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개인요 ‘도강요’ 설립, 전국서 작가들 모이다
일본의 첫 전시회를 다녀온 이후 이야기로 잠시 건너가보자. 일본에서 심수관 선생을 만나 도자기를 만드는 공방을 둘러보며 나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는 계기가 됐다.
심수관 선생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 주민들은 도자기 사업이 지역 전체를 먹여살리는 사업이라는 생각에 아주 귀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도자기만을 위해 계획에 없던 간이역을 세우고 지역 정치인들도 도공들을 귀한 사람으로 대접하는 모습은 강진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이었기에 생소하면서도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심수관 선생에게 지역 정치인들조차도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는 모습은 가치 충격이었다.
이렇게 일본을 둘러보고 난 후 나는 강진의 청자산업이 나가야할 길에 대해 보다 더 고민하고 연구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평소 친분이 있었던 칠량의 윤도현에게 전해주었다.
윤도현은 대학교에서 화공학을 전공하고 칠량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평소 도자기와 청자에 관심이 많았기에 나는 일본에서 본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이때 칠량에는 윤도현의 지인이 흙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때 이미 칠량 봉황에서는 옹기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흙에 대한 수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도현은 나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뒤로 도자기에 뛰어들었다. 이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화공학에 대한 지식을 도자기에 접목하기로 하고 칠량에 있던 흙공장의 흙으로 도자기 제작에 들어갔다.
이때 칠양의 주조장을 매입해서 그곳을 공장으로 활용했다. 나는 윤도현에게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과 흙을 고르는 방법, 강진에서 좋은 흙을 구할 수 있는 곳 등 여러 가지 노하우와 방법, 지식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이시기에 윤도현은 강진에서 최초 민간요인 도강요를 설립하게 됐다. 이때만 하더라도 청자생산은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에서만 이뤄졌고 청자사업소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관청 중심으로 청자 생산이 이뤄지고 있었다. 청자로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청자를 생산하면서 도자기로 유명한 이천 등에도 자주 찾아가 사람들을 만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이때 그곳에서 활동했던 여러명의 작가들도 청자 소식을 전해듣고 강진에 정착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추진위 시절 나와 함께 일했던 윤태영 작가도 고려청자박물관 근무를 거쳐 퇴직후 개인요를 설립했다.
또 김경진 작가와 이천에서 주로 활동했던 윤윤섭 작가도 흙을 구하기 위해 강진을 찾은 것이 인연되어 강진에 정착해 청자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윤도현의 도강요 설립을 시작으로 80년대말부터 90년대까지 줄줄이 개인요 업체들이 줄지어 들어서게 됐다. 이때 청자사업소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중 사업소를 퇴직하고 개인요를 창업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2000년대 이후에는 젊은 작가들도 강진으로 찾아와 작품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생겨나면서 오늘날 강진의 청자산업이 형성됐다.
개인요 초창기에는 매병과 주병과 같은 전통적인 고려청자를 재현한 작품들이 만들어졌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확대되면서 개인요업체에서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다기세트와 생활용기 등을 제작에 초첨이 맞춰졌다.
재현에서 시작됐던 청자는 이제 강진의 대표적인 산업이 됐으며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발전을 거듭해가고 있다. <정리=오기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