조
2. 고려왕조의 붕괴와 가문의 沈滯
1) 고려왕조의 붕괴
2) 成一·希東 조 父子의 光陽 白雲山 隱遁
제4절 조선의 건국과 隱遁의 삶
1. 조선의 건국
2. 광양의 山河
3. 산으로 바다로 삶을 찾아 나선 希東 祖 형제들
4. 奇淵 조와 思文 조의 世代들
5. 鄕班 漢榮 祖
제5절 新齋 선조의 家門 中興
1. 白雲山 鳳精을 타고난 新齋 선조
2. 士林派 道學政治의 中心人物
3. 己卯士禍와 14년간의 길고 긴 謫居生活
4. 新齋先祖의 인품과 학문
5. 新齋先祖의 詩文
제6절 삶의 터전을 일군 落南祖들
1. 10대 종파의 기원
2. 白雲山 先塋을 지킨 첨정공 得麟 조 -- 僉正公派
1)參判 好立公의 후예들
⑴宇晟公系
①승주이읍의 宇晟公 종손 문중 ②승주장안의 命宣公 후손 문중
③주오봉의 命益公 후손 문중 ④승주구표의 祥顯公 후손 문중
⑤여천두모의 致完公 후손 문중 ⑥여천우두의 祥南公 후손 문중
⑦순창관전의 祥彩公 후손 문중 ⑧곡성죽산의 瑞武公 후손 문중
⑨임실갈담의 祥杓公 후손 문중 ⑩남해서상의 祥良公 후손 문중
⑪순창죽전의 洪武公 후손 문중
⑵宇熙公系
①승주미곡의 宇熙公 종손 문중 ②여천안도의 祥會公 후손 문중
③고흥화계의 祥粲公 후손 문중 ④순천송학의 成武公 후손 문중
⑤완주안덕의 彦複公 후손 문중
⑶宇德公系
①순창방화의 宇德公 종손 문중 ②여천여자의 時同公 후손 문중
③남원방동의 祥準公 후손 문중
⑷宇仁公系 ― 순창상리 문중
⑸宇奇公系 ― 광양동지 문중
⑹宇福公系
①고흥외초의 宇福公 종손 문중 ②강진석교의 弘武公 후손 문중
③추자도 영흥의 命 公 후손 문중
⑺宇春公系 ― 승주죽청 문중
⑻宇義公系
①순창금창의 宇義公 종손 문중 ②화순대곡의 康武公 후손 문중
2)通德郞 景立公의 후예들
⑴담양봉서의 景立公 종손 문중
⑵곡성금반의 命彦公 후손 문중
3)僉知中樞府事 生立公의 후예들
⑴순창건곡의 生立公 종손 문중
⑵여천용주의 尙榮公 후손 문중
⑶남원입암의 蘭重公 후손 문중
4)司憲府監察 彦立公의 후예들 ― 담양신계 문중
5)貴立公의 후예들 ― 남원정송 문중
3. 海南 梨津에 家基를 세운 龍雲公 慶麟 조 ― 龍雲公派
1)郡守 煜立公의 후예들
⑴宇松公系
①청산도당리의 宇松公 종손 문중 ②신지도가인의 智義公 후손 문중
③신지도동고의 命君公 후손 문중 ④청산여서도의 孝義公 후손 문중
⑤완도생일도의 晟武公 후손 문중 ⑥장흥가학의 命術公 후손 문중
⑦고흥신양의 致龍公 후손 문중 ⑧여천초도의 尙泰公 후손 문중
⑨여천덕촌의 貞義公 후손 문중 ⑩여천서도의 一貴公 후손 문중
⑪승주선월의 命學公 후손 문중
2)淸立公의 후예들
⑴宇銀公系
①소안도가학의 宇銀公 종손 문중 ②완도대신의 命輔公 후손 문중 ③제주도서귀포의 永武公 후손 문중
⑵宇益公系
①노화도천구의 宇益公 종손 문중 ②완도 모도의 命曦公 후손 문중
⑶宇蘭公系
①보길도중통의 宇蘭公 후손 문중 ②노화도당산의 命南公 후손 문중
3)弘立公의 후예들
①순창외령의 東儉公 종손 문중 ②정읍화죽의 武立公 후손 문중
③옥구취산의 東錫公 후손 문중
4. 長城 大興에 家基를 세운 監察公 錫麟 조와 그 후예들 ― 監察公派
1)泰立公의 후예들 ― 장성대흥 문중
2)錫立公의 후예들 ― 옥구관산 문중
3)淵立公의 후예들 ― 화순평지 문중
5. 淳昌 將發에 家基를 세운 在道公 正麟 조의 후예들 ― 在道公派
6. 海南 馬峰에 家基를 세운 錦岡公 成麟 조의 후예들 ― 錦岡公派
7. 南原 五龍에 家基를 세운 禦侮公 聖麟 조의 후예들 ― 禦侮公派
8. 井邑 黃土에 家基를 세운 進士公 麟 조의 후예들 ― 進士公派
9. 정유왜란 중 남원성 싸움에서 殉節한 琦龍 조의 후예들 ― 殉節公派
1)순절공파의 기원
2)순절공 琦龍 조의 정유왜란 남원성 전투 殉國
3)문중의 형성과 씨족사의 전개
⑴부안증동의 殉節公 종손 문중 ⑵정읍내장의 東望公 후손 문중
⑶고창상평의 俊鳳公 후손 문중 ⑷순창방축의 謹宣公 후손 문중
⑸담양덕성의 仁信公 후손 문중
10. 南海에 家基를 세운 通政公 宗國 조의 후예들 ― 通政公派
11. 淳昌·全州·都草島에서 삶을 일군 通德郞 宗壽 祖의 후예들
― 通德郞公派
1)전주의 통덕랑공 종손 문중
2)순창심초의 天麟公 후손 문중
3)신안도초도의 旺麟公 후손 문중
제7절 族譜의 編纂과 一家의 結束
1. 최초의 族譜 「辛未譜」의 편찬과 그 의의
2. 「辛卯譜」의 편찬
제8절 道源書院의 毁撤과 儒林의 新齋先生 請諡 發議
1. 大院君의 改革政治와 鳳陽祠·道院書院의 毁撤
2. 儒林의 新齋先生 請諡 발의
제9절 日帝治下에서의 崇祖愛族 운동
1. 계속되는 族譜의 刊行
2. 儒林의 新齋先生에 대한 〈文節公〉私諡 獻呈
제10절 광복후 일가찾기 운동과 家門의 재결집 그리고 雄飛의 나날
1. 1970년대 일가찾기 운동과 丁巳譜의 刊行
2. 道院書院의 復建
3. 己巳譜의 성공과 雄飛의 나날
1) 己巳譜의 대성공
2) 道院書院 重建
3) 副總理의 탄생과 종친들의 활약상
4) 光陽市의 鳳陽祠 重建
題二部
草溪崔氏 人名事典
1. 先代 人名篇 .....................................................
2. 現代 人名篇 .....................................................
題三部
草溪崔氏 文獻篇
1. 序.跋 篇 .......................................................
2. 家狀.行狀.碑文 篇 ..............................................
3. 敎旨 篇 ........................................................
4. 古文書(訴旨.完文.戶籍 등) 篇.....................................
□ 附錄
1. 인명색인
2. 記事·遺蹟·遺品 색인
3. 거주지별 인명색인
4. 직업별 인명색인
□ 畵報
선조들의 얼이 서려 있는 사적지·유품
(예 : 書院, 祭閣, 文化財, 旌閭, 孝烈碑, 都先山, 入鄕朝 墓所,
敎旨, 戶籍, 기타 古文書, 기타 遺蹟 )
草溪崔氏 七百年의 삶의 歷程
제 1 절 서 설
1. 草溪崔氏의 淵源
지구상의 모든 종족들은 어느 한계 이상의 시조는 알 수 없다.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가 또 누구를 낳고 … " 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각 종족의 종족사는 그 최초의 누구에 이르게 되면 앞이 막히고 만다. 우리민족에게 있어 단군이나 중국 漢族에게 있어 황제 헌원씨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아담이나 매 한가지다. 단군이나 황제 헌원씨나 아담이나 그들이 모두 인간이라면 그들은 그들을 낳아 준 부모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부모들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각 종족들은 그들을 神의 아들이거나 神이거나 신의 피조물로 각각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설명하고 있다. 결국 신화가 아니고는 그 시조를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人智가 발달하고 인류의 문명이 진보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눈을 우리 민족 내부의 각 성씨로 돌려보아도 마찬가지다.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는 알로써 하늘에서 내려왔고, 김해김씨의 시조 수로도 하늘에서 알로써 내려왔으며, 제주 양씨·고씨·부씨의 시조들인 양을나·고을나·부을나는 모두 땅에서 솟아났고, 한국 土姓 六姓인 경주 이씨·최씨·정씨·손씨·배씨·설씨의 시조들인 알평·소벌도리·지백호·구례마·지타·호진 등도 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다. 또 南平文氏의 시조 文多省은 石函 속에서 나왔고, 平康蔡氏의 시조 蔡元光은 거북의 精을 받아 태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최씨의 시조도 神話로 채색되어 있다. 이 신화의 주인공인 소벌도리 공을 시조로 보계를 잡고 있는 것이 경주최씨요, 다시 경주최씨는 역사적 인물로 그 25세손이라 하는 최치원을 중시조로 하여 보계를 잇고 있다. 한편 전주최씨는 이 소벌도리 공의 후손으로서 최치원의 從弟이면서 최치원과 함께 문장으로 '一代三崔'의 한 사람으로 文名을 떨쳤던 崔彦 의 후손 文烈公 崔純爵을 派祖로 分派하였고, 또 이 文烈公으로부터 8世를 내려와서 文肅公 崔龍宮 祖를 始祖로 우리 초계최씨가 分派하였다.
이렇듯 초계최씨 시조 최용궁은 전주최씨(全州崔氏) 시조 문열공(文烈公) 최순작(崔純爵)의 8세손으로 고려말인 1300년 경에 태어났다. 충숙왕 7년 경신년(1320)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간 후, 여말(麗末)에 부단사충익대보조공신(府斷事忠翼戴保祚功臣)에 책록되어 삼중대광금자광록대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 판사(判事; 1품)에 올랐고, 세자태부(世子太傅)를 역임하였으며, 팔계군(八溪君; 八溪는 현재의 경상남도 草溪의 옛이름이다)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따라서 그 후손들이 草溪를 본관으로 하여 2000년 현재 30世에 이르도록 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최씨는 127本을 헤아릴 만큼 많은 분파를 보이고 있는데, 2000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216만9000명의 인구를 이루고 있어, 우리나라 토착성씨 285성씨(귀화인 성성씨는 2000년 현재 442성씨에 이른다) 중 4위를 차지하는데, 그 중 약 45%에 해당하는 97만 7천명이 경주최씨이고, 우리 초계최씨는 8,612가구 27,213명으로 127본 가운데서 아홉번째로 많은 인구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 성씨 중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고 있는 성씨는 김씨로 2000년 인구 통계에 의하면 그 수가 992만 6천명으로 남한 총인구 4,595만명의 약 21.6%를 차지하고 있고 그 본관 수도 『朝鮮氏族統譜』에 623본이 나와 있다. 그리고 2위인 이씨는 同 인구통계에 679만 5천명, 『朝鮮氏族統譜』본관 수 546본에 이르며, 3위인 박씨는 동 인구통계에 389만5천명, 본관 수 300본에 이르러 위 김·이·박·최 4대성씨의 인구 합계가 2,278만 5천명으로 전체의 약 반(49.6%)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성씨와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 즉 賜姓이나 중국의 同姓氏의 移入 등으로 姓만 가지고는 동족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씨의 시조가 태어난 땅이나 시조와 封爵·封地 등으로 연관이 있는 땅으로써 후손들이 다른 성씨와 자기의 성씨를 구별하고 같은 시조의 자손으로서 동족임을 나타내기 위해 또 貫鄕[本貫]을 姓과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관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 경부터인데 후에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같은 관향의 성씨 안에서도 또 혈연을 따라 派祖를 세우고 이 파조를 공동조상으로 제사를 받들고 파보를 간행하면서 혈연적 일체성을 나타내었다. 또 인구의 증가에 따라 이 派의 규모가 커지게 되면 같은 파 안에서도 각기 특정 조상을 정점으로 그 후손들끼리 하위 동족집단인 문중을 구성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들면서 一家愛를 돈독히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동성동본집단인 하나의 성씨는 대체로 여러 개의 파집단을으로 구성되고 또 각각의 파집단은 또 여러개의 문중집단으로 구성되며 각각의 문중집단은 또 여러 개의 가구들로 구성되는 여러 단위의 종적구조로 조직되어 있다.
예를 들면 초계최씨는 僉正公派(派祖: 僉正公 得麟)를 위시하여 10개 종파로 이루어져 있으며 첨정공파는 또 승주이읍문중(門祖:宇晟公) 등 42개 문중으로, 승주이읍 문중은 또 수백의 家口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대종회의 등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는 "첨정공파 승주이읍 문중 0자0자의 아들 누구"라고 해야 자신을 정확하게 다른 일가들에게 알릴 수가 있는 것이다.
2. 譜系 辨正
초계최씨는 족보를 편찬한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고종 8년 신미(1871)년에야 비로소 산실(散失)된 기록들을 모아 족보를 편찬하게 되었다. 이 족보는 우리 초계최씨가 간행한 최초의 족보라는데 서 그 큰 의의를 찾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거족적인 일가 찾기 운동을 이뤄내지 못함으로써 전국 각처에 산재(散在)해 있는 각파문중의 씨족구성원 전체를 수록해내지 못하였다는 점과, 씨족사에 대한 연구가 치밀하게 이루어지지 못해 한영 조 이전 상계보(上系譜)의 설정에 오류를 범하고 있는 등의 보계정립(譜系定立)에 정확성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점 등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특히 우리 씨족의 근원을 전주최씨 사도공계(司徒公系)로 보아 동(同) 시조 균(均)으로부터 12世 경(敬)까지를 최계최씨 상계(上系)로 설정하였고, 또 시조 문숙공(文肅公) 용궁(龍宮) 조(祖) 이후 한영 조에 이르기까지 상대(上代)의 세계(世系)가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 이 때문에 시조로부터 중시조 이전까지의 선계(先系)는 세대수(世代數)를 명시하지 않은 채로 휘자(諱字)만을 열서(列書)해 놓고 있고, 그 나마 希東 조 이하 3-4世는 실전(失傳)하여 상고할 길이 없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따라서 중시조 이하의 손록(孫錄)은 한영 공의 아드님인 기묘명현(己卯名賢) 문절공(文節公) 최산두(崔山斗)를 1世로 기세(起世)하여 계대(系代)하고 있다.
이후로 중시조 이전의 상계보를 밝히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신묘보(1891)·신해보(1911)·신유보(1921)·을축보(1925)·을미보(1955)·정사보(1977)·기사보(1989)를 간행해오면서 꾸준히 계속되어왔고 그 때마다 상계보를 수정 내지 보완하여 시조로부터 현대 자손들까지를 일통(一統)하는 보계를 정립(定立)하였으나, 어느 것도 신뢰할 수 있는 문헌자료에 의한 고증을 갖추지 못한 것이어서 오히려 보계(譜系)의 혼란과 모순만 가중되고 말았다.
여기서는 신미보(1871)로부터 신묘보(1891)·신해보(1911)·신유보(1921)·을축보(1925)·을미보(1955)·정사보(1977)·기사보(1989)에 이르기까지의 보계의 문제점들을 일일이 검증하여 정확한 보계를 정립하는 일을 진행해 나가기로 한다.
1) 신미보(1871년)의 보계
신미보는 고종 8년인 1871년에 간행된 우리 씨족의 최초족보이다. 이 족보는 종손계인 첨정공 득린 조의 후손과 순절공 기룡 조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創譜하였는데 첨정공파 승주 이읍문중의 창운(昌雲) 공이 도유사를 맡았고, 교정은 첨정공파 時化·時璂 공과 순절공파 정읍 내장문중 錫龜 공이 맡았다. 총 수단인원은 生·卒자를 합하여 1637명이다.
崔 均 +- 甫淳 -- +-- 允 -- -- 毗一 -- 誠之 +- 文度 -- 思儉 +-- 甲仁
+- 甫延 +-- 允愷 +- 文進 +-- 乙義 --
-- +-- 宣 -- +-- 得平
+-- 宏 +-- 立平 -- +-- 敬 -- +-- 龍宮 -- ┌─ 徵 -- +-- 良遂
+-- 阿 +-- 龍生 ├─ 徽 +-- 良善 -- 稽聖 --
└─ 傍
-- +-- 完興
+-- 完玉 +- 德康
+- 德崑 -- +- 成一 --- +-- 希東 ……(失傳)…… 漢英 -- 山斗 +-- 丙吉
+- 應之 +-- 傅東 +-- 丁吉
+-- 季東
※근거 : 상계보의 근거가 분명치 않다. 遠祖를 고려 인종조의 禮部郎中 均(? - 1174)으로 삼아 그 12대 손이 되는 龍宮을 우리 씨족의 시조로 삼고 있다. 均의 生年은 미상이나 고려 인종조(1123-1146)에 벼슬에 나가 의종(1147-1170)을 거쳐 명종 4년인 1174년에 歿하였다. 벼슬은 예부낭중에 이르렀고 완산군에 봉해졌다. 그 5대손인 최성지(1265-1330)는 충선왕 때의 名臣으로 찬성사를 거쳐 광양군에 봉해졌으며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런데 이 보계는 최성지의 7대손인 龍宮 조가 고려 忠惠王(1331-1332, 1340-1344) 庚申年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충혜왕 때에는 경신년이 없어 기록이 의심스럽고, 또 충혜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면 龍宮 조의 출생년도는 1300년 경에 해당될 것이므로 최성지의 출생년도가 1265년이니 불과 40년 정도의 시간 속에 5대가 출생하였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다. 그 밖에 경신년은 충숙왕 때인 1320년과 고려말 우왕 때인 1380년이니 어느 것도 이 보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또 이 신미보에는 고려 말에 익제 이제현이 지은 "고려 은청광록대부 추성양절공신 광양군 최문간공 휘 성지 墓道碑銘"을 요약하여 참고자료로 실어놓고 있다. 이것은 "균 - 보순…비일-성지-문도"의 보계를 입증하기 위한 자료로 보인다.
그런데 이 족보에서는 시조 용궁 조로부터 한영 조 이전까지의 상계보를 "용궁―징―양선―계성―완옥―덕곤―성일―희동…(실전)…한영"으로 설정하고, "희동 조 아래로 3·4세가 失傳되어 문헌상의 증거를 찾을 길이 없다" 하여, 시조 용궁 조로부터 한영 조 이전까지의 상계보에 세대수(世代數)를 定立하지 않고 휘자(諱字)만을 기록하고 그 관직·배위·묘소 등은 휘자 아래에 小註를 달아 기록하였다. 따라서 最初譜인 신미보의 편찬자는 문헌 상의 증거가 확실한 신재 조의 아버지 한영 조를 중시조로 추존하고 그 아드님이신 신재 조를 1세로 기세(起世)하여 후손들의 세계(世系)를 계대(系代)하고 있다.
2)辛卯譜(1891년)의 譜系
崔 均 +- 甫淳 -- +-- 允 -- -- 毗一 -- 誠之 +- 文度 -- 思儉 +-- 甲仁
+- 甫延 +-- 允愷 +- 文進 +-- 乙義 --+
+-----------------------------------------------------------------------------+
+-- +-- 宣 -- +-- 得平
+-- 宏 +-- 立平 -- +-- 敬 -- +-- 龍宮 -- ┌─ 徵 -- +-- 良遂
| +-- 龍甲 ├─ 徽 +-- 良善 -- 稽聖 ---
| └─ 傍
+-- 阿 ---- 龍鳳 ── 乙仁 ── (담)― 匡之
시조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龍宮 +-徵 +- 良遂
| +- 良善 -- 稽聖 +- 完興
| +- 完玉 +- 德康
| +- 德崑 ― 成一 +- 希東 ― 淵 ― 得文 ―億洙 ― 漢英 -- 山斗
| +- 傅東
| +- 季東
+-徽
+-
※근거 : 최성지의 문생 송한(宋翰)이 고려 충숙왕 17년(1330년, 경오)에 쓴 최성지의 비문을 <世系紀事>로 실어놓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은 고려말 大元 至順 庚午年(1330년)에 익재 이제현이 짓고 門生 도관직랑 宋翰이 글씨를 쓴 최당(이름을 달리 성지라고도 한다)의 묘비명 즉 "고려 은청광록대부 추성양절공신 광양군 최문간공 휘 성지 墓道碑銘"과 같은 글이다. 이 묘비명은 <東文選>에 전해지고 있는데, 신묘보에 제시된 <世系紀事>는 이것과 내용이 같다.
※용궁 조의 기사
號雲星忠惠王庚申登第壯元嘉義大夫眉斷事忠翼戴保祚功臣判書參贊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太子太傅大護軍封八溪君 更今名草溪 諡文肅 配南陽洪氏父工曹參議 興
3)辛亥譜(1911년)의 譜系
崔純爵 -- 崇 -- 南敷 -- 佺 -- 正臣 +-- 得枰 -- +-- 阿 -- +--龍生
| | +--龍角
| | +--龍甲
| | +--龍鳳
| +-- 宰 -- 有慶
+-- 立枰 --- 敬 --- 龍宮 ---
龍宮 +-- 徵 -- +- 德康 -- 成一 -- +- 希東 -- 淵 -- 思文 -- 漢榮 - +- 山斗 +- 丙吉
+-- 徽 +- 德崑 +- 傅東 | +- 丁吉
+- 季東 +-- 山厚 -- 愼
이 족보는 德殷 송병순이 서문을 쓰고 泰善·順泳·鍾秀 祖가 발문을 썼다. 그러나 上系를 완전히 새로 설정하였으면서도 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
4)신유보(辛酉譜: 1921)의 보계
신유보는 鍾秀 公이 도유사가 되고 전라북도 宗人들이 주축이 되어 수보한 일종의 派譜다. 1300여 宗人이 收單되었다
崔純爵 -- 崇 -- 南敷 -- 佺 -- 正臣 +-- 得枰 -- +-- 阿 -- +--龍生 -- 田雨
| | +--龍角 -- 哲
| | +--龍甲
| | +--龍鳳 -- 乙仁
| +-- 宰 -- 有慶 +- 士儀
| +- 士規
| +- 士康
+-- 立枰 --- 敬 --- 龍宮
龍宮 +- 徵 -- +- -- 文度 -- +- 儉泳 -- 奇淵 -- 思文 -- 漢榮 - +- 山斗 +- 丙吉
+- 徽 +- 玹 +- 倬泳 | +- 丁吉
+-- 山厚 -- 愼
※근거 : 최성지의 문생 송한(宋翰)이 고려 충숙왕 17년(1330년, 경오)에 쓴 최성지의 비문을 <世系紀事>로 실어놓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은 고려말 大元 至順 庚午年(1330년)에 익재 이제현이 짓고 門生 도관직랑 宋翰이 글씨를 쓴 최당(이름을 달리 성지라고도 한다)의 묘비명 즉 "고려 은청광록대부 추성양절공신 광양군 최문간공 휘 성지 墓道碑銘"과 같은 글이다. 이 묘비명은 <東文選>에 전해지고 있는데, 신유보의 <世系紀事>는 이것과 내용이 같은 것으로 다만 그 서두부분의 世系만이 달라져 있다. 즉 <동문선>의 그 것은 그 시작이 "完山崔氏 自禮部郎中諱均死節西賊爲名家 其子甫淳 相高王 諡文定公 文定生奉御尹 奉御生學士 學士生贊成事 毗一 娶司宰卿辛洪成之女 生公 公五易名…"으로 되어 있는데, 신유보의 <세계기사>는 "崔氏自神護衛上將軍 完州伯 諱純爵 諡文烈公始 至七代龍宮三重大匡光祿大夫世子太傅封君八溪 諡文肅公爲名家 文肅公生子翰林徵 翰林公 娶司宰卿辛洪成之女 生公 公凡五易名…"하여 <동문선>의 기록은 최당(성지)의 세계가 "최균 - 보순 - 윤이 - 소 - 비일 - 성지(당) - 문도"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신유보의 <세계기사>에서는
"崔純爵-- 崇 -- 南敷 -- 佺 -- 正臣 +-- 得枰 -- ……(전주최씨)
+-- 立枰 ― 敬 ― 龍宮 ― 徵 ― (誠之) ― 文度" 로 바꾸어 당(성지)을 용궁 조의 손자로 바꾸어 놓고 있다. 이 글은 어떤 문헌적 근거를 바탕으로 世系를 그렇게 바꾸어놓았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 전주최씨 균(均)계 보계와 다르고 변조된 흔적이 역력함으로 믿기 어렵다.
특히 편찬자는 <崔氏本源> 註에서 전주최씨 족보 가운데 최균이 최순작의 上世祖로 기록된 것을 비판하고 최균이 최순작의 上世祖가 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또 <범례>에서는 전주 최씨의 문헌과 팔계의 옛 史料에서 증거를 찾아 金石과 같이 확실한 자취를 얻었다면서 元祖 문열공으로부터 문숙공에 이르러서 비로소 팔계군에 봉해지므로 문숙공을 시조로 하여 "一宗之系"를 세웠다고 하였다. 이 족보에 수립된 문숙공 이전의 전주최씨 상계보는 전주최씨 순작계 족보와도 일치한다.
5)을축보(1925년)의 보계
芳秀 公이 도유사가 되어 전라남도 宗人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일종의 派譜다. 을 축보의 보계는 당시에 새로 발견된 자료인 신재 조의 조카인 愼 조가 쓴 신재 조의 家狀을 근거로 상계보를 크게 수정하였다. 1550여 宗人이 收單되었다
崔純爵 -- 崇 -- 南敷 -- 佺 -- 正臣 +-- 得枰 -- +-- 阿 -- +--龍生
| | +--龍角
| | +--龍甲
| | +--龍鳳
| +-- 宰 -- 有慶
+-- 立枰 --- 敬 --- 龍宮
龍宮 +- 徵 -- +- 德康 -- 成一 -- +- 希東 --- 孟河 +-- 悌男 --- 宗復 +-- 灝元--+
+- 徽 +- 德崑 +- 傅東 +-- 季男 +-- 灝亨 |
| +- 季東 |
+- -- 文度 -+- 儉泳 |
| +- 倬泳 |
+- 玹 |
+---------------------------------------------------------------------------+
+-- 奇淵 -- 思文 -- 漢榮 - +- 山斗 +- 丙吉
| +- 丁吉
+-- 山厚 -- 愼
※근거 : 신재선조의 조카인 최신의 신재선조 가장(家狀)
그러나 조선초 문과방목에 의하면 맹하, 제남, 종복, 호원 조의 부자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최맹하(성주최씨, 경북 성주군, 족보 未刊) : 수(穗)-맹하
최종복(전주최씨 文成公 '阿'系) : (순작-숭-남부-전-정신-입평-阿)阿-龍生-田雨-澤-斯 江-宗復-承魯 …
최제남(전주최씨 司徒公 '均'系) : (순작-공-남돈-균)균-보순-윤이-소-비일-성지-문도- 사검-병례-영순-제남-지임…
최호원 : 安止-호원
특히 이 家狀을 발굴하여 신재집에 수록한 이는 錫柱 公인데 公은 이 글의 저자를 숙종조 때의 文臣이며 우암 송시열의 高弟인 鶴菴 崔愼으로 比定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을 신재조의 조카라 하였고, 또 신재 조의 아우인 산후 조를 아버지라고 하고 있으므로, 이를 양자의 연보를 통해 확인해 보면, 신재 조는 1483년에 나서 1536년에 歿하였는데, 학암공 최신은 1642년에 나서 1708년에 卒한 사실이 확인된다. 결국 학암공은 신재 조보다 160년 뒤에 태어난 사람이므로 신재 조의 친동생인 산후조의 아들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재 조의 조카도 될 수 없다. 즉 학암 공과 산후 조 사이에 父子關係가 성립될 수 있는 가의 여부는 두 사람의 생몰 연대만 비교해 보아도 금방 확인이 가능하다. 그런데 산후 조의 생몰 연도는 족보에 나타나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산후 조는 아버지 한영 조가 죽기 전까지는 태어났을 것이므로, 한영 조의 생몰 연도를 통해 그 출생연대를 추정해 보면, 한영 조는 1457년에 나서 1520년에 歿하였으므로 산후 조는 적어도 아버지 한영 조가 몰하기 전인 1520년 이전에 태어났고, 또 형인 신재 조보다는 뒤에 났으므로 1483년 이후에 태어났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된다. 그런데 학암 공은 1642년에 태어났으므로 산후 조의 출생가능연대(1483∼1520) 하한선인 1520년보다도 무려 122년 뒤가 된다. 따라서 학암 공은 산후 조의 아들이 될 수 없고, 이 가장의 저자인 최신은 학암 공이 아닌 학암 공과 同名異人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석주 공의 이 비정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학암공의 문집인 <학암집>에 보면 학암공의 아버지는 崔山厚이고 백부는 崔山斗로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광양에 유배된 적이 있기까지 하여 가장을 기록할 당시 愼 조도 당시 광양에 유배되어 있었던 점까지 묘한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아무튼 2대에 걸쳐 세 사람이 우리 초계최씨와 同名異人이 되고 있다는 점은 특이하다. 학암집에 의하면 학암공은 해주최씨이고 고려조 文憲公 의 후예로 해주최씨 족보서문을 남겨놓고 있는 점으로 보아 초계최씨가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이 족보에서는 문숙공의 기사 가운데 문숙공이 과거에 급제한 해를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고려 충렬왕 병신년(1296년)으로 소급시켜 놓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고증조차 거치지 않고 행한 것으로 명백한 오류를 면치 못하고 있다. 즉 이 족보의 편찬자는 문숙공이 전주최씨 문열공의 8세손이라 하고 문열공의 6세손인 입평과 7세손인 경을 문숙공의 조부와 부로 그 세계를 밝혀 놓고 있다. 그 중 입평은 득평·직평 3형제 가운데 막내인데, 전주최씨 족보와 고려사에 장형인 득평의 생·몰년대가 1260년과 1344년으로 밝혀져 있으므로, 입평은 적어도 1260년 보다 뒤에 태어난 것이 된다. 따라서 입평의 子인 경은 1280년 이후라야 출생이 가능하며 그 子인 용궁 조는 당연히 1300년 이후라야 출생이 가능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본다면 용궁조의 1296년 과거급제는 낳기도 전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되어, 결과적으로 이 족보의 기록은 모순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용궁조의 과거급제 연도는 신미보에 기록된 경신년(충숙왕 7년, 1320년)이, 용궁 조가 20세 전후의 나이가 되는 때로써, 더 합리적이다.
또한 이상의 사실관계를 가지고 용궁 조의 출생연대를 유추해본다면, 그 출생연도는 1300년을 전후한 어느 해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용궁 조가 1300년에 태어났다면 용궁 조는 1320년 21세의 나이로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 것이 된다.
6)乙未譜(1955년)의 보계
乙未譜의 보계는 을축보의 보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2200여 宗人이 收單되었다
7)丁巳譜(1977년)의 보계
정사보도 상계보는 을축보의 보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전국적인 일가 찾기 운동을 벌려 만든 명실상부한 大同譜로 10300여 宗人이 수단되었다.
8)己巳譜(1989년)의 보계
기사보도 상계보는 을축보의 보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정사보에 누락된 宗人들이 많아 12년만에 다시 수보한 족보로 20,000여명이 수단됨으로써 가장 방대한 족보를 이루었다.
지금까지의 考究를 통해 현재의 기사보(1989)에 정립된 상계보 가운데 6세 맹하(孟河)·7세 제남(悌男)·8세 종복(宗復)·9세 호원(灝元)은 초계최씨가 아니라는 사실이 문과 및 사마방목·조선왕조실록·전주최씨문성공(阿)파 족보·전주최씨 사도공(균)파 족보·성주최씨 족보 등에 의해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이 때문에 위 4대는 초계최씨 보계에서 삭제할 수밖에 없어 보계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따라서 위 4조를 삭제하고 용궁시조로부터 신재 조에 이르기까지 새로 정립된 世系圖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시조 2세 3세 4세 5세 6세
龍宮 +- 徵 -- +- 德康(광양입향조) -- 成一 -- +- 希東 --- 奇淵 -------------+
+- 徽 +- 德崑 +- 傅東 |
| +- 季東 |
| |
+- -- 文度 -+- 儉泳 |
| +- 倬泳 |
+- 玹 |
+---------------------------------------------------------------------------+
| 7세 8세 9세 10세
|
+--------- 思文 -- 漢榮 - +- 子 山斗 +- 子 丙吉
| +- 丁吉
+- 子 山厚 -- 子 愼
3. 광양최씨와의 문제
한편 초계최씨와 동조(同祖)를 세계로 하여 분파한 성씨로 광양최씨(光陽崔氏)가 있다. 족보에 의하면 광양최씨는 초계최씨 중시조인 한영 공을 시조로 하여 6세손인 최검문(崔儉文)에서 분파하였는데, 그 세계를 보면, "최한영(1세)-산두(2세)-병길(3세)-종원(4세) -득린(5세)-검문(6세)-덕명(7세)……"으로 계승되고 있는 바, 6세 검문 공은 초계최씨 첨정공파의 파조인 득린(得麟) 공의 6자 중 1자이다. 그러므로 초계최씨와 광양최씨는 한영 공 이하 5세를 동조(同祖)로 하고 있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인 것이다. 광양최씨가 광양(전남)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은 2세 신재 휘 산두 조의 문과방목에 기록된 출신지가 '광양'으로 되어 있는 것에 근거하고 있지만, 1592년 신재 조의 조카인 최신이 지은 신재 조의 <가장>에는 팔계군 용궁의 후손으로 그 세계가 기록되어 있어 신재 조의 본관이 초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또 초계최씨라는 성씨명은 위 <가장>외에도 <淳昌城隍大神事跡記>(1633년 및 1743년), 관찬(官撰)인 <여지도서>(1757년), 建隆12년(1747)에 발행한 崔萬載(戊辰生: 1688년)의 호적을 위시한 수많은 초계최씨의 호적단자들에 광범하게 나타나고 있어, 초계최씨의 연원이 심원(深遠)함을 전해주고 있다.
보계 : 최한영 - 산두 - 병길 - 종원 - 득린 - 검문 +-- 덕명 … 부여파
+-- 덕립 … 서천파
인구수 : 2000년 인구통계 402호 1246명(초계최씨 8,612호 27,213명)
4. 초계최씨 호적기록
崔萬載(戊辰生: 1688년, 숙종14년 생)의 1747년 정묘(建隆12년: 영조23년)에 임실현감이 발행한 호적 - 순창 심초문중 최병렬 소장
*최만재는 호적은 그 주소지가 임실군 덕치면 巖峙里 제57통 제1호로 되어있는데 職은 淳昌 騎兵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妻는 南平文氏 召史인데 이 문소사의 외조부가 본관이 초계최씨 인 崔庭敏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녀의 외가가 초계최씨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당시 최만재의 집(戶)이외에도 주위에 초계최씨가 더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국가의 공적 기록으로써, 이 호적을 통해서 우리는 한 성씨로서 초계최씨가 조선초기로부터 분파하여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즉 이 호적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문소사의 할아버지인 文元은 아들인 文永龍을 초계최씨 최정민의 딸과 혼인을 시켰는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손녀 문소사를 또 초계최씨 최숙의 아들 최만재에게 시집보내 초계최씨와 겹혼인을 맺고 있다. 여기서 문소사의 생년이 丙寅(1686년)生이니, 그녀의 2대조가 되는 외조부 최정민은, 1세대의 간격을 25년으로 본다면, 적어도 1630년대에 출생하였거나 그 이전에 출생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적어도 1630년대 이전부터 한 성씨로써 초계최씨가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또 최만재(1688년생)의 호적에 '부-조-증조'가 '淑-公望-大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증조 최대원은 적어도 1610년대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므로 1600년대 이전부터 국가 공적기록인 호적에 초계최씨가 한 성씨로 분류되어 기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大元 조가 출생한 바로 그 시기인 1592년 신재 조의 조카 崔愼이 쓴 <신재선생가장>에는 신재 선생의 본관을 草溪로 말하여 그 본관유래와 始祖의 世系를 밝혀놓고 있다. 이는 愼 선조 당시 또는 더 거슬러 올라가 1483년부터 1546년까지 살았던 신재 선조 당시에도 초계최씨라는 성씨가 분파되어 한 姓族으로서 世系를 이어 오고있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愼 조의 초계최씨 世系 記述은 그 자신이 초계최씨라는 분명한 성씨의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렇게 이미 조선초기에 초계최씨는 한 성씨로서 성립되어 그 역사를 발전시켜 오고 있었다. 이처럼 초계최씨는 그 연원이 멀고 깊다 할 것이다.
그러나 족보의 편찬이 늦었기 때문에 신재조 이전의 상계 선조들의 행적이 기록되지 못하였고, 또 신재 조 이후라 할 지라도 신재 조를 중시조로 推尊함으로써 모든 초계최씨 종족들이 한결같이 신재 조의 직계 후손으로 그 세계를 잇고 있어 그 譜系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안고 있기도 하다.
崔德萬(壬子生; 1732년, 영조8년 생)의 1810년 庚午(嘉慶15년: 순조10년)에 담양부사 발행의 호적 - 전북 순창 최창룡소장
崔晸華(丁巳生: 1737년, 영조13년 생)의 1771년 辛卯(영조47년)에 순창군수 발행의 호적 - 전북 정읍 화죽문중 최득주 소장
崔聖八(己卯生: 1759년, 영조35년 생)의 1837년 丁酉(헌종3년)에 순천부사 발행의 호적 - 송 광 이읍문중 최환유 소장
제2절 龍宮 始祖 草溪君의 封爵을 받고 門戶를 열다
1. 始祖 文肅公 諱 龍宮
시조(始祖) 최용궁(崔龍宮)은 호(號)는 운성(雲星)이며, 아버지는 전주최씨 시조 문열공(文烈公) 최순작(崔純爵)의 7세손 경(敬)으로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생몰연도는 실전되어 정확하지 않으나 종조(從祖)인 상호군(上護軍) 득평(得坪:1260-1344)의 생몰연대와 본인의 과거급제 연도를 통해 역산(逆算)해 보면, 고려말 충렬왕 26년(1300)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숙왕 7년 경신년(1320)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간 후, 여말(麗末)에 부단사충익대보조공신(府斷事忠翼戴保祚功臣)에 책록되어 삼중대광금자광록대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 판사(判事; 1품)에 올랐고, 세자태부(世子太傅)를 역임하였으며,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졌다. 八溪는 현재의 경상남도 草溪의 옛 이름으로, 이로부터 후손들이 문숙공의 봉지(封地)인 초계(草溪)를 본관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렇듯 초계최씨는 고려말(1300년경) 시조 문숙공이 탄강하여 문호를 연 이래 7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각 시대마다 시대의 주역으로서 민족사의 창달에 크게 기여해온 명문법가(名門法家)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초계최씨는 전남·북과 서울, 경남 등지에 8,612가구 27,213명이 분포하여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어 최씨 127본 가운데서 아홉 번째로 많은 인구를 갖고 있는 큰 성족(姓族)이다.
2. 草溪崔氏의 發祥地 全州
1)全州崔氏의 발상지 전주
2)立枰公의 청주 대율리와 文成公 阿의 완주 소양
3. 草溪崔氏의 發源
1)草溪崔氏의 封地 草溪
초계(草溪)는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초계면(草溪面)으로, 본래 신라 초팔혜현(草 八兮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에 지명이 바뀌어 팔계현(八溪縣)이 되었다가, 다시 고려초에 지명이 바뀌어 초계현(草溪縣)이 되었고, 이후 조선을 거쳐 현재에 이르도록 이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2)草溪를 本貫으로 하는 다른 姓氏들
초계를 본관으로 삼고 있는 성씨로는 우리 최계최씨 외에도 초계정씨(草溪鄭氏)와 초계변씨(草溪卞氏).초계주씨(草溪周氏)가 있다.
제3절 簪纓世族으로의 발돋움
1. 6世 簪纓이 끊이지 않은 名門
1) 贊成事 徵 선조
2) 參判 稽聖 선조
3) 戶部尙書 德康 선조
4) 三司贊成評議事 成一 선조
5) 禮部尙書 希東 선조
2. 고려왕조의 붕괴와 가문의 沈滯
1) 고려왕조의 붕괴
2) 成一·希東 조 父子의 光陽 白雲山 隱遁
제4절 조선의 건국과 隱遁의 삶
1. 조선의 건국
2. 광양의 山河
3. 산으로 바다로 삶을 찾아 나선 希東 祖 형제들
4. 奇淵 조와 思文 조의 世代들
5. 鄕班 漢榮 祖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에 관한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의 기록에 의하면, "여러 대를 광양에 살아서 친족들이 많이 군보(軍保)로써 여러 진(鎭)에 수자리를 살고 있었는데, 공(公)은 일찍이 왕명을 받들고 고향에 돌아오면, 반드시 여러 진영과 읍의 수령들에게 술과 안주를 구해, 친히 그들이 속해 있는 진영의 관아에 나가 부복(俯伏)하여 공손히 그들을 대접하였으며, 자신이 귀하게 되었다고 해서 능멸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당시 광양에는 신재 조의 부친 외에도 많은 초계최씨들이 살고 있었고, 신재 조가 엎드려 술대접을 할만큼 신재 조의 손위 일가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일가들은 당시 족보가 만들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오늘 날 2만7천을 헤아리는 초계최씨는 모두 신재 조의 후손으로만 세계(世系)를 잇고 있음으로써 당대 일가들의 행방은 묘연할 뿐이다.
오늘날 초계최씨를 10개 파로 나누는 일은 최초 보(譜)인 신미보(辛未譜)보다도 훨씬 뒤의 일이다. 즉 1955년 을미보 수보(修譜) 당시 편찬자가 일가의 계통을 보다 더 잘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16세조를 중심으로 각각 그 손들을 하나의 파로 분류하여 판관공파(判官公派 : 派祖 16세 得麟)·용운공파(龍雲公派 : 파조 16세 慶隣)·감찰공파(監察公派 : 파조 16세 錫麟)·학생공파(學生公派 : 파조 16세 正麟)·금강공파(錦岡公派 : 파조 16세 成麟)·어모공파(禦侮公派 : 파조 16세 聖麟)·진사공파(進士公派 : 파조 16세 麟)·순절공파(殉節公派 : 파조 16세 琦龍)·통정공파(通政公派 : 파조 15세 宗國)·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 파조 15세 宗壽)로 나눈 것이 그 시초다. 그 뒤 1970년대 병채(29세)·병오(29세)·동련(28세) 등이 주축이 되어 전국적인 일가찾기 운동의 결과, 많은 일가들을 결집하여 1977년 총 □□□명을 수록한 정사보(丁巳譜)에서도 이 분류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 중 종손계인 첨정공 득린의 후손이 크게 번성하여 전체 초계최씨의 53% 가까이를 차지한다. 다음은 용운공 경린의 후손으로 약 30%를 차지하며 나머지 파로는 순절공 기룡의 손과 통정공 종국의 손, 감찰공 석린의 손이 각각 7%와 3.5%, 3%를 차지하고, 그밖의 5개 파는 어모공 성린의 손이 1.5% 정도가 되고 나머지 족파는 각각 1% 에도 미달할 만큼 그 손들이 번성하지를 못하였다.
초계최씨가 광양에 세거(世居)하기 시작한 것은 9세 호원(灝元) 조로부터 인 것으로 나타난다. 즉 호원 조는 단종조 계유(145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다가 조정의 대세가 장차 대변(大變)이 있을 기미가 엿보였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백운산 가운데 들어가 은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최호원은 세조 5년으로부터 연산 8년까지, 대구 도호부사로 외직에 나가 있는 때를 빼고는 조정에서 풍수지리가로 활약하면서,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군자감 첨정, 사재감 부정, 봉상시 정, 장악원 정, 병조참지, 첨지사, 사직, 호군 등의 벼슬을 맡으며 70세가 훨씬 넘도록 임금의 측근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보면 실록에 보이는 최호원은 초계최씨가 아닌 同名異人이거나, 단종 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다가 백운산으로 물러난 후, 다시 세조 5년 한양으로 가 벼슬살이로 일생을 마쳤을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기록상 초계최씨의 광양 세거는 호원 조의 행적을 기초로 한다면 1455년경부터라 할 것이다. 이 때 10세 기연 조는 이미 장성하여 일가를 이루었을 때이니, 기연 조는 백운산 기슭, 현재의 광양군 봉강면 부저리에 남아 이곳에 가기(家基)를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 사문(思文) 조와 12세 한영(漢榮) 조에 이르도록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이 곳에서 농사에 종사하며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부저리에 정주(定住)한 한영 조
도선산이 있는 이 부저리 마을에 초계최씨가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2세 한영 조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한영 조 이전 시조 팔계군으로부터 11세 사문(思文) 조에 이르기까지 11위의 묘소는 모두 실전되어 현재로써는 이를 상고할 길이 없다. 따라서 한영 조 이전의 초계최씨 상계 역사는 현재로서는 순치 9년 임진년(1652)에 신재 조의 조카인 최신(崔愼) 조가 기록한 <신재선생가장(新齋先生家狀)>에 기록된 내용 이상을 알 길이 없다.
이 <가장>에 기록된 바는 시조 팔계군으로부터 한영 조에 이르기까지 상계 선조 들의 관직만을 나열하였고, 9세 호원 조가 "조정의 대세가 장차 변란이 일어날 기미가 엿보였기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백운산에 은둔하였다"는 기록을 해 놓고 있어, 조선 단종 2년(1454) 쯤에 백운산으로 낙남(落南)한 것을 알 수 있으나 그 낙남지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알 수없다. 또 이후 10세 기연 조와 11세 사문 조의 자취도 묘연하여 그 생활터전이 어느 고을이었는지 조차 알 길이 없다. 왕조실록에는 호원 조의 기록이 세조 5년부터 나오기 시작하여 연산군 8년까지 나오는데 연산군 6년에 사헌부가 70세가 된 관원을 임금에게 보고하는 명단에 사직 최호원이 보이므로 최소한 72세까지는 관직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 기간 중에 실록에 호원 조의 기사가 82회나 나오고 있어 일시 대구부사로 내려가 있던 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임금의 측근이나 경관직에 재직하고 있었음이 확인되기 때문에, 호원 조는 적어도 세조 5년에는 다시 벼슬 길로 발길을 옮겼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아드님인 10세 기연 조는 아버지 호원 조를 따라 다시 서울로 올라간 것일까? 아니면 백운산 자락 어느 고을엔 가에 그냥 눌러 살았던 것일까? 호원 조가 다시 벼슬길에 나간 세조 5년은 1459년이고, 호원 조가 70세가 된 때인 연산군 6년은 1500년이므로 이로써 역산(逆算)을 해보면 호원 조가 벼슬에 나간 1459년은 호원 조의 나이 29세 때가 된다. 이 사실을 놓고 추리해 본다면 이 때 기연 조는 아무리 그 출생시기를 일찍 잡는다해도 10세 전후의 나이에 있을 때이기 때문에 아버지 호원 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갔을 가능성이 높다.
기연 조는 연일 정씨 종(淙)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장인 종은 그 세보를 통해 확인해 보면 그 묘소가 ----에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 사문 조는 광산 김씨 우진(禹鎭)의 따님과 혼인했는데 우진 공은 진사에 올랐던 것으로 보아 학문이 넉넉한 향반(鄕班)이었을 것이며 그 묘소가 ----에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에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으로 보면 기연 조와 사문 조가 부저리에 家基를 세우고 세거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 만약 부저리에서 살았다면 한영 조의 묘는 있는데 그 묘가 실전되었을 가능성이 없다. 그러므로 부저리에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한영 조 때부터 일 것이다.
한영 조는 세종조 정축년인 1468년에 나서 청주한씨 경회(敬澮)의 따님과 혼인하였는데 경회 공은 홍문관 교리를 지낸 사대부로 그 묘소가 ----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에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부저리는 한영조가 살던 당시에는 산저리(山底里)라 하였고 광양읍에서 북쪽(동쪽?)으로 약 4-5km쯤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마을 우측으로는 백운산 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냇물이 흘러 마을 앞 2km 쯤 되는 지점에 백운저수지를 이루며 마을 앞 남서쪽으로 비교적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 이 마을은 옛날로부터 논농사가 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 마을 북동쪽 산기슭엔 밭농사도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루는 한영 조가 홀연 바람을 좀 쐬고 싶은 마음이 들어 집을 나와 산수간을 소요하는데, 때는 청명한 봄날이라 햇살은 다사롭고 녹음방초(綠陰芳草)가 어우러져 마음을 끄는지라, 흥결에 이곳저곳을 거닐다 심신이 노곤하여 잠깐 나무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가 문득 한 꿈을 꾸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그 꿈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백운산 꼭대기로부터 달려 내려와 입 속으로 들기로 꿀꺽 삼켰더니 뱃속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이에 놀라 깨니 한 꿈이었다 한다. 한영 조는 이 꿈을 마음에 품고 누구에게도 발설치 않은 채로 집에 돌아와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하여 한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그가 곧 산두 조라 한다. 더욱 산두 조가 태어난 날은 기이한 향내가 방에 가득했고 상서로운 해가 더욱 광채를 발하여 훌륭한 인물의 탄생을 축하하였다고 한다.
한영 조는 헌릉참봉을 지냈는데 이를 보면 상당한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고 반가(班家)에 장가든 것을 보면 그 문벌과 인품이 토민(土民)들의 인망(人望)을 받을 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처가가 있는 -----(부저리와의 거리) ---- 부저리에 정착하여 농사로 생업을 삼으면서 산두(山斗)·산후(山厚) 두 아들을 두고 직접 글을 가르치는 한편 또 이들을 서당에 보내 글공부를 시키며 자식 교육에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신재선생 연보를 보면 신재(산두 조의 호) 조는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또 이 때 인동(仁同)이라는 종이 있었던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양반가의 가풍을 지켜오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어떻든 큰아드님인 산두 조는 일찍부터 생원시와 진사시에 급제하며 문명을 떨쳐 호남삼걸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졌고 뒤에 중종 8년(1513, 계유)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가 신진사림의 한 사람으로 중종 임금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입어 승문원 박사.홍문관 수찬.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간원헌납.사헌부장령.의정부사인 등의 내직을 역임하며 조정암으로 더불어 도학정치로 지치(至治)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진력한다. 이때 중종 임금은 산두 조에게 "一人有慶寶命維新(일인유경보명유신)"이라 새긴 옥홀(玉笏)을 하사하여 그 지극한 지우(知遇)를 보였는데, 그 글의 의미는 "임금에게 善이 있으면 보명(寶命; 天命)이 새로워져 사직(社稷)이 영원하리라"는 뜻이니 자신이 선정을 베풀 수 있도록 적극 보필해 달라는 간곡한 당부가 담겨져 있다. 이 옥홀은 현재 승주 이읍문중 종손가에 세전되어오고 있는데, 1974년 전라남도 지정문화재 제 40호로 지정되었다. 산두 조는 중종 9년(1514) 처음 홍문관 저작을 배명하여 벼슬에 나간이래 5년 사이에 정4품 사인에 오르고 호당(湖堂)에 들어 학문을 연찬하였으며, 경연 시강관으로 임금과 신료들에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론하는 대유(大儒)로 추중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기묘년(1519) 홍경주 남곤 등 훈구파의 해를 입어 조광조 등 신진 사림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는 화를 당했는데, 신재 조는 이때 전라남도 동복에 유배되어 14년을 적거(謫居)하게 된다.
둘째 아드님인 산후(山厚) 조 또한 학문에 힘써 벼슬에 나가 승문원 박사에 올랐는데, 중종 25년 경인년(1530)에 함경도 회령에 유배되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배소에 눌러 살게 되니, 뒤에 그 아드님인 신(愼) 조 또한 벼슬에 나갔다가 선조조 임진년인 1592년에 유배를 당해 광양에 적거하게 되어 여기서 신재 조의 보계(譜系)를 밝힌 <신재선생가장>을 찬하게 되니, 이것으로 오늘 후손들이 우리 씨족의 보계를 삼아오고 있다.
한영 조는 큰아들 신재 조가 기묘년(1519) 사화를 입고 동복에 부처된 이듬해에 세상을 버리게 되니 신재 조는 분상(奔喪)치 못하고 상례 절차를 산후 조가 주재하여 부저리 자경산(自磬山) 화전봉(花田峯 ; 현 초계최씨도선산)에다 장례를 치루었다. 한영조가 죽고 난 뒤에도 이곳 부저리는 오랫 동안 그 후손들이 세거하였는데, 산두 조의 부인 이천서씨가 2남1녀 곧 병길·정길 조와 순천인 박이량에게 시집간 한 따님으로 더불어 마을을 지켜 살았고, 죽어서는 부군판윤공 곁에 묻혔다. 산두 조 또한 14년의 적거 끝에 중종 28년(1533)에야 풀려났으나 이듬해 어머니 청주한씨의 상을 입고 애훼(哀毁) 하다가 상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운명하고 만다. 장례에는 인근 일곱 읍의 수령들이 다 나와 호상하였고 인근의 사림과 관원들이 모두 나와 禮를 표하였다 한다. 묘소는 부저리 화전봉(花田峯) 중록(中麓) 판윤공 묘 위쪽 간좌(艮坐) 원(原)에 안장하였다.
2) 초계최씨 도선산
증 정헌대부 한성부판윤 한영 조와 정부인 청주 한씨의 묘소가 쌍분(雙墳)으로 자리잡은 위쪽에 숲을 사이에 두고 문절공 의정부 사인 신재 조와 영인 이천 서씨의 묘소가 합조(合兆)로 자리잡고 있고 후대에 신재 조의 묘역 위에다가 묘가 실전된 초계최씨 시조 팔계군 문숙공 용궁 조의 신단을 설단(設壇)하고 비를 세웠다.
한영 조의 묘 아래로는 그 손·증손·현손들의 묘가 자리해 있는데, 한영 조의 묘 바로 아래 에는 손(孫)인 어모장군 병길(신재 조의 장남) 영인 제주고씨, 사헌부 장령 정길(신재 조의 차남) 숙인 경주정씨의 묘가 각각 쌍분으로 자리해 있고, 또 그 아래로는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종원(병길 조의 장남) 숙부인 경주김씨의 묘가 합조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아래로 어모장군 행 훈련원 첨정 득린(종원 조의 장남) 숙인 김해김씨의 묘가 합조로, 또 증 가산대부 호조참판 호립(득린 조의 장남) 숙부인 마천차씨의 묘가 쌍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모두 8위(位)의 묘(단비 1위, 쌍분 4위, 합조3위)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는 이곳이 초계최씨 도선산(都先山)인데 부저리 마을 사람들은 이 도선산이 자리잡고 있는 산의 봉우리를 화전봉(花田峯)이라 하고, 좌우로 촛대봉과 책상바위가 벌려 있어 초계최씨 도선산의 산혈을 선인독서혈(仙人讀書穴)이라 부른다.
제5절 新齋 선조의 家門 中興
1. 白雲山 鳳精을 타고난 新齋 선조
신재 조의 휘(諱)는 산두(山斗)요, 자는 경앙(景仰), 호는 신재(新齋) 또는 나복산인(蘿 山人).농중자(籠中子)라 하였다. 초계최씨로 전남 동복과 광양에 신재 조를 배향한 서원인 도원서원과 봉양사가 있고, 뒤에 유림들이 선생의 학덕과 절의를 추모하여 문절선생(文節先生)이란 사시(私諡)를 헌정(獻呈)하였다.
초계최씨 씨족사에서 생몰년대가 분명하고 유적과 유물이 전하며 그 행적의 고증이 가능하여 인물연구를 학문적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신재 조부터라고 할 수 있다.
신재 조는 성종 14년 1483년에 현재의 전남 광양군(光陽郡) 봉강면(鳳岡面) 부저리(釜楮里 : 당시 光陽縣 山底里) 월곡(月谷)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산실(産室)엔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고 서광이 하늘에 빛났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례를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 한영 조는 비록 산간벽지에서 농업으로 생계를 삼으며 살았지만 누대(屢代) 사대부가의 후손답게 글읽기에 힘을 썼고 또 참봉을 지냈을 만큼 학문이 裕餘했다. 어머니 청주한씨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낸 경회(敬澮)의 따님으로 신재 조를 잉태했을 때 "북두성(北斗星)의 광채가 백운산 가운데로 뻗쳐 내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 한영 조가 이름을 '백운산의 영기(靈氣)'와 '북두성의 정기(精氣)'가 합하여 낸 아들이라 하여, 여기서 각기 한 글자씩을 취하고 또 '태산북두(泰山北斗;태산과 북두성처럼 온 세상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 큰 인물을 가리킴)'의 뜻을 취해 '산두(山斗)'라 하였다 한다.
선생은 신골(神骨이 영준(英俊)하고 기국(器局)이 활달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글읽기를 힘썼다. 그리하여 늘 경서(經書)를 가까이 하고 이에 잠심(潛心)하여 성현의 삶을 法받아 수행하기를 독실히 하였으니 그 지향(志向)이 일찍부터 남다른 바가 있었다.
광양의 전설 가운데 <백운산의 三精>이라는 전설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백운산에는 예로부터 鳳精·狐精·猪精의 세 요정이 살아왔는데, 그 중 신재 조가 봉정을 받고 태어나 뒷날 대학자가 되었다 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6살 되던 때부터 서당을 다니게 되었는데, 이웃 남정(南井; 현재는 山南里인데 山本 마을과 南井 마을이 합하여 된 것이다) 마을에 있는 이 서당을 가기 위해서는 산길을 따라 재를 넘어 가야 하는데 도중에 초빈(草殯)이 있어 어른들도 밤에는 이 길을 다니기를 꺼려하였다. 그런데 6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재 조는 오직 배움을 위한 일념에서 이 길을 밤낮으로 넘나들며 서당을 다녔는데, 하루는 밤에 서당을 가는 도중 갑자기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져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초빈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초빈의 귀신들이 문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가운데 선생이 머물고 있는 초빈의 귀신이 말하기를 "사인 선생 행차가 있어 호위해야 하니 집을 떠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신재 조는 이때부터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나가게 될 것을 예견하고 분발하여 더욱 열심히 이 재를 넘나들며 공부를 부지런히 하였다고 한다. 뒤에 또 서당에 갔다가 밤늦게 이 재를 넘는데 한 예쁜 처녀가 선생을 유혹하며 입맞추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신재 조는 학업에 방해가 될 것을 꺼려 이를 뿌리치고 재를 넘었는데, 매일 밤 이 처녀가 나타나 이와 같은 유혹을 하는 것이었다. 궁리 끝에 신재 조는 이 사실을 서당 훈장께 고하고 어찌할 것인가를 여쭈었다. 훈장은 입맞춤을 요구하면 응하여 그 처녀의 혀에 구슬이 있을 것이니 그 구슬을 빼앗아 버리라고 가르쳐주었다. 그 날밤 신재 조는 처녀의 유혹을 당하자 서슴치 않고 응하는 체하면서 혀끝에 있는 구슬을 잘라 삼켜버렸다. 그 처녀는 여우가 되어 도망하고 말았고 신재 조는 이 구슬의 효험으로 훗날 과거에 급제하여 거유(巨儒)가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신재 조는 8세 때에 벌써 <영우두(詠牛頭)>라는 시를 지었고 10세가 넘어서는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고을에 그 이름이 드러나 당시 광양현감 이공(李公)이 기특히 여겨 文房諸具를 갖추어 보내 치하하였다고 한다.
15세 때에 이르러서는 공부를 독실히 할 뜻을 품고 주자강목(朱子綱目) 80권을 안고 마을에서 10여리나 떨어져 있는 옥룡동(玉龍洞) 계곡의 石窟(현 光陽郡 玉龍面 東谷里 東洞 마을 소재) 속에 들어가 2년 동안을 기거하며 주자강목을 천 번을 통독하고 춘추대의를 밝히 해석하고 나오니 하늘의 구름조각이며 풀잎이며 나뭇잎들이 모두 강목글자로 보였다고 한다. 이 때 석굴 앞의 절벽 바위 위에다가 "白流洞 學士臺"라고 큰 글씨로 새겼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자획(字劃)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학사대의 주변환경】 학사대는 백운산을 오르는 옥룡면 동곡리 동동 마을 건너편 산에 있는 석굴인데 석굴위에는 광양군에서 선현의 유적을 기리기 위해 <학사대(學士臺)>란 현판을 단 정각(亭閣)을 세워놓았고, 이 정각 밑 바위에 7-8인 정도가 앉아 있을 만한 자연굴이 있는데 굴 안으로는 빛이 잘 들어오고 또 앉고 눕고 하며 기거할 만한 충분한 공간이 있어 공부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이 석굴 밑 15m 지점에는 폭 5m 가량의 내가 흐르는데 이 내는 백운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로 바위 사이를 부딪쳐 흐르면서 하얀 물거품을 일으켜 계곡전체가 흰빛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계곡을 백류동(白流洞)이라고 한다.
동동 마을 주변에는 고리수 나무가 많은데 3월5일 경칩 무렵에 이 수액을 채취해서 마시면 신경통 관절염 위장병에 효과가 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또 학사대 상류 700m 쯤 되는 곳에 冬栢 숲이 있는데, 이 숲 건너편 벌판이 옛날에 있었던 송천사(松川寺)의 터다. 이 동백숲 아래에는 높이 3m 가량의 증감대 碑가 서 있고, 비에서 200m 지점에 약수대가 있고 여기서 1km 쯤 더 오르면 더 오르면 장군바위·龍門·龍沼 등이 나오는데, 옛부터 가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이 이 龍沼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 전해오는 전설에, 신재 조가 석굴을 나와 집을 향하다가 백류동 어구에서 뒤를 돌아다보니 백운산이 우뚝 솟아 눈에 들어오는 지라 갑자기 詩興이 일어 '泰山壓后天無北'이라고 첫 구를 읊고 나서 대구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 때 그 옆을 지나가던 웬 나무꾼이 신재 조를 향해 '大海當前地盡南'이라 대구를 읊고는 '십 년을 공부했다는 양반의 글이 그 정도라면 출세를 하기는 다 글렀다'고 하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에 신재 조는 자신의 글이 부족함을 깨닫고 그 길로 석굴로 다시 들어가 1년을 더 공부한 뒤에 나와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고 큰 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광양에는 신재 조와 관련된 많은 전설과 유적들이 남아 있다. 특히 신재 조가 태어났고 또 죽어 그 혼백이 잠들어 있는 광양군 봉강면 부저리에는 밤에 신재 조가 비를 피하다가 귀신의 소리를 들었다는 초빈터가 있고(현재는 논으로 변해 있다), 8살 때 <영우두(詠牛頭)>라는 시의 제재가 된 소가 앉아 있는 형상을 한 우두산(牛頭山)이 멀리 마을 앞 동남방으로 뻗어 있다. 또 신재조가 당시에 공부하러 다녔던 마을을 진내면(珍內面: 이곳 사람들은 이곳을 소 '코뚜레 마을' 이라 하여 '며내리'라 한다) 토점리(土店里)라 하는데 이 마을에는 사우재(士友齋)란 학당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 마을이 저수지(백운저수지)로 수몰되어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또 신재 조를 장사지낼 때 동복 현감인 석천 임억령이 비용을 관비로 판출하고 인근 일곱 현의 수령들이 장례에 참례하였는데 당시 일곱 수령들이 타고 온 말들과 그 행차를 수행한 수행원들이 타고 온 말이 수십 필에 이르러 이들을 한 곳에 매어 두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말들이 서로 싸워 죽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 때 말들을 맸던 곳을 '몰뜰(이곳 사람들은 '말'을 '몰'이라 발음 한다)'이라 하고 또 이 때 죽은 말들을 묻은 곳을 '몰무덤'이라 하는데 지금까지도 그 터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신재 조의 묘는 아버지 한영 조의 묘 위쪽에 자리잡고 있어 위계상(位階上) 일반적인 묘지 배치의 원칙에 어긋나 있다. 그것은 당시 한영 조의 묘가 먼저 모셔져 있는 상황에서 지관이 명당을 가리다 보니 아버지 위로 모실 수밖에 없다 하므로, 당시 일곱 현감들이 신재 조의 명망과 학덕을 존숭하여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정해진 것이라 한다. 이 때문에 한영 조의 묘역과 신재 조의 묘역 사이에는 숲을 두어 그 묘역을 달리 함으로써 불경(不敬)함을 면케 해놓고 있다.
2년 여의 석굴 독학을 마치고 나온 17세 때로부터 畢齋 金宗直·寒喧堂 金宏弼 두 선생을 私淑하여 道學에 정진하니, 門路가 이미 발라 학문이 더욱 깊고 포부가 더욱 원대하였다. 18세 때인 1500년에는 당시 사림의 영수로 추앙을 받아오던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무오사화로 평안도 熙川으로 定配되었다가 이해 5월에 順天으로 移配되어 오자, 평소 사숙해오던 선생을 적소로 찾아가 뵙고 직접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501년에는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上京하여 그 제자들인 趙光祖·金淨·金安國·金湜·金絿·韓忠·金正國·朴世熹 등으로 道義之交를 맺어 道學을 講究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일러 洛中君子會라 하였다.
22세 때인 1504년(甲子) 司馬試에 <綱目賦>와 <柏梁臺詩>로 장원을 하였다. 특히 <강목부>는 그 文勢가 雄放豪逸하여 一世를 회자하였다. 22세 때인 1504년(甲子) 司馬試에 <綱目賦>와 <柏梁臺詩>로 장원을 하였다. 특히 <강목부>는 그 文勢가 雄放豪逸하여 一世를 회자하였다. 이 해 10월 갑자사화로 한훤당 김선생이 순천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효수(梟首)당하였다. 스승의 참혹한 죽음을 목도(目睹)한 후 연산 조의 폭정을 피해 낙향하여 전남 승주군 송광면 천자암(天子菴)에 머물며 이후 9년 동안을 도학궁리(道學窮理)에 정진하였다.
31세 때인 1513년(계유, 중종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 正字로 벼슬에 나가 著作에 승직되었다. 이어 33세 때에 홍문관 박사가 되었고, 34세에는 홍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에 올랐으며, 35세 때는 사간원 정언 겸 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하였다. 36세 때는 不次로 사헌부 지평에 擢用되니 차례를 뛰어넘어 昇職한 것을 미안히 여겨 사직을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이어 홍문관 교리 겸 경연시독관, 사간원 헌납, 의정부 검상, 예조 정랑, 이조 정랑 겸 성균관 직강 등 조정 요직을 두루 역임했고, 또 이 해에 중종께서 특별히 “一人有慶寶命維新”이라 새긴 玉笏을 하사하니 恩榮이 넘치었다. 그리고 이 해 11월에 承政院에서 性理大典을 講할 만한 사람 26인을 뽑아서 아뢰었는데, 선생이 그 가운데 들었으며, 이로부터 湖堂에 들어 더욱 학문에 전념하였다. 37세 때인 1519년 (기묘, 중종14) 9월에 사헌부 장령에 승직되고 이어 11월 廣興倉 守를 거쳐 의정부 사인 겸 춘추관 편수관에 올랐다. 그러나 이 해 11월 의정부 사인으로서 홍경주·남곤·심정 등 훈구세력이 일으킨 己卯士禍의 禍를 입고 삭탈관직되어 전남 동복현에 유배되었다.
이후 선생은 14년 동안을 이곳에서 謫居한 끝에 51세 때인 1533년 10월에야 유배에서 풀렸으니, 당시 竄逐당했던 기묘제현들 가운데서도 가장 길게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선생의 宦海는 5년 벼슬에 14년 謫居의 不遇 그것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謫所에서도 愛君憂道의 일념으로 講堂을 열고 道學을 講하며 후진을 양성하여, 河西 金麟厚·眉巖 柳希春과 같은 巨儒를 배출함으로써 호남의 도학을 크게 일으켰다. 이로써 후학들이 오래도록 선생을 호남도학의 師宗으로 추앙해 오고 있다. 또한 동복에 적거(謫居)하는 동안 세사(世事)의 득실(得失) 따윈 마음에 두지 않고 물염(物染).적벽(赤壁)과 같은 명승들을 탐방하며 석천 임억령과 같은 시우(詩友)들로 더불어 시주(詩酒)로 소창(消暢)하였는데, 특히 적벽은 이 때 신재 선조가 그 이름을 명명한 명소이다.
1536년(중종 31, 병신) 4월에 유배에서 풀려난 지 3년을 다 넘기지 못하고 再起를 얻지 못한 채 병으로 세상을 버리니 향년 54세였다.
선생은 조정에 있는 동안 朝廷의 師表요, 임금의 直臣으로서, 靜菴 趙光祖 선생 등 新進士林들로 더불어, 도학정치를 통해 해이된 士習과 풍속을 개혁하여 堯舜의 至治를 이루고자 진력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의지는 한 取才에서 맹자를 전국시대의 談士로 정자를 伊洛의 黨類로 폄하한 글을 首位로 뽑은 試官을 論劾하여 파직케 한 사례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또 백성들의 고통을 헤아려 이를 경감시켜 주기 위해서도 여러 노력을 하였으니, 예컨대, 매는 남방의 토산이 아닌데도 남방의 백성들에게 이를 진상케 함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이 큰 것을 아뢰어 이를 폐지케 한 일이나, 軍役을 고르게 하는 문제, 강상의 윤기를 바로 세워 풍속을 바로잡는 문제, 貪汚한 수령들을 징계하는 문제 등에 대해 임금께 여러 가지 진언을 올린 데서 잘 드러난다. 또 인사에 있어서도 정승을 뽑는 일은 사람에게 있고 위계에 있지 않으니 산 속에 숨어 있는 사람도 뽑아 쓸 수 있다고 진언한 것이나, 인재를 등용할 때 문무를 가리지 말고 능력에 따라 등용해야 한다고 진언한 것들에서 선생의 개혁에 관한 의지가 잘 드러나고 있다. 또 세자의 지위를 굳건히 하는 문제, 왕실의 宗系辨誣 문제 등등 국정 전반에 관하여 그 식견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그 때마다 중종께서는 그 의견을 嘉納하였다. 특히 선생은 조정에 있는 동안 홍문관·사간원·사헌부·의정부·이조·예조 등 정부 주요부서의 핵심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또 지제교와 경연(검토관,시독관,시강관)·춘추관(기사관,편수관)의 여러 職任을 겸직하면서 항상 최 측근에서 임금의 庶政을 보필하여, 임금을 堯舜과 같은 聖君의 길로 인도하고 도학적 至治를 실현해내는 일을 자기책임으로 여겨 盡忠竭力하였다. 그러나 기묘년 사화로 그 국정전반을 섭렵하며 쌓아온 경륜을 다 펼치지 못한 채 竄黜되고 말았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다.
선생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당시 조광조·기준·양팽손으로 더불어 경연의 講席을 주도했던 四學士로 불려졌으며, 또 문장이 豪邁·動湯하고 名望이 높아 당시 尹衢·柳成春으로 더불어 湖南三傑로 기림을 받았다.
선조 11년(1578년) 광양현감 鄭淑男 公이 본 고을 鄕賢인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광양에 鳳陽祠를 세우고 享祀하였다.
선조 24년(1591년)에는 생전에 조정에서 宗系辨誣를 위해 힘쓴 공적으로 光國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현종 9년(1668년)에는 전라남도 유림들이 선생의 謫所인 同福에 道源書院을 세우고 선생을 主壁으로 하여 石川 林億齡·寒岡 鄭逑·牛山 安邦俊 등 四賢을 配享하여 享祀하였다. 그리고 숙종 14년(1688)에는 임금께서 賜額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 四賢을 致祭하였다.
고종 13년에는 盧沙 奇正鎭 선생이 중심이 되어 전남의 유림들이 임금께 선생에게 爵諡를 내리기를 청하기 위해 회동하였으나 불행히도 그 해에 흉년이 크게 들어 이를 도중에서 중지하고 말았다. 그 후 1923년에 다시 儒論이 크게 일어 大同斯文會에서, 금릉위 박영효·전판서 홍순형·전부제학 정만조 등 전국의 유림 대표들과 전남 유림 수천 인이 모인 가운데, 선생께 '文節先生'이라는 私諡를 奉呈하였다. 그 私諡案에 일렀기를
"최신재 선생의 諱는 山斗다. 점필재·한훤당 양 선생께 사숙하고 정암 조 선생으로 더불어 우의가 두터웠으니, 그 연원이 端的하고 학문이 순수하여 사림의 사표가 된다. 이를 '文'이라 이른다. 또한 기묘사화로 인해 동복현에 유배되어 무릇 15년간을 謫居하면서 愛君憂道의 시를 읊조리다 끝내 졸하였다. 이를 '節'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시호를 '文節先生'이라 한다.
하였다.
선생의 文集으로 「신재집(新齋集)」이 있다.
【「新齋集」】기묘명현이자 호남 도학의 사종(師宗)인 신재 조의 유문(遺文)과 실기(實記)를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신재 조 몰후(歿後) 335년 뒤인 고종 8년 신미년(1871)에 이르러서야 후손 시묵(時默).석구(錫龜) 등의 노력으로 그 유문과 실기가 수습(收拾)되어 「新齋崔先生 實紀」라는 이름으로 당시 편찬 중이던 초계최씨 족보 초간본(初刊本)에 부편(附編)되어 처 음 간행되었다.
그 뒤 1911년 신해년에 후손 순영(順永).석구(錫龜)가 "東史를 상고하여 數條를 가려 얻고 또 선현들의 문집들을 질정(質正)해서 수 편을 수득(搜得)해" 앞의 신미본을 증보하여 「신 재선생실기」를 중간(重刊)하였다.
또 1921년 신유년에는 후손 종수(鍾秀)가 다시 앞의 신해본에 유사(遺事)를 약간 편 증보 하여 「신재선생문집」이란 이름으로 이를 간행하였고, 그 5년 뒤인 1925년 을축년에는 또 후손 석주(錫柱)가 신재 조의 연보를 작성하고 1923년에 있었던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에서 선조께 사시(私諡)를 헌정(獻呈)한 사적을 보태어 다시 「신재선생문집」을 간행하였다.
그 후 을미년(1955)과 정사년(1977)에도 신재 조의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이들은 앞의을 축본을 약간씩 증보하여 다시 간행한 한 것이다.
또 기사년(1989)에는 후손 길용(吉容)이 지금까지 간행된 선행본들에 수습(收拾)되어 있는 선조의 遺文과 遺事들을 종합 정리하고, 여기에 또 새로이 중종실록.대동야승.연려실기술.전 설집 등의 각종 문헌들에 所載된 기사들을 발취(拔取).증보하여 한 데 엮었다. 그리고 그 성 격을 따라 8권으로 편(編)하고 그 표제도 '신재에 관한 모든 것을 모아 놓은 책'이란 뜻으로 「新齋集」이라 하였다. 또한 그 전체의 내용을 국역(國譯)하여 알기 쉽도록 하였다.
2. 士林派 道學政治의 中心人物
신재 선조께서는 조선 중종 8년 문과(文科)로 출사(出仕)하여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당대 신진사류(新進士類)들과 더불어서 성리학에 학문적 기반을 둔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시를 통해 정치를 혁신, 유가적 정치이상, 곧 이른바 '三代(고대 중국에서 왕도정치가 행하여졌다고 하는 夏.殷.周 세 왕조)의 治世'를 회복키 위해 진력하였었다.
당시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조의 폐정(廢政)을 개혁하고 해이된 풍속과 사습(士習)을 바로잡기 위해 유학,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장려하였었다. 그리하여 忠.孝와 같은 윤리도덕을 강조하고 청렴과 절의를 숭상하며 도학이 있는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고, 스스로도 경연(經筵)에 나가기를 근실히 하며 성리(性理)를 궁구(窮究)하고 치도(治道)를 탁마(琢磨)하기에 몰두하였었다.
이러한 중조의 뜻을 받들어 중종의 치세를 요순탕무(堯舜湯武)와 같은 성대(聖代)를 만들고자 분발했던 인물들이 바로 선생을 포함한 조광조.김정.김식.김구.기준.박상.김안국.김정국 등과 같은 일군의 신진사류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자 사림파(士林派)의 사종(師宗)으로 추앙받는 김종직.김굉필의 학통을 이어받은 성리학도들로, 경학(經學)에 전념하며 도학적 이상주의에 불탔던 20대·30대의 젊은 신진들이었다.
이들 신진사류들은 중종의 두터운 신임과 지우(知遇)를 힘입어 불차탁용(不次擢用)의 승진가도를 달리며, 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 포열(布列)하여 대간(臺諫).시종(侍從).경연관(經筵官)으로써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하며, 경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고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 이들은 도학과 절의를 숭상하며 인심을 바르게 하고 성현의 법도를 궁행(躬行)하며 도학적 지치주의(至治主義)를 목표로 삼아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추진해 나갔다. 그리하여 이들은 「소학」을 장려하며 남아가 8세가 되면 소학에 들어가 쇄소응대(灑掃應對)와 진퇴(進退)의 절(節)과 애친경장(愛親敬長)·융사(隆師)·친우(親友)의 도(道)를 배우게 하는 함편, 전국에 향약(鄕約)을 실시하여 덕업상권(德業相勸)하는 미풍양속(美風良俗)을 기름으로써, 사습과 풍속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또한 「근사록(近思錄)」.「소학」.「성리대전」 등 성리서(性理書)들을 경연에서 진강(進講)하고 이것들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으로써 또는 치국의 원리로써 중시함으로써, 경학을 숭상하고 사장(詞章)을 입신출세의 방편인 과거급제를 위한 말예(末藝) 쯤으로 천시하였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국가의 인재를 발탁함에 있어서도, 경학은 본(本)이요, 사장은 말(末)이라 하여, 사장으로써 인재를 취(取)할 것이 나이라 경학으로써 인재를 취할 것을 주장하고 또 경학과 덕행을 겸비한 자를 천거받아 임금의 친책(親策)에 의해 인재를 등용하는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주장, 마침내 이를 관철하였다. 이로써 학(學).행(行)을 갖춘 신진사류들의 등용문이 열려 사림파의 세력이 크게 확대되고 상대적으로 사장파 훈구세력의 세력기반이 취약해짐으로써 이에 불안을 느낀 훈구파와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3. 己卯士禍와 14년간의 길고 긴 謫居生活
또한 이들은 소인(小人)과 군자(君子)를 논하고 절의와 청렴을 귀히 여겼다. 따라서 이들의 눈으로는 중종반정시 아무런 공도 없이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남록(濫錄)된 자들, 예컨대 반정에 가담하지도 않고 그 주동인물(유자광 등)에게 뇌물을 주고 공신에 책록(策錄)된 자, 또는 폐조(廢朝)에서 고관으로 사환(仕宦)하던 자가 이미 대세가 정하여진 후에 소문을 듣고 나가 중종추대에 참여한 자들, 등등에 대한 불쾌감과 울분을 품어왔었다. 마침내 중종 14년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은 정국공신들의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고 나서, 이들이 과분하게 받고 있는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부당한 부(富)의 편중을 막고 사대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 위훈문제가 논의되었고 정국공신 107명 가운데 그 3분의 2에 해당하는 심정(沈貞) 등 76명의 훈적(勳籍)이 위훈이라 하여 그 훈호(勳號)가 삭탈되었다. 이에 격분한 심정.남곤.홍경주 등 훈구파 핵심세력들은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을 일망타진할 계략을 꾸미고 이들이 붕당(朋黨)을 만들어 궤격(詭激)을 일삼으려 조정을 교란한다고 무고하고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를 움직여 한 나라의 인심이 조광조에게 쏠리고 있고, 공신의 삭훈(削勳)으로 왕실의 우익(羽翼)을 제거한 뒤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고 참소케 하였다.
한편 이에 앞서 중종도 자신의 뜻을 거슬려 가면서까지 이들 신진사류들이 소격서혁파(昭格署革罷)와 반정공신들에 대한 훈호 삭탈 등과 같은 과격한 개혁정치를 강행하기를 주장해 온데 대한 불만과, 이들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대해 염증을 느껴오던 터였고, 또 현량과의 실시로 경학을 중시하는 신진사류들이 대거 등용됨으로써 이들이 커다란 세(勢)를 형성, 왕권을 제약하기에 이르자 내심 이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중종의 불만과 정치적 의도가 훈구세력들의 신진사류 제거 움직임과 계산이 서로 맞아 떨어짐으로써 마침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광조는 사사(賜死)되고, 김정.김식.기준은 절도(絶島)에 안치(安置)되거나 변경(邊境)에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김구.박세희.박훈.윤자임 등은 변경(邊境)에 유배되었으며, 신재 조를 위시하여 유용근.정응.정항.한충 등은 외방(外方)에 유배되고, 최숙생.이자.양팽손 등 40여 현류(賢類)들이 삭탈 또는 파직되는 등의 화를 입었다.
이로써 도학정치로 삼대(하.은.주)의 치세를 이루고자 했던 신진사류들의 지치주의 이상은 좌절되고, 모처럼의 혁신정치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재 조는 바로 이 기묘사류의 핵심인물로 당시 도학정치를 주도했던 인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즉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 사류들이 일단 조정에서 찬축(竄逐)되고 난 뒤, 중종실록 기묘년 12월 14일자의 황이옥 등이 조광조 등을 극심히 헐뜯어 처단할 것을 상소했던 상소문의 한 대목을 보면,
신 등은 그 당을 갖추어 말하겠습니다.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인은 권세 있는 자리를 나누어 차지하여 노성(老成)한 사람들을 배척하고 후진을 끌어들여 요로에 벌려놓고, 유용근.한충.정응.박훈.윤자임.기준.박세희는 조아(爪牙)가 되고, 최산두.장옥.이충건.이희민.조광좌는 응견(鷹犬)이 되고, 안당.이자.김안국은 우익이 되었습니다.
하여, 신재 조를 당시 기묘사류들 가운데 핵심인물로 지목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신재 조는 이 기묘사화로 전남 동복현에 유배되어 14년간을 적거하다, 기묘사류 가운데서도 가장 늦게 풀려났고 재기(再起)를 얻지 못한 채 곧 하세(下世)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 기묘사화를 논하여 이 때 신진사류들을 죄를 얽어 일망타진했던 남곤.심정 등의 화매(禍媒)들을 소인이라 하고, 이들에게 화를 입었던 사류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이른다.
4. 新齋先祖의 인품과 학문
지금까지 신재 조의 생애와 신재 조의 관직생활과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에 있는 기묘사화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선생의 인품.학문에 대하여 간략히 논급(論及)하기로 한다.
신재 조의 인품을 규지(窺知)할 수 있는 자료로는 우선 당시 선생의 문하에서 직접 수학했던 하서 김인후 선생이 지은 「祭 崔新齋先生文」을 들 수 있다. 이에 의거하면 신재 조는 장신미염(長身美髥)에 신골(神骨)이 괴기(傀奇)했고, 기국(器局)이 활연웅방(豁然雄放)하였다. 또 문장은 삼협(三峽)을 기울이고, 기개는 일세를 뒤엎으며, 필법 또한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 또한 술 곧 대하면 거나하고 바둑이며 활쏘기 같은 잡기(雜技)에도 능하여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적소(謫所)에서도 언제나 우국애군(憂國愛君)의 신절(臣節)을 잃지 않앗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여 사친(思親)의 념(念)을 이기지 못해했다.
조카 신(愼)이 쓴 선생의 가장(家狀)에 의하면,
선생은 매양 깊은 밤이면 반드시 관대(冠帶)를 정제(整齊)하고 북쪽을 향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하늘에 기도하기를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小人을 멀리함이 治國의 근본이요, 소인을 가까이 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함은 난정(亂政)의 기틀입니다"하였으니, 캄캄한 방에서 이렇듯 한결같이 나라를 근심하였던 것은 다 그 본성이 그러하였던 때문이다.
라고 신재 조의 우국충정을 술회하고 있다.
또 신재 조가 적소(謫所)에서 안순지에게 보낸 다음의 시 한편만 보아도 선생의 애군사친(愛君思親)의 정이 얼마나 곡진(曲盡)한 것이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萬里 밖에서 두 그리는 마음
임금을 생각는 한시도
꿈을 꾸고 그칠 새 없으니
삼경(三更) 깊은 밤엔 그대께
또 한잔 술을
어머님 생각 가득 부어 보내오
<증 안순지 贈 安順之>
다시 하서의 「제 최신재선생 문」으로 돌아가면, 선생은 학문이 굉원(宏遠)하고 시문에 하였으며, 좌우엔 언제나 여러 제자들이 추종(追從)하여 수학하였을 뿐 아니라, 선생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도 남달리 자별하여, 가르치고 이끌으며 문답하며 품평함이 다 곡진하지 않음이 없었다 한다. 하서는 이를 회고하기를,
읊조리고 노래하며 끌어주고 올려주어
구석구석 이모저모 날로 날로 부지런히
배불리고 기름지어 단점 덮고 장점 키워
이(理) 순(順)하니 마음 흐믓 조랑말을 천리마고
산 오르고 물 다다라 내 성글고 오활하여
꽃동산 버들강변 글 솜씨 졸렬치만
여러 순(旬)을 종유(從遊)하니 남다르게 허여하여
얻은 것 하 많았네. 쇠가 자석 만난듯이
이만큼 이룬 것도 쌓인 의문 풀어주니
교훈의 덕 아니겠소 무지한 몸 행(幸)이었네.
…… (중략) ……
<「제 최신재 선생 문」가운데서>
하였고, 또 미암 유희춘 선생도 「제 나복선생 문(祭蘿 先生文)」에서
지난날 약관시절(弱冠時節) 밥짓는 종 근심할까
책보따리 메고 가 스승께 뵈니 돌아가길 빌었었네
선생께선 옛일 생각 글로써 왕복하여
날 보기를 아이만 여기셨네 가르치고 인도하심
이웃집에 방 구해서 일명(一名)을 이루어선
나물국 베푸시고 나가 사은하려더니
곳간 들어 먹이시며 어찌하여 오년 사이
종일 토록 이끄시니 유명을 달리 하오니까
하여, 신재 조의 곡진한 훈도와 사랑을 추모하고 있다.
한편, 중종실록 가운데서 신재 조를 논평한 사관(史官)의 사평(史評)을 보면, 중종 10년 5월, 신재 조가 홍문관(弘文館)에 천거된 데 대해 "출신이 한미(寒微)하다" 하여 대간(臺諫)의 반대가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 사관은 신재 조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최산두는 비록 한미한 집안 출신이나 사람됨이 학문이 있고 덕행도 있으니, 어진 이를 조정에 등용함에는 일정한 한계가 없는 것인데 안 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또, 이 해 10월에 사헌부로부터 똑같은 논계(論啓)가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 사관은 신재 조를 두둔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산두는 한미하다고는 하나 기상이 씩씩하고 글이 넉넉하니, 어찌 옥당(玉堂)에 합당하지 않으랴.
한편, 「대동야승(大東野乘)」이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소재(所載) 신재 조의 전(傳) 가운데는 특별히 신재 조의 종족애를 기록해 놓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띈다.
공은 여러 대를 광양에서 살았다. 친척이 모두 군보(軍保)로서 여러 진(鎭)에 예속되어 수자리를 살았는데, 공이 사신으로서 고향에 와서는 반드시 술과 안주를 구해 그들이 머무는 영(營)이나 막사에 가서 술잔을 올리며, 감히 영귀(榮貴)한 것으로써 종족을 업신여기지 않았다.
그 밖에 또 전 장에서 살핀 바와 같은 신재 조의 출생.수학.출세와 관련된 수 편의 전설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는데, 이 전설들은 한결같이 하방(遐方) 산촌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력(獨力)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현유(賢儒)가 되었던 사실들에다 신비성을 부여하여 윤색한 이야기들로, 신재 조가 의지가 강한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의 여러 사실들에서 산견(散見)되는 신재 조의 편모(片貌)들을 종합해 보면, 우선 신재 조는 키가 크고 아름다운 수염을 지녀 풍채가 걸연(傑然)하고 체격이 석대(碩大)했다. 또한 기상이 씩씩하고 기국(器局)이 활연(豁然)하여 매사에 응체(凝滯)함이 없었다. 그리고 학문과 덕행이 높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필법이 신묘한 경지에 들었고, 바득.활쏘기 같은 잡기에도 능하였다.
또한 우국애군의 충과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고 교육애와 제자애가 남달이 강하였으며, 사제(師弟)의 도(道) 또한 자별(自別)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되, 독학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큰 학자가 되었던 입지전적 인물이며, 또 종족애가 강하였던 인물이다.
다음으로 신재 조의 학문적 바탕은 주자학(朱子學)이다. 신재 조는 15세 때에 벌써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80권을 안고 석굴에 들어가 이를 1000독(千讀)을 하여 춘추대의(春秋大義)와 대일통지의(大一統之義)를 정통(精通)하였고, 17세 때는 畢齋 金宗直·寒喧堂 金宏弼 두 선생을 私淑하여 道學에 정진하니, 門路가 이미 발라 학문이 더욱 깊고 포부가 더욱 원대하였다. 그리고 18세 때는 무오사화로 평안도 熙川으로 定配되었다가 이해 5월에順天으로 移配된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적소로 찾아가 뵙고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듬해에 한훤당 선생의 권고를 따라 上京하여 한훤당의 제자들인 趙光祖·金淨·金安國·金湜·金絿·韓忠·金正國·朴世熹 등으로 道義之交를 맺어 道學을 講究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일러 洛中君子會라 하였다. 22세 때는 司馬試에 <綱目賦>와 <柏梁臺詩>를 지어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특히 <강목부>는 바로 「주자강목」을 시제(試題)로 한 논설인데, 주자강목의 연원.사관.정통론.위대성.의의 등을 논술한 글로 文意가 深遠하고 文勢가 웅건하여 당대에 널리 회자했던 명문(名文)이다. 신재 조는 이 글에서 주자의 학문을 계승.강구하고 실천해 나갈 것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하늘이 심의(深衣;학문과 덕이 높은 선비)에게 내린 의틱을 어찌 전배(前輩)들만의 할 일이라 하리요. 이낙(伊洛:정주학)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궁구하고, 수사(洙泗; 공자의 學)의 전형(典刑: 일정한 법규)을 사복(思服)하며, 주자의 뜻을 지향(志向)하여, 당시에 행하여지지 못하였던 뜻을 강구하고 행함으로써, 하늘이 이 도(道)를 내려준 重한 뜻에 보답함이 있기를 대아불기(大雅不器)한 군자에게 바람이 있노라
그런데 이 해 10월 갑자사화로 한훤당 김선생이 순천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효수(梟首)되는 화를 당하였다. 스승의 참혹한 죽음을 목도(目睹)한 후 신재 조는 연산 조의 폭정을 피해 낙향하여 전남 승주군 송광면 천자암(天子菴)에 머물며 이후 9년 동안을 도학(道學)의 궁리(窮理)에 정진하였다. 이처럼 신재 조는 15세로부터 31세 때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가기까지 오직 도학[주자학]의 연구에 온 젊음을 바쳐 진력하였다.
신재 조는 이 주자학을 학문적 이념으로 한 지치주의 이상을 실현코자 했다. 일찍이 畢齋.寒喧堂을 私淑하여 "정몽주(鄭夢周) - 길재(吉再) - 김숙자(金叔滋) - 김종직(金宗直) - 김굉필(金宏弼)"로 이어지는 조선초 사림파 성리학의 적통을 이었고, 당시 조광조 등 사림파 신진사류들과 함께 도학정치를 통해 해이된 사습(士習)과 풍속을 개혁하여 요순의 지치(至治)를 이루고자 진력하였었다. 신재 조의 이러한 의지는 매우 준열한 것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중종 13년 순창군수 유중익이 도회취재(都會取才)의 시관(試官)이 되어 "맹자는 戰國時代의 談士요, 두 程子는 伊洛의 黨類이다" 하여 맹자.정자와 같은 성현을 폄(貶)한 글을 지은 자를 수위(首位)로 뽑은 사례를 아뢰고, 유중익을 파직하여 사습을 바로하고 선비가 지향할 바를 알게 해야 한다고 논주(論奏)하여 결국 중익을 파직케 한 일이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 하나만 보아도 신재 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신재 조는 중종 13년 「性理大典」강독관(講讀官)으로 발탁되어 경연에서 이를 진강(進講)하는 영예를 얻었다. 이것은 당시 조정이 신재 조의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명망(名望)을 높이 인정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己卯錄」에 따르면, 당시 중종 임금은 유학을 숭상하고 文治에 뜻을 두어 조광조 등 여러 賢人들을 애중하였는데, 이들은 매야 경연에 나아가 한 章을 講할 때마다 의리를 이끌어 비유하고 經典에 출입하여 미묘한 곳까지 관철하였으며, 강이 기준.박세희.양팽손.최산두 같은 이에 이르게 되면 말이 지리히 이어져 끝날 줄을 몰랐고, 조강(朝講)이 해가 기울어서야 끝나곤 했다고 한다. 이는 신재 조의 경연에서의 진강이 얼마나 진지했던 가를 잘 말해준다.
불행히도 신재 조의 학문적 업적을 살필 수 있는 저술들이 다 인멸되어 그 그 진수(眞髓)를 상고할 길이 없지만, 이상의 정황들로 보아 신재 조는 당대 성리학의 대가였고, 또한 동복에 적거하면서 이를 힘써 전수(傳受)하여, 하서.미암과 같은 거유(巨儒)들을 배출하였으니, 가히 호남도학의 元祖요 師宗이라 할 만하다.
5. 新齋先祖의 詩文
다음으로 신재 선조의 詩文을 살펴보기로 하자.
신재 선조는 시문에 뛰어나 당시 호남삼걸(湖南三傑)로 일컬어졌었다. 그러나 선조의 시문은 그 문집이 失傳되어 현재 수습(收拾)된 것은 당시 교유했던 知友들의 문집이나, 「대동야승」「연려실기술」과 같은 문헌, 구전설화나 정자의 제영(題詠) 가운데 전해지는 것을 수습한 것들로, 모두 합해 賦 1편, 한시 18수, 서간 11편, 행장 1편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도 시 2수는 落句가 있어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재 선조는 여러 가지 정황이나 기록들로 보아 많은 시문의 술작(述作)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선생은 8.9세 때에 이미 <詠牛頭><詠烏>와 같은 고사에 박통(博通)한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고, 청년시절로부터 사우(師友)로 더불어 승경(勝景)을 소요.유람하며 가는 곳마다 시를 남겼으며, 石川 林億齡.橘亭 尹衢. 懶齋 柳成春.學圃 梁彭孫.訥齋 朴祥.服齋 奇遵.思齋堂 安處順 등과 같은 知己들과 수창(酬唱)하며 시를 주고 받았었다. 또 관직생활의 대부분을 홍문관.사헌부.사간원 등의 言路에 몸 담았었고, 아울러 경연 검토관.시강관(侍講官)의 직을 겸하였음으로 그 직에 따른 많은 술작(述作)들이 있었을 것이며, 또 하서.미암 등과 같은 제자들에게 시문을 가르치며 상화(相和)한 시문들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여기저기 전하는 기록들을 보아도 신재 조의 시문은 현재 수습된 것보다는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신재 조가 안처순에게 서간을 보내며 그 말미에다가 "그 밖에 신배경(申裵卿)에게 보낸 절구 8편은 이미 읽어봄이 있으신지?"라고 묻고 있는 것이나, 또 다른 서간에서 "그동안 군이 송광불지(松廣佛紙(종이이름)를 보내 준 것이 무려 오백 여권이었는데, 다만 두 책만 나누어 보내었으니 실로 본래의 바램을 너무 크게 저버렸소." 한 것, 또 하서가 선조께 처음 나와 수학하면서 지은 시에 "신재가 지어놓은/ 두세 편 부(賦)는/ 우리 동방 옛사람도 못 가본 경지"라 한 것이나, 또 하서가 선조의 시 <문주(問酒)> <양벽정( 碧亭)> 운(韻)을 차운(次韻)하여 지은 시가 「河西集」에 전하고 있는 사실, 또 임억령의 <石川集>에도 신재 조의 시에 차운한 시편들이 실려 있고, 또 김세필의 <十淸軒文集>에도 신재 조와 화답한 시가 실려 있는 사실, 그밖에 梁學圃 彭孫이 신재 조에게 글을 보내 진사시험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여 이르기를 응시작 "<강목부>와 <백량대시>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천고기절(千古奇絶)한 문장"이라고 극찬한 기록 등등을 보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것 이외에도 많은 시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집의 失傳으로 그 문학세계를 제대로 살필 수 없음이 유감이다.
여기서는 현전 시작품 18수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신재 조의 시셰계를 규시(窺視)해 보기로 한다.
우선 비유의 참신성괴 기발함이다.
백로(白鷺) 고기 엿는 모습 노란 꾀꼬리 나비 쫒는 양(樣)은
강물이 백옥을 품은 듯하고 산이 황금을 토함 같네
<題 勿染亭>
물염(勿染)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세계다. 이 亭고 마주한 강과 산, 그리고 그 속에 노니는 노란 꾀꼬리는 그대로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더욱 백로가 고기를 쪼으러 물속을 기웃거리는 모습과 노란 꾀꼬리가 나비를 쫒아 나는 모습을 각각 "강물이 백옥을 품은 듯하고"."산이 황금을 토함 같다"한 비우는 기발함을 넘어 절묘하기까지 하다. 이 시에서는 바로 이러한 시적 구성과 절묘한 표현이 이 시를 속태(俗態)를 벗은 청정물염(淸淨勿染)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단금(丹禽)이 한 송이 꽃으로 화하고선
적송(赤松)으로부터 내려와 고운 용모쯤이야 새암조차 없구나
<鳳仙花>
鳳仙花의 이름자들이 갖는 의미를 비유적으로 표현해 그 청초한 모습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곧 '단금(丹禽)'은 단조(丹鳥) 곧 봉황(鳳凰)의 이칭(異稱)이니, 鳳仙花의 첫 글자인 <鳳>자를 말한 것이요, 또 '적송(赤松)'은 옛 仙人 赤松子를 말함이니 곧 신선들이 산다는 세계를 비유한 말로 鳳仙花의 가운데 글자인 <仙>자를 말한 것이며, '한 송이 꽃'은 곧 그 끝 글자인 <花>자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丹禽이/ 赤松으로부터 내려와/ 한송이 꽃으로 化하고선"은 鳳仙花의 글자를 풀어 그 유래를 전설처럼 꾸며내고, 이를 그 탈속연(脫俗然)한 모습에 비겨본 절묘한 비유인 것이다.
다음 신재 조의 시가 갖는 서경적(敍景的) 회화미(繪畵美)다.
강남(江南)의 아침 저녁 때때로 비를 조차
평화를 일렁기고 앞산 넘을 젠
한들한들 촌색실 따라나섬 진애(塵埃)따라 씻겨나니
정이 있는 양 산빛도 해맑다.
<취연(炊煙)>이라는 시다. 밥짓는 연기가 촌색시의 치맛자락을 싸고도는 모습이나, 산자락을 타고 넘는 모습이 실경(實景)처럼 정감 있게 살아 넘실거린다.
산은 가을을 맞아 연고없는 학발노옹(鶴髮老翁)
마-악 물들려 하고 한가로이 목침 위에 잠이 깊고
종소리는 멎은 채로 조차서, 거문고 안고 온 정(情)도
새벽을 기다려 묵묵하네. 솔소리에 잠겨 고즈넉하네.
<更登天子菴>의 일부다. 초가을 山寺의 정경과 고요, 탈속한 분위기가 그림처럼 잔잔하게 펼쳐져 있다.
다음 世事의 得失과는 초연한 거리(距離)에서 수분지족(守分知足)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심경을 읊은 시 한편을 보자.
강언덕 시를 생각하노라
길따라 해마다 골짜기 물은
봄을 찾다 늦어 산모퉁이를 굽어 돌고
그대 생각하며 나는 분수를 따라
달빛에 걸으면서 살아갈뿐
<贈 尹橘亭 衢>
「대동야승」 소재 <海東雜錄> 1권 최산두 전에 이 시가 보이는데, 이에 의하면, 이 시는 선생이 사인(舍人) 벼슬로 있다가 동복(同福)으로 귀양을 가서 나복산(蘿 山) 아래 살면서 호남삼걸의 한 사람인 귤정 윤구에게 보낸 시로 소개되어 있다.
골자기 물이 해마다 산모퉁이를 따라 흐르듯, 적거(謫居) 중인 자신도 자신의 처지를 따라 분수에 맞게 살아갈 뿐이라 하여 수분지족(守分知足)의 삶을 담담히 피력하고 있다.
한편으로,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남원으로 돌아가는 安順之에게 준 贈別詩를 보면, 儒者로서 忠孝에 독실했던 신재 조의 성품을 대할 수가 있다.
공의(公義)와 사은(私恩)을 장차 어버이 봉양할
무겁고 가벼움 헤랴 하면 성주(城主) 한 자릴 얻었도다
때로, 두 뜻이 마음에서 서로 다퉈 몸은 점점 멀어가도
둘을 온전케 다 이루긴 어려웁데 마음은 대궐을 떠나지 못해
나서 효로써 다스리는 돌아다 아득히
시절 만나 흰구름 바라보는 눈이 뚫어지네
<贈 安順之 歸養南原>
公義를 세움은 임금께 충성을 다함이고, 私恩을 보답함은 부모께 효도를 다함이다. 여기서 이 "둘을 온전케 다 이루긴 어려웁데"라고 한 표현은 안순지가 어버이를 봉양키 위해서 임금의 곁을 떠나 하향(下鄕)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를 비겨 충효가 양전(兩全)키 어려움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면서도 "몸은 점점 멀어가도/ 마음은 대궐을 떠나지 못해/ 돌아다 아득히/ 흰구름 바라보는 눈이 뚫어지네"에서 임금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을 핍진(逼眞)하게 그려놓고 있다.
또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시로, 전 장에서 소개된 <贈 安順之>가 있다. 이를 보면, 적소에서도 임금을 그리며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곡진하게 담겨져 있어, 신재 조의 충성과 효심이 본디 그 천성에서 우러난 자연한 성정의 발로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다음 <만안사재당(輓安思齋堂)> 시는
청년에 지하로 다시금 바다처럼 봄이 너른데
군이 이처럼 갔으니 술독 마주하여 웃음꽃 피울 날은
백발로 人世에 남아 어느 날에 다시
나는 누구로 더불어 벗 할꼬 생각이나 해볼 수 있으리
꽃과 새들 가득한 숲은
젊은 시절부터 허심(許心)하여 종유(從遊)해왔고, 동복 謫居時에는 食物이며 文房具.생활용품까지를 의지했던 知友 안순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시다. "꽃과 새들 가득한 숲은/ 다시금 바다처럼 봄이 너른데/ 술독 마주하여 웃음 꽃 피울 날은/ 어느 날에 다시 생각이나 해 볼 수 있으리"에는 이승과 저승의 거리(距離) 앞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하는 유한자(有限者)의 육중한 절망과, 벗에 대한 추억과, 그 넓고도 깊은 우정이 절절히 드러나고 있다.
또 다른 세계로
운창(雲窓)에 도학(道學) 궁리 강산이 물에 잠겨
아홉 해를 보내었네 수국(水國)이 된다 치면
연일 두고 쏟는 빗발 포구(浦口)에 배를 붙들어
은하(銀河)물을 대었는지 창생(蒼生) 힘써 건네리
<천자임우음(天子菴霖雨吟)>
신재 조는 22세되던 갑자년(1504)에 사마시에 장원급제하였는데, 이해 10월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스승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순천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효수(梟首)되는 화를 당하였다. 이 해 신재 조는 스승의 참혹한 죽음을 목도(目睹)한 후 연산 조의 폭정을 피해 낙향하여 전남 승주군 송광면 천자암(天子菴)에 머물며 9년 동안을 도학궁리(道學窮理)에 정진하였다. 이 시는천자암에 머물 때의 작품으로 보인다. 운창(雲窓)에서 도학 궁리로 9년을 보냈다고 하였으니, 30세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시는 신재 조의 도학공부가 경세제민(經世濟民)에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신재 조는 천자암 9년 칩거를 마치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간 후 오직 이 '창생 구제'의 일념으로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몸을 바쳤던 것이다.
끝으로 신재 조의 시세계에 담겨있는 풍류적인 멋을 살펴보자. 신재 조는 특히 "술 대하면 거나하고" 했던 하서의 추모처럼 술을 즐겼고, 주흥(酒興) 가운데서 더욱 풍류스런 멋이 표출되곤 했다.
뽕나무 오디는 靑紅으로 물들고 사마소(司馬所) 술단지에
감나무 잎사귀는 두툼하게 살져있어 술 빈 까닭을 알려거든
작은 후원 풍물이 선생이 취해
꽃답고 향기롭네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사마연(司馬宴)>
이 시도 앞의 <증 윤귤정 구>와 함께 「대동야승」 소재 <해동잡록> 권 1 '최산두 전'에 실려 있는데, 그 詩作 유래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선생이 일찍이 본현 사마소에 연회가 있다는 전갈을 받고 갔었는데 아직 다른 사마(진사.생원)들이 모이지 않았었다. 이에 선생은 그 곳에 마련되어 있는 술을 다 마셔버리고 돌아왔다. 술단지를 지키는 자가 죄를 입을까 두려워 하므로 선생은 감나무 잎을 따서 위의 시를 적어놓고 돌아왔다 한다.
위 시는 이러한 일화와 함께, 취중(醉中)에 감나무 잎을 따 그 위에다 한자 한자 취한 붓으로 시를 적고 있는 신재 조의 풍류스런 멋이 진한 인상으로 와 닿는 시다.
또 다음 다음 시에는
백발 문장(文章)이 운산수림(雲山樹林)의 정겨운 모꼬지가
취가(醉歌)를 부름은 아직도 끝날 줄 모르는 여기는
연석(宴席)의 주배(酒盃)가 꽃지고 새우는
분주했던 때문이오 석양(夕陽) 언덕일네라
<여유미암동연(與柳眉巖同宴)>
주흥(酒興)이 도도한 연석(宴席)의 정취가 한껏 펼쳐져 있다. 뿐만 아니라 아래 시도 이러한 정취와 풍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백발과 청년이 선경(仙境)에 술 즐기니
한 루(樓)에 둘러 앉아 흥결에 이는 즐검 거두기 어려웁네
<초추회천자암(初秋會天子菴)>
이상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선생의 시는 비유가 절묘하고 정경묘사에 있어 회화미(繪畵美)가 초출(超出)하다. 그런가 하면 자연친화적(自然親和的) 경향의 경물시(景物詩)와 守分知足·戀君思親 등의 인생론적 경향의 시들, 그 밖에 술과 풍류를 읊조린 시들로 고아(高雅)하고 품격 높은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문집의 실전(失傳)으로 많은 시들을 대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제6절 삶의 터전을 일군 落南祖들
1. 10대 宗派의 기원
1)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산두 조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병길(丙吉) 조는 중종 을해년(1515)에 나서 고향을 지켜 살았다. 관은 충순위(忠順衛)에 들었고 통덕랑(通德郞)으로 독부교적(督簿校籍)을 역임했으며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다. 차남인 정길(丁吉) 조는 중종 기묘년(1519)에 나서 병신년(153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가 이 해에 부친 신재 조의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마친 후 임인년(1542)에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으로 부름을 받고 출사(出仕)한 후, 갑진년(1544)에 홍문관 수찬, 병오년(1546)에 사간원 헌납을 거쳐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다. 병길 조의 묘는 부저리 화전봉 한 영 조의 묘 아래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마을에서 일생을 마쳤을 것으로 보이나, 정길 조의 묘는 처음부터 도선산에 자리잡지 않음으로써 도선산 묘도(墓圖)에 그려져 있지 않으며, 신미보(1871년)에는 실전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후 신해보(1911) 을축보(1925)에는 묘가 태인(泰仁: 전북 정읍군)에 있었는데 실전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벼슬살이를 마친 후 향리로 돌아오지 않고 전라북도 정읍군이나 순창군 어딘 가에서 家基를 정하고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장에서 좀더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현재의 도선산 정길 조의 묘는 을축보(1925년) 이후에 그 종손계열인 부안 증동 문중에서 공이 태어나 성장했던 터전인 도선산에다 묘를 축성(築成)하고 비를 세운 것이다.
병길 조는 종원(宗元).종언(宗彦) 두 아드님을 두었는데 종손인 종원(宗元) 조만 남아 선산을 지켰고 종언 조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부저리를 떠나게 된다. 그리하여 종언 조가 정착한 곳은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장덕산(長德山) 기슭의 장덕 마을인데 두 아들을 두어 그 장자인 성린(聖麟) 조의 후손들은 '어모공파'를 이루어 가계를 이어오고 있고, 차남인 충린( 麟) 조의 후손들은 '진사공파'를 이루고 있다. 한편 정길 조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벼슬살이를 하기 전에는 출생지인 광양 부저리에서 살았을 것이지만 벼슬에 나가 향리를 떠난 뒤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지 않고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이나 순창군 지역에 눌러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따름이다. 즉 정읍 태인 설은 앞서 말한 바 신해보와 을축보에 "墓在泰仁未詳(묘는 태인에 있는데 자세하지 않다)"이라 한 기록에 근거 한 것이지만, 정길 조가 왜 태인에 거주하게 되었는지를 뒷받침해 줄만한 어떤 단서도 남아 있지를 않기 때문에 믿기 어렵다. 또 순창군에 살았을 가능성도 정길 조의 가장 가까운 혈손인 증손 仁信 조의 묘가 순창군 팔덕면 태자리에 있었던 사실에 근거한 것이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다만 그 묘역의 규모, 묘의 크기, 목관의 크기, 석회로 관 주위를 두텁게 쌓아 견고하게 묘를 축조한 점 등으로 보아 인신 조는 당시 그 지역에서 상당한 정도의 신분과 부를 누리고 있었던 토반(土班)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적어도 그 2·3대 이전부터 그 지역에 세거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후자가 더 설득력이 높다. 이렇게 본다면 인신 조의 증조가 되는 정길 조가 벼슬살이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낼 터전으로 선택한 곳은 순창 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비교적 넓은 농토가 있는 이 태자리 이거나 근방의 어느 마을이었을 것이다. 이 마을에서 광양 부저리까지는 전남 구례를 거쳐 직로(直路)로 간다면 이틀 정도면 득달할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선영의 제사에 참석하는 일도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후 아드님이신 종형 조가 부친의 가산을 이어받아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고 종형 조의 아드님이신 기룡 조가 정유재란 때 이곳에서 의병을 모아 관군과 합세하여 왜적과 맞서 싸우다 남원성 싸움에서 순국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2001년 현재 태자리는 인근 광암리와 통합되어 행정구역상으로는 팔덕면 광암리에 속해 있다. 정길 조는 종형(宗亨).종국(宗國).종수(宗壽) 세 아드님을 두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종형 조가 정착한 곳은 그 묘가 실전 되어 확실치는 않으나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광암리로 추정되며, 그 아드님인 기룡(琦龍) 조가 정유재란 때 포의(布衣)로써 의병에 가담하여 남원성 싸움에서 순국함으로써 그 후손들이 '순절공파'라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 둘째 아드님인 종국 조는 경상남도 남해군 서면의 갯마을인 염해리(鹽海里)에 정착하여 가기(家基)를 세움으로써 그 후손들이 '통정공파'라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또 종수 조는 북쪽으로 옮아가 전라북도 임실군 갈치재 기슭의 덕치면 암치리(현재의 행정구역명칭은 장암리이고 장암리를 이루는 세 마을 가운데 하나다)라는 마을에 정착하여 살았고, 그 자손들 가운데 일부가 전주.완주 지역에 산거(散居)하며 '통덕랑공파'를 이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 임진왜란 선무원종공신 종원 조
우선 고향을 지킨 종원 조와 그 후예들의 자취를 보면, 종원 조는 명종 7년 1552년에 태어났는데, 천품(天稟)이 영특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힘이 장사였다. 또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극진히 섬겼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라 항상 '忠.孝' 2자를 써서 몸에 지니고 다녔다 한다. 또한 지조가 곧고 志氣가 강건하였으며, 일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治産에 힘쓰며 어버이를 힘써 孝養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30만 대군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경상도를 유린하며 쳐 올라가 20일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40일에 평양을 점령하여, 선조 임금이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의주로 몽진(蒙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비보를 접하자, 의연히 가산을 모두 내놓고, 또 널리 의곡(義穀)을 모아 이를 직접 배로 실어 해로(海路)로 임금이 계신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갖다 바쳤다. 또 1597년 정유년에 왜군이 다시 14만 대군으로 침략해와 경남 일대를 유린하며 북상하면서 이번에는 후방 보급기지의 확보를 위해 전라도 지역까지 전선을 확대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이순신 장군의 해상봉쇄로 전라도 지역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가 없었으나, 이때는 이순신 장군이 원균의 모해로 감옥에 갇혀있는 틈을 타, 왜군이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지휘하는 수군을 대파하고 제해권을 장악, 해안 각처로 상륙하여 전투를 벌림으로써 전라도 남부지역도 처참한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이 때 광양에서도 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종원 조는 46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싸움터로 달려가, 승주군(현, 순천시) 해룡면 신성포 예교(海龍面新城浦曳橋) 전투에서 아군이 적세에 눌려 전의를 잃고 있을 때 단신으로 적진에 돌격하여 적병을 참살하고 그 머리를 베어 돌아옴으로써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전세를 역전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이 사실이 『昇州郡史』(1985), 『光州全南五亂忠義士錄』(1992)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공으로 종원 조는 선조33년(1605)에 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1647년 통정대부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승주군사』에 기록된 종원 조의 사적은 이러하다
崔宗元, 字는 大春, 本貫은 草溪, 龍宮의 後孫이며 新齋 山斗의 孫子로 1546년인 明宗 1 年에 出生했다. 타고난 性品이 英敏하고 非凡하여 義롭지 못한 것을 보면 正義感이 복 받쳐 義憤했고 忠孝의 두 글자를 써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1592年 壬辰倭亂 때는 避身한 王을 돕기 爲해 義穀을 모아 義州가지 輸送하여 주었고 昇州郡 海龍面 新城浦 曳橋 戰鬪에서 明將 유정이 包圍되어 苦戰을 免치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늙은 몸으로 單身으로 突擊하여 參劃의 功을 세웠다. 宣武原從功臣勳에 記 錄하고 兵曹參議를 贈했다. <『昇州郡史』(1985) 1002쪽>
이 정유왜란으로 광양지역도 전란의 참화를 혹독히 겪어야 했다. 이 때 우리 씨족도 광양 유림들이 선조11년(1578)에 신재 선생의 제향을 받들기 위해 광양읍에 세웠던 서원인 '鳳陽祠(봉양사)'가 불타버렸고, 서원에 소장해왔던 신재 조의 문집과 사적을 적은 글들도 모두 불타 없어지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사실은 봉양사가 불탄지 꼭 93년 뒤인 숙종 16년(경오, 1690)에 광양 유림들이 봉양사 사우(祠宇)를 중건한 기록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본현에 세웠던 사우(祠宇)가 정유왜란에 분탕(焚蕩)될 때 그 글들과 사적을 또한 다 잃고 말아 그 말을 상고할 데가 없다.(本縣所立之祠宇於丁酉焚蕩之際文蹟亦盡 失故其辭 無可考據) <『新齋集』 鳳陽祠重建祠宇狀>
신재 조는 호남삼걸로 일컬어질 만큼 당시 문장의 대가였다. 이는 현재 전하고 있는 선생의 시편들이나 그 제자인 하서 김인후 선생이 신재선생을 추모한 제문,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선생이 선생의 <강목부(綱目賦)>와 <백량대시(柏樑臺詩)>를 평하여 "전 사람들이 일찍이 발견치 못한 경지요 천고에 기절(奇絶)한 문장(果是前人未發千古奇絶)"이라 한 것만 보아도 그 경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학문과 문장이 담겨진 유고(遺稿)들이 전란의 잿더미 속에 묻혀버린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정유왜란은 우리씨족에게 이러한 슬픔만을 안겨준 것은 아니다. 순천인 박이량(朴以良)에게 시집간 신재 조의 외동 따님은 전란 중에 왜군에게 피살되는 참변을 당했다. 신재 조가 돌아가신 해가 1536년이니, 이 때 이 따님은 60이 훨씬 넘은 나이였을 것이다. 당시 훈련원 첨정으로 군영에 있었던 남편 박이량은 처자가 적중에서 피살된 것을 알고 울분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병사들을 모아 적을 치려하니 당시 순천부사 김언공(金彦恭)이 그를 장수로 삼아 전투에 나가게 하였다. 박이량은 60을 훨씬 넘긴 노장(老將)이었지만 식솔과 백성들이 적군에게 유린되는 참상 앞에 분기충천하여 군사를 이끌고 적진에 돌진, 좌충우돌하면서 적병을 참살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적군의 목을 베어들고 말까지도 빼앗아 돌아오는 큰 전공을 세운다. 선조실록 가운데는 선조 30년 11월 28일에 순천부사 김언공이 이 수급과 함께 박이량의 전과를 임금께 치계(馳啓)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순천부사(順天府使) 김언공(金彦恭)의 치보에 '본부에 사는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 박이량(朴以良)은 처자가 적중에서 피살되자, 울분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군인을 모아 적을 토벌하여 복수할 것을 결심하므로 장수로 정할 것을 허락하였는데, 순천의 많은 적 과 서로 접전하여 머리 1급을 베고 말 1필을 빼앗아왔으므로, 머리 1급을 올려보낸다"고 하였습니다.
정유재란 중 순천·광양 일원은 참혹한 격전장이 되었고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가옥이 분탕되는 피해를 겪었다. 광양읍으로부터 4-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부저리 마을도 이 때에 전란의 화를 피해가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종언 조의 다섯 아드님 중 네 아드님이 고향을 떠나 제각기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이주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실 부저리라는 마을은 산기슭에 위치하여 주변에 농토가 넓게 형성되어 있지 못한 터라 많은 인구가 생애를 부치기에는 처음부터 부적합한 마을이다. 여기에 전란의 참화까지 겪었으니 당시 마을 사람들의 삶은 더욱 참담하기만 하였을 것이다.
3) 10대 종파의 기원
종원 조는 1621년(광해군 13, 신유)에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부저리 선영에 묻혔다. 득린(得麟).경린(慶麟).석린(錫麟).정린(正麟).성린(成麟) 다섯 아드님을 두었는데, 맏아드님인 득린 조만 선영을 지켜 고향에 남고 나머지 4형제는 각기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다 터전을 일구고 가기(家基)를 세웠다. 이 5형제 중 장님인 득린 조는 1633년(인조11, 계유)에 54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에 나가 선전관.사헌부감찰.회령도호부 판관.어모장군 행 훈련원 첨정 등을 역임하며 78세에 이르도록 관직에 머물었는데, 이 첨정공이 바로 우리 초계최씨 전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첨정공파'의 파조(派祖)가 된다.
경린 조는 21세 때인 1602년(선조33) 사마시에 합격하고 상경하여 성균관에 들었다가 1605년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를 배명하여 관직에 나감으로써, 54세에야 무과로 관직에 나가 외직(外職)과 경관직(京官職)을 전전한 백씨(伯氏) 득린과는 달리 일찍부터 순탄한 벼슬길을 걷게 된다. 이 경린 조는 호를 '용운(龍雲)'이라 하였는데, 41세 때인 1622년(광해군 14) 낭주(영암의 옛 이름)군수로 재직 중 갑작스럽게 서거함으로써, 자손들이 공(公)을 해남(海南)의 영산(靈山)인 달마산(達磨山)에 장사지내고 그 곳 해남군 북평면 이진(梨津) 마을에 눌러 살게 되는데, 그 후손들이 바로 첨정공파 다음으로 번성하여, 공을 파조(派祖)로 받들어 우리 초계최씨의 거대 계파(系派)인 '용운공파'를 이루고 있다.
한편 3자 석린 조는 북쪽으로 옮아가 장성군 북하면 성암리에 정착하여 가기(家基)를 세워 후손들이 이에 세거(世居)하였는데, 석린 조가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에 증직 되었으므로 그 후손들을 '감찰공파'라 일컫는다. 또한 4자 정린 조는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 남촌리에 거주를 정하였는데 후손들이 다시 순창군 쌍치면 장발리로 옮아 살았다. 정린조가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므로 그 후손들을 '학생공파'라 칭해왔는데 이 호칭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즉 '학생(學生)'이란 '벼슬도 못하고, 학문으로도 一家를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 붙였던 미칭(美稱)이긴 하나 사실 드러내놓고 자랑삼을 만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는 미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폄칭(貶稱)으로 인식되고 있고, 또 관직만이 호칭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닌 이상 이는 온당한 호칭이라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족보에 기록된 정린 조의 자(字) '재도(在道)'로서 호칭을 삼아 '재도공파'라 칭하기로 한다. 이 재도공파는 후손이 여러 대를 독자로 내려와 번성하지를 못하였다. 또 5자 성린 조는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진사(進士)로 있으면서 광해조의 폐정을 직간한 소를 올렸다가 조정의 미움을 받아 전라남도 완도에 유배되어 적거하다가 34세 때인 1623년(인조1, 계해)에 풀려났으나,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해남군 송지면 달마산 기슭의 마봉리에 우거(寓居)하였다. 성린 조는 호를 금강(錦崗)이라 하였으므로 그 후손들을 '금강공파'라 한다.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우리 초계최씨를 현재의 10대 종파로 나눈 것은 1955년 을미보를 간행한 때의 일로 전에는 족보를 발간할 때마다 그때그때 계파를 나누어 보계(譜系)를 기록해오곤 하였다. 이 10대 계파의 기원을 세계도(世系圖)로 나타내 보이면 다음과 같다.
또 이 10대 종파의 각 후손들이 저마다 삶의 터전을 찾아 각처로 분파하여 살아오면서도, 일정한 세거지(世居地)를 중심으로 같은 선조의 제사를 받들며 혈연적 연속성을 유지해옴으로써 또 각각의 문중(門中)을 이루며 살아왔는데, 이 문중 분파도를 제시해 보면 또 다음과 같다.
草溪崔氏 宗派·門中 分派圖
시조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崔龍宮 -┌ 徵 - 稽聖 -┌ 德康 ― 成一 - ┌ 希東 ― 奇淵 ― 思文 ------------+
├ 徽 └ 德崑 ├ 傅東 |
└ 玹 └ 系東 |
+--------------------------------------------------------------------------------+
| ◎ 10대종파 【 72문중 】
|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 漢榮+- 山斗+- 丙吉+- 宗元+- 得麟 +- 好立+-宇晟+-昇武+-祥業+-命灝-+
| | | |◎첨정공파 | | | +-命大-+..............승주이읍(우성공후손)문중
| | | | 僉正公派 | | | +-命五-+
| | | | | | | | +-命宣 ...............승주장안(명선공후손)문중
| | | | | | | | +-命益 ...............승주오봉(명익공후손)문중
| | | | | | | +-祥顯―命鎬+-致憲..........승주구표(상현공후손)문중
| | | | | | | | +-致完..........여천두모(치완공후손)문중
| | | | | | | +-祥南―洪逸 ...............여천우두(상남공후손)문중
| | | | | | | +-祥彩―致江 ...............순창관전(상채공후손)문중
| | | | | | +-瑞武+-祥孫―命元 ...............곡성죽산(서무공후손)문중
| | | | | | | +-祥杓― 俊 ...............임실갈담(상표공후손)문중
| | | | | | | +-祥良―命萬 ...............남해서상(상량공후손)문중
| | | | | | +-洪武―祥仁―國慶 ...............순창죽전(홍무공후손)문중
| | | | | +-宇熙+-信武┌ 祥廷―命應·命善.........승주미곡(우희공후손)문중
| | | | | | | ├ 祥會―命久 ..............여천안도(상회공후손)문중
| | | | | | | └ 祥粲―命源 ..............고흥화계(상찬공후손)문중
| | | | | | +-成武┌ 祥元─命允...............순천송학(성무공후손)문중
| | | | | | └ 彦複― 敦 ...............완주안덕(언복공후손)문중
| | | | | +-宇德―正武+-祥傑― 命湖┌ 致順........순창방화(우덕공후손)문중
| | | | | | | └ 時同 .......여천여자(시동공후손)문중
| | | | | | +-祥準― 命岳 ..............남원방동(상준공후손)문중
| | | | | +-宇仁―東武―祥珍 .....................순창상리(우인공후손)문중
| | | | | +-宇奇―逸武―祥善 .....................광양동지(우기공후손)문중
| | | | | +-宇福+ 愛錦 -+ ........................고흥외초(우복공후손)문중
| | | | | | + 奉武 -+
| | | | | | + 弘武―祥燮 +-命 -+
| | | | | | +-命翼 | ............강진석교(홍무공후손)문중
| | | | | | +-命翕-+
| | | | | | +-命 ..............추자도영흥(명핵공후손문중
| | | | | +-宇春+-楠武―汝柱-+....................승주죽청(우춘공후손문중)
| | | | | | +-源武―廷達-+
| | | | | +-宇義+-重武―祥星 ......................순창금창(우의공후손문중)
| | | | | +-康武―祥寅 ......................화순대곡(강무공후손)문중
| | | | +-景立― 聖發┌ 賢尙―大 ―致明 以明 順明┐....담양봉서(경립공후손)문중
| | | | | └ 濬尙+-大成―致鳳 │
| | | | | +-大郁┌彩鳳 彩明 ┘
| | | | | └命彦 ...............곡성금반(명언공후손)문중
| | | | +-生立+-守重― 奉榮-+ ..........................순창건곡(생립공후손)문중
| | | | | +-載重+- 善榮-+
| | | | | | +- 尙榮 ............................여천용주(상영공후손)문중
| | | | | +-蘭重― 敬伯 ............................남원입암(난중공후손)문중
| | | | +-彦立―鶴南― 致建 ............................담양신계(언립공후손)문중
| | | | +-貴立―龜玄― 俊尙 俊大 .......................남원정송(귀립공후손)문중
| | | +- 慶麟 +-煜立―宇松 +- 軒武+-德義+- 命實-+...........청산도당리(경린공후손)문중
| | | |◎용운공파 | | +- 命壽 |
| | | | 龍雲公派 | | +- 命元 |
| | | | | | | +- 命崇-+
| | | | | | +-智義+-命申―日元 .......신지도가인(지의공후손)문중
| | | | | | | +-命君―日明 .......신지도동고(명군공후손)문중
| | | | | | +-孝義―命伯―日玉 .......청산여서도(명백공후손)문중
| | | | | +- 晟武+-福義+-命春―日完 .......완도생일도(성무공후손)문중
| | | | | | +-命術―日陽+-尙仲+-致來.......장흥가학(명술공
| | | | | | | | 후손)문중
| | | | | | | +-致龍.......고흥신양(치룡공
| | | | | | | 후손)문중
| | | | | | +-尙泰 ...여천초도(상태공후손)문중
| | | | | +-貞義+-命道+-日伯 .........여천덕촌(정의공후손)문중
| | | | | | +-日貴 .........여천서도(일귀공후손)문중
| | | | | +-命學―日慶 .........승주선월(명학공후손)문중
| | | | +-淸立+-宇銀 +- 鳳武―祥義+-命奎-+ ...........소안도가학(청립공후손)문중
| | | | | | | +-命鎭-+
| | | | | | | +-命輔 ...............완도대신(명보공후손)문중
| | | | | | +- 永武―銅義―命萬 .............제주서귀포(영무공후손)문중
| | | | | +-宇益 ― 道武―甫義+-命京 .............노화도천구(우익공후손)문중
| | | | | | +-命曦 ...............완도모도(명희공후손)문중
| | | | | +-宇蘭 ― 松武―培義+-命距 .............보길도중통(우란공후손)문중
| | | | | +-命南 .............노화도당산(명남공후손)문중
| | | | +-弘立+-東儉 ― 克忠+- 運 ―德珍 ...............순창외령(홍립공후손)문중
| | | | | +-武立―忠達 ...............정읍화죽(무입공후손)문중
| | | | +-東錫 ― 世忠┌虎龍+-德英 ┐.............옥구취산(동석공후손)문중
| | | | │ +-德雄 │
| | | | └象龍―德一 ┘
| | | +- 錫麟 +-泰立--徹信 ..................................장성대흥(석린공후손)문중
| | | |◎감찰공파(監察公派)
| | | | +-錫立―春相 ..................................옥구관산(석립공후손)문중
| | | | +-淵立―在星 ..................................화순평지(연립공후손)문중
| | | +- 正隣 ―堯立―琮鐵 ..................................순창장발(정린공후손)문중
| | | |◎재도공파(在道公派)
| | | +- 成麟 ―德立―宇善 ..................................해남마봉(성린공후손)문중
| | | ◎금강공파(錦岡公派)
| | +- 宗彦+- 聖麟┌ 善立-+ ......................................남원오룡(성린공후손)문중
| | |◎어모공파(禦侮公派)
| | | └ 龍立-+
| | +- 麟 ―蘇立―鳳壽 ..................................정읍황토(충린공후손)문중
| | ◎진사공파(進士公派)
| +- 丁吉+- 宗亨-- 琦龍 +-仁興+-謹南+-秀鳳+-聖望-+ ....................부안증동(기룡공후손)문중
| | ◎순절공파 | | +-夢望-+
| | 殉節公派 | | +-東望 ......................정읍내장(동망공후손)문중
| | | | +-俊鳳+-克亮 ......................고창상평(준봉공후손)문중
| | | | +- 湜 .......................순창남계(식 공후손)문중
| | | +-謹宣―弼武―祥承 .......................순창방축(근선공후손)문중
| | +-仁信―弘得―日瓏―振望 .......................담양덕성(인신공후손)문중
| |- 宗國 ― 歇 ― 春武 ........................................남해동천(종국공후손)문중
| | ◎통정공파(通政公派)
| +- 宗壽 +-天祥― 瑞 ―得賢 ...................................전주(종수공후손)문중
| ◎통덕랑공파 +-天麟― 大元―萬載 ..................................순창심초(천린공후손)문중
| 通德郞公派 +-旺麟― 竣 +-明賢-+ ................................신안도초(왕린공후손)문중
| +-貴宗-+
+- 山厚 ― 愼 ..............................................................(북한 거주)
2. 光陽 白雲山 先塋을 지킨 첨정공 得麟 조와 그 후예들
--- 첨정공파
첨정공파는 어모장군 행 훈련원 첨정 득린 조의 후예를 일컫는 말로, 첨정공을 파조로 하며 우리 초계최씨의 종손파이다. 지금까지 우리 씨족에서는 이 득린 조를 관직명으로 일컬어 판관공이라하고 그 후손들을 판관공파라고 호칭해왔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득린 조는 통훈대부 행 회령도호부 판관을 엮임 한 바 있지만, 뒤에 승직하여 어모장군 행 훈련원 첨정에 올랐으므로, 마땅히 정5품직인 회령판관 보다는 이 보다 2품계나 상위직인 정4품 훈련원 첨정으로 호칭해야 한다. 현재 득린조의 묘비에도 통정대부 행 광주부판관이라 새겨져 있는데 이는 자손이 선조를 현양 하기는커녕 오히려 낮추고 있는 불경(不敬)을 범하고 있는 일로 시급히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첨정공의 사적은 『호남읍지』나 『광양읍지』의 무과 급제 기록과 공에게 관직을 제수한 8편의 교지가 남아 있어 이를 통해 그 생애를 파악할 수 있다. 공은 선조12년(1579)에 태어났다. 외모는 기골이 장대하고 지기가 강건하였던 아버지 선무원종공신 종원 조나 조부 어모장군 병길 조, 또 문절공 신재 조를 닮은 건장한 체격을 타고났고, 선대의 가풍을 이어 어려서부터 충효로써 수신의 근본을 삼아 학행을 힘써 닦았다. 공은 어려서 학문에 힘쓰면서 또 부친을 도와 가업인 농사에도 힘을 써 치산을 부지런히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자 부친 종원 조는 가산을 털어 바치고 또 고을 사람들로부터 의곡을 거두어 이를 배에 실어 의주까지 갖다 바쳤고 또 정유재란 때는 왜적의 침입으로 고을이 분탕되고 백성들이 살육당하는 현실을 보고 있을 수 없어 노구를 이끌고 분연히 싸움터로 나가 선봉에 서서 적을 막아 싸우고 참획하는 전공을 세웠을 만큼 나라에 충성함을 몸으로 실천하였다. 득린 조는 이러한 부친의 충의를 본받아 정유재란 때는 군보로서 전장에 나가 싸웠고 전란이 끝난 뒤에는 생업에 힘써 어버이를 효양하면서 글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득린 조가 무과에 급제한 해는 1633년(인조 11, 계유) 그의 나이 54세 때다. 그 직이 보인(保人; 조선시대 군에 직접 복무하지 않는 병역의무자)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때까지 그는 벼슬에 나갈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치산에 힘쓰며 어버이를 효양하는 일에만 전념하였음 알 수 있다. 곧 어머니 숙부인 경주김씨는 1614에 돌아가셨고 아버지 참의공(종원조는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은 1621년에 돌아가셨으니, 양친을 모두 성효로 봉양하고 삼년상까지를 마쳐 이렇듯 어버이 섬기기를 마친 후에야 벼슬길에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사실 효자의 마음으로서는 늙으신 어버이를 고향에 두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차마 벼슬길을 나설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득린 조가 1633년 무과급제 후 첫 번째로 나간 관직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교지를 통해 그 연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54세, 1633년(인조11, 숭정6) 7월 24일 : 무과(武科) 을과(乙科)로 급제
61세, 1640년(인조18, 경진) 3월 11일 : 선략장군(宣略將軍) 무신(武臣) 겸 선전관(宣傳
官)이 됨.
67세, 1646년(인조24, 순치3) 2월 3일 :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이 됨
67세, 1646년(인조24, 순치3) 6월 21일 : 통훈대부 행 회령도호부 판관을 배명(拜命)하여
외직으로 나감
73세, 1652년(효종3, 순치9) 6월 21일 : 조산대부 행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가 됨
75세, 1654년(효종6, 순치11) 4월 21일 : 어모장군 행 훈련원 첨정에 오름
77세, 1656년(효종8, 병신) 4월 11일 : 둔전(屯田) 도별장(都別將)의 특명을 받아 각 진
영(陣營)의 둔전(屯田)을 순행하면서 농사를 장려하고 둔민(屯民)들을 위무(慰撫)·
구휼(救恤)하다.
득린 조가 무과에 급제한 인조11년(1633)은 정묘호란(인조5년)의 여파로 정국이 흉흉한 때였다. 정묘호란에서 패전한 조선은 후금(後金; 뒤에 淸國)과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고 강화를 하였으나, 후금은 더욱 세력을 확장하며 명(明)을 치기 위해 조선에 군량을 강요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의 압력을 가하는 한편 1632년에는 형제관계를 고쳐 군신관계를 맺을 것과 세폐(歲幣)를 증가시킬 것을 강요하므로, 1633년 마침내 조선은 후금과 전쟁도 불사할 각오로 국교를 단절, 이 해 1월 척화(斥和)의 교서를 반포하고 전쟁을 대비한다. 이 해에 군 지휘관 취재(取才)를 위해 시행한 무과에 을과 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득린 조는 틀림없이 곧 바로 임관되어 국가 보위의 선봉에서 군 전력증강을 위해 헌신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 중에는 전쟁터에서 국가와 사직을 수호하기 위해 용전분투 하였을 것이다. 오직 나라 위해 한 목숨 바치겠다는 충의(忠義) 하나로 54세의 노구를 이끌고 과거 시장(試場)에 나갔던 그가 아니었던가 !
득린 조의 무과 급제 후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 그리고 그 후 61세 때 선략장군 선전관에 임명되기 전까지 약 7년 동안의 행적은 현재 기록을 찾지 못하여 알 길이 없다. 현재 남아있는 교지를 보면 득린 조는 문무를 겸비하였던, 매우 성실한 관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선전관은 전령(傳令)의 출납 등을 맡는 관원이기 때문에 문신이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 득린 조는 '무신 겸 선전관'으로 문신의 직무를 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내직(內職)으로 관원들의 직무를 규찰하며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사헌부 의 감찰에 등용된 것을 보아도 득린 조의 학식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득린 조는 무과 급제 후 처음 경관직(京官職)에 등용된 이래, 67세 때 회령판관이 되어 외방(外方)에 나가기 전까지는 서울에서 벼슬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득린 조가 다시 경관직을 제수 받아 서울로 돌아온 것은 73세 때 조산대부 행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부임한 때일 것으로 보인다. 이어 75세 때는 정3품 어모장군에 승직하여 행 훈련원 첨정에 오르게 되는데, 여기서 2년 동안을 머물다가 77세 때에 훈련원 첨정으로서 둔전(屯田) 도별장(都別將; 정3품관)의 특명을 받아 각 진영(陣營)의 둔전(屯田)을 순행하면서 농사를 장려하고 둔민(屯民)들을 위무(慰撫)·구휼(救恤)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족보의 득린 조 기사 가운데는 광주부(廣州府) 판관을 역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교지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부임 연도는 알 수 없다.
득린 조는 둔전 도별장을 끝으로 치사하고 향리로 돌아와 양로(養老) 하던 중 이듬해에 서거하였다. 향년 79세였다. 54세에 출사하여 78세로 치사하기까지 24년간을 환해(宦海)에 머물었으나, 영직(榮職)에서 역사의 주연으로 화려한 활약을 펼쳐 보였다기보다는 조연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성실하게 노력하며 역사를 지켜온 생애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집에서는 효도를 다하였고 나가서는 충의를 다하였던 지조 높은 선비였다.
득린 조는 숙부인 김해김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好立·景立·生立·彦立·貴立의 다섯 아들을 두었고 죽어서는 부인과 함께 광양 도선산 선영에 묻혔다. 이 다섯 아들들 가운데서 가장 걸출한 인물은 호립(好立) 조다. 호립 조는 父·祖를 닮아 천성이 영민(英敏)하고 지절(志節)이 강개하며 무(武)를 중히 여겼다. 약관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국난극복에 앞장섰으며, 호조참판에 추증 되었다. 슬하에 8남을 두어 가문을 크게 번창시켰는데 첨정공의 후손들이 대부분 호립 조의 자손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승주이읍·승주운용·승주장안·승주오봉·승주옥산·여천봉두·여천두모·여천우두·순창관전·곡성죽산·임실봉천갈담·여천소호·남해서상·순창죽전·승주덕치·승주미곡·여천안도·고흥화계·순천송학·완주안덕·승주죽청·승주죽학·옥구구암·담양금월·화순대곡·순창방화·여천여자·남원방동·순창자양·광양동지·고흥외초·강진석교·완도대문·추자도영흥 문중의 자손들이 모두 이 호립 조의 손들인 것이다.
2자 경립(景立) 조는 官이 통덕랑인데 광양 부저리 선영 밑을 떠나 담양군 금성면 봉서리 장항마을로 옮아 새 터전을 닦고 家基를 세웠다. 후손들이 번성하여 주로 담양 곡성 등지에 세거
하여 살았는데 담양장항 문중과 곡성금반 문중의 후예들이 그 손들이다.
3자 생립(生立) 조는 관이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인데 향리 광양 부저리를 떠나 순창군 유등면 건곡(乾谷)에 이거(移居)하여 삶의 터전을 닦았다. 후손들이 이곳에 세거하여 자자일촌(子子一村)하며 번창하였는데, 이 순창건곡 문중을 주축으로 해서 뒤에 이곳에서 다시 전남 여천으로 옮아 일가를 이룬 여천용주 문중, 그리고 남원으로 나가 일가를 이룬 남원입암 문중의 자손들이 모두 생립 조의 후손들이다.
4자 언립(彦立) 조는 벼슬이 사헌부감찰에 올랐는데 인조 20년(1642, 임오)에 담양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 이 곳 담양군 금성면 월률리에 눌러 살게 되어 후손들이 인근 월산면 무정면 등지에 세거해 오고 있다. 담양신계 문중과 담양동강 문중의 후예들이 언립 조의 자손들이다.
끝으로 5자 귀립(貴立) 조는 그 묘소가 정읍군 고부면 두승산에 있는 것으로 막연히 전해지고 있을 뿐 그 구체적인 장소가 실전(失傳)되었을 뿐 아니라 또 귀립 조가 광양 향리에서 옮아 새로 뿌리를 내린 마을이 구체적으로 어느 마을인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그 후손들은 남원 군 주생면 정송 마을을 중심으로 남원군 대산면과 구례군 산동면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남원군 대산면 대곡리 입향조는 귀립 조의 손자인 준대(俊大; 19世) 조와 증손자인 두추(斗秋; 20世) 조다. 남원정송 문중의 후예들이 그 후손들이다
1) 참판공(參判公) 호립(好立) 조의 후예들
⑴ 내리 3대가 국난극복에 몸바쳤던 충절의 가문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나중에 진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곧 시련을 겪어봐야 그 사람의 지조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국난은 많은 충신열사들을 배출하였는가 하면 그들이 보통사람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전쟁이 일어나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가산을 털어 의곡(義穀)을 바치고 또 늙은 몸을 이끌고 싸움터로 달려갔던 종원 조나,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늙은 나이도 아랑곳하지 않고 과장(武科試驗場)으로 달려나갔던 득린 조, 병자호란에 포의로써 의병을 일으켜 서울을 향해 진군해갔던 호립 조, 이렇게 父(종원)·子(득린)·孫(호립) 3대가 충의를 분발하여 국난극복에 몸바쳤던 역사로 첨정공파의 가문사는 시작된다.
종원 조와 득린 조의 사적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호립 조는 천품(天稟)이 순후하고 지절(志節)이 강개하여 평생을 충효로써 스스로 힘쓰고 병서를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향당이 그 지략의 뛰어남을 칭찬하였다. 일찍 약관의 나이에 武科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부름을 얻지 못하였다.
1636년(인조14) 12월 청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 파죽지세로 대군을 몰아 서울로 직행하여 10일만에 서울에 당도해서 서울을 포위, 항복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항하여 조선은 화(和)·전(戰) 양면 책을 쓰면서 조정을 남한산성으로 옮겨 항전하지만 성이 포위 된지 45일만에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인조가 삼전도(三田渡; 松坡)에 나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겪고 만다. 청나라의 침입 사실이 전해지자 호남의 유림들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게 되는데, 이 때 호립 조는 운암(雲巖) 이흥발(李興勃; 1600-1673)의 척화(斥和) 격문을 보고 분격한 나머지 즉시 가장(家藏)해온 활과 화살을 싣고 의병청에 나가 척화를 부르짖으며 즉각 기병하여 적과 싸워 국난을 구할 것을 강경히 주장하니, 여러 義士들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당당한 절의가 진실로신재(新齋)의 자손이라 이를 만 하다" 하고 경앙하기를 마지않았다 한다. 이에 의병소에 머물며 여러 의사들로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서울을 향해 진군하던 중, 청주에서 조정이 淸兵에 항복하여 강화(講和)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 외부와 절연한 채 조용히 세상을 보내었다. 『승주군 향토지』에 기록된 호립 조의 사적은 이러하다.
字는 益之, 본관은 초계, 신재 山斗의 현손이다. 判官 得麟의 아들로 천성이 영민하고 지조와 절개가 강개하였으며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14) 운암 이흥발의 격문을 받아보고 분에 넘친 눈물을 흘리며 활을 메고 의 병청으로 뛰어들어가 討賊의 대책을 건의함으로 여러 義士들이 감탄하며 이르기를 "당당 한 절의는 가히 신재의 어진 자손이라 이를 만 하도다" 하였다.
청주로 진병하였다가 오히려 적에게 首都의 城下까지 침공을 당하고 講和를 약속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
<『昇州郡鄕土誌』(순천문화원, 1975) 341쪽>
같은 내용이 『昇州郡史』에도 기록되어 있고, 병자호란 당시 호남의 의사들이 의거한 사적을 기록한 <병자호란창의록(丙子胡亂倡義錄)>에도 이 같은 사실이 나타난다. ??? 요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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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호립 조의 나이 38세의 한창 장년이었고, 아버지 득린 조는 장군으로 군영에 있었다.
1645년(인조23, 순치2) 음서(蔭敍; 공신 또는 현직관원의 자손- 즉 3품 이상 고위관원, 이조·병조·사헌부·사간원·홍문관·선전관 등의 자제 - 에게 관직을 주어 관리로 임명하던 제도)로 종사랑(從仕郞)을 제수받고 무공랑(務功郞)을 거쳐 1646년(인조24, 순치3) 선무랑(宣務郞)을 제수 받았으나 실직(實職)에 나가지는 않았다. 뒤에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657년(효종9, 정유)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막(廬幕)을 짓고 시묘하여 효자의 도를 다하였다. 1659년 정부인(貞夫人) 마전(麻田) 차(車)씨를 사별하고 이듬해 1660년(현종1, 경자)에 세상을 떠나 부저리 선영에 부인과 함께 묻혔다. 슬하에 8자 우성(宇晟)·우희(宇熙)·우덕(宇德)·우인(宇仁)·우춘(宇春)·우의(宇義)·우기(宇奇)·우복(宇福)을 두었고 그 자손들이 또한 크게 번성하여 초계최씨의 문호를 크게 넓혔다.
장자 우성은 1618년(광해10, 무오)에 나 관이 통정대부인데 부저리에서 글 읽고 농사지으며 선영을 지켜 살았다. 그러나 이 마을은 산간 마을로 터가 좁고 농토가 적어 장구히 자손들이 생계를 붙여 살아가기에는 부족한 곳이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길이 문호를 보존하며 번영할 수 있는 터전을 물색하던 중, 인근 고을인 승주군 송광면 이읍(梨邑) 마을이 마을 터가 넓고 농토도 넓게 발달되어 있어 가히 자손들이 복록을 누리며 길이 살만한 터전이라 여겨, 이 마을로 옮아 살며 새로이 후손들의 삶의 터전을 닦았다. 이로써 한영 조이래 우성 조까지 7대 약 200년 가까이 世居해 오던 초계최씨의 광양 부저리 시대는 그 막이 내려지고 이 이읍 마을로 씨족의 중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이 이읍 마을은 부저리 선영과는 하룻 길 정도의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선영은 부저리에 그대로 둔 채 가족들만 이읍으로 옮은 것이었고 점차 자손들이 번성하여 세거함으로써 초계최씨 종가로서 확실한 지위를 갖게 된다. 이 이읍문중과 여기에서 뻗어나간 승주운용·승주장안·승주오봉·승주옥산·여천봉두·여천두모·여천우두·순창관전·곡성죽산·임실봉천갈담·여천소호·남해서상·순창죽전 문중의 일가들이 모두 우성 조의 후손들이다.
2자 우희 조는 1621년(광해13, 신유)에 광양 부저리에서 태어나 관은 통덕랑을 지냈고, 성가(成家) 후 승주군 별량면 금치라는 마을로 옮아 살았는데, 자손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지 않고 승주·여천·고흥 등지로 이주하여 각기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왔다. 승주덕치·승주미곡·여천안도·고흥화계·순천송학·완주안덕 문중의 일가들이 바로 우희 조의 후손들인데 그 중 고흥화계 문중이 가장 번성하였다.
3자 우덕 조는 1624년(인조2, 갑자)에 태어났고 관은 통덕랑 승문원 박사를 지냈는데 뒤에 통정대부 홍문관 직제학에 증직되었다. 중년(中年)에 전북 순창군 구림면 방화리에 옮아 살며 자손들의 삶의 터전을 닦아 자손들이 이에 세거(世居)하며 번성하였다. 또 우덕 조의 현손(玄孫) 가운데 시동(時同;22세) 조가 전남 여천군 화정면 여자리로 이거(移居)하여 그 자손들이 이곳에서 일가를 이루며 번성하였다. 순창방화·여천여자·순창대촌 문중의 일가들이 우덕 조의 후손들이다.
4자 우인 조는 1627년(인조5, 정묘)에 나 관은 의금부 도사를 지냈는데 뒤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한성부 좌윤에 증직되었다. 중년에 백씨 우덕 조와 함께 순창으로 옮아와 순창군 구림면 자양리에 가기(家基)를 세우고 터전을 닦아 후손들이 이에 세거하였다. 순창자양 문중의 자손이 그 후손들이다.
5자 우기 조는 1632년(인조10, 임신)에 나 관은 통덕랑을 지냈다. 성가(成家) 후 광양군 인덕면 동지리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자손들이 이곳에 세거하지 않고 여천군 소라면·화양면 등지로 옮아 살았다. 후손들이 번성하지 못해 일가가 많지 않은데, 광양 동지문중의 자손이 그 후손들이다.
6자 우복 조는 1633년(인조11, 계유)에 나 관은 직장(直長)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중년에 고흥의 여러 섬들을 유람하다가 나로도(羅老島)의 빼어난 경관에 심취해 광양 부저리에서 가솔들을 이끌고 지금의 외나로도(外羅老島) 외초리(外草里)에 들어와 정착하였는데 후손들이 이곳에 세거하여 크게 번성하였다. 한편 우복 조의 아드님 가운데 홍무(弘武; 19세) 조는 다시 섬을 나와 강진군 군동면 석교리로 옮아가 정주(定住)하였는데, 자손들이 이곳에 세거하여 또한 번성하였다. 또 홍무 조의 후손 가운데는 완도와 추자도로 옮아가 정착한 자손들도 있다. 고흥외초·강진석교·완도대문·추자도영흥 문중의 자손들이 모두 우복 조의 후손들이다.
7자 우춘 조는 1634년(인조12, 갑술)에 태어났고 관은 가선대부에 증직되었다. 성가(成家) 후 승주군 낙안면 용정동( ????)으로 옮아 살았는데, 자손들이 이곳에 세거하지는 않았다. 승주군 서면 죽청리, 승주읍 죽학리 등지에 자손들이 살고 있고 이곳 승주죽청 문중과 승주죽학 문중의 자손들이 그 후손들이다.
8자 우의 조는 1637년(인조15, 정축)에 나 중씨(仲氏) 우덕 조가 살고 있는 순창군 구림면 방화리로 가서 함께 살았으나, 그 자손들은 이곳에 정착하지 않고, 옥구·담양·화순 등지로 옮아가 살았다. 옥구구암·담양금월·화순대곡 문중의 일가들이 그 후손들이다.
⑵ 선영을 지켜온 우덕 조의 후예들
― 승주이읍 문중; 승주운용·승주장안·승주오봉·승주옥산·여천봉두·여천두모·여천우두·순창관전·곡성죽산·임실봉천갈담·여천소호·남해서상·순창죽전 문중
앞서 말한 것처럼 우성 조의 승주 이읍 이거(移居)는 초계최씨의 광양 부저리 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을 뜻한다. 한영 조 이래 우성조에 이르기까지 7대(한영-산두-병길-종원-득린-호립-우성) 약 200년(1460-1660)에 걸쳐 우리 씨족사의 뿌리이자 그 중심무대가 되어왔던 이 부저리 마을은 그러나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 뿐이요 넓은 평원도 유유히 흐르는 강도 양양히 드넓기만 한 바다도 이 마을과는 인연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그저 산자락이나 구릉지에 일군 밭뙈기들만 덕지덕지 붙어있는 전형적인 산간마을이다. 200여년을 우리의 종가가 이곳에 뿌리박고 살아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생활환경이 넉넉지 못한 마을이다. 때문에 우성조가 새로운 터전을 물색하여 이주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장자 우성 조는 1618년(광해10, 무오)에 나 관(官)이 통정대부인데 부저리에서 글 읽고 농사지으며 선영을 지켜 살았다. 그러나 이 마을은 산간 마을로 터가 좁고 농토가 적어 장구히 자손들이 생계를 붙여 살아가기에는 부족한 곳이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길이 문호를 보존하며 번영할 수 있는 터전을 물색하던 중, 인근 고을인 승주군 송광면 이읍(梨邑) 마을이 마을 터가 넓고 농토도 넓게 발달되어 있어 가히 자손들이 복록을 누리며 길이 살만한 터전이라 여겨, 이 마을로 옮아 살며 새로이 후손들의 삶의 터전을 닦았다. 이로써 한영 조이래 우성 조까지 7대 약 200년 가까이 世居해 오던 초계최씨의 광양 부저리 시대는 그 막이 내려지고 이 이읍 마을로 씨족의 중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이 이읍 마을은 부저리 선영과는 하룻 길 정도의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선영은 부저리에 그대로 둔 채 가족들만 이읍으로 옮은 것이었고 점차 자손들이 번성하여 세거함으로써 초계최씨 종가로서 확실한 지위를 갖게 된다. 이 이읍문중과 여기에서 뻗어나간 승주운용·승주장안·승주오봉·승주옥산·여천봉두·여천두모·여천우두·순창관전·곡성죽산·임실봉천갈담·여천소호·남해서상·순창죽전 문중의 일가들이 모두 우성 조의 후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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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신재 조의 부조묘를 이곳에 세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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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은 관이 선무랑을 거쳐 통정대부에 올랐으나 실직(實職)에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①승주이읍의 宇晟公 종손 문중
②승주장안의 命宣公 후손 문중
③주오봉의 命益公 후손 문중
④승주구표의 祥顯公 후손 문중
⑤여천두모의 致完公 후손 문중
⑥여천우두의 祥南公 후손 문중
⑦순창관전의 祥彩公 후손 문중
⑧곡성죽산의 瑞武公 후손 문중
⑨임실갈담의 祥杓公 후손 문중
⑩남해서상의 祥良公 후손 문중
⑪순창죽전의 洪武公 후손 문중
⑵宇熙公系
①승주미곡의 宇熙公 종손 문중 ②여천안도의 祥會公 후손 문중
③고흥화계의 祥粲公 후손 문중 ④순천송학의 成武公 후손 문중
⑤완주안덕의 彦複公 후손 문중
⑶宇德公系
①순창방화의 宇德公 종손 문중 ②여천여자의 時同公 후손 문중
③남원방동의 祥準公 후손 문중
⑷宇仁公系 ― 순창상리 문중
⑸宇奇公系 ― 광양동지 문중
⑹宇福公系
①고흥외초의 宇福公 종손 문중 ②강진석교의 弘武公 후손 문중
③추자도 영흥의 命 公 후손 문중
⑺宇春公系 ― 승주죽청 문중
⑻宇義公系
①순창금창의 宇義公 종손 문중 ②화순대곡의 康武公 후손 문중
2)通德郞 景立公의 후예들
⑴담양봉서의 景立公 종손 문중
⑵곡성금반의 命彦公 후손 문중
3)僉知中樞府事 生立公의 후예들
⑴순창건곡의 生立公 종손 문중
⑵여천용주의 尙榮公 후손 문중
⑶남원입암의 蘭重公 후손 문중
4)司憲府監察 彦立公의 후예들 ― 담양신계 문중
5)貴立公의 후예들 ― 남원정송 문중
3. 海南 梨津에 家基를 세운 龍雲公 慶麟 조 ― 龍雲公派
1)郡守 煜立公의 후예들
⑴宇松公系
①청산도당리의 宇松公 종손 문중 ②신지도가인의 智義公 후손 문중
③신지도동고의 命君公 후손 문중 ④청산여서도의 孝義公 후손 문중
⑤완도생일도의 晟武公 후손 문중 ⑥장흥가학의 命術公 후손 문중
⑦고흥신양의 致龍公 후손 문중 ⑧여천초도의 尙泰公 후손 문중
⑨여천덕촌의 貞義公 후손 문중 ⑩여천서도의 一貴公 후손 문중
⑪승주선월의 命學公 후손 문중
2)淸立公의 후예들
⑴宇銀公系
①소안도가학의 宇銀公 종손 문중 ②완도대신의 命輔公 후손 문중 ③제주도서귀포의 永武公 후손 문중
⑵宇益公系
①노화도천구의 宇益公 종손 문중 ②완도 모도의 命曦公 후손 문중
⑶宇蘭公系
①보길도중통의 宇蘭公 후손 문중 ②노화도당산의 命南公 후손 문중
3)弘立公의 후예들
①순창외령의 東儉公 종손 문중 ②정읍화죽의 武立公 후손 문중
③옥구취산의 東錫公 후손 문중
4. 長城 大興에 家基를 세운 監察公 錫麟 조와 그 후예들 ― 監察公派
1)泰立公의 후예들 ― 장성대흥 문중
2)錫立公의 후예들 ― 옥구관산 문중
3)淵立公의 후예들 ― 화순평지 문중
5. 淳昌 將發에 家基를 세운 在道公 正麟 조의 후예들 ― 在道公派
6. 海南 馬峰에 家基를 세운 錦岡公 成麟 조의 후예들 ― 錦岡公派
7. 南原 五龍에 家基를 세운 禦侮公 聖麟 조의 후예들 ― 禦侮公派
8. 井邑 黃土에 家基를 세운 進士公 麟 조의 후예들 ― 進士公派
9. 정유왜란 중 남원성 싸움에서 殉節한 琦龍 조의 후예들
― 殉節公派
1)순절공파의 기원
순절공파의 파조(派祖)는 기룡(琦龍) 조다. 그러나 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순절공파는 종형(宗亨) 조에서 분파되고 있으므로 종형 조를 파조로 세우는 것이 타당하지만 을미보(1955년) 이후 10대 종파를 정할 때 그 분파를 대체로 16세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기룡 조를 파조로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순절공파의 기원은 당연히 종형 조에서부터 살펴야 한다. 이를 살피기 위해 그 세계(世系)를 다시 정리해 보면 순절공파는 신재 조의 차자(次子) 정길 계열에 속하며 종형 조는 정길 조의 장자이고 순절공이 또 종형 조의 장자이기 때문에 순절공파는 정길 조의 종손계이다. 즉,
최산두 +-- 병길
+-- 정길 - +-- 종형 --- 기룡(순절공) ─ +-- 인흥 … ─┐ 순절공파
+-- 종국 …… 통정공파 +-- 인선 … ─┘
+-- 종수 …… 통덕랑공파
(1)사헌부 지평 정길(丁吉) 조의 순창 입향(入鄕)
그런데 족보의 기록에는 정길 조의 묘나 종형 조의 묘가 실전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 삶을 추적할 단서조차 나타나 있지 않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지만 현재 광양 부저리 도선산에 있는 정길 조의 묘는 을축보(1925년) 이후에 그 종손계열인 순절공파 부안 증동 문중에서 이곳 부저리가 공이 태어나 성장했던 터전이고 조부모이신 판윤공 내외와 부모이신 문절공 내외, 형님이신 어모공 내외가 다 이곳에 모셔져 있기 때문에 이 도선산 선영 아래에다 공의 신주(神主)를 묻고 묘를 축성(築成)한 후 비를 세운 것이다. 이로써 순절공파의 역사는 그 시작부터가 미궁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순절공파의 형성과정을 더듬어 보기 위해서는 정길 조와 종형 조의 생활근거지를 추적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길(1519-1577) 조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벼슬살이를 하기 전에는 출생지인 광양 부저리에서 살았을 것이지만 벼슬에 나가 향리를 떠난 뒤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지 않고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이나 순창군 지역에 눌러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따름이다. 즉 정읍 태인 설은 앞서 말한 바 신해보와 을축보에 "墓在泰仁未詳(묘는 태인에 있는데 자세하지 않다)"이라 한 기록에 근거 한 것이지만, 정길 조가 왜 태인에 거주하게 되었는지를 뒷받침해 줄만한 어떤 단서도 남아 있지를 않기 때문에 믿기 어렵다.
또 순창군에 살았을 가능성은 정길 조의 가장 가까운 혈손인 증손 仁信 조의 묘가 순창군 팔덕면 태자리에 있었던 사실에서 유추된 것인데 이것을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2001년 한식일에 담양 덕성문중에서는 순창 태자리에 있는 인신(1597-1665) 조의 묘를 담양군 금성면 덕성리 선산으로 이장하기 위해 파묘를 한 일이 있다. 그런데 그 분묘의 규모가 보통의 묘보다 클 뿐 아니라 가로세로 50㎝×200㎝에 이르는 대형목관을 썼는데 관을 만든 송판의 두께가 5㎝ 정도나 되고 목관 주위를 6-7㎝ 정도 두께로 석회를 부어 견고하게 묘를 축조한 것이었다. 인신 조가 卒한 해가 1665년인데 아직까지 목관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을 뿐 아니라 관속에 있는 유골도 두개골과 팔 다리 뼈 등 50% 정도가 남아 있어 이를 수습하여 이장을 하였다고 한다. 덕성 문중에서는 수 백년 동안을 자손들이 대대로 이 묘를 지켜 시제를 지내왔는데 금번 이장을 한 것은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하여 시제를 받들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11대손인 종수(鍾洙)씨가 앞장을 서서 파묘를 해왔다 한다.
이를 근거로 유추해보면 당시 仁信 조의 집안은 그 지역에서 상당한 정도의 신분과 부를 누리고 있었던 토반(土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인신 조의 아버지 순절공 기룡(1573-1597) 조가 25세의 나이로 정유재란 때 남원성 싸움에서 순절한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리고 인신 조는 이 정유년 3월에 태어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지통(至痛)을 안고 자라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인신 조의 선대는 적어도 2·3대 이상을 이곳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본다면 인신 조의 증조가 되는 정길 조가 벼슬살이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낼 터전으로 선택한 곳은 순창 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비교적 넓은 농토가 있는 이 태자리였거나 이 인근 마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마을에서 광양 부저리까지는 전남 구례를 거쳐 직로(直路)로 간다면 이틀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추론을 좀더 확대해 본다면 이렇게 정길 조가 이곳에 정착한 후 아드님이신 종형(1553-1618) 조도 부친의 가산을 이어받아 이곳에 世居하여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종형 조의 아드님이신 기룡 조가 1597년 정유재란 때 이곳에서 의병을 모아 관군과 합세하여 왜적에 맞서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가문적 기반이 없었다면 기룡 조가 25세의 청년으로서 국난을 당해 의병을 규합하여 전쟁에 나갈 수 있었겠는가. 이 사실로 미루어 당시 기룡 조는 선대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고을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人望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정길 조는 기묘명현이신 최신재 선생의 아드님이요, 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에 나가 승문원 저작, 홍문관 수찬, 사간원 헌납, 사헌부 장령과 같은 조정의 현직을 두루 역임하고 전야(田野)로 물러 나온 선비로서 고을 사람들의 경애를 한 몸에 받았을 것이요, 또 그 아드님이신 종형 조도 학문이 넉넉하여 벼슬이 통덕랑에 올랐던 만큼 법도 높은 반가(班家)로써의 기반을 훌륭히 닦아 고을사람들의 기림을 받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기룡 조의 人望의 기반은 정길 조의 순창 태자 마을 정착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정길·종형 조의 2대에 걸친 이 같은 세거(世居)와 적덕(積德)이 있었기 때문에 기룡 조가 의병을 일으켜 충절을 다할 수 있었고, 또 公이 남원성 싸움에서 순국하신 뒤 그 부인이신 순천박씨(1577-1614)가 청상(靑孀)으로 이 마을에서 시부모께 의지하여 당시 남편이 남기고 간 두 아들 ― 이 때 장자인 仁興 공은 세 살이었고 차자인 仁信 공은 태어난 지 5개월밖에 안된 핏덩이나 다름없는 갓난애였다 ― 을 길러내 문호를 보전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001년 현재 태자리는 인근 광암리와 통합되어 행정구역상으로는 팔덕면 광암리에 속해 있다.
(2)순절공파·통정공파·통덕랑공파의 분파
정길 조에게는 종형(宗亨).종국(宗國).종수(宗壽) 이렇게 세 아드님이 있었는데 종형 조는 앞에서 추론한 바와 같이 부친의 가업을 계승하여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태자리(현, 광암리)에 세거(世居)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아드님인 기룡(琦龍) 조가 정유재란 때 포의(布衣)로써 이곳에서 기병하여 남원성 싸움에서 순국함으로써 그 후손들이 '순절공파'라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 둘째 아드님인 종국 조는 경상남도 남해군 서면의 갯마을인 염해리(鹽海里)에 정착하여 가기(家基)를 세움으로써 그 후손들이 '통정공파'라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또 종수 조는 북쪽으로 옮아가 전라북도 임실군 갈재(葛峙: 임실군 덕치면과 순창군 인계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큰 재로 전주·임실 등지에서 순창으로 들어오는 관문이 되고 있다. 최고봉은 545m의 頭流峰이다) 기슭의 덕치면 암치리(巖峙里: 현재의 법정 마을 名은 장암리로, 장산·신촌·암치 3개 마을이 합하여 장암리를 이룬다)에 정착하여 살았고, 후손들이 인근 마을인 순창군 인계면 탑리(塔里)·심초리(深草里) 등지에 분포하여 수 백년을 살아왔다. 또 그 후손들 가운데 일파는 일찍이 전주·완주 지역으로 옮아 살아왔는데, 이러한 종수 조의 후손들을 '통덕랑공파'라 한다.
(3)순절공파 문호를 보전한 통덕랑 종형(宗亨) 조
족보의 기록에 의하면 종형 조는 명종 8년(癸丑, 1553)에 태어났다. 이때 아버지 정길 조의 나이는 35세였다. 정길 조는 18세(丙申, 1536)에 과거에 급제(국조방목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과는 아니고 생원시나 진사시 쯤 되었던 듯 하다)하였으나 이 해에 신재 조께서 돌아가시어 부친상을 입고 삼년상을 치룬 후 내직(內職; 京官職, 서울에 있는 각 관청의 직)에 부름을 받아 24세(壬寅, 1542)에 승문원 저작을 배명하였고, 이어 26세(甲辰,1544)에 홍문관 수찬, 28세(丙午,1546)에 사간원 헌납을 거쳐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는데 이후 관직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인종·명종의 교체기에 을사사화(1545년)를 비롯하여 숱한 옥사(獄事)들을 목격하면서 이에 절망하여,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 전야(田野)로 돌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 러한 사실로 미루어 본다면 정길 조가 순창 태자리에 입도(入都)한 것은 30세(1548년) 전·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향리인 광양 부저리에서 백씨(伯氏) 병길 조와 작별하고 이틀 거리나 떨어져 있는 순창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입도한 정길 조는 이곳에서 治産을 근실히 하고 학문에 힘쓰면서 士林들과 빈번히 교유하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다가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종형 조는 이곳 태자리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둘째인 종국(1555, 乙卯) 조나 셋째인 종수(1557,丁巳) 조도 이곳에서 생장(生長)하여 후에 경남 남해, 전북 임실에 입도하여 각각 자손들의 삶의 터전을 닦았을 것이다.
종형 조는 부친의 훈도를 받아 학문에 힘쓰며 치산을 부지런히 하여 생활의 기반을 닦아나갔다. 21세 때인 1573년엔 독자 기룡 공을 두었고 1577년엔 부친상을 만났다. 1597년 정유왜란에서 독자 기룡 공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장에 나가 싸우다 남원성 싸움에서 순절하니 청상과부가 된 자부 순천박씨와 인흥·인신 두 유아(遺兒)를 보호하여 문호를 보전하였다. 관은 통덕랑에 제수되었는데 실직에 나갔었는 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1618년에 졸하니 향년 66세였다.
2)순절공 기룡(琦龍) 조의 정유왜란 남원성 전투 순국(殉國)
(1)기룡 조의 순국과 선무원종공신 녹훈
기룡(1573-1597) 조는 어려서부터 기개가 높고 담략이 뛰어났으며 학문에도 힘써 경서에 두루 통달하였다. 항상 '대장부' 3자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항상 말하기를 "집에 들어서는 경서를 읽고, 나가서는 창을 잡아, 하늘이 나를 낸 뜻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 왜적이 재침하여 삼남을 유린하기에 이르자 공은 의병을 일으켜 여러 동지들을 규합하여 전장으로 달려가 남원성 싸움에 참전하게 된다. 여기서 잠깐 당시 전쟁상황을 <선조실록>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30만 대병으로 침공해와 선조 임금이 의주까지 몽진하는 치욕을 겪고 전 국토가 왜군에게 유린되는 참상을 겪었으나 다행히 전라도 서남부 지역은 이순신 장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어 왜병의 진로에서 비켜 있음으로 해서 이듬해 7월 왜군이 물러갈 때까지 큰 피해 없이 보낼 수 가 있었다. 그러나 1592년 정유년에 왜군이 다시 14만 대군으로 쳐들어 왔을 때는 당시 이순신 장군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어 왜군이 쉽게 제해권을 장악, 남해안 곳곳으로 상륙하여 북상해 옴으로써 영호남 전역이 전쟁터로 변하였다. 적은 7월 1일 칠천양 해전에서 원균의 수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고 그 여세를 몰아 주력부대인 소서행장(小西行長) 군과 가등청정(加藤淸正) 군이 전라도를 완전 장악하기 위해 남원을 치기로 하고 대군을 몰아 진격해와 8월 1일에는 가등청정군이 함양을 함락시키고 그 12일에는 소서행장이 거느린 5만 6천의 대군(大軍)이 남원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조정에서는 전라도의 요충지인 남원을 방어함으로써 적의 북상을 저지할 전략으로 명나라 구원병을 남원으로 내려보내 결진(結陣)케 하는데 이때 명나라 장수는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으로 5월 21일 명군(明軍) 3000명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게 된다. 당시 남원부사는 임현(任鉉)으로 명군을 맞아 군관민이 일치단결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게 되는데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으로 하여금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응원케 하였다. 8월 12일 왜군이 5만 6천의 대병으로 남원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공격해오자 성안에서는 명나라 군사 3천명과 남원 군민(郡民) 1만여명이 이에 맞서 결사적으로 싸웠고 또 이복남 병사(兵使)의 응원군 1천여명도 남원에 이르러 성을 구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4천명의 군사로 5만6천명의 적군을 막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4일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마침내 성안에 있던 군민 1만여명과 명군 3천명 응원군 1천명이 성의 함락과 함께 모두 옥쇄(玉碎)하였으니 이 남원성 전투는 정유재란 전사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전라병사 이복남도 방어사 오응정도 남원부사 임현도 모두 전사하였고 오직 명장(明將) 양원만 몸에 총탄을 맞은 채 10여명의 군사와 함께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후에 본국에 소환되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참수되고 그 머리가 조선에 조리돌리었다. 선조실록은 이 남원성 전투의 최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적이 남원을 함락시키니, 총병(總兵) 양원(楊元)은 도망하여 돌아왔고, 총병 중군(總 兵中軍) 이신방(李新芳), 천총(千總) 장표(蔣表)·모승선(毛承先), 접반사(接伴使) 정 기원(鄭期遠),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 방어사(防禦史) 오응정(吳應井), 조방장(助 防將) 김경로(金敬老), 별장(別將) 신호(申浩), 부사(府使) 임현(任鉉), 판관(判官) 이 덕회(李德恢),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 등이 모두 죽었다.
처음에 적장 평행장(平行長)과 평의지(平義智) 등이 군사를 나누어 진격해 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이때 양원과 이신방은 동문에 있고 천총 장표는 남문에 있고, 모승선은 서문에 있고 이복남은 북문에 있으면서 서로 여러 날 동안 버티었다. 적병이 나무와 풀로 참호를 메우고 밤을 틈타 육박해 올라와 어지러이 탄환을 쏘아대니, 성안 이 크게 혼란하였다. 이에 양원은 휘하 몇 사람과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겨우 죽음을 면하였고, 중국 군사와 우리 군사는 모두 죽었다. 이신방·장표·모승선·정기원·이복 남·오응정·김경로·신호·임현·이덕회·이원춘도 모두 전사하였다. 남원이 함락되자 전주(全州) 이북이 한꺼번에 와해되어 어찌 해볼 수가 없게 되었다. 후에 중국에서는 양원을 죽여 우리 나라에 조리돌리었다.
<선조실록; 선조30년 9월1일>
물론 이 남원성 전투에 참전한 무명(無名)의 의사(義士) 순절공 기룡 조도 성의 함락과 운명을 같이하여 그 고귀한 목숨을 나라에 바쳐 충의를 다하였던 것이다. 후에 조정에서는 공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하였다. 그러나 공신에 녹훈된 이상 응당 추증(追贈)이 내려졌겠지만 녹권과 교지가 소실되어 추증된 관직은 알 수가 없다.
공의 8세손 정택(禎澤,1795-1869) 공이 지은 <순절공 사실(殉節公事實)>에 의하면,
정유년에 왜적이 재침하자 의병을 일으켜 동지들을 규합해 전장에 나가 남원성 싸움 에서 여러 차례 죽음을 무릅써 싸워 많은 적병을 베고 공을 세웠다
전장에 나가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글로써 그 결의를 밝히기를 "오호라 천지에 이보다 더 큰 변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개의 무리와 같은 오랑캐들이 중원(中原)을 어지럽혀 해 내(海內)를 들끓게 하고, 2천만 백성이 병란에 곤(困)하며, 삼천리 예의지방(禮儀之邦) 이 도탄(塗炭)에 들었으니, 오늘과 같은 일이 또 어찌 있겠는가. 무릇 내 당당히 의로 운 선비로서 임금을 위하여 절(節)을 세우고, 백성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백 겹의 칼날 앞에 돌진하여 반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창칼을 베기를 즐거운 땅같이 하리니 설 사 몸과 목숨이 구학(溝壑) 가운데 떨어진다 한들 어찌 적과 더불어 하늘을 같이 할 수 있으랴. 혈심으로 힘을 다해 섬멸한 후 그칠 따름이다. 또 날로 나아가 용력을 다하여 적과 싸우다 군(軍)이 고립되고 세(勢)가 다하면 스스로 헤아려 크게 한소리 외치고 마 칠 뿐이다" 하였다. 금계 노인(錦溪魯認)으로 더불어 한 날에 남원에서 순절하였다.
뒤에 임금께서 듣고 특별히 상을 내리고 탄복하시어 그 아들 인흥에게 한산군수를 제 수하시고, 그 손 근남에게 성균관 진사를 제수하시었다.
<순절공사실(殉節公事實)> 중에서
또 <부안군지(扶安郡誌;1991)>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崔琦龍, 草溪人, 신재의 증손, 효성이 지극했고 또한 담략이 있었다. 1597년(선조30년) 에 정유왜란이 일어나니 동지를 규합하여 이곳저곳 싸움터에 나가 전공을 세웠다. 그러다 가 남원의 싸움터에 참여하여 많은 적병을 참획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려오는 적군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입으로 시 한 수를 부르고 마침내 전사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그 에게 선무원종공신에 녹훈하였다.
그 밖에도 공의 이름이 <湖南三綱錄>의 선조조 충의편에 올라있다.
3) 문중의 형성과 씨족사의 전개
(1)신사년 화재와 문첩(文牒)의 소실
<순절공사실>에 의하면 "신사년(辛巳年)에 화재를 당해 그 교지와 녹권(錄券)·구첩(舊牒)들이 모두 소실되어 그 정확한 사실을 상고할 길이 없어 오직 집안 어른들로부터 전해 오는 말을 들어 이처럼 기록한다" 하고, 또 "보첩 가운데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6자를 기록하였으나 생졸일월(生卒日月)을 증거할 길이 없어 기록하지 못하였다"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순절공사실>을 기록한 사람은 보첩(乙未譜:1955) 순절공 기사 가운데 공의 8세손 정택(禎澤) 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집안에 화재가 났던 신사년이 어느 해인가를 추적해보면, 우선 '신사년'이란 해를 공이 기억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화재가 공의 대 또는 그 바로 선대에 일어난 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택 조는 1795년에 나서 1869년에 졸하였으니, 이 화재는 1821년 신사년이거나 또는 1761년 신사년 중 어느 하나일 것이다. 이것을 또 정택 조의 가족사와 관련지어 유추해 본다면 정택 조의 아버지는 학성당 처행(處行) 조인데,1766년(영조42, 병술)에 나시어 정읍 신촌리에서 살다가, 만년에 가산을 정리하여 부안 변산 산내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시서(詩書)에 잠심하여 여생을 보내시다 1835년(현종1,을미)에 돌아가시었다. 여기서 학성당께서 정읍 신촌에서 변산 산내로 이사하게 된 계기를 화재로 가옥이 소실되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야 할 필요 때문으로 본다면 그 해는 1821년 즉 학성당의 나이 56세, 정택 조의 나이 27세의 일로 볼 수 있다. 어떻든 이 신사년의 화재로 순절공과 관련된 문헌들이 모두 소실되어 버림으로써 그 증직과 그 아드님이신 인흥공의 관직생활 등을 상고할 길이 막연하게 되었다.
(2)전쟁미망인과 두 아들
― 효열부인 순천박씨와 군수공 인흥 조·가선공 인신 조
<순절공사실>은 순절공의 생졸일월을 상고할 길이 없어 보첩 가운데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6자만 기록하였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보첩>은 이 사실의 기록자인 정택 조의 생애와 관련시켜 본다면 정택 조가 1869년에 몰(沒)하였으니 1871년에 간행된 최초 보(譜)인 신미보(辛未譜)를 말하는 것이고, 그 쓰여진 연대는 1868년에서 1869년 죽기 전까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세 번 째 보인 신해보(1911년)는 순절공의 부인인 순천박씨의 생몰년대를 정축년인 1577년에 나서 갑인년인 1614년 11월 13일에 죽은 것으로 확인해 놓고 있다. 이 연대를 가지고 기룡 조와 그 두 아드님의 생년을 유추해 본다면 기룡 조가 순절한 정유년(1597년)에 박씨부인은 21세가 되기 때문에 두 아드님의 나이는 장자가 많아야 3살쯤 되었을 것이고 터울을 2살쯤으로 본다면 차자는 1살이니 이 해에 갓 낳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남편인 기룡 조의 생년도 당시의 혼인 풍습이 대체로 부부간의 나이 차를 5년 이상 두지 않기 때문에 순절 당시 25세 안팎쯤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최근 기사보(1989)에서 3부자의 생년을 "기룡 조 계유생(1573년)", "인흥 조 을미생(1595년)", "인신 조 정유(1597년) 3월 12일생"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간의 족보에서 보이고 있는 여러 서로 다른 기록들을 종합해서 내린 상당한 타당성을 갖는 결론이라고 생각된다.
어떻든 기룡 조는 인흥(仁興)·인신(仁信)두 아드님을 두었는데, 순절 당시 인흥 공은 3살이었고 인신 공은 이제 갓 태어나 핏덩이나 다름없는 5개월 된 젖먹이였다. 그러니 이 두 유아(遺兒)를 보존하여 문호를 잇게 할 책임은 고스란히 미망인 순천박씨의 몫이었다. 이에 순천박씨(1577-1614)는 시부모인 통덕랑 종형 조 내외에게 의지하여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며, 강보(襁褓)의 두 유아를 지성으로 교양(敎養)하여 훌륭히 성취시켜, 마침내 장자인 인흥 공은 군수에 나가고 차자인 인신 공은 가선대부에 증직되는 영화가 있게 하여 남편의 문호를 빛나게 하였으니, 오늘날 순절공파가 있게 됨이 다 박씨부인의 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참으로 박씨부인은 청상(靑孀)으로 일생을 살면서 남편에게는 절을 지켰고, 두 아들에게는 정성을 다하였으며, 시부모께는 효성을 다하였으니, 남편에게는 열부요 두 아들에게는 현모요 시부모께는 효부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인흥(1595 - ?) 조와 인신(1597-1665) 조는 그 출생지인 순창군 팔덕면 태자리에서 성장하며 조부 통덕공의 훈도를 받아 학문에 정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뒤에 인흥 조는 순절공의 음직(蔭職)으로 한산군수에 나가게 되어 향리를 떠나게 되는데 교지가 남아 있지를 않아 그 정확한 해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순절공사실>에 의하면 "뒤에 임금께서 (기룡 공의 순절 사실을) 듣고 특별히 상을 내리고 그 아들 인흥에게 한산군수를 제수하시고, 그 손 근남에게 성균관 진사를 제수하시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흥 조가 한산군수에 나간 때는 적어도 그 아들 근남(1614-1666) 조가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족보에는 근남 조가 성균관 진사에 합격한 해를 인조 임진년으로 기록해 놓고 있으나 인조대에는 임진년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기록은 신뢰할 수 가 없다. 또 인조이후의 임진년으로 본다 해도 이 해는 효종 3년 임진년(1652)이 되니, 당시 선무원종공신 녹훈(錄勳)이 선조 38년인 1605년에 이루어진 것에 비추어보면, 시차가 무려 50년 가까이 벌어지고 있는 데다, 이 해에 있었던 진사시와 생원시의 사마방목(司馬榜目)에도 근남 조의 이름이 올라있지 않기 때문에 역시 신뢰할 수 없다. 사실 근남 조의 진사시 합격 사실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사마방목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즉 근남 조가 17세가 되는 1630년 이후로부터 졸년인 1666년까지의 사마방목에 그 이름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족보의 성균관 진사 기록은 음서(蔭敍)일 가능성이 높으며 또 그렇게 본다면 근남 조가 성균관진사를 제수받은 것은 17세 이후 즉 1630년 이후가 될 것이니, 결국 인흥 조가 한산군수에 나간 것은 1630년 이후의 일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임진·정유왜란 후 국난에 공을 세운 공신들에 대한 녹훈은 전쟁이 끝난 8년 뒤인 선조37년과 38년(1605)에 가서야 공적 심사절차가 끝나 대규모 녹훈이 이루어지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始終)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 공신(扈聖功臣)이라 하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들은 선무 공신(宣武功臣)이라 하여, 선무공신 18명·선무원종공신 9,060명·호성공신 86명·호성원종공신2,475명 도합 11,639명에 대한 녹훈(錄勳)과 포증(褒贈)이 행해졌다. 또 선조 38년 9월 21일에는 "공신의 아들·사위 등에게 재능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여 실직(失職)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임금의 전교가 내려졌다.
순절공이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된 해가 어느 해인지는 녹권이 소실되어 알 길이 없다. -----------------------------( 녹권 확인 要 )------ 선조38년 4월 16일에 선무원종공신 9060명에게 내린 녹권에 공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까지 남원성에서 전몰한 의사(義士)들에 대한 공적심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실록> 가운데는 이 공신책록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추가 녹훈이 그 가족들의 청원에 의해 여러 차례 거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8년 뒤인 광해군 5년(1613)에도 공신록에 추록(追錄)을 청하는 상소가 오르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순절공에게 '선무원종공신'의 녹권이 내려진 것은 그 포증이 행해진 선조38년 보다 뒤의 일이었고, 당시 인흥(仁興) 공은 아직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선조 38년 인흥 조는 11살이었다―, 관직의 제수가 미루어졌다가 1630년 36세 이후에 가서야 한산군수에 제수되어 실직(實職)에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인흥공의 묘소가 실전되고 신묘보(1871)에 단지 "묘는 태인에 있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墓在泰仁 未詳)"이라 기록된 것을 보면 인흥공은 한산군수를 마치고 향리인 순창 태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정읍 태인 어느 마을인가에 옮겨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비해 인신 조는 향리에 남아 선대의 가업을 계승하여 治産과 학문에 힘써 상당한 명망과 부(富)를 누리며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최근 확인된 인신공 묘의 규모가 이를 잘 반증해 주고 있다.
(3)각 문중의 형성
①인흥 조의 후손들
인흥 조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36세 때인 1630년을 전후해서 4대째 살아오던 순창 태자마을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오래 갈망해 왔을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벼슬살이를 얼마나 했는지는 교지가 모두 소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알 길이 없고 또 졸년까지도 전하지 않아 이후 그 생애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전무한 실정이다. 부인 남원양씨 또한 생졸년대는 물론 그 묘와 부친의 휘·관직 등이 모두 전하지 않아 그 삶을 파악할 길이 없다.
인흥 조의 자손들은 상당히 번성하였는데 일정한 마을에 세거(世居)하며 자자일촌(子子一村)을 이루어 집단으로 살기보다는 이 마을 저 마을에 흩어져 살았으며 또 대마다 그 터전을 옮기는 일이 잦았다. 이 때문에 세계(世系)가 멀어지게 되면 자연 먼 선대의 묘소를 잃어버릴 위험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인흥 조의 후손들은 원조(遠祖)로부터 파조(派祖) 그리고 인흥 조의 아드님인 진사공 근남 조에 이르기까지, 즉 "장령공 정길 조 - 통덕공 종형 조 - (派祖) 순절공 기룡 조 - 군수공 인흥 조 - 진사공 근남 조"의 5대에 이르는 묘소를 실전하는 뼈아픈 교훈을 가슴속 깊이 새겨야 했다. 이러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후대에 이 인흥 조의 후손들이 족보간행에 적극 나서고 초계최씨 대종회 건설에도 열성적이어서 최초 보(譜)인 신미보에서부터 모든 대동보 편찬에 적극 참여하며, 두 차례(相萬 씨와 相文 씨)나 대종회장을 배출하면서 씨족사의전면에 서서 활발히 일해오고 있다.
순절공의 후손들은 묘소를 실전한 선조들에 대해 원조(遠祖)인 장령공 정길 조의 묘는 전술한 바와 같이 도선산에다 신주를 모셔 묘를 축성하였고, 그 이후 종형 조 이하 근남 조까지 4대는 1950년에 순절공 11대손 동현(東鉉)씨가 중심이 되어 정읍 내장산 서래봉 기슭에 선산을 마련하고 이곳에다 각각 단비(壇碑)를 세워 시제를 지내오고 있다.
이 인흥 조의 후손들을 혈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그 친소관계를 따라 몇 계열로 나누어 보면 우선 인흥 조는 근남(謹南)·근선(謹宣) 형제를 두었는데 이 가운데 장자손인 근남 조의 후손들이 특히 번성하였다. 이 근남 조는 수봉(秀鳳)·천봉(天鳳)·준봉(俊鳳) 삼 형제를 두었고 그 중 장자인 수봉(秀鳳) 공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였는데, 수봉 조는 聖望·夢望·東望 3형제를 두었다. 그런데 이 삼형제 가운데도 특히 둘째 집인 몽망 공의 자손들이 가장 번성하였고, 장자손인 성망 공의 손은 6대를 독자로 내려와 자손이 매우 귀하고 세(勢)가 미(微)하여 순절공의 종가(宗家)로서 문중사를 주도해 나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종손인 종기(鍾基; 순절공 13세손)씨가 고창군 흥덕면 오정리에 살고 있다. 다음 수봉 조의 자손 가운데 가장 크게 번창한 둘째 집 몽망 공의 자손들은, 그 선대로부터 "정읍태인-순창군 쌍치면 시산리-담양군 용면 청흥리-정읍군 정주읍 초산리-부안군 변산면 중계리-부안군 동진면 증동리"로 옮아 살며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최종 부안 증동에서 여러 대를 세거하여 하나의 집성촌을 형성하였으므로 이들을 '부안 증동(扶安甑東) 문중'(인흥공 후손 문중)이라 칭하기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 종손가인 성망 공의 자손들도 포함시키기로 한다. 사실 수봉 조의 자손들 즉 성망·몽망·동망 조의 후손들은 일가애와 숭조정신이 남달라서 일찍부터 함께 화수회(花樹會)를 조직하여 종토(宗土)를 마련하고 서로 화목하면서 선조들의 제사를 받들어 오고 있어, 문중을 나누는 것이 부적절할 수도 있지만, 문중의 규모가 크고 세거지나 자손들이 살고 있는 지역적 분포가 달라 편의상 동망 공의 자손들을 떼어 따로 문중을 설정하여 그 역사를 서술해 두고자 한다. 이로써 부안증동 문중은 종가가 자리잡고 있는 문중으로서 명실상부한 순절공파의 종문(宗門)이 되는 셈이다. 또 여기서 따로 분파 된 셋째 집 동망 공의 자손들도 자못 번성하였는데 그들은 순창군 쌍치면 시산리에 근원을 두고(동망 공의 묘소가 여기에 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살면서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현재 시산리에는 선영과 종산(宗山)·위토(位土)만 있고 자손들은 살고 있지 않으며, 자손들은 정읍시와 광주·서울·부안군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특히 정읍시 내장동 사암리(士巖里; 현재의 행정단위 명칭은 부전리 사암부락이다)에 시산리를 떠나온 자손들이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여러 대를 이곳에서 세거하다가 또 여러 지역으로 분산 이거(移居)하였으므로 이들을 '정읍 내장(井邑內藏) 문중'(동망공 후손 문중)이라 칭하기로 한다. 현재 정읍시는 정주시와 정읍군이 통합되어 한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다.
한편 근남 조의 둘째 아드님인 천봉(天鳳) 공의 손들은 신미보로부터 족보에 참여해왔는데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고 여러 대를 독자로 명맥을 유지해와 을미보(1955년)시에는 4-5 가구 정도가 전북 태인면 서재리에 사는 것으로 수단(收單) 되었으나 이후 대종회와 연락이 끊겨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을미보에 수단된 세계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또 근남 조의 셋째 아드님인 준봉(俊鳳) 조의 자손들은 순창군 쌍치면 강성산에 선산을 두고 준봉 조이하 5대조의 선영을 모시고 있는데 그 후손들이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통리, 서울 강서구 화곡동 등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어 편의상 후손들을 그 선산의 지명을 따 "순창 강성산(淳昌江城山) 문중(준봉공 후손문중)"이라 칭하기로 한다.
또한 인흥 조의 두 아드님 중 둘째 집인 근선(謹宣) 조의 후손들은 상대(上代)로부터 일정한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지 않고 순창군 팔덕면, 인계면, 구림면, 금과면, 담양군 금성면,무정면, 정읍군 고부면 등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아오고 있어 대표적 근거지를 찾기 어려우나 현재 후손들이 순창군 구림면 구암리에 많이 살고 있어 문중의 이름을 "순창 구암(淳昌龜岩) 문중(謹宣公 후손문중)"이라 칭하기로 한다.
②인신 조의 후손들
인신 조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향리인 순창군 팔덕면 태자마을에 남아 선대의 가업을 계승하여 治産과 학문에 힘써 상당한 명망과 부(富)를 누리며 살았고 돌아가신 뒤에도 그 마을에 묻혔다. 學行으로 士林의 推重을 받았고 官은 증 가선대부이다. 정부인 광산김씨는 致瑞公의 따님으로 貞操가 곧고 婦道가 높으시었으며 公에게 시집와 獨子를 두었는데 이름은 弘得이요 字는 乃震이시다. 역시 학행을 힘써 官이 통훈대부 군자감 정에 올랐는데, 晩年에 순창 태자리에서 담양 덕성리로 옮아 家基를 세웠고 후손들이 이곳에 世居함으로써 오늘의 덕성문중을 이루게 된다. 결국 장령공 정길 조이래 가선공 인신 조에 이르기까지 4대가 세거하여 살아왔던 순창 태자마을은 홍득 조가 담양 덕성마을에 입향(入鄕)함으로써 순절공파의 순창 태자리 시대는 그 종언(終焉)을 고하게 된다. 이후 인신 조의 후손들은 인흥 조의 후손들과는 달리 대대로 이 마을에 세거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고 있어 그 후손들을 "담양 덕성(潭陽德成) 문중(인신공 후손문중)"이라 일컫고 있다.
이상의 순절공파 후손들이 이룩한 문중들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4)씨족사의 전개
①부안증동 문중(인흥공 후손문중)
부안증동 문중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순절공파의 종문(宗門)이다. 그러나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재 조의 둘째 아드님이신 장령공 정길 조의 종문이면서 또 그 아드님이신 통덕공 종형 조의 종문이기도 하다. 앞에서 '정길 - 종형 - 기룡 - 인흥 조'에 이르기까지 4대조의 역사는 대략 언급되었다. 즉 정길 조가 1550년을 전후하여 순창 팔덕면 태자리에 입도(入都)하여 가기(家基)를 정한이래 종형·기룡·인흥 조에 이르기까지 약 80여 년간을 이곳에 세거해오다가, 1630년 경 인흥 조가 한산군수에 부임키 위해 아우 인신 조와 작별하고 고향을 떠난 후로부터 인흥 조 후손들의 긴 이주(移住)의 역사가 시작된다. 고향을 지켰던 인신 조의 후손들은 비록 한 차례 터전을 담양 덕성리로 옮기기는 하였지만 이후 이곳에서 300여년을 세거함으로써 한 곳에 정주하여 안정된 삶을 누려온 데 비해 인흥 조의 후손들은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살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옮아 살았다. 이 때문에 인흥 조의 후손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원조(遠祖) 정길 조·종형 조로부터 파조(派祖) 순절공 그리고 인흥 조·근남 조에 이르기까지 5대조의 묘소를 실전하는 뼈아픈 역사를 체험해야 했다. 그러나 비온 뒤에 땅이 더욱 굳어진다고 했듯 이러한 시련이 있었기에 오늘날 인흥 조의 후손들은 화수회를 중심으로 더욱 결속하여 돈독한 일가애를 갖고 조상을 섬기면서 선대의 문풍(門風)을 지켜오고 있다.
이제 순절공파 부안증동 문중의 역사를 그 시원에서부터 탐사해가기로 한다. 1630년경 한산군수 부임을 위해 향리를 떠난 인흥 조는 일단 지금의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 있는 당시 한산군 관아로 나가 부임하였을 것이다. 한산군은 지금은 서천군에 편입되어 일개 면으로 행정구역이 축소되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12군의 하나로 종4품 군수가 다스리던 큰 고을이었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임기는 동일지역에서 관찰사는 360일(1년), 수령은 1800일(5년)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수령·군수들도 1 - 2년 정도가 지나면 체직(遞職)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인흥 조의 한산군수 재직기간은 길게 잡아도 2년 남짓밖에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30대 후반 한창 장년기에 짧은 관직생활을 마친 인흥 조가 물러나 새로이 가기(家基)를 세우고 정착한 고을이 어디인지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족보에 "묘가 태인에 있다고 하나 자세치 않다(墓在泰仁未詳)" 고 한 기록으로 보아 태인에 살았던 것만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인흥조가 태인으로 물러나 만년의 삶을 보내게 된 것은 어쩌면 순창의 산간마을에서 태어나 청장년기를 살아온 인흥 조로서, 한산군수 부임을 위해 임지로 가던 길에 정읍 태인을 지나다가 그곳의 광활한 농토와 풍부한 물산을 보고 퇴임 후 그곳으로 물러나 살 작정을 하였던 것일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인흥조는 정읍 태인면 어느 마을엔 가에 정착하여 농사에 힘쓰는 한편으로 시서(詩書)에 잠심(潛心)하여 전형적인 선비의 삶을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인흥 조는 두 아들을 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큰아드님은 근남(謹南;1614-1666) 조는 친생자이지만 작은 아드님인 근선(謹宣;1633-1678) 조는 후에 그 후손들이 상계를 실전(失傳)하여 을축보(1925년) 때에 순절공 후손인 인흥 조의 차자(次子)로 계대(繼代)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인흥 조는 독자 근남 조만을 두신 것이다.
근남 조는 자못 문명(文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족보에는 성균관진사에 합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성균관 진사에 들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즉 당당히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진사가 되거나, 현직관원의 자제나 공신의 자손으로 문명이 있어 조정에 품달(稟達)됨으로써 문음(門蔭)으로 성균관에 들거나 하는 길이 그것이다. 앞에서는 근남 조가 17세가 되는 1630년 이후로부터 졸년인 1666년까지의 사마방목에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을 들어 족보의 성균관 진사 기록은 음서(蔭敍)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으나 꼭 그렇게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전하고 있는 사마방목은 당시 전국에서 실시했던 생원시나 진사시의 합격자 명부를 당시 사람들이 종합하여 정리해 놓은 것으로, 그 가운데는 수집이 안되어 빠진 것도 있을 수 있고 전사과정의 오류도 있을 수 있는 것이어서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든 근남 조는 위 두 길 중 어느 하나로 성균관에서 공부할 기회를 가졌고, 그 기간은 당시 성균관 유생에게는 최소한 6개월 이상을 입재(入齋)하여 공부해야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던 점으로 미루어 1년 남짓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근남 조는 문과에 최종 급제를 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진사에 만족하고 낙향할 수밖에 없었던 근남 조는 이후 전야(田野)에서 농사에 힘쓰는 한편, 그 호(號) 회당(誨堂)이 말해주듯 진사로서 학당을 열어 후진을 가르치기에 힘쓰면서, 또 어버이를 효양(孝養)하며 독서와 시문(詩文)에 잠겨 선비로서의 자족적인 삶을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근남 조가 생전에 살았던 곳은 기록이 전하지 않고 또 묘소까지도 실전되어 정확한 것은 알 길이 없으나 아버지 인흥 조가 살았던 정읍 태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근남 조는 수봉(秀鳳)·천봉(天鳳)·준봉(俊鳳) 삼 형제를 둔 것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중 셋째인 준봉 조는 최근 기사보(己巳譜;1989)에 와서야 그 후손들이 계대(繼代)하였고, 둘째인 천봉 조의 후손들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을미보(1955년) 이후 대종회와 연락이 끊겨 사실상 보계가 단절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선 근남 조의 직계혈손이면서 종문(宗門)인 수봉 조 후손들의 삶부터 살펴나가기로 한다. 그리고 준봉 조 후손들의 삶은 따로 떼어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 수봉(1634-1697) 조가 태어난 곳은 아버지 근남 조가 살았던 정읍 태인이었을 것이다. 이곳은 조부 인흥 조가 새로 둥지를 틀었던 바로 그 터전으로, 인흥 조가 여생을 마친 곳도 이곳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근남 조의 묘소를 실전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근남 조 또한 여기서 일생을 마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수봉 조가 이 마을을 떠나 순창군 쌍치면 시산리(詩山里)로 다시 가기(家基)를 옮긴 것은 근남 조 사후, 즉 아버지 장례를 마친 뒤인 1666년 이후의 일일 것이다. 어떻든 수봉 조는 태인에서 청장년기를 보내며 가업(家業)을 이어받아 사족(士族)으로서 농업과 독서에 힘쓰는 한편 양친을 효봉하며 세 아들을 교양(敎養)하기에 진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대에 걸친 이 같은 성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농토적 기반을 갖고있지 못한 양반가의 살림은 처음부터 가난을 면키가 어려웠을 것이다. 소작농이나 영세지주로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을 인흥 조나 이를 이어받아 똑같은 생활을 꾸릴 수밖에 없었을 근남 조나 수봉 조에게 있어서 가난을 벗어 던지고 양반의 권위와 유족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넓은 농토를 소유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었지만, 태인처럼 토지소유구조가 확립된 안정된 농촌사회에서는 그 길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결단을 내린 것이 수봉 조의 순창 시산 행(行)이었을 것이다. 시산리는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순창군 쌍치면에 속하는 비교적 큰 마을로 동서남북 4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산간마을이다. 다만 남쪽으로 복흥면 남부와 북부의 산간지역에서 발원하여 쌍치면 산곡간을 돌아 정읍 산내면을 거쳐 옥정호로 흘러드는 추령천(秋嶺川)이 흐르고 있어 하천을 따라 상당히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고, 또 사방이 산악으로 둘러 쌓인 가운데도 소쿠리 속 모양의 상당히 넓은 분지가 형성되어 있어,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산으로부터는 땔감을 구하기가 용이하여 마을이 들어서기에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형이다. 또 지리적으로는 정읍이 9km 정도, 순창읍이 25km 정도, 담양읍이 25km 정도씩 떨어져 있어 경제적으로는 정읍생활권에 가까운 편이다. 1979년도 순창군지에 실린 인구통계를 보면 시산리는 55가구 268명이 사는 비교적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1600년대 후반의 시산리는 오늘날처럼 큰 마을을 이루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 마을다운 마을이 이루어지지 않은 그저 오두막집 몇 채가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는 그런 산간오지에 불과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수봉 조는 왜 이러한 산간오지로 이주를 결심하게 된 것일까.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인흥 조의 태인 정착 후 3대에 걸친 삶은 토지가 곧 권력과 부의 근거가 되는 평야지 농촌사회에서 농토의 기반을 갖지 못한 양반의 삶이 얼마나 곤고하고 무력한 것인가를 절감케 해주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수봉 조는 무엇보다도 농토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졌고 이 욕망을 황무지 개간을 통해 충족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 시산 땅은 태인으로부터 25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태인 - 순창'간 또는 '태인 - 담양'간의 한 중간에 위치해 있어서, 수봉 조가 순창이나 담양에 살고 있는 일가를 찾아가기 위해 자주 지나던 곳이었다. 그는 이 곳을 지날 때마다 황무지로 남아있는 이 땅을 개간하여 내 땅을 만들 포부를 키워오다가 마침내 부친상을 마치고 난 뒤 1670년을 전후해서 가산을 정리해서 세 아들과 함께 이 시산 땅에 들어오게 된다. 이로부터 수봉 조 4부자의 피땀어린 시산리 개간의 역사가 시작되게 된다.
수봉 조는 부인 청주한씨와의 사이에 성망(聖望;1654-1708)·몽망(夢望; 1659-1726)·동망(東望;1661-1718) 삼형제를 두었는데, 시산리 입향(入鄕) 후로 부인과 세 아들로 더불어 이른 새벽부터 해가 져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수 십년을 농토 일구기에 진력하여 마침내 부농(富農)의 꿈을 실현하고야 만다. 수봉 조 부부는 물론 세 아드님 모두 이 시산땅에다 몸을 묻었을 만큼 개간사업에 온 열정과 인생을 다 바쳤던 것이다. 이리하여 시산리 농토의 대부분이 최씨의 땅이 되어졌고 자손들이 대를 이어 이 땅에 뿌리내려 살아옴으로써 오래도록 순절공 후손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었다. 3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 시산리에는 비록 일가들이 떠나면서 농토는 다 처분하고 떠남으로써 남아있는 땅이 없지만 임야는 아직도 ---정보에 이르는 광대한 산이 순절공 후손들의 종산(宗山)으로 마을 앞뒤로 병풍처럼 둘러 있어 당시의 터전을 짐작케 해준다.
수봉 조는 1697년(숙종 23,정축)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비로소 일생 손발이 닳고 등뼈가 휘도록 혹사해왔던 몸을 쉬게 된다. 공은 천품(天稟)이 온후(溫厚)하였고 정훈(庭訓)을 받아 학문에도 힘써 학행(學行)이 단정하였다. 평생 어버이를 효양하였고 자손들의 교육에도 온 정성을 다하여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선비가문의 가풍(家風)을 지켜가게 하였다.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 또한 천성이 효순(孝順)하여 시부모를 성효로 섬겼으며 부군(夫君)과 고락(苦樂)을 함께 하며 해로(偕老)하여 슬하에 삼 형제를 두어 모두 훌륭히 성취시켰으니 오늘날 순절공 후손의 번성이 이에서 비롯된 바 크다 아니 할 수 없다. 1632년에 나서 1702년에 하세(下世)하니 향년이 71세였다. 공의 손(孫) 가운데 만표(萬表) 공은 효행으로 조정으로부터 효직(孝職)의 영전(榮典)이 있었고, 증손 우(瑀) 공과 현손 학성당(學聖堂) 처행(處行) 공 역시 효행과 학문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학성당의 아드님 정관(禎寬) 공 또한 효행으로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겼다. 이처럼 수봉 공의 후손들에게는 충효법가(忠孝法家)의 아름다운 가풍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공의 8대손 동현(東鉉)씨가 1950년에 시산리에서 공의 묘를 옮겨 호남 제일명승 내장산 서래봉 기슭에 새로 유택(幽宅)을 마련하였고 또 2000년에는 8대손 윤헌(允憲)씨가 화수회장으로서 후손들의 뜻을 모아 묘비를 세웠다.
장자 성망(聖望;1654-1708) 조는 부친을 따라 시산리에 들어와 동생들과 함께 부친을 도와 시산리 최씨촌의 건설을 위해 진력하였다. 슬하에 독자 웅표(雄表;1688-1748)를 두고 죽어 아버지 묘 아래 묻혔는데, 웅표 공 또한 독자 도명(道明)을 두었고, 도명 공 또한 독자 처로(處老)를 두었고, 처로 공 또한 독자 정량(楨良)을 두었고, 정량 공 또한 독자 윤화(允華)를 두었고, 윤화 공 또한 독자 동환(東煥)을 두었으니, 성망 공으로부터 윤화공에 이르도록 6대가 내리 독자로 내려옴으로써 가문이 번창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6대 200년에 이르도록 성망 공의 후손들은 선산을 지켜 시산리에서 살아옴으로써 종가(宗家)의 책임을 다하였다. 26世 동환(東煥; 1854-1914) 조에 이르러 1878년 부친 윤화 공이 돌아가시고 또 모친 여양진씨(驪陽陳氏)마저 돌아가시자 양친을 선영 근처(상치면 삼계리)에 장사한 뒤 새로운 삶을 찾아 200여년을 살아왔던 고향을 떠나 부안 줄포로 이사함으로써 순절공파 시산리 시대는 그 종언을 고하게 된다.
한편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사한 동환 조는 중근(重根)·중일(重日) 형제를 두었는데 중근씨는 독자 점술(点述)을 두었고 점술씨는 종기(種基)·종렬(種烈)·광호(光鎬) 3형제를 두고 고창군 흥덕면 오정리에 살았던 것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타지로 이사하여 사는 곳을 알지 못한다. 또 중일씨도 독자 진섭(振燮)을 두었고 진섭씨는 고창군 흥덕면 대양리에 살면서 1자 영렬(永烈)과 6녀를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진섭씨는 죽고 영렬씨의 사는 곳은 알지 못한다. 성망공 후손들의 세계도(世系圖)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수봉 조의 둘째 아드님인 몽망(夢望;1659-1726) 조 또한 형제들과 함께 부친을 도와 초창기 시산리 최씨촌의 건설을 위해 진력하였는데, 슬하에 익홍(益鴻;1695-1752)·대홍(大鴻;1703-1758) 형제를 두고 부부가 시산리에 뭍혔다. 불행히 장자 익홍 공은 아들을 두지 못해 후사가 끊겼으나, 차자 대흥 조는 경서(慶瑞)·중서(重瑞)·이서(以瑞) 3형제를 두어 자손이 창성함으로써 인흥공 후손들 가운데서 가장 큰 문중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대홍 조는 부모와 형 그리고 여러 사촌 형제들이 살고 있는 시산리를 떠나 전남 담양군 용면 청흥리(淸興里) 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가 왜 홀로 가족들 곁을 떠나 담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지는 전해오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당대에는 대개 혼인으로 인해 처가의 가업을 물려받거나 또는 처가에 의지하여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이사하는 경우가 많았던 점으로 미루어 대홍 조도 어쩌면 혼인과 관련되어 이사를 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즉 대홍 조는 둘째 아들로서 꼭 부모를 모셔야 할 처지도 아닌데다 처가는 능성(綾州) 구(具)씨 가문으로 장인인 구흥재(具興載)는 관(官)이 가선대부에 올랐던 양반인 만큼 가산이 요부(饒富)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론을 근거로 그 이사 시기를 추정해 본다면 대흥 조가 20세가 되는 1722년 전후쯤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든 대흥 조는 시산리를 떠나 담양 청흥리에 정착하게 되는데, 청흥리는 시산리에서는 30리(12km) 가량 떨어져 있는 농촌마을로 오늘날에는 1976년 6,670만톤 규모의 담양댐이 축조되어 마을의 일부가 담양호에 수몰되었으나 대흥 조가 묻혀 있는 선산은 그대로 있어 현재도 후손들이 묘소에 나가 시제를 모시고 있다.
대흥 조는 경서(慶瑞;1724-1774)·중서(重瑞;1730-1783)·이서(以瑞;1737-1793) 3형제를 두었다. 그런데 신미보(1871년)에는 중서 공이 1남 복형(福衡)과 1녀 유언(柳彦)의 처를 두고 순창군 쌍치면 산수리에 묻힌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복형 공은 또 독자 정신(禎新)을 정신 공은 또 독자 낙규(洛奎)를 두었는데 그 후 세계(世系)가 끊겨 알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을미보(1955년) 시에 봉서(鳳瑞; 본명은 鳳弼이고 鳳瑞는 譜名이다) 공과 그 자손들이 대홍 조의 자손으로 계대(繼代)하였는데 이는 순창 심초 문중의 봉필(鳳弼) 공 자손들이 족보에 참여하면서 그 세계(世系)를 잘못 정한 것이다. 최근 심초 문중에서 그 선조들의 교지와 호적이 다량으로 세전(世傳)되어오던 것이 공개됨으로써 그 족파가 순절공파가 아니고 통덕랑공파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대홍 조의 친 혈손(血孫)은 경서 조의 후손들과 이서 조의 후손들만 그 세계를 이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먼저 경서 조 후손들의 역사를 다루고 이어 이서 조 후손들의 역사를 살펴나가기로 한다. 그리고 봉서 조 후손들의 삶은 통덕랑공파의 역사 속에서 다루기로 한다.
【경서(慶瑞) 공 후손들】
학성당(學聖堂) 처행(處行) 공의 학문과 삶
경서(慶瑞;1724-1774) 조는 청흥리에서 부친이 물려준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독자 처행(處行)을 두고 청흥리 선친 묘 아래 묻히게 된다. 이 해 처행(1766-1835) 조의 나이는 9살이었으니 일찍 엄친을 여읜 그는 어머니 금성김씨(1734-1781)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서 글공부에 전념하여 일생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는 천성이 총명하고 지기(志氣)가 고상하여 7·8세의 어린 나이에 벌써 경전(經典)의 장구(章句)를 능히 분변하였고, 일찍부터 이름 있는 선생들의 문하에 나가 토론하며 경전(經典)의 의리(義理)를 밝히기에 골몰하였다. 성장하여서도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성현의 학문에 힘을 써 스스로의 학(學)을 수립하기를 기약하여 태극도설(太極圖說)과 동서의 명(銘)이며 범장(范張; 범중엄과 장횡거, 송나라 때의 학자)의 잠언(箴言)들을 벽상에 걸어놓고 이에 잠심하여 궁리하며 이치를 밝히기를 날로 독실히 하여 쉼이 없었다.
또 홀로 되신 어머니를 지효(至孝)로써 섬겨 평시에는 봉양하기를 지극히 즐거운 마음으로 하였고, 병환을 당하여는 근심이 가득하여 간병하기를 지극히 하였다. 불행하여 어머니마저도 공이 16세 되던 해 11월에 돌아가시니 애통하기를 도에 넘게 하며 부인으로 더불어 어머니를 아버지 묘 곁에 안장하고 삼년상을 예를 다하여 마쳤다. 그러나 삼년상을 마치고 난 후 공은 생계를 꾸려가기가 막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효자였던 공은 모친의 뜻을 조차 돌아가시기 전에 혼인을 하여 여한(餘恨)을 두지 않게는 하였으나, 16세에 이르도록 농사를 모른 채 글공부에만 전념해왔던 샌님으로서는 일가들의 도움 없이 홀로 농사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어린 나이였다. 그런데 숙부가 되는 이서(以瑞) 공도 이미 정읍군 내장면 답곡리로 이사를 하고 난 뒤여서 청흥리에는 이들 어린 부부의 후견인 역할을 해 줄 혈족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처행 조는 모친 3년상을 마치고 난 뒤 청흥리를 떠나 70리(28km)쯤 떨어져 있는 정주읍 초산리(현 정읍시 시기3동)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이 마을은 어쩌면 부인 경주김씨의 친정마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리하여 이곳에서 공은 처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농사를 익혀가고 또 학문에 열중하면서 신혼살림을 꾸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1925년(을축보 때) 김영한(金 漢)이 쓴 <학성공 행장>에는 공의 호는 학성당(學聖堂)인데 영조 병술년(1766) 12월 11일에 정읍 신촌리에서 태어나 만년에 가산을 정리하여 변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여 공이 정읍 신촌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같은 해에 이상영(李商永)이 지은 <학성공 묘갈명>에는 영조 병술년 12월 11일에 태어나 만년에 초산(楚山)을 떠나 부안 변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여, 출생지를 밝혀놓지 않아 의문점을 남겨놓고 있다. 아무튼 1925년 김영한의 행장 기록은 공이 태어난지 160년 후의 추측일 뿐 어떠한 문헌적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상의 씨족사를 근거로 볼 때 믿기 어렵다. 즉 공이 만약 정읍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부친 경서 공은 정읍에서 죽은 것이 되고, 모친 금성김씨 또한 정읍에서 죽은 것이 되는데, 그 해가 각각 9살·16살 때이니, 고아나 다름없는 어린 상주가 두 차례나 상여를 끌고 70리나 떨어져 있는 담양 청흥리 조부의 묘하에까지 나가 장사를 지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태어난 곳이 어디이든 간에 공은 이 초산리에 정주(定住)한 이래 생업보다는 학문에 더 몰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읍의 사림들과도 폭넓게 교유하며 자신의 학문의 세계를 넓혀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영한이 쓴 행장에는 공을 추모하기를
"오호라 선비가 도(道)에 뜻을 둔 자는 후세에 이름을 구하지 않았으니, 곧 공 이 숲 가운데 묻혀 세상에 몸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공에게는 아무런 손해 될 바 가 없으되, 그러나 공과 같이 학문을 독실히 한 자나 공과 같이 아름다운 덕을 가 진 자가 인몰(湮沒)되어 이에 그친다면 어떻게 착한 일을 하여는 사람들을 권면할 수 있으리요"
하였다. 또 이상영이 지은 묘갈명에도 "신재의 어진 손(孫) 호향(湖鄕)의 훌륭한 선비로다 / 시서(詩書)에 잠심하며 효우(孝友)를 실천하였네" 하였다.
이처럼 공은 학(學)과 행(行)을 겸전(兼全)한 선비로서, 당대 이 지역 사림(士林)들로부터 사표(師表)로 추중(推重) 되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만년(晩年)에 공은 다시 정읍 초산리를 떠나 다섯 아들과 함께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中溪里)로 옮겨 은거하였다. 이곳에서 공은 혹 바닷가를 소요하기도 하며 혹 밭갈이도 하고 혹 낚시질도 하며 초연히 만상(萬象)의 밖에 홀로 서서 풍월을 읊조리다 1835년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70세였다. 부인 경주김씨는 10년을 더 살고 변산면 질마리 후록(後麓)의 부군 곁에 묻히니 향년이 81세였다. 공이 이 변산면 중계리로 옮긴 해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앞에서 살핀 바 있듯이 신사년 화재와 관련시켜 본다면, 그 해는 1821년 즉 처행 조의 나이 56세 이후로 볼 수 있다. 즉 신사년(1821)에 우연한 사고로 화재를 입고 새로운 터전으로 삼은 곳이 전에 산수(山水)를 벗하여 변산의 바닷가를 유람하다가 보아두었던 이 마을이었을 것이다. 이 마을은 정읍과는 직로(直路)로 80리(32km) 정도가 떨어진 마을로 현재는 부안댐이 축조되어 마을의 대부분이 부안호(扶安湖)로 수몰되었으나 공의 묘소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처행 조는 부인 경주김씨와의 사이에 5남 정개(禎盖)·정관(禎寬)·정택(禎澤)·정량(禎良)·정환(禎煥)과 2녀를 두었는데, 5남 모두가 장성한 뒤에 아버지를 따라 정읍 초산에서 변산 중계리로 이사하여 6부자가 힘을 모아 농토를 일구며 삶의 터전을 일구어 나갔던 것이다. 장남 정개(1785-1833) 공은 진주 강씨와 혼인하였으나 자녀를 두지 못한 채 49세의 나이로 부모보다도 먼저 죽어 변산 땅에 묻혔다.
효자 정관(禎寬) 공
차남 정관(1791-1853) 공은 효자로 이름이 부안군지에 올라 있을 만큼 효행이 독실하였다. 천성이 순효(純孝)하여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고 어버이를 극진히 효양(孝養)하였으며, 어버이께서 병환이 있을 때는 몸을 헐어 간병에 정성을 다하였다. 일찍이 어버이의 병환에 살을 깍고 손가락을 베어 생혈(生血)로써 구병(救病)하였고, 한 겨울에 눈구덩이 속에서 생쑥을 구해 구병하였는가 하면, 또 눈 속에서 백합의 뿌리를 캐 다려드려 문득 효험이 있게도 하였다. 또한 부친상과 모친상을 다 기름진 음식을 피한 채 죽으로써 연명하며 삼년 동안을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며 효자의 도리를 다하니 고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부안군지(1991년 간행)에는 그의 효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고 있다
"초계인, 효자, 겨울에 눈 속에서 쑥을 구해 어버이를 구병하였다"
부인 무송유씨(茂松庾氏)와 해로하였으나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해 후사가 끊겼고 묘는 중계리와 인접한 마을인 청림리에 있었다고 하나 후손이 끊겨 실전되었다.
<순절공사실>을 지은 정택(禎澤) 공
3남 정택(1795-1869) 조는 호를 운파(雲坡)라 하였는데 부친의 지취(志趣)를 이어받아 학문이 유여(有餘)하였다. 부친을 따라 변산면 중계리로 들어와 형제들과 함께 농토를 일구며 치산에 힘쓰는 한편 학문에도 힘을 쏟아 학행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만년에는 학당을 열어 후진을 교육하였다. 증손 기석(淇碩)씨가 지은 <운파 초계최공 정택 묘표(雲坡草溪崔公禎澤墓表)>에는 일찍이 선친으로부터 들은 바를 기록하였는데, 선친이 공의 묘소를 보수(補修)하고 있는데 산 아래로부터 한 문사(文士)가 올라와서 말하기를 "이 묘는 저의 선생님 묘소입니다. 생시에 선생님께서는 높은 학문과 아름다운 행실로 명망(名望)이 온 고을에 가득하였습니다. 저 또한 여러 해를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아왔었습니다"고 하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기석 씨는 선친으로부터 이와 같은 정택 조가 마을 사람들에게 끼친 교화들에 대해 전해들은 바가 많다고 술회하고 있다. 정택 조가 중계리로 이사를 온 것은 20대 후반인데 75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50년 가까이 타관(他關)임에도 불구하고 이 고을에 살아오는 동안 끼쳐온 교화가 이러하였다면 그 인품과 학행이 얼마나 고매했었는가를 짐작할 수 가 있다. 그는 또 선조들의 사적을 찾아 후세에 전하는 일에도 남다른 열성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우리 씨족 최초의 대동보인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