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5년 5월, 왜구는 120척의 대함선을 이끌고 남해안을 노략질하기 시작했다. 합포원수 류만수(柳曼殊)는 나주와 목포를 경비하고 있던 해도원수 정지 장군에게 구원요청을 했다. 정지 장군은 47척의 함선을 이끌고 밤새 달려와 섬진강 입구에 이르렀다. 왜구의 대함선 역시 남해 관음포에 도착해 있었다. 하늘은 무심케도 비가 비리고 있었다.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를 준비하고 온 정지 장군은 당혹스러웠다. 이미 진포에서 정박해 있는 왜선을 모조리 부숴버리며 화포의 위력을 경험한지라 이번 전투에서 화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승패는 알 수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전황이 긴박해지자 지리산 신령에게 기도했다.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전투에 있사오니 바라 건데 저를 도와 신(神)의 부끄러움이 없게 하소서”
노량해전을 앞두고 “나라를 위해 적을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라고 축천기도를 올렸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충심과 비견될 만한 기도였다. 하늘도 감응했는지 비는 금세 멈추었다. 화포를 앞세운 정지 장군의 함대는 단번에 적의 전함 17척을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도망가는 적을 쫓아 적량진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왜구는 고려를 침공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해상전투에서 처음으로 최무선의 화포로 왜구를 대파한 정지 장군을 기리기 위해 고현면 탑동에는 정지석탑이 세워져 있다.
물론 탑의 건축양식이나 두 가지 탑을 섞어서 하나로 조합한 것이라 다소간의 문제는 있지만 남해군에는 정지 장군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지 장군은 이듬해 문화평리에 임명되어 왜구의 침탈을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와 이키도의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388년 요동정벌 때에는 이성계 휘하에 예속되어 안주도도원수로 출전했지만 위화도 회군 때 돌아왔다. 이때 다시 왜구가 창궐하므로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적을 대파했다.
왜구를 무찌른 장군으로서 활약에도 불구하고 정지 장군 역시 우왕의 복위를 꾀한 김저의 옥사를 피할 수 없어 경주로 유배된 후 횡천으로 이배되었다. 「고려사」에는 정지 장군의 유배가 간단히 기록돼 있다.
“김저(金佇)가 옥 안에서 갑자기 죽으니, 저자에서 송장을 베었다. 김저가 진술한 말이 순군부의 관원과 많이 관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의심하였다. 이에 문하평리 정지ㆍ이거인, 전 판후덕부사 유혜손ㆍ이을진, 전 밀직 이유인ㆍ유번ㆍ조호ㆍ안주 등 27명을 귀양 보냈으니, 김저의 모의에 참여한 까닭이었다. 또 조방흥을 목베었다”
정지 장군은 위화도회군에 동조한 공이 있어 곧 풀려나 2등공신에 봉해졌다. 하지만 또다시 윤이·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다. 이성계의 권신제거를 위한 옥사의 희생양이기도 했지만 금방 풀려나 전라도 광주에 물러나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1391년 9월, 정지 장군은 다시 판개성부사에 임명되어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10월 15일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젊은 시절 왜구를 떨게 했던 정지 장군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은 너무나도 우호적이었다.
“판개성부사 정지가 졸하였다. 정지는 젊을 때 큰 뜻이 있고 자질이 뛰어나게 훌륭하였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였다, 장수가 되어 글 읽기를 좋아하여 대의에 통하였으며, 드나들 때마다 항상 서적을 지니고 다녔다. 윤이ㆍ이초의 옥사에 잡혀서 청주에 갇혔는데, 불복하며 말하기를, “이 시중(이성계)이 대의를 주장하여 군사를 돌이킬 때 내가 이윤ㆍ곽광의 고사로써 시중에게 암시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는데 다시 어찌 윤이ㆍ이초에게 편당하였겠느냐“ 하면서 말할 때마다 반드시 하늘에 맹서하며 말뜻이 사무쳤는데, 결국 수재 때문에 죄를 면하고 물러나와 광주에 있었다. 이때에 와서 왕의 부름을 받았는데, 나아가기 전에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