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생으로 충북 진천이 고향인 정운갑은 한국근대사의 굴곡점마다 시류에 편승하여 출세를 거듭하여 왔다. 일제 말기 중일전쟁 등 일제가 자신의 제국주의적 책동 속에서 지배 관료 기구 내에 한인을 대폭 충원하던 시기, 그리고 미군정하에서는 좌익의 대항 세력으로 일제 관료 기구를 복원시키던 과정에서, 또한 한국전쟁 이후에는 경제개발계획과 경제안정화 정책에 따라 기술 관료의 필요가 증대되었을 때, 그뿐 아니라 유신 체제하의 권위주의적 통치 행위가 극치에 도달하였을 때, 그뿐 아니라 유신 체제하의 권위주의적 통치 행위가 극치에 도달하였을 때 등 한국사회의 중요한 변환점마다 정운갑은 관료로 혹은 정칭니으로 자신의 영달을 이룩하였다.
성운갑은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0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1938년에 졸업하고, 충남 군속으로 근무하다가 1943년 일제 기시 고위 공직자 선발 시험인 고등문과시험(이하 고문)에 합격하면서부터 출세 가도를 구가하기 시작한다. 당시 학교는 반식민투쟁과 출세라는 이중적 장의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정운갑은 경성제대 법학부라는 최고의 대학을 나와서 고문(高文)시험에까지 합격하여 엘리트로의 경력을 쌓아나갔다. 일제 시대 고문시험은 고급관료료의 진출이 보장되는 길이었다.
일제 시대에 관료를 지낸 경우는 대개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 유형은 대한 제국의 관료였다가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일제 관료로 중용된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오늘날의 중학교 졸업 수준의 학력 소지자로 토지조사사업의 말단 실무에 종사하다가 문관시험에 합격하여 하급관리로부터 출발한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1930년대에 고급관료의 등용문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이들 고문합격자들은 초스피드로 승진하여 임관된 지 10년여에 도참여관까지 진출했고, 사무관급으로서 차지할 수 있는 요직 중의 요직인 총독부 과장 혹은 고급관원으로 발탁된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해방 후 신생대한민국 정부의 고급관료, 나아가서 역대 정권의 권력 엘리트로 등장한 것이 다름 아닌 이 네 번째 유형의 사람들이다(이기동,「일제하의 한국인 관사들」,『신동아』, 1985년 3월호, 458쪽). 정운갑 역시 이 네 번째 유형으로 일제 관료로 진출하여 권력 엘리트가 되었다.
일제 시대 관료는 천황의 관료로서 통치하의 동포들을 집적 상대하면서 그들 위에 군림하였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이후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급격하게 증가하는 국가 활동을 감당하기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실질적인 실현과 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관료 조직 내에 한인 관료를 대거 충원하다. 일제의 식민통치 초기에 관료 대부분이 일인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제 식민통치 후기에 오면 관료 내에서 한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증가한다. 특히, 대개 하급관료로 기용되었던 한국인 출신자들은 1931년 고문시험의 설치와 함께 상층으로의 진출을 도모하게 된다 한인 관료의 증가 경향이 진척된 관료 기구는 전시 동원과 감독을 더욱 강화하는 도구로 일본의 더욱 악랄한 제국주의 정책의 수족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이른바 '고도방위국가의 건설'이라는 허울좋은 이름 아래 전쟁 수행을 위한 갖가지 행정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차츰 인적ㆍ물적 자원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이 암흑기에 들어와 한국인 관료 사회는 크게 바뀌었다. 이 시기 행정의 기본적인 흐름인 통제 강화와 전시 체제의 수행에 적합한 새로운 관료들이 대거 등장했고, 종래 한국인 관리의 일반적인 특성이었던 일본인 관리에 대한 수족적인 성격이 차츰 변해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관료상으로 바뀌어져 갔다. 당시희 고학력자들의 대량 출현과 특히 소수이기는 하나 1929년부터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생들의 배출이 있었다. 고학력자의 대량 출현과 더불어 경제사정의 악화로 인하여 대학졸업자 상당수가 일제 관료로 지원을 시도하였다. 특히 이 시기 한국인 관료들은 스스로가 통제형 관료로 변모해 간다(「일제하의 한국인 관사들」,『신동아』, 1985년 3월호). 1931년부터 1943년까지 매년 시행된 고문시험을 통해 일제 때 상층 한국인 관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로써 관료 출신으로 '고문 그룹'이 형성되게 되었다. 고문시험에 합격한 자들은 모두 133명에 달하고 있다. 1943년 한국인 합격자들은 모두 22명인데, 그 중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창씨명으로 되어 있다. 1943년 고문합격자들 역시 대개의 경우 출세 가도를 구가하였으며 여기서 정운갑은 더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고 있다.
관료의 영예인 장관이 되다
정운갑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관계(官界)에 머물러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하여 직급을 높여 갔다. 해방과 미군정의 수립과 함께 일제 시기의 관료 기구는 신속히 복원되었으며 미군정은 이를 통해 군정통치를 수행하였다. 당연히 정운갑 역시 해방 이후 중앙관료로 계속 남아 있게 되었다. 특히 미군정의 관료 조직은 일본 총독부의 구조를 모방하여 중앙집권적 구조를 더욱 강화했다. 정운갑 역시 자신의 직급을 중앙으로 계속 높여 갔다. 1945년 경기도 지방과장을 시발로 하여 1946년에는 경기도 인사처장, 1951년에는 총무처 경리과장, 총무처장, 내부차관을 거쳤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자 정부는 남북통일과 경제 안정 및 전쟁 복구를 국가의 당면 목표로 하여 경제 안정과 회복을 위하여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은 경제부 처장으로 임용하기 시작하였다. 경제 안정과 전화 복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제 때 소위 실무경력이 있는 인물들이 대거 기용되어, 경제 재건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들이 이들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한국의 정치변동과 관료제, 1945~1972 :국가관료제의 변천 과정 >, 94쪽).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운갑은 농림부 장관이라는 직책을 맡게 된다. 당시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시 농업은행과 농업조합 등의 사안들이 다루어졌다. 또한 대충자금 등에도 농림부 장관이 관여하였다. 대충자금(counterpart fund)은 당시 한국정부가 가지고 있던 중요한 재원이었다. 농림부 장관 재직시 '청와대 화재 사건'이 발생하여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반려되기도 하였다(『동아일보』, 1957년 2월 21일자). 이를 두고 당시 대단한 운의 소유자라고 회자되기도 했다.
제1공화국 시대에 있어서 일제 시대 관료들의 사상과 행동에 대해 박동서 교수는 "그들은 자기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보장해 주는 한에 있어서 대통령(행정부)애 충실했으며, 그의 호감을 사는 데만 경쟁하였다"하고 평가하는데, 아마 정운갑은 이러한 대통령의 신임을 톡톡히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제1공화국 당시 자유당과 관료는 상당한 정도의 밀착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서로간의 인적 교루 역시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장관들은 대개의 경우 장관직을 그만두면 이후 자유당으로 들어가 정계로 입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운갑 역시 장관이라는 자리에 오른 이후 정계로 진출하였다. 그는 1958년 자유당 공천으로 진천에서 출마하여 당선된다.
"政운갑"이라는 별명도
정운갑은 장관이라는 자리까지 오를 정도로 관운이 있었던 것처럼 정치판에서도 실패를 모르고 승승장구하였다. 1957년 장관직을 그만둔 후 1958년 자유당 공천으로 진천에서 출마, 4대 민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 놓은 후, 5ㆍ16군부 쿠데타 이후 신민당에 입당한다. 민중당(民衆黨)측의 유진오(兪鎭午) 계열과 신한당(新韓黨)측의 윤보선(尹潽善)계, 그리고 재야측의 통합으로 이루어진 야당에 정운갑은 윤보선계로 참여하게 된다. 이후 신민당의 대통령 선거 분비 과정에서 재정위원장이라는 요직은 차지하게 된다. 또한 1969년 신민당의 개헌 저지 투쟁위원회의 기획위원으로 인선되는 등 당 내에서 자신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나갔다. 이후 당 내 반란 세력의 응징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해산과 재창당 과정에서도 정운갑은 발기인으로 포함된다(《대한민국정당사 제1편》).
1973년 유진산(柳珍山) 총재 때는 정책심의회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제7대 국회에는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고, 제8대 때 성울 성동ㆍ강남구로 옮겨 제10대까지 5선 의원을 지낼 정도로 정치운이 따랐다. 농림부 장관 시절 '청사 화재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으나 반려된 데서 얻은 별명인 '政운갑"은 그의 정치 활동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정운갑은 대체로 원만하고 과묵한 성격의 5선 의원으로 평가되었다. 대체로 한국의 야당사는 파벌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면서, 반독재 투쟁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분열과 반목 그 차제였다. 이러한 분열과 반목의 대표적인 사례가 소위 '각목 대회'이다. 1976년 5월의 신민당 전당대회는 당권파와 비주류 연합의 대결이었다. 이철승(李哲承)이 중도통합론을 주장하면서 주류 김영삼계에 맞선 대회였는데, 이 비주류 연합의 중심 인물들에 이철승, 신도환(辛道換), 고흥문(高興門), 정해영(鄭海永), 김원만(金元萬) 등과 함께 정운갑도 들어가 있었다. 정운갑은 오세응(吳世應) 등 13인의 중도파와 함께 비주류의 반김영삼 대열에 동참하였다(≪야당40년사≫, 337쪽). 이들의 연합을 통해 이철승이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신민당은 중도통합론의 기조하에 강경한 대정부 투쟁보다는 협조와 타협이 강조되게 되었다.
중도통합론의 지지로 김영삼에 반대했던 정운갑은 신민당 가처분 결정을 둘러싸고 다시 한 번 김영삼 체제와 대결한다.
장관에서 권한 대행으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인에 의해 총재단의 직무 집행 가처분 신청에서 비롯된 신민당 가처분 사태는 유신 시대 야당의 분열과 위기가 최고 정점에 달한 사태이다. 특히 유신 수립 이후 박 정권이 자신의 정권 기반 강화를 위해 야당에 대한 공작과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상황하에서 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그 심각성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유신 정부는 김영삼의 발언과 행위 및 대여 강경 노선에 대해서 제거할 필요성을 심각히 느끼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태의 극적 표현이 신민당 가처분 사태였다. 어린 여공의 생존권 요구를 폭압적으로 탄압한 YH사건과 이에 연이어 나온 신민당 가처분 조치는 유신이 파국을 향해 가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10월 1일 세 차례의 심리 후 서울 민사지법 합의 16부는 총재단의 직무 집행 정지 신청이 이유 있다는 판결과 함께 총재 직무 대행으로는 정운갑 전당 대회 의장을 지명했다. 이러한 법원의 결정에 대해 신민당은 이 나라 민주주의와 사법권 독립에 조종(弔鐘)을 울린 것이라고 비난하고 정치 재판에 승복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김영삼 총재 역시 불복을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나는 오늘 서울민사지법의 신민당에 대한 결정은 야당을 말살해 정권의 영구화를 기하려는 박 정권의 부도덕한 정치음모에 사법부가 하수인 역을 맡아 조작된 비극적 소산으로 규정.....모든 계층의 국민의 힘을 집결하여 범국민적 항쟁을 할 것이며, 이 항쟁을 통해 박 정권의 타도 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야당40년사》, 363쪽).
이러한 불복 성명 등의 사태가 있을 후 정운갑 대행은 김영삼을 비롯하여 중진급의 면담을 신속히 개최하고 법원의 결정에 승복하는 차원에서 당의 수습을 제시하였고, 이에 김영삼 등 주류측은 이를 완강히 반대하였다. 당 내 이철승, 신도환으로 대표되는 비당권파는 악법도 법인 이상 따를 수밖에 없다면서 정운갑 체제를 지지하였다. 여기서 당시 정운갑과 김영삼의 대담 한 토막을 인용하고자 한다.
정: 이왕 왔으니 얘기하자.
김: 무엇이 그렇게 급한가.
정: 당이 혼란이 났으니 그런 게 아니냐.
김: 뭣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러느냐. 나는 평소 정 의장을 존경해왔다.
정: 지금 보니 개떡같이 생각하는 게 아니냐. 오늘 얘기 못한다는 이유가 뭔가? 사람 대접을 이렇게 하는 거냐.
김: 그런 식으로 얘기 말자.
정: 지금 현실은 분명히 유고이고 혼란 아닌가. 나는 당헌에 따라 나선 것이다.
김: 그것은 당 내부의 결정이어야지 법원 결정이 만든 혼란을 왜 우리가 혼란으로 받아 들이냐, 전당 대회 결정도 살아 있고 당론도 그대로인데 왜 유고인가?
정: 그것은 혁명가나 할 얘기고 김 총재가 할 자격이 없다.
김: 8ㆍ24정무회의 결의가 당론이며 전당 대회 때 방망이를 두들긴 사람이 정 의장 아닌가.
정: 내가 방망이를 친 것은 표수의 집계를 발표한 것이다. 유고도 아니고 혼란도 아니라면 얘기가 안 되는 것이 아니냐. 12시가 되려면 시간이 있는데 이런 얘기만 할거요
(「정운갑 총재대행」, 『서울신문』, 1979년 9월 17일자).
이러한 정운갑의 태도에 대해 주류측에서는 면담의 관례상 이례적인 심야 방문을 성토하면서 이는 정 의장이 무엇엔가 쫓기고 있는 것 같다라는 평가와 함께 정 의장이 대행직을 수락하면 그 뒤에 오는 모든 책임과 국민의 심판이 정 의장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운갑은 법원의 결정에 승복을 주장하며 비주류계를 중신으로 당의 운영을 시도한다. 그는 9월 17일 대행직을 수락했다.
물론 정당 내부의 문제를 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은 정치가이지 혁명가는 아니다. 야당도 헌법 안의 정당이니 만큼 법원 결정을 부인할 수도 없지 않은가.............모든것을 수습위 결정에 따르겠다. 법보다도 정치적인 합의로 운영해 나가겠다 (「내 사명은 빨리 수습대회 여는 것」, 『동아일보』, 1979년 9월 18일자).
정운갑은 소속의원들을 접촉한 결과 대행직을 맡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 의원이 43명으로 이를 반대하는 13명보다 많아 다수 의사에 따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총재대행직을 등록, 합법성을 승인받았다. 하지만 이후 김영삼 지지 결의 서명 운동에서는 42명의 소속의원이 호응한 결롸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비서명의원은 25명밖에 되지 않았다. 정운갑과 그 지지측은 합법성만을 인정받았을 뿐 권한 행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야당40년사》. 하지만 합법성만 가진 신민당 가처분 역시 10ㆍ26박정희 암살 사건과 유신 정권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다.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서 관료 기구는 일본 본국의 제국주의적 수탈과 동원을 위한 기관으로 경찰과 군과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조직이다. 특히 일제의 신민지 통치 지배는 다른 나라에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식민 통치 관료 기구의 비대화를 가져왔다. 이는 일제의 식민 통치의 폭압성과 관료 기구가 수행한 역할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러한 관료 기구는 단지 일제 시대의 폭압과 수탈의 도구로서의 기능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 특히 해방 공간에서 미군정하에서도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미군정은 일제 관료 기구의 신속한 복원을 이루고 이에 절대적으로 의자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일제 이후 한국의 비대한 관료 기구는 그 연속성을 계속 유지하였으며 특히나 일제 시대 관료로 복무한 이들의 인적 연속성이 계속 되었다. 이들 관료들은 자신들이 쌓은 경력과 부를 기반으로 정치권으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한국근대사의 한 흐름 속에서 정운갑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해방 후 요직 오른 친일관료 정운갑
1913년 생으로 충북 진천 출신인 정운갑은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거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 법문학부를 1938년에 졸업, 1943년 일제 시기 고위 공직자 선발 시험인 고등문과시험(이하 고문)에 합격한 전형적인 직업관료출신이다.
자칭 이 사회의 주류라는 사람들의 입을 빌리자면 정운갑은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일제하 경력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이 빨리 패전하여 그가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고문 출신자들은 구한말 관료였다가 한일합방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총독부 관료가 된 경우나 면서기처럼 총독부의 말단 관리와 달리 철저하게 일제에 충성하기로 결심하고 그야말로 프로의 길로 나선 확신범이라 할 수 있다.
1930년대부터 시행된 고문시험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이 안정화되면서 친일 엘리트관료의 등용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즉, 정운갑은 만 30세의 나이에 그의 인생의 목표를 일본의 관료로 정한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을 거쳐 그대로 대한민국의 관료가 된 일제 관료 출신들은 자신들을 pro-Jap(일본 협력자)이 아닌 pro-Job(직업 관료)이었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기도 하였다.(이 말은 조병옥 미군정 경무국장의 말로 해방 정국에서 좌익 색출에 앞장섰다.)
정운갑 역시 해방 후, 일제관료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이승만 정권아래서 총무처장, 내무차관, 농림부장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유달리 관운이 많은 그를 두고 주변에서 ‘정(政)운갑’이라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다.
박정희의 5·16쿠데타이후 새로 만들어진 신민당에 윤보선계로 참여한 이후 그는 1958년 이후 1978년까지 5선의 국회의원이 된다.
유신이 종말을 고해가던 시기인 1979년 야당인 신민당 내부에선 이철승을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타협과 협조를 기조로 하는 이른 바 ‘중도통합론’ 세력이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강경노선에 반기를 들고일어났다.
정운갑은 여기서 ‘중도통합론’쪽에 선다. 결국 ‘중도통합론’이라는 것은 박정희 정권에 백기를 드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정국은 10·26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접어드는데 당시 신민당 내분 사태에 박정권이 깊숙히 개입되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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