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4일 “마1:18~25” <이름을 예수라 하라!>
티브이를 보면 다양한 분야의 커플들이 생의 반쪽을 만나 살아가면서 남자와 여자의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토닥거리며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재미를 그려낸 프로가 있습니다.
동상이몽이라는 프로입니다. 이 프로에 등장하는 부부 추자현이라는 탈렌트와 중국인 신랑 우효광이라는 사람이 프로의 재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잠깐 소개하면 이들이 결혼하여 알콩, 달콩 신혼의 재미를 가지고 살면서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이 아이는 축복입니다.
산부인과를 다녀오고 초음파 사진을 들고 기뻐하며 빨리 신랑에게 아이의 잉태의 소식을 전하려고 하는 아내의 마음이 그려질 때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아내에게 대견해 하며 고마워하는 신랑의 모습과 뒤 돌아서서 감격하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면서 대박을 외치며 어찌할 줄 모르는 신랑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의 축하를 한 몸에 받게 하는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은 어머니의 태에 잉태 될 때 모두 온 가족의 모든 축복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축복받을 아이를 잉태하고도 죄인의 모습으로 축복받지 못하고 어찌할 줄 몰라 고민해야 하는 신부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마리아입니다. 두 사람은 약혼한 사이입니다. 약혼은 결혼에 버금가는 법적구속력이 있어서 서로는 남편과 아내의 호칭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동거는 허락이 되지 않으며 만일 약혼 중에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미망인이 되기에 파혼 장을 써주어야 할 정도로 약혼은 결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 아이를 가졌습니다. 자신이 선택하고 약혼한 남편 요셉의 육체적인 관계를 통하여 잉태한 아이가 아니라 그것도 약혼만 하고 동거도 하기 전에 아이를 잉태를 한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의 임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참 의미를 숙고하며 사실을 요셉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은 처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알릴 수 없는 축복은커녕 손가락질과 돌을 맞아 죽을 상황이 됐기 때문입니다. 모세율법에 저촉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22:23~24을 보면 처녀인 여자가 아이를 가지면 돌로 쳐 죽이는 법이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이를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임신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19절입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소문내지 아니하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지 않으며 조용히 이혼을 준비하였습니다.
한 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며 혼외 임신사실을 숨기고 없었던 일로 마무리 하려는 것입니다.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는 단어의 뜻은 자유롭게 놓아 보낸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를 보더라도 조용히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한 요셉의 결심을 볼 수 있으며 이 방법만이 마리아를 다치지 않게 하고 조용히 파혼하여 보내는 지혜로운 선택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요셉은 이 선택대로 일을 처리할 것입니다. 요셉은 매일의 시간들이 염려와 걱정으로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최종의 결정은 하였지만 요셉은 마음의 번민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요셉의 꿈속에 생생하게 전달된 것입니다. 꿈속에서 주의 사자 천사가 현몽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천사는 이미 마리아에게도 나타났던 가브리엘 천사입니다. 천사가 찾아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이를 해석하면 ‘기뻐하라 너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입은 자라’입니다. 마리아는 이제 은혜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하였니다.
천사가 요셉에게도 찾아와 주셨습니다. (눅1:26~27)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눅1: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나님은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한 결정을 실천하기 전에 천사를 보내셔서 마리아 잉태의 전모를 알려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신 것입니다.
천사는 요셉을 부르십니다. 이름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낳게 될 아이는 계보 상 다윗의 혈통이요 후손이 되며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인지시키고 계십니다.
“네 아내를 데려와라 파혼해서는 안 된다.” 정혼하였으나 각자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마리아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제 마리아의 배도 불러올 것입니다. 신부를 데려와 면사포를 씌어주고 하얀 드레스를 입혀야 할 결혼식이 가까운 때임을 암시합니다. 두려워하며 주저하는 요셉을 안정시키며 이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임을 확인하여 고지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잉태는 부정의 결과가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으로입니다. 요셉이 주저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육신의 방법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성령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잉태하게 한 것은 성령입니다. 아들입니다. 이름도 지어 주셨습니다. 이제 요셉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서둘러 갈릴리 나사렛에 있는 자신의 처가로 달려가 마리아를 데려옵니다.
아내 마리아에게 너무도 미안하고 무거운 짐을 지어준 것 같아 요셉은 어찌할 줄 몰랐을 것입니다. 이미 아들인 것도 알았고 아이의 이름도 지어놓았습니다. 태명은 구원이입니다. 우리 아이의 이름은 ‘예수’라 할 겁니다.
1, 이 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십니다.
이미 이 땅에 오실 메시아는 예수님이시며 저희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서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죽으시기 위해 오신분임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 이름을 직역하면 예수의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마리아가 낳을 아이의 이름을 왜 ‘예수’라고 지어야 하는지는 우연이 아니라 분명하게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자기백성은 이 땅에 영적인 통치자로 오신 그분의 백성이고, 예수가 통치하고 다스리는 백성이며, 우리는 그분의 소유이기에 자기 백성은 예수의 백성이요 바로 우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분리하여 구원하실 구속자가 되십니다. (히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속주가 되시기 위해 오셨지만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2,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심입니다.
이 땅에 오실 예수그리스도는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바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이루어지고 신약성경이 성취됨입니다.
(눅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의 예언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 나실 것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우리의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시나 사람들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한다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고난과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분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분께 담당 시키셨습니다.
3, 그분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상황 속에서 어려움과 고민해야할 일이 생기면 나를 가장 믿어주는 누군가를 찾아가 위로받기를 원하고 내속의 일들을 이야기하며 도움을 구하고 자문을 구합니다.
누군가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힘을 얻고 위로를 받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동행하며 지켜주고 힘들고 지칠 때 위로해 줄 수 있는 이가 있다는 사실은 감사입니다.
우리의 곤고를 아시고 힘들다고 말하면 우리의 짐을 내려놓게 하시고 대신 져 주시는 분이 임마누엘 하나님 이십니다. 이분은 이미 칠백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 선포된 예언의 성취입니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동정녀의 잉태와 탄생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뜻에 의한 성육신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채로 사람의 아들이 되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신성과 인성을 함께 양성을 가지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 아담이 되신 예수님은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밝히 밝히기 위해 빛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첫 번째 아담의 죄책으로 인해 죄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빛이 되심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목적이 있습니다.
이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말씀과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허락해주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그 자체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우리를 사랑하심이고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라는 임마누엘은 처음 구원의 시작부터 마지막 심판에 이르기까지 함께 계심입니다.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세상 끝 날까지 영원히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입니다. 임마누엘은 성경의 약속이고 주제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복음의 시작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됩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시작이 우주만물의 창조로부터 시작된다면 신약의 시작은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재창조라는 구속의 은총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그분의 백성을 구원할 왕으로 그리고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은 복음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물론 구약에서 계시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친히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는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