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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찰에서의 정초기원
일본불교의 역사와 현황
아시아 대륙 동쪽, 동해(東海)와 태평양 사이에 위치한 일본은 홋까이도오(北海島)ㆍ혼도오(本島)ㆍ혼슈우(本州)ㆍ시꼬꾸(四國)ㆍ규우슈우(九州)의 5개 섬과 그 부속도서로 이루어진 섬나라다. 총면적은 377,582㎢. 인구는 1억 2천만이다. 이 가운데 불교신도는 9천만 명이 훨씬 넘는다. 사찰 수도 전국적으로 10만여 개에 달한다. 객관적인 자료가 보여주듯 불교는 일본에 최대의 종교이며 그만큼 사회적 영향력도 크다.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 어느 곳에서나 존경을 받는다.
일본에 있어서 불교의 발전은 전통적으로 왕조에 대해 진호(鎭護)국가라는 입장으로 국가권력과의 밀월관계를 계속해온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같은 관계는 불교가 처음 전래된 6세기 초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계속된 일본불교의 역사적 성격이다.
일본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흠명천황(欽明天皇) 13년(552)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기록일 뿐이고, 불교신앙은 그 이전에 이미 백제로부터 도래(渡來)한 사람들에 의해 널리 신봉되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흠명천황 시절은 바로 백제의 성왕(聖王:523~553) 때이고, 고대 일본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스승이 한국이었듯이 불교 역시 한국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던 것이다.
일본에 불교가 정착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은 성덕태자(聖德太子:574~622)다. 그는 그의 스승이었던 고구려 스님 혜자(惠慈)의 가르침에 따라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국가통치이념으로 채택했다. 그가 제정한 17조 헌법은 불교의 이념을 근간으로 한 것으로써 삼보(三寶)에 귀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는 또 혜자 외에도 백제의 혜총(慧聰)에게서 불경을 배우고 주석서를 저술하여 불교신앙의 기초를 닦았다.
일본은 이후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유학승을 파견, 대륙불교를 받아들이는 한편 국가적인 힘을 기울여 대사원(大寺院)을 건립했다. 불교가 정부의 보호관리 아래 토착화되었던 시대를 나라불교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는 교학의 수입경로에 따라 삼론(三論)ㆍ성실(成實)ㆍ법상(法相)ㆍ화엄(華嚴)ㆍ율(律) 등 6종의 학파가 나왔다.
나라시대(奈良:710~784)는 국가의 보호 아래 번영을 누렸지만, 동시에 승려들은 안일에 빠져 승풍이 타락하고 퇴폐하는 폐단이 생겼다. 승려가 정치에 깊게 개입하는가 하면 출가와 재가와의 구별도 뚜렷하지 않아 계율이 문란해졌다.
조정이 헤이안시대(平安:784~1185)로 바뀌면서 불교의 보호는 계속되지만, 그것은 국가에 유용한 인재를 배출키 위한 것으로 한정했다.
헤이안시대에 들어와서 일본에는 새로운 불교가 도입됐다. 최징(最澄)과 공해(空海)가 중국으로부터 천태(天台)와 밀교(密敎)를 수입한 것이다. 최징(最澄:766~822)은 당에 유학하여 천태교학을 배워 귀국한 뒤, 비예산(比叡山)에 연력사(延歷寺)를 세우고 천태교학의 바탕 위에 염불교ㆍ밀교를 도입, 일본 천태종의 개창자가 됐다.
공해(空海:773~835)는 최징과 같이 유학했으면서도, 장안(長安)에 머물면서 불공삼장(不空三藏)의 제자 혜과(惠果)로부터 진언밀교를 전수받아 고야산(高野山)에 새로운 도량을 세웠다. 천태와 진언은 교단조직을 확립하고, 서로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 점에서 일본 종파불교의 원형이 됐다.
헤이안시대 중기가 되자, 일본은 전통적인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귀족의 장원(莊園)이 출현했으며, 지방호족과 무사계급의 쟁투가 일어났다. 이러한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법연(法然:1132~1212)은 왕생(往生)을 위해 다른 잡행(雜行:염불 이외의 선(禪)이나 독경 등)은 버리고, 오로지 염불만 할 것을 제창했다. 그는 천태종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정토종(淨土宗)을 세웠다.
또 그의 제자 친란(親鸞:1173~1263)은 아미타불의 자비에 의해서만 왕생이 이뤄진다고 주장하고, 타력보은(他力報恩) 염불을 강조했다. 그는 다시 정토종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종파를 세웠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 최대의 종파가 된 정토진종이다. 정토종과 정토진종의 개종은 종래의 귀족불교가 민중불교로 전환된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가마꾸라시대(鎌倉:1185~1333)에 더욱 확대되어 불교는 완전히 일본민중에게 뿌리를 내렸다. 또 이 시대는 송(宋)과의 무역이 성행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선(禪)이 수입돼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영서(榮西:1141~1203)는 임제(臨濟) 계통의 선을 도입했고, 도원(道元:1200~1254)은 조동(曹洞) 계통의 선을 들여와 일본 선종의 창시자가 됐다.
가마꾸라시대 새로운 불교운동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일련(日蓮:1222~1282)에 의한 법화종(法華宗: 日蓮宗)의 개교다. 일련도 다른 종파의 조사처럼 처음에는 비예산에서 공부를 했으나, 법화경 하나만을 의지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세우고 독립을 선언했다. 일련은 독특한 교의의 주장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에 의해 막부(幕府)의 박해를 받아 한때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가마꾸라시대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교의의 중심은 염불과 선(禪) 또는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과거의 불교가 국가주의 또는 귀족주의였던 것과 달리 개인의 종교로 출발하여 민중 사이에서 교단의 기초를 확립한 것이 공통적인 특색이다.
가마꾸라시대 다음의 일본역사는 무로마찌시대(室町:1392~1477)로 접어든다. 이 시대에 이르면 불교교단도 정치와 경제가 변혁됨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는다. 무엇보다 장원(莊園)제도가 붕괴되자, 그것에 경제적 기반을 두었던 나라(奈良)나 교오또(京都)의 사찰들은 경제적으로 곤궁해졌다. 이런 궁핍상을 타개하기 위해 불교계는 밀교화되었다. 경제적 기반구축을 위해 어느 교단이든 가지기도(加持祈禱)가 일반화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원은 경제적 궁핍을 이기지 못해 황폐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이 시대는 농업기술의 진보와 농민의 자각에 의해 농민결속이 지방마다 일어났으며, 이것이 조직화되자 저항운동으로 바뀌었다. 불교는 이들 농민과 연합하여 자주 무사계급에 저항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한때 이들은 사찰에 사병(寺兵)을 두는 등 강력한 힘을 가졌으나, 결국은 패배하고 말았다.
불교교단으로 이 시대에 크게 번창한 것은 정토진종뿐이었다. 진종은 연여(蓮如:1415~1499)에 의해서 교리뿐만 아니라 세력 면에서도 크게 발전하여 본원사(本願寺)는 사실상 봉건영주적 세력이었다. 이 진종은 개인의 구제를 목적으로 했고, 호국기도는 관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상숭배와 습합하고 농민의 종교가 되기 위해 신도(神道)와는 결합했다.
또 누구나 행하기 쉬운 칭명염불을 제창하여 당시 민중의 고통을 종교로써 치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리하여 진종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세속종단으로서 혈연에 의해 상속되는 가장 일본적인 형태의 불교로 정착케 됐다.
이 시대는 진종뿐만 아니라 조동종ㆍ임제종ㆍ일련종ㆍ정토종도 일본적으로 변질되면서 일본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일본의 조사불교(祖師佛敎:종파불교)는 이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정착됐다.
그러나 다음 시대인 에도시대(江戶:1598~1867)에 이르면 가마꾸라시대에 서민화됐던 불교는 다시 국가불교 체제로 전환케 된다. 에도시대에는 조선을 침략했던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고 정치의 실권이 도꾸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로 넘어간 때로부터 시작된다. 이때의 불교교단은 새로운 봉건체제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다.
이 시대의 주역 도꾸가와막부(德川幕府)는 사찰이 강대한 힘을 가지고 농민들과 결속해 체제에 대항하는 것을 근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사찰을 무장해제시키고 불교교단을 국가가 직접 관리했다.
에도시대의 봉건제도 아래서 불교의 국가관리는 오늘의 일본불교를 지탱하는 단가(檀家)제도를 확립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도꾸가와막부(德川幕府)시대는 불교의 자유로운 포교활동의 금지, 사원건립 제한, 출가자의 제한 등 탄압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국가권력에 의한 본말사(本末寺)의 행정체계 확립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채택했다. 이것은 막부의 명령을 본산(本山)을 통해 곧바로 말사(末寺)까지 하달하는 체계로써 각 종파는 행정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는 결과가 됐다. 이 무렵 본말사가 불확실한 사원은 모두 폐쇄되었다.
막부는 불교종파의 행정체계 정비와 더불어 주지의 임면권까지 장악했다. 승려들은 주지가 되기 위해서는 막부가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했고, 그것은 불교 교학과 각종파의 종학(宗學)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동시에 각 종파는 경쟁적으로 학교를 경영하여 커다란 곳에서는 1천 명 이상의 학승이 모여 강의와 연구를 했다. 또 불교교단은 일반인들을 위한 강습소까지 개설해 불교를 일반민중에게 가르쳤다.
한편으로 막부는 그리스도교(切支丹) 금제(禁制)를 위해 불교를 이용하였고, 불교는 정치의 일단을 청부맡아 기독교 금제를 강화했다. 기독교는 1549년에 일본에 전해졌으나, 신사(神社)를 참배하지 않고 봉건무사의 풍습인 절복(切腹)을 부정하는 등 일본의 전통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배척됐다. 그리하여 기독교를 믿던 사람은 반드시 개종하여 불교사원에 신자등록을 시키고 그 증거로 사찰에서 증명서를 발급받도록 했다.
이런 일은 점차 기독교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일반민중에게도 보급시켜 혼인ㆍ여행ㆍ이사 등에서도 반드시 사찰이 발급한 증명서가 막부에 제출되어야만 하게 했다. 이것은 일종의 호적제도로써 막부가 불교를 억압하면서 동시에 불교를 위무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막부의 이 같은 불교관리는 오늘날 일본불교의 특색인 단가제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모든 주민이 어떤 형태로든 불교사원과의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고, 그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민중은 불교를 신앙케 되었던 것이다.
일본불교는 이 단가제도로 인해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불교를 체제 순응적으로 만들었다. 승려는 관료화되고, 안일과 타락이 생겨 에도시대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극심한 부패상을 노출케 되었다. 막부말기에는 이에 대해 불교계 내부에서 자기비판이 일어나고 계율 진작에 의한 승풍쇄신운동도 있었다. 하지만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맞이하자 배불론자(排佛論者)들에 의해 폐불훼석(廢佛毁釋)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명치 초기 일본의 국학자(國學者)와 신도자(神道者) 및 그들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1870년 신도(神道)에 의한 교육추진을 선포하여 신불(神佛)을 분리하는 정책을 취했다. 원래 불교는 도입이래, 신도와 습합하여 불사(佛寺)와 산시(神社)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을 분리하는 정책을 폄과 동시에 일어난 배불운동은 전통의 명찰(名刹)을 폐허화시켰다. 당시의 불교는 불상과 경전까지 소각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이와 함께 전통적으로 사찰이 발행했던 사령(寺領:사찰이 발행하는 각종 증명서)이 폐지되고 토지도 몰수됐다.
정치권력으로부터 하루아침에 줄 끊어진 연의 신세가 된 불교는 자위책으로 과거보다 더욱 신불일치(神佛一致)를 강조했다. 또 천황과 군국주의(軍國主義)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근대 일본불교는 일본군국주의가 저지른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2차대전)조차도 팔굉일우(八紘一宇: 온 세상이 한집이라는 뜻)의 성전(聖戰)이라고 찬양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불교는 천황에게 신권을 부여하고, 불교적 성왕(聖王)인 전륜성왕(轉輪聖王)과 동일시하여 이웃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마치 정법(正法)에 의한 정당한 행위라고 궤변을 일삼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부 양심적인 불교도는 이러한 그릇된 작태를 반성하고, 신앙쇄신운동을 일으켜 불교정신 회복에 앞장서기도 했다. 1932년 일련종(日蓮宗)의 매미의랑(妹尾義郞:1883~1961)이 주도했던 ‘신흥불교청년동맹’이 그 대표적인 예다.
신흥불교청년동맹은 첫째, 타락한 기성교단을 배격하여 불교의 참모습을 발양시키며 둘째, 분열된 불교계를 통일하여 추악한 종파분쟁을 불식(拂拭)시키며 셋째, 불타정신에 위배되는 군국주의를 배격하며, 자비와 평등의 불국토를 지상에 건설하겠다는 슬로건으로 한때 20개 지회와 수천의 회원이 참여했으나, 파시즘으로 흐른 국가체제에 의해 탄압되고 말았다.
일본불교의 역사적 특색 가운데 하나는 엄격한 종파불교(宗派佛敎: 祖師佛敎라고도 함)이다. 일본의 종파불교는 가마꾸라시대부터 시작하여 무로마찌시대에 이미 확립되어 최징(最澄)을 조사(祖師)로 하는 천태종(天台宗), 공해(空海)의 진언종(眞言宗), 법연(法然)의 정토종(淨土宗), 친란(親鸞)에 의해 확립된 정토진종(淨土眞宗), 도원(道元)에 의한 선종(禪宗), 일련(日蓮)에 의한 일련종(日蓮宗) 등이 독자적인 발전을 해왔다.
일본에서는 종파가 다르면 본존불(本尊佛)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가람배치양식, 가사의 색깔과 모양, 심지어는 독경(讀經)의 음률까지 다르다. 또 종파별 종학이 발달해 교의와 신앙, 수행방법, 그에 따른 성과도 분명히 다르다.
이 같은 종파는 1945년 전에는 13종 56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13종(宗)은 법상종(法相宗)ㆍ화엄종(華嚴宗)ㆍ율종(律宗)ㆍ천태종(天台宗)ㆍ진언종(眞言宗)ㆍ융통염불종(融通念佛宗)ㆍ정토종(淨土宗)ㆍ정토진종(淨土眞宗)ㆍ임제종(臨濟宗)ㆍ조동종(曹洞宗)ㆍ일련종(日蓮宗)ㆍ시종(時宗)ㆍ황벽종(黃壁宗) 등이었다. 그런데 종전(終戰) 이후에는 화종(和宗)ㆍ성관음종(聖觀音宗)ㆍ아함종(阿含宗)ㆍ변천종(辯天宗)ㆍ창가학회(創價學會)ㆍ입정교성회(立正佼聖會) 등이 더 생겨났다.
최근 발간된 일본의 《종교총감(宗敎總鑑)》에 의하면 일본불교의 종파는 7개 계통의 180파에 이르고 있다. 천태계가 20파, 진언계가 43파, 정토계가 25파, 선종계가 23파, 일련(법화)종계가 36파, 나라불교계(奈良佛敎系)가 6파, 기타가 27개 파다. 이 중 전국에 4천개 이상의 말사를 가지고 있는 종파는 천태ㆍ진언ㆍ일련ㆍ임제ㆍ정토진종 등 8개 종파이다. 이들 종파는 제각기 사회복지와 교육ㆍ해외포교에 나서고 있다.
현대의 일본불교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불교학에 대한 연구열의와 그 성과다. 불교교단에서 세운 4년제 대학만 해도 駒澤ㆍ大正ㆍ立正ㆍ臨濟ㆍ龍谷ㆍ大谷ㆍ花園ㆍ同朋대학 등 10여개가 넘고, 2년제 단기 대학은 이보다 훨씬 많다. 불교학자이 숫자는 ‘인도학불교학회’ 회원만도 2,500명이 넘는다. 오늘날 세계불교학계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은 이런 저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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