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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월
[鄭世月, 1896~1977]
본명은 인흥(仁興). 법호는 칠타원(七陀圓). 불법연구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서중안(秋山徐中安)의 부인. 최초 여자정수위단원 역임. 1896년 1월 26일, 전북 김제군 만경면 인흥리에서 부친 문명(文明)과 모친 이명인화(李明仁華)의 10남매 중 5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천성이 활달하고 근실했으며, 3살 때부터 백부 슬하에서 양육되어 16세에 서중안과 결혼했다. 전처소생의 딸 둘을 친딸과 다름없이 사랑하여 인근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부모를 효양(孝養)하며 하솔의 도도 분명히 하여 가족들이 모두 따랐고 이웃의 모범이 되었다.
1924년(원기9) 불법연구회 창립과 익산총부 건설에 초대회장인 부군과 함께 당시 3천여평의 기지 대금과 건축비 일부(6백여원)를 의연(義捐)했다. 1927년(원기12) 부군과 더불어 가산을 정리하고 교단 창업에 전무하기 위해 총부 구내로 이사했다. 그러나 부군은 우연히 발병하여 효차를 보지 못하고 1930년(원기15) 6월 2일 49세의 일기로 열반했다. 큰 슬픔이었지만 이를 이겨내고 1932년(원기17) 전무출신을 단행했다. 이후 총부식당 주임으로 7년간 알뜰한 공심으로 살림을 꾸렸으며, 1941년(원기26)부터 3년간은 총부 순교로 교화발전에 노력했다.
소태산대종사가 직접 여자정수위단 시보단을 조직할 때 여자정수위단의 일원이 되었다. 8ㆍ15광복 이듬해인 1946년(원기31) 전재동포구호소 주임으로 1년간 구호사업에 종사했으며, 1947년(원기32)부터는 총부 순교로 1년, 총부 내 감원으로 2년, 양로원 주임으로 1년을 일했다. 《회보》 제4호에 ‘공부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의 구별’이라는 감상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1935년(원기20) 동선 때는 소태산으로부터 초견성 인가를 받기도 했다. 1954년(원기39) 6월부터는 중앙수양원에 입원하여 수양에 힘쓰다가 1977년(원기62) 열반을 얼마 앞두고 ‘음력 구월 보름경에 가야겠다’고 미리 날을 받아 두더니 과연 9월 13일(양력 10월 25일) 82세로 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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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여성10대 제자
칠타원 정세월 정사
정신·육신·물질 다바친 생애
남편 서중안과 함께 3천여 평의 기지 대금과 건축비 6백여원을 희사해 익산총부 건설에 앞장 선 칠타원 정세월 정사.
원기9년(1924)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도록까지 실질적인 희사만행, 그리고 소태산 대종사가 봉래정사를 하산하게 되는 역사적 역할의 중심에 있었던 그의 일생을 이경진 교무가 '원불교 여성 10대 제자'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그는 "칠타원 정세월 정사는 삶에 대한 고단함 속에서도 무엇보다 제일 큰 기쁨이 대종사와 만남이었다"며 서중안 선생과 결혼한 이후 바뀐 칠타원 정사의 삶을 서술했다. 칠타원 정사가 부군 서중안의 인도로 소태산 대종사를 처음 뵙고 제자가 된 것은 원기8년(1923) 변산 봉래정사에서였다. 이때 소태산은 칠타원 정사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지중한 인연이 될 것임을 밝힌 대목이 나온다. "내가 오늘 어디를 좀 다녀오려고 행장을 차리던 중이었는데 어디선가 내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멈추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이렇게 조그마한 사람이 오는군. 하지만 영은 매우 크구나. 내가 장차 큰 회상을 열어 고해 창생을 다 제도하려 하니 그 대도 새 회상의 큰 주인이 되기 바라노라. 그대에게 세월이란 법명을 주노니 인간 세상을 밝혀 비춰주는 달 같은 인물이 되라."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칠타원 정사에게 뜻하지 않는 변고가 생긴다. 부군이 우연히 발병해 백방으로 치료에 힘을 써 보았지만 원기15년(1930) 49세에 애석하게 열반을 맞게 된다. 칠타원 정사는 말할 수 없는 큰 슬픔이었으나 이듬해 원기17년(1932) 전무출신으로 출가해 총부 공급주무·내감원·순교·중앙수양원 주무·감원 등 21년간 봉직한다. 또한 원기20년 동선에서는 소태산으로부터 초견성 인가를 받기도 했다. 원기30년에 칠타원이란 법호를 받고 여자수위단을 처음 조직할 때 곤방 단원이 됐다.
이 교무는 "칠타원 정세월 정사는 어릴적부터 아랫사람을 지극히 생각하는 게 남달랐다"며 "이러한 성품은 훗날 교단의 주인으로, 알뜰한 공심가로 이끌게 된다"고 말했다. 칠타원 정사는 1896년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 인홍리에서 부친 정문명과 모친 이명인화의 10남매 중 5녀로 태어나 16세에 서중안과 결혼했다. 천성이 활달하고 근실해 부모를 잘 모셨으며, 하솔의 도가 분명해 가족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이러한 성품은 훗날 출가해 감원으로서 총부 살림을 맡을 때에는 활달한 성격과 치밀한 보살핌으로 대종사의 수족 같은 역할을 했고, 후진들에겐 어머니 같은 따뜻한 인정을 베풀었다.
그는 "칠타원 정사의 남다른 하솔의 덕은 전재동포구호사업에서 크게 발휘됐다"며 "구호활동에서 급식을 총지휘하며 담당했는데, 하루 평균 20가마씩 모두 890가마니 밥을 지어날랐다"고 말했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일본 만주 중국 등지로 징용을 나갔던 전재동포들이 물밀 듯이 돌아왔는데, 전재동포구호활동은 9월4일 이리역전과 9월10일 서울역전에 '전재동포구호소'를 설치하면서 시작한다. 이리에서는 13개월 반, 서울에서는 6개월 반 동안 귀환 동포들에게 식사·의복 공급, 숙소 안내, 무임승차권 제공, 응급 치료와 분만 보조, 그리고 사망자에 대한 치상 등을 행했다. 대부분 구호물자는 미군이 제공했지만, 교도들의 성금과 성품, 시민들로부터 모집 및 기탁에 의지했다. 칠타원 정사가 있던 이리후생원은 1946년 10월26일까지 활동했다. 당국에서 지원하고 교단에서 후원한 식량은 890가마였는데 이 때 쉴틈없이 오직 봉공심으로 끝까지 일을 해냈던 것이다.
칠타원 정사는 제1대 성업봉찬대회를 마친 후 원기39년(1954) 6월부터 중앙수양원에 입원하여 수양에 힘쓰다가 원기62년(1977) 열반을 얼마 앞두고 "구월보름경(음력)에 가야겠다"고 미리 날을 받아 두더니 과연 음력 9월13일(10월25일)에 82세를 일기로 거연히 열반했다.
그는 "칠타원 정사는 대종사님 초창 회상 때부터 정신·육신·물질로 아낌없이 다 바치셨으면서도 후진 사랑과 사회 봉사 등 출가인으로서 인생을 크게 살다가신 분이다"며 칠타원 정사의 인생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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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없는 환자를 간병하고 장례도 치뤄줘
칠타원 정세월 정사(七陀圓 鄭世月·1896~1977) |
칠타원 정세월 정사
최도화 여쭙기를 “이 세상에 미륵불의 출세와 용화회상의 건설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사람이 많사오니 미륵불은 어떠한 부처님이시며 용화회상은 어떠한 회상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미륵불이라 함은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들어나는 것이요, 용화 회상이라 함은 크게 밝은 세상이 되는 것이니, 곧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대의가 널리 행하여지는 것이니라.” 장적조 여쭙기를 “그러하오면 어느 때나 그러한 세계가 돌아오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지금 차차 되어지고 있나니라.” 정세월이 여쭙기를 “그 중에도 첫 주인이 있지 않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하나하나 먼저 깨치는 사람이 주인이 되나니라.”
대종경 전망품 16장 말씀이다. 칠타원 정세월 정사는 불법연구회 초대회장을 지낸 서중안 선진의 부인으로, 그를 내조하여 새 회상 공개와 새 회상 건설에 정성을 다하며 소태산 대종사께 신성을 다했던 자랑스러운 선진이다. 하지만 그가 새 회상 건설에 끼친 영향에 비해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아서 원불교사에 남긴 자취를 더듬어 가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시창27년 여성 임원들이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기념촬영을 했다.
정세월 선진의 입교
칠타원 정세월 정사는 1896년 1월 26일 전북 김제군 만경면에서 부친 정문명 선생과 모친 이명인화 슬하에 10남매 중 5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천성이 활달하고 근면 착실했으며, 3살 때부터 백부 슬하에서 양육되다가 16살 되던 해에 서중안 선진과 결혼했다. 전처소생의 딸이 둘이 있었으나 친딸과 같이 사랑을 하여 인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칠타원 정사와 새 회상과의 인연은 장적조 선진을 연원으로 작은 아주버니인 서동풍 선진이 입교를 하면서 부터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서동풍이 입교를 하자 새 회상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할 기틀임을 한 눈에 알아보고 동남풍이 되라는 뜻에서 동풍이란 법명을 주었다. 당시 부안 변산에서 법명을 받은 제자 가운데는 유독 이춘풍, 장풍, 서동풍, 이청풍, 김순풍 등 풍자 돌림의 이름이 많았다.
이렇게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된 서동풍 선진은 그로부터 2년 후인 원기8년 7월 동생 서중안을 봉래정사로 안내해 입교시켰고, 서중안 선진은 그로부터 얼마 후 그의 아내인 정세월 정사를 인도하여 새 회상에 입교시켰다. 칠타원 정사는 김제를 출발해 부안, 줄포를 거쳐 종곡 이춘풍의 집을 경유해 실상초당에 이르러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할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세상을 비추는 달이 되라
초당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에는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그 위에 삼간초가 한 채가 커다란 바위를 끼고 들어앉아 있었다. 서중안, 정세월 부부가 석두암에 나타나자 육척 장신의 우람한 체구에 안광이 형형하게 빛나는 소태산 대종사가 마루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 칠타원 정사는 소태산 대종사가 초면이었지만 뵈는 순간 마치 친정 부모님을 만나듯 그렇게 반갑고 좋을 수가 없었다.
시창23년경 소태산 대종사와 제자들이 전주 다가공원을 방문했을때 사진.
소태산 대종사는 칠타원 정사에게 “내가 오늘 영광에 가려고 했는데, 아침에 좋은 기운이 뜨길래 손님이 올 것 같아서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소. 키는 조그만 하지만 영靈은 매우 크구려. 내가 장차 큰 회상을 열어 고해 창생을 다 제도하려 하니 그대도 새 회상의 큰 주인이 되기 바라오. 그대에게 세월世月이란 법명을 주니 인간 세상을 밝게 비춰주는 달 같은 인물이 되시오.” 라고 당부를 했다.
사실 서중안 선진이 대종사를 만나 사부師父의 예를 올린 뒤 한 달도 못되어 부인 정세월 정사와 함께 부안 변산을 다시 찾은 것은, 대종사의 웅대한 포부와 호대한 법을 장소가 넓고 교통이 편리한 곳에서 펼쳐, 천하 사람의 앞길을 다 열 수 있도록 대처로 모시고자 하는데 그 뜻이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 역시 마침내 때가 온 것을 짐작하고 모든 준비를 서중안 선진에게 당부한뒤 하산을 기다렸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로부터 정식으로 회상을 열 준비를 시작하여 마침내 원기 9년 4월 29일에 이리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열고, 그해 8월에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용리에 총부 건설의 기지를 확정하였다. 서중안 선진은 이날 창립총회에서 초대 불법연구회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3천여 평의 중앙총부 기지 매입 대금과 건축비 일부(6백여 원)를 의연하고, 총부기지 건설에 앞장섰다.
서중안 선진은 원기 12년(1927)에 이르러서는 교단 창업에 더욱 전력하기 위해 정세월 정사와 함께 그동안 벌여온 사업과 가산을 정리하고 아예 중앙총부 구내로 이사를 단행하였다. 하지만 서중안 정사가 뜻하지 않게 찾아온 병마로 인해 원기15년(1930) 49세를 일기로 열반하자, 칠타원 정사는 그 길로 전무출신을 단행하였고 외동딸 서공남도 어머니의 뒤를 따라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공부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의 구별
정세월은 원기 18년에 발행된 회보 4호에 ‘공부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의 구별’이란 감상문을 발표했다. 다음은 이를 정리한 내용이다.
제가 금년에 서숙(조) 농사를 좀 지은바 다행히 종자가 잘 발아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특히 한 포기는 다른 조보다 훨씬 잘 자라서 저는 밭에 다닐 때마다 재미가 나서 정성을 더 많이 들였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일기가 변화를 하면서 결실하는 것을 본 즉, 다른 포기에서는 보기 좋게 서숙이 많이 열렸으나 제가 정성을 많이 들이고 재미를 붙인 포기에서는 개꼬리(수강아지풀)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허망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습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 가지 깨친 바가 있었습니다. 범상한 사람의 안목으로 이 세상 사람들이 하고 사는 것을 보면 제가 서숙과 개꼬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같이 도학공부를 하고 사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고 되는대로 지내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이 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부를 하고 지내는 사람이라고 저 세상 사람들보다 별로 나은 점도 없고, 공부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이라고 공부하고 지내는 사람보다 별로 못한 점도 없이 보일 것입니다. 도리어 우선 잘 먹고 잘 입는 것만 보아서 제가 저 잘된 개꼬리를 참 서숙보다 좋게 알듯이, 공부를 하지 않고 되는대로 지내는 세상 사람들이 훨씬 좋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만 잘 하여 삼대력만 충분히 얻고 보면 지금은 별 볼 일 없이 보일지 모르나 언젠가는 반드시 공부한 효력이 나타나서 무한한 복락도 받을 것이요 영명 榮名 을 천추에 영전할 것이며 내생에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않고 되는대로 지내는 사람은 생전에 아무리 천지를 뒤흔들고 지냈다 할지라도 잘된 서숙 포기에서 개꼬리가 나오듯이 보잘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도학공부의 가치를 알아 열성으로 정진했던 정세월 정사는 원기 20년 을해동선때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초견성인가를 받았다. 정세월 정사는 전무출신 후 식당 주임으로 봉직하며
7년간 알뜰하게 살림을 꾸렸으며, 원기 26년(1941)부터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에 들기까지 3년간은 중앙총부 순교로 교화 발전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칠타원 정사는 천성이 활달하고 근실해 부모에 효를 다하였으며, 하솔의 도가 분명해 가족들이 모두 그를 잘 따랐다. 이러한 성품을 바탕으로 간고한 총부 살림에 책임을 다하면서도 후진들에겐 늘 어머니 같은 따뜻한 인정을 베풀었다. 종기가 나서 고통 받는 후진들의 환부를 입으로 빨아 치료할 정도로 사랑을 지녔고, 집에 찾아든 연고 없는 환자를 간병하고 치상의 도를 다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8.15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는 이리역 앞에서 전재동포구호소 주임으로 근무하며 1년 간 구호사업에 최선을 다하다가 원기 39년 59세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중앙수양원에 입원해 정양에 힘썼다. 원기 62년(1977) 열반을 얼마 앞두고 구월 보름경에 가야겠다고 미리 날을 받아두더니 9월 13일 열반에 들어 9월15일 발인했다. 그의 나이 82세였다.
칠타원 정세월 정사 약력
1896년 1월 26일 전북 김제에서 출생
원기 8년(1923) 입교
원기 17년 전무출신 서원
원기 20년 대종사로부터 초견성 인가
원기 30년 칠타원 법호 수증
최초여자수위단원 피선
원기 62년 음 9월 13일 열반
ㆍ 일화
불법연구회 회장 서중안의 부인 정세월이 원기 10(을축, 1925)년 여름에 하선을 나기 위해 본관 근방 내곶리에 거처를 정하고 석달간 선방에 내왕하였다.
정씨는 본관에 사는 회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사로 보지 않고 유념해서 보았다. 모두 생불님의 제자들이니 필시 법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며칠 먼저 익산본관에 온 정세월은 과연 도인들 사는 데가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마침 끼니 때가 되어 서무부의 송도성 서기가 우물가에서 양식을 일고 있었다. 미상불 조리질하는 것이 세상 사람과 달랐다. 조리질을 하는데 고개를 훼훼 돌리며 일었다.
『아하, 보리쌀 이는 것도 과연 법도가 있는구나』정씨는 집으로 돌아와 쌀을 북북 씻어 몇 차례 뜨물을 일구어 낸 뒤 새 물을 적당히 받은 다음 고개를 훼훼 내두르며 조리질을 하였다. 안 하던 짓을 하니 고개가 아프고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었다. 법 있게 공부하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구나 싶었다.
『엄마, 무슨 조리질을 하면서 고개를 훼훼 내저어?』전에 안하던 모양을 보고 작은 딸 선암이가 물었다.『너는 모른다. 법도 있게 쌀을 일 땐 고개를 내두르는 법이란다.』나중에 서중안이 이 소릴 듣고 나무랬다.
『누가 그런다냐. 별 소릴 다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