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소설은 노벨문학상은 탄 한강 작가(이하 작가)의 현재까지 가장 최근작이다. 작가는 자기 소설을 처음 접하려는 사람에게 이 작품으로 시작할 것을 추천했다.
2. 이 작품의 앞부분에는 인선이 제주도 자기 집에서 공예작업을 하다가 손가락이 짤려서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한 후에 예전에 활동을 같이 했던 친구 경하에게 전화해서 자기가 기르던 앵무새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고 부탁해서 경하가 인선이 살았던 제주도 P읍의 중산간 마을로 가는 과정이 오래 계속된다.
저 P읍은 표선읍이고 중산간 마을은 가시리이다.
나는 저 제주도를 10년 이상 오래 다녔고 근래에 2년 전세살이도 했었다. 가서 주로 올레길과 한라산 둘레길을 버스 타고 가서 많이 걸어 다녔다. 그래서 폭설이 와서 한라산 횡단도로로 가지 못하고 일주도로를 급행버스를 타고 저 P읍로 가는 장면과 거기서 지선으로 갈아타고 중산간 마을로 가는 방법과 장면들이 내 눈에 선하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쓴 소설을 읽다 보면 지명들과 사람 이름들이 워낙 어렵고 낯설고 헷갈려서 머리에 입력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에 나오는 (특히 나에게) 지명이나 (몇 명 안 나오지만) 이름들은 친숙해서 좋다. 무엇보다도 노벨문학상을 탄 작품을 원어로 읽는 그 ‘기분이 째진다’.
3. 이 소설속에 나오는 1948년 4.3사건에 대한 기록은 주로 인선의 엄마(정심)와 인선이 수집한 자료라고 나온다. 그 기록들은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 같은 선구자적인 작품도 있었지만) 군사정권시절이었던 2000년 이전에는 불가능했고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된) 2000년대에 들어와서 제주 4.3연구소 등에 의해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여기에는 그 당시를 살았던 생존자들의 증언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작가는 그것을 참조했다고 이 책 뒤에서 밝히고 있다. 그분들 중에는 지금 돌아가신 분들이 많을 것이기에 그 생생한 증언들은 매우 소중하다.
그 기록을 작가는 꼼꼼하게 검토하였고 그 기록들이 이 소설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런 알면 알수록 아프고 괴롭고 비극적인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런 저자의 자세를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가 높이 평가했다. 저런 엄청난 비극과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은 그 고통이 마음속에서 재현되고 새로운 현실이 되고 작가와 독자가 공감을 한다는 것인데 이런 것을 체험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소년이 온다>에서는 ‘광주민주항쟁’을, 여기서는 4.3사건을 죽을 힘을 다해 그려내고 있다.
4. 이 소설은 제주도의 4.3사건에 관한 것인 줄 알았는데 4.3사건도 다루지만 한국전쟁 발발후에 이루어진 보도연맹원과 관련된 예비검속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제주도 올레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4.3사건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 그런데 제주올레 10코스를 걷다 보면 섯알오름이 있는데 그 근처에 저 예비검속에서 죽은 약 1000여명의 학살터가 나온다. 그곳은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위험한 부류로 분류되어 있던 사람들이 한밤중에 집단으로 무참하게 참살당한 곳이다.
다른 곳에서도 예비검속 때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아주 많았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랐거나 알았어도 잊었던 사실들을, 이 책이 상기시키고 있다. 경북지방에서도 대략 만 명, 전국적으로 이십만 명에서 삼십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 소설에는 다행히도 4.3사건 때에 인선의 엄마(정심)와 언니는 살아 남았지만 정심의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 8살 여동생은 죽었다. 그런 와중에 도망가서 죽지 않았던 정심의 오빠가 나중에 잡혀서 1950년 5월 4일에 제주도에서 배에 실려 육지로 가서 대구 형무소에 갇혔었는데, 그리고 형기가 6년이나 남았었는데, 그래서 정심은 소식이 없는 오빠가 혹시나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끈질기게 추적한다. 신문기사를 보고 자료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 정리하여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그 오빠는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집단으로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엄마가 가졌던 그 희망과 그리고 억울하고 비참하게 대규모로 죽어 나간 사람들의 원혼(冤魂)과 사연들과 결코 “작별하지 않는다”, 않겠다(!)는 것이 이 소설이 주는 의미다.
이 소설의 제목이 <작별하지 않는다> 인데 이 책에는 인선이 작업하는 프로젝트의 이름이 그것이고 그에 대한 언급이 아주 잠깐만 나온다(192쪽). 그렇지만 그 사건에 집착하는 친구 인선의 엄마와 인선의 모습에서 한강 작가의 결연한 모습이 겹쳐진다.
5. 이 책에는 제주도의 눈 내리는 광경들과 눈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는 장면들과 그 눈 때문에 정전이 되어 촛불을 켜고 그 촛불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의 모습이 아주 많이 쓸데없이 많이(!) 지겹도록(!) 나온다. 특히 (나에게도 그렇지만) 저자는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것이 내려오지”하고 감탄하게 하는 눈에 대하여 많이 연구한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그렇더라도 뒷부분에서는 날이 맑게 개고 (눈 때문에 나간) 전기가 들어와서 환해지는 그런 장면을 예상했는데 눈은 끝까지 그치지 않았고 전기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끝까지 촛불로 주변을 살핀다. 촛불이 밝힐 수 있는 범위는 아주 한정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그런 장면설정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울하고 갑갑하였던 결코 녹록지 않았던 우리의 역사와 현실도 그러하기에 그런 과거의 고통의 기억들과 작별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뚝심과 저력이라고 나는 본다.
6. 이 소설 앞부분에는 인선이 앵무새(아마)를 살려내기 위해 경하에게 P시의 자기 집으로 가 달라고 부탁을 한다. 자기가 키우던 한 마리 새가 죽어가는 것은 인선은 그냥 방치할 수 없었다. 새에게도 귀중한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하가 간 그곳이 마침 4.3사건 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마을이다. 한 마리 새의 생명도 그렇게 귀중한데 하물며 그곳에 살던 그 많은 사람들의 귀중한 생명을 어찌 그렇게 잔인하게 짓밟았는지! 그때는 무엇이 그런 인식을 못하도록 방해했는지! 작가의 이런 비대칭적이고 대조적인 상황설정이 비극성을 돋보이게 한다. 인선과 인선의 엄마의 고통을 경하는 충분하게 이해하고 동화된다. 그 모든 비극성과 산 자와 죽은 자의 고통은 잊혀지거나 사라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다.
7. 이 소설의 표현 기법을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했는데 그렇다. 소설은 대체로 산문이지만 중간중간에 시적인 표현들이 아주 많다. 시에는 운율과 압축미와 은유가 있는데 이 소설에도 그런 것들이 즐비하다. 풍경-상황전개-심리 묘사는 처음부터 계속해서 나오지만 단연 돋보인다. 제주도에 눈 내리는 모습과 얼핏 보이는 바다의 풍경, 그리고 촛불에 흔들리는 그림자의 모습을 그려내는 방식들이 특히 시적이다.
이 소설에서 스토리는 복잡하지 않다. 등장인물도 다른 장편소설들에 비하여 아주 적다. 그럼에도 이런 스토리가 장편소설로 쓰여질 수 있는 데에는 그런 적절한 묘사의 힘이 작동한다. 저자의 글 쓰는 능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8. 나는 영(靈)적인 면이 부족한 사람이다. 꿈을 꾸기는 하지만 다 개꿈이다. 그래서 꿈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강 작가는 (대부분의 작가들도 그렇듯이)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꿈을 동원한다. ‘채식주의자’에서도 그랬고 이 책의 맨 앞부분에서도 그리고 중간중간에서도 꿈 이야기를 가미한다. 꿈은 황당한 경우가 많지만 현실을 반영하여 원망과 소망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특히 영적인 면이 강한 사람도 있겠다.
9. 1부(새)에서는 화자이자 주인공이 제주도 P시의 인선의 작업실로 가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눈보라 속에서 눈구덩이에도 빠지면서도 가보니까 인선이 키우던 앵무새(아마)는 죽어 있었다. 경하는 그 앵무새를 정성껏 나무 밑에 묻어 준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눈은 계속 오지만 병원에 있던 인선이 돌아와 있고 죽었던 아마가 살아있다. 여기서는 “망자의 환상” 그리고 “혼”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이렇게 장면이 바뀌려면 구체적인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환상’이라는 말로 슬쩍 넘어가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누구는 이 소설이 ‘실험적’이라고 하는데 실험적 소설은 이러한가? 이 소설은 환타지 소설이 아닌데. 나의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이 독후감을 쓰기 위해 정확하게 다시 읽었는데도 그 부분이 여전히 나에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