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영 묵상노트]
산상수훈(23) 마태복음 5장 43절-47절 원수를 사랑하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반부에 있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모세의 율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레 19:18). 그런데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사실상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앞의 모세의 율법에 덧붙여 해석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와 같은 잘못된 적용에 대하여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44절은 바꾸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유전을 따라 왜곡된 적용과 달리 이미 모세의 율법은 원수 사랑까지 사랑이라는 본질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 있는 사랑(Ἀγαπήσει)이란 상대방으로부터 나에게 어떤 향기로운 조건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거기에 끌린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오히려 나에게 대적하는 요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꺼내심으로,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랑을 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이해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46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며,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는 당시의 직업인인 세리까지도 이와 같은 사랑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의 대상을 형제에게 한정한다면,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랑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사랑은 세리도 이방인도 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45절 후반 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마치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으로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비추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도 비를 내리시는 것처럼, 그렇게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45절 전반 절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으려면 이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γένησθε)”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그렇다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대하면 대할수록, 주님의 교훈을 따라 우리 믿는 자들이 한 발 한 발 내딛는 삶이 얼마나 어렵고도 힘든 것인지 깨닫습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라고 스스럼없이 말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반성에 또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나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사랑의 실천자가 되기 위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간구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용서를 시작으로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의 자녀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