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꽃무늬가 그려진 잠옷을 입은 채로, 어떤 전원 주택의 이층 창가에 있는 낡은 휠체어 위에 앉아 있다. 꼼짝 않고 있는 그는 잠이 든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잠이 들어 있다. 그는 꿈이라도 꾸는 듯 이따금 불규칙적으로 몸을 뒤척이기도 한다. 가지런하지 않은 백발이 그의 머리를 덮고 있고,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에 머리칼이 조금씩 흩날리고 있다. 잠시 후 그가 천천히 눈을 뜬다. 깜빡 졸았던 모양이군. 갈수록 이렇게, 나도 모르게 잠이 드는 일이 잦아지는 거 있지. 아마 이건 오래지 않아 들게 될, 죽음이라는 영원한 잠에 적응하기 위한 내 나름의 노력의 한 과정인지도 모르겠어. 이미 나는 죽음이 매순간 기다려지는 나이에 이르렀으니까. 그는 손을 들어 입가를 훔친다. 다행히 침까지 흘리며 자지는 않은 모양이군, 아니면, 자던 중 흘린 침은 자는 사이에 모두 말라버렸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상관이 없지. 내가 모르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나는 상관하지 않는 편이니까, 물론 그것이 상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일 때에 한해서이지만. 그는 목 언저리가 뻐근하기라도 한 듯 목을 몇 차례 주무른 후 생각에 잠긴다. 자고 나면 꼭 이렇게 목을 주무르게 된단 말야. 하지만 내가 이렇게 목을 주무르는 건 목이 뻐근해서라기보다는, 자고 난 후면 늘 습관처럼 이렇게 목을 주무르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서일 거야. 이처럼 나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이유가 있어서라는 생각을 하기를 좋아하지. 그래, 중요한 건 자신이 하는 무슨 일에서도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는 거야, 마치 이유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그런 건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 천장을 올려다본다. 다행히도 천장에 박쥐들이 매달려 있지는 않군. 최근 들어, 가끔 잠에서 깨어 천장을 올려다보면 동굴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시커먼 박쥐들이 날개를 접은 채로 어둠 속에 무리를 지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게 보여. 그것들은 아주 조용히, 마치 나를 노리기라도 하듯,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천장에 붙어 있어, 최소한 내게 들리는 소리는 내지 않아. 나는 박쥐들이 내게 해를 끼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데, 처음에는 몇 마리 되지 않던 것들이 내가 보는 앞에서 삽시간에 무수히 불어나지. 그것들의 모습이 끔찍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아. 끔찍한 건 어느 순간 그것들이 마치 더이상 매달려 있을 힘을 잃은 것처럼 아래로 떨어져내리는 거야. 그럴 때면 나는 그것들을 털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그는 방 안을, 마치 처음 그곳에 있게 된 사람처럼 한번 둘러본다. 모든 건 여전히 그대로군,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 달라질 이유도 없지만, 달라져서는 안 될 이유도 없는데도. 한데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걸 어떻게 알지? 내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잠이 들기 전, 이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면밀하게 점검을 했기 때문이지. 이 방에 있는 사물 중 나의 감시와 보호를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이 방의 사물들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나로 인해 책상은 책상일 수 있고, 휠체어는 휠체어가 되는 거지. 사물들에 대한 우위를 나는 나의 생각으로나마 확보하고 있지. 하지만 그 사이 모든 게 조금 더 낡고, 닳은 것이 틀림없어, 비록 내가 알아차릴 수는 없지만. 그런데 그 사이 누구도 이 방에 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야, 들어온 사람이 없으니 나간 사람도 없겠지? 아니, 어쩌면 아들놈이 나 몰래 들어와, 조용히 내가 자는 모습을 훔쳐본 후 나갔는지도 몰라. 그는 집에 있을 때면 가끔 그렇게 내 방에 들러 내가 죽지는 않았는지 확인을 한 후 돌아가곤 하니까. 아직은 죽으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하겠군, 그렇다면 좀더 시간을 줘야지, 하고 그는 생각하며 나를 내려다본 후 조용히 밖으로 나갔을 거야.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가 나를 찾는 경우는 드물어, 아마 내가 그의 뜻대로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인 것 같아. 그는 귀를 기울인다. 주위는 조용하군. 아들놈은 집에 없는 것 같아. 요즘은 집에 붙어 있는 경우가 드물어. 여러 가지 일로 바쁜 척을 하는데 실제로 바쁜 모양이야. 며느리는 안방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겠지? 그녀는 자신이 잠을 자는데 내가 소리를 내 방해를 하면 몹시 싫어하지. 그런다고 내가 조심을 하는 건 아냐. 나는 누구의 눈치를 보며 뭘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지는 않아. 그럼에도 집 안에 있을 때면 될 수 있는 한 조용히 하려고 하지. 아니면 그녀는 무료해져 쇼핑을 하기 위해 외출을 했는지도 몰라. 시간을 보내기에는 쇼핑만한 게 없지. 며느리는 아직 철이 없고 씀씀이가 헤픈데다가 게을러빠졌어. 하지만 며느리에게는 귀여운 구석이 있는데, 그것은 아들놈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거야. 내가 둘 중에 어느 한쪽을 편애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말하라면 며느리에게 좀더 애정이 가는 것이 사실이야. 그리고 며느리에게는 착한 구석도 있지. 내게도 잘하려고 애를 쓰는 편이야. 그것이 내게는 별로 소용이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게 확실한지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인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군. 그리고 누구도 내가 혼자 하는 말을 엿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누구도 귀를 기울일 만한 말을 내가 하는 일은 없으니까. 나야 항상, 혼자 해도 좋지만 하지 않아도 좋은 말을 할 뿐이니까. 그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는다. 그런데 이렇게 귀를 막으면 온갖 소리들이 들려온단 말야, 귀를 막기 전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귀에서 손을 떼면 사라지는 소리들이,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내 안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소리들이, 그 소리들이 시끄러울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소리까지. 하지만 이 소리들이 뭐가 어떻다는 얘기는 아냐. 결국 그것들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니까. 그는 방문 쪽을 흘낏 쳐다본다. 방문은 살짝 열려 있다. 저렇게 문을 열어놓은 것은 아들놈이야. 그는 그가 나를 방 안에 가둬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항상 저렇게 열어두지. 물론 그가 나를 이 방에 가둬놓은 건 아냐.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기를 좋아하지만. 실제로 나는 내가 원하면 언제든, 문 밖으로 나갈 수 있어. 나간다고? 그래, 나갈 수는 있지. 하지만 문 밖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멀리는 갈 수 없어. 아래층으로 나 있는 계단이 버티고 있어 굴러 떨어지거나 하는 식이 아니고는 계단을 내려갈 수는 없으니까. 때로는 그러고 싶은 충동도 들지만, 그래서 완전히 뻗어버리고 싶기도 하지만…… 이성의 고삐를 완전히 늦추는 건 생각 이상으로 힘든 일이야. 문제는 이성을 잃을 때조차도 이성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이성이라는 놈은 정말이지 거머리같이 질긴 놈이야. 이성만큼 자신을 완전하게 마비시킬 수 있는 것도 없지. 내가 생각하는 이성이라는 놈의 모습은 깍지 낀 두 손으로 자신을 부둥켜안은 채로 완고하게 앉아 있지, 끝내 자신을 풀기를 마다하며…… 하긴 정말로 계단을 내려가고 싶을 때는 아들놈에게 부탁해, 물론 그가 집에 있을 때 얘기지만, 계단을 내려갈 수는 있어. 내가 부탁을 할 때면 그는 뼈밖에 남지 않아 별로 무겁지도 않은 나를 안고서는 마치 무거운 것을 든 것처럼 힘든 시늉을 하며 나를 계단 아래로 옮겨놓지. 그렇지만 그러한 일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 그리고 그러한 일이 있을 때에도 곧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아들놈을 다그쳐 나를 다시 데리고 올라가게 하지.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나의 이 좁은 반경을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 방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이 방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마치 어항 밖으로 나온 물고기 같단 말야, 어항 밖으로 나온 물고기가 이 방을 벗어난 나처럼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마음은 나의 몸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곳에까지 가고 싶어하는 경우가 드문데, 그 점은 나로서는 다행스런 거야. 나를 다시 내 방에 데려다주거라, 나는 아들놈에게 소리치지. 그러면 그는 대놓고 불평은 하지 않지만,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는 내 지시를 따르지. 그는 내가 그를 일부러 골탕을 먹이기 위해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그런 경우는 드물어. 아주 가끔, 괜히, 그럴 만한 이유라곤 없이 그가 말할 수 없이 얄밉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그를 위한 좋지 않은 일을 꾸미기는 하지,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일은 드물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들놈을 각별히 미워하는 것은 아냐, 아무리 해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아. 세상의 모든 자식들에 비해서도, 내 아들놈이 각별히 못된 놈이라고도 할 수 없고…… 좀더 몰인정한 아들놈을 두었다면, 벌써 나는 이 집에서 쫓겨났을지도 몰라. 차라리 그 편이 나았을 텐데. 왜 아들놈은 나를 그냥 자동차에 실어가 어디든 갖다 내버리거나 하지 않는 걸까, 그런 것쯤은 용서를 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은 패륜에 해당되는 짓이라는 판에 박은 생각이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게 틀림없어. 아들놈은 도리를, 의리를 중요시하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웃기는 놈이야. 어쨌든 아들놈은 나를 부양하고 있고, 지금도 가족을 위해, 무슨 사업인가를 하느라고 여념이 없어, 수상쩍은 어떤 일을, 범죄의 구린 냄새가 나는. 아들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하지만 아들놈은 그가 하는 떳떳하지 못한 일을 내게는 철저하게 감추지, 내게 얘기를 하고 나의 조언을 구할 수도 있을 텐데. 나를 완전한 무용지물로 생각하는 것 같아. 하긴 그건 사실이지. 나야말로 이대로 그냥 사라져버린다 해도 이 세상에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을 인간이니까…… 그러면서도 아들놈은 나에 대한 다분히 형식적인 공경의 태도는 잃지 않아, 가당찮게도. 구역질이 나. 가끔 내가 괜히 짜증이 나 역정을 내면 아들놈은 내게, 내가 그에게 어떻게 해도, 무슨 말을 해도, 내가 그의 아버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곤 하지, 뻔뻔스런 얼굴로.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나의 아들로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해.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모르고…… 나 또한 아버지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노력을 하는 건 아니지만, 항상 그 점에 대해 생각은 하고 있지…… 아니, 그건 사실이 아냐. 나는 도리 같은 것 따위와는 담을 쌓은 지 오래됐어…… 아들놈은 항상 힘과 자신감이 넘쳐 보여. 뭐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식이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고. 그런데 그 점이 나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아. 내가, 오늘 따라 힘이 넘쳐 보이는구나, 하고 말하면 아들놈은 기쁜 듯 웃음을 짓지. 내가 좋지 않은 뜻으로, 빈정거리며 말한 것도 모르고. 단순한 놈이야, 아니, 그렇게 단순한 놈이 아냐, 머리가 비상한 데가 있어. 누굴 닮아서인지 모르겠어, 내 쪽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렇게 잘나가는 거야. 이 집만 해도 웬만큼 돈이 많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집이지. 수완이 여간 좋은 놈이 아냐…… 그에게는 그를 돕는 하수인들이 여럿 있지. 모두, 완력으로 인생을 헤쳐나가는 듯한, 건장한 체구의, 건달처럼 보이는 작자들이지. 그들은 아들놈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 같아. 아들놈은 그들에게는 무서운 존재인 것 같아. 왜 아들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모르겠어, 하긴 나 또한 무서워하긴 마찬가지지, 그의 얼굴만 봐도 무서운 게 사실이야. 내가 무서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냐. 하지만 아들놈이 나를 때리거나 한 적은 없어, 겁을 준 적은 있지만, 아니, 겁을 준 것도 아닌데, 내 쪽에서 지레 겁을 먹었지, 나로서는 때리면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말로 해서 안 될 때는 매질을 하는 게 상책일 텐데…… 하지만 우리의 원한관계가 내가 생각하는 만큼 깊은 것은 아닌지도 몰라, 우리 사이의 반목의 골은 내가 기대하는 만큼 깊어지지 않고 있어…… 그런데 아들놈 주위의 사람들이 아들놈을 무서워하는 건 이해가 가. 한번은 그의 하수인 중 한 놈이 그를 배신했을 때, 아들놈이 이 집 거실에서, 배신의 대가가 어떤 건지 모르는 모양인데 그걸 알게 해주지, 하고 말하며, 그의 손가락을 하나 부러뜨린 후 태연하게, 이번에는 손가락이지만 다음번에는 모가지야, 하고 말하는 걸 들은 적도 있지. 그리고 또 언젠가는 거실에서 여러 명이 함께 앉아 무슨 작당을 하는 동안, 아들놈은 며느리가 내온 사과를, 거실 벽에 걸려 있던,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사용했을 법한 긴 칼을 꺼내 깎아 먹은 적도 있어. 아마 그 칼은 누군가의 배를 갈랐던 기억을 갖고 있는 칼인 게 틀림없어, 할복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것처럼 보이는 칼이야. 그래서인지 내가 그 칼을 한번 만져보면 안 되겠냐고 하면 아들놈은 그것만은 안 된다고 하지…… 아들놈은 세상을 헤쳐나가려면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는 강한 것이야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해. 그 점에 있어 그는 그의 할아버지인 내 아버지를 닮기도 했지. 내 아버지만큼 내가 싫어하는 점을 그토록 골고루 갖춘 사람도 없었지. 그에게 바람직한 것이 내게도 바람직한 일은 드물었어. 그는 항상 강해야 한다고 말했지,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다고. 그에게 타자는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인 존재였지, 그가 오르고자 하는 곳에 이르게 되는 데 있어 발판 같은. 강자의 논리, 그것만큼 우습기 짝이 없는 것도 없지. 하지만 약자의 논리 또한 우습긴 마찬가지야. 약자의 논리란 미래에 기대는 데 있을 뿐이지. 언젠가는 약자의 정의가 실현될 거라고, 그런 일은 없는데도. 그는 잠시 다리를 만져본다. 여전히 아무런 감각도 없군. 오래 전부터 이랬지. 그런데 지금의 이 자세로 여러 시간을 있은 탓에 허리가 몹시 뻐근하기는 하군. 하지만 이제 막 시작된 뱃속을 후벼파는 통증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냐. 그놈의 위염 때문이야. 신음 소리를 내는 것도 자연스럽겠지만 참아야지. 옆에 아무도 없는데 혼자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은 김빠지는 일이니까. 아들놈이 찾아오면 그때 가서 나 혼자서 듣기에는 아까운 나의 멋진 신음 소리를 그에게도 들려줘야지. 그런데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은 경우에 따라 기운을 나게 하기도 하지만 기운을 뺏기도 한단 말야. 대체로 누군가가 옆에 있을 때 하는 신음은 기운을 나게, 그 반대인 경우에는 효과 또한 반대인 것 같아. 그는 독백을 멈추고 잠시 가만히, 마치 무슨 할 일을 생각하는 사람처럼, 앉아 있다. 이 방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 물론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럼에도 나는 이 방 안에 있는 동안 거의 쉬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는 뭐가 있을까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지. 내가 하게끔 되어 있는 것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들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하고 나는 소리를 내어 말하지. 그리고 잠시 후면, 할 수 없는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을 할 수는 있다는 자연스런 결론에 이르게 되고, 그때부터 마음껏 아무것도 하지 않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를 따를 사람은 없을 거야. 나는 그만큼, 오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익숙해져왔어. 아니, 설사 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다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아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할 거야, 그냥 가만히 있게 할 거야. 설사 내가 뭔가를 한다 하더라도, 내가 한 것으로 치지 않을 거야.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지 않으며, 실제로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지. 하지만 문제는 내가 하는 얼마 되지 않는 일이 대체로 뭔가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거야. 가령 나는 나의 손길이 뻗치는 범위 안의 모든 것들을 다스릴 수도 있다는 것을 뭔가를 넘어뜨리거나 부수거나 하는 식으로 보여주는 거야. 그리고 가끔은 그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 나 자신을 상대로 하는 행패를 일삼기도 해, 제대로 된 자학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단지 행패에 지나지 않는. 그 점에 비춰 나의 사지 중에 내가 나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상체에 국한되어 있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야. 몸 아래쪽은 오래 전부터 마비가 되어, 그 위쪽의 상체를 떠받치고 있는 역할 외에 다른 것은 해내지 못하고 있어. 이렇게 있으나 마나 한 다리는 잘라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내게 쓸모가 없는 것들을 잘라내게 되면 남아 있게 될 것이 거의 없을 거야. 어쩌면 내가 가장 먼저 없애야 하는 것은, 나라는 인간의 쓸모없음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나의 머리통인지도 모르지…… 그런데 나는 왜 항상 이렇게 혼자 있을 때에도 나의 생각을 마음속으로 하는 대신 소리를 내어 말하는 걸까, 마치 생각을 입으로 토해내기라도 하듯? 어쩌면 내가 이렇게 혼잣말을 하는 것은, 나의 마음의 진실이 하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어. 진실이라는 게 내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앉아 있다. 신의 자비로운 손길이 닿아 있는 곳에 인간의 고통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어떤 문장을 읽듯 천천히 말한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모르겠어. 그는 다시 침묵에 잠긴다.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꼼짝 않고 앉아 있으면 괜히 조바심이 난단 말야. 하지만 이럴 경우에도 방법은 있지, 나의 조바심이 생각하게 하는 것, 또는 하게 하는 것들을 생각하거나 하는 거야.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그러다가 책상 쪽을 흘낏 바라본 뒤, 마치 무슨 할 일이라도 생각난 듯 눈을 번쩍 뜬다. 아, 참, 하려던 일을 해야지, 유언을 남기는 일을 마쳐야지,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그래, 이렇게, 마땅한 좋은 일이 갑자기 생각이 나기라도 한 척을 하는 거야. 그는 책상이 있는 곳으로 휠체어를 밀고 가기 시작하는데, 휠체어를 앞으로가 아닌, 뒤로 밀고 간다. 이 휠체어는 뒤로만 움직일 수 있다는 특징이 있지, 물론 뒤로도 원활하게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비해서는 원활한 편이지. 이 휠체어가 어떻게 하다가 이런 이상한 습성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 내가 오래도록 의지해온 이 휠체어가 언젠가 고장이 나 아들놈에게 수리를 부탁한 후로 그렇게 되었어. 어쩌면 그는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휠체어가 앞으로 나아가기를 꺼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대로 내버려두게 한 것은 나였지. 오히려 그 편이 나의 의도를 더 존중하는 것 같아서였어. 책상 앞에 이른 그는 서랍 안에서 녹화 테이프를 꺼낸다. 그는 책상 옆에, 그의 얼굴을 측면에서 비추는, 삼각대 위에 설치되어 있는 캠코더를 책상 위의 텔레비전에 연결한 뒤 녹화 테이프를 캠코더 안에 넣은 다음 재생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아무 영상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 지워져버렸군, 하긴 지난번에 녹화를 한 후 다 지워버렸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한 건 녹화한 것 중 건질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였어,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이 될 정도의 유언을 하지 못했던 거야. 그는 테이프를 처음으로 되감는다. 이 캠코더는 지난번 내 생일 선물로 아들놈이 사준 거야. 그는 내가 원하는 거면 뭐든 사주지. 그 이상으로 그가 내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듯. 그는 녹화 버튼에 손가락을 얹은 채로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항상 시작은 어려워, 시작을 한 후도 어렵지만. 물론 그 뒤에는 끝을 내야 하는 더 어려운 일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는 잠시 후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른 듯 천장을 바라본다. 천장에는 실에 묶인, 팽팽하게 부푼 고무 풍선 몇 개가 더이상 높이 날아가지 못하고 천장에 붙어 있다. 그는 그 풍선 중 하나의 실을 잡아당겨 아래로 내려 잠시 풍선을 들고 있다가 다시 놓아준다. 풍선은 다시
너를 낳은 건 실수로 점철된 나의 인생에서도 가장 큰 실수였다. 나의 실수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어서는 안 되었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래서 그만큼 더, 실수로는 돋보이는 것이었다. 너는 적어도 나의 계산에는 없던 존재였다…….
그는 정지 버튼을 누른 후 되감기를 한 뒤 재생 버튼을 누른 다음 조금 전 녹화된 화면을 본다. 아무런 할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말을 하니까 말이 나오는군.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는 괜찮은 것 같은데, 표정이 별로야. 표정이 지나치게 풍부해. 잔뜩 일그러져 있어. 그는 정지 버튼을 누른 후 표정을 고친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더 일그러진다. 아무런 표정 없는 표정을 만들기란 정말 힘든 일이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는 활짝 웃음을 지은 후 조금씩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간다. 그의 표정은 거의 무표정한 상태에 이른다. 이제야 된 것 같군. 그는 다시 줌인 버튼을 끝까지 누른다. 이제 그의 입술이 텔레비전 화면 전체를 차지한다. 거친 입자가 화면을 뒤덮고 있다. 이렇게 하니 표정에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군. 그는 녹화 버튼을 누른다.
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네 어머니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 말의 가장 피폐한 의미에서 사랑하는 사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이상한 친분관계 같은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우연히 알게 되었고, 쉽게 버리지 못하는 습관처럼 서로를 만났다. 만나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안이하게 상대했고 부당하게 취급했지…….
그는 정지 버튼을 눌러 다시 녹화를 중단한다. 그의 얼굴에 언짢은 표정이 떠오른다. 내가 누군가를, 또는 뭔가를 사랑한 적이 있던가? 그는 고개를 젓는다. 항상 아무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을 준비는 되어 있었지. 사랑은 내게 너무 벅찬 어떤 것이었어. 그래서 뭔가를, 아무리 하찮은 무엇이라도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도록 하려고 애를 썼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나 자신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로 여겨졌거든. 그래, 이제는 나 자신으로 하여금 내게 사랑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어. 그는 두 손으로, 마치 표정을 펴듯 얼굴을 쓰다듬은 후 다시 녹화 버튼을 누른다.
네가 잉태된 날의 기억. 네 어머니와 나는 그날 시내에 있는, 조국을 위해서라는 미명 아래, 아무런 보람 없이 목숨을 바친 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공동 묘지의 안쪽 구석에 있는, 인적이 드문 무덤 사이에 누워 있었지. 그곳 공동 묘지는 다른 많은 장소에서 내가 느끼는, 그 장소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떻게든 나를 밀어내려 하고 있는 것 같은 어떤 느낌도 주지 않는 곳이었어. 따뜻한 봄날 오후였지. 햇살은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 있기에 딱 좋았고, 그래서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 있었어. 내 옆에 앉아 있던 네 어머니가 내게 무슨 얘긴가를 했지만, 나는 듣지 않고 있었어. 그렇게, 네 어머니는 내가 듣지 않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무슨 말인가를 쉴새없이 주절거리곤 했어…….
그는 정지 버튼을 눌러 녹화를 중단한다. 그런데 이런 기억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떠올리려 하지도 않았는데. 항상, 지난 일을 떠올릴 때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떠오른단 말야. 떠올리고 싶은 기억들은 떠오르지 않고. 하긴 떠올릴 만한 기억이라는 게 없기도 하지…… 지나간 시간들, 나의 것이 아니었던 시간들, 내가 멀리한, 멀어진 시간들. 어쨌든 그 시간들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야. 그는 다시 녹화 버튼을 누른다.
그때 나는 다른 어떤 소리를 듣고 있었거든. 멀리서, 그것을 듣는 사람까지도, 마구, 얼마든지, 무방비로 애처로운 감정에 빠지게 만드는 뻐꾸기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어, 뻐꾸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애처로운 소리에 마음이 쏠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애를 쓰는 만큼 그 애처로움에 마음을 뺏기고 있었지. 나는 잠시 눈을 떠, 하늘 드높이 떠 있는, 자유자재로 모습을 달리하는 구름들을 보며, 그것들에서 어떤 형상을 찾으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구름은 아무런 형태도 빚어내지 못하며 그냥 흘러가더군. 나는 다시 눈을 감았고, 서서히 졸음을 느꼈고, 잠이 들고 싶었어. 그런데 잠을 잘 수가 없었지. 누군가가 내가 잠이 들지 못하게 하더군. 나는 다시 눈을 떴고, 네 어머니가 내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지. 그 사이 나는 네 어머니가 내 옆에 누워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그녀가 마치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눈을 반짝이며 내 몸에 손을 대기 시작하더군, 내 허락도 없이, 지시도 없이, 간청도 없이. 그런데도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 있었어, 우리가 누워 있는 주변의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죽은 자들을 생각하며. 그 죽은 자들의 몸이 희미하게 뿜어내는 냄새를 들이켜며. 죽은 자들의 몸이 내쉬는 냄새로 자욱한 무덤가의 공기에는 사람을 아늑하게 감싸주는 어떤 게 있었어. 그런데 조금 있자 네 어머니에게 딸린 손 하나가 내 바지 속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지더군. 마치 그 안에서 뭔가 꺼낼 게 있는 것처럼 그녀의 손이 들어왔지. 그런데도 나는 가만히 있었어, 나는 봄날의 따스함을 즐기고 있었거든. 그 봄날의 따스함에는 사람의 얼을 빼놓는 어떤 게 있었어. 조금 후 나는 네 어머니가 내 바지의 지퍼를 내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걸 발견했어. 하지만 지퍼는 쉽게 내려가지 않았어. 나는 그녀를 도울 생각은 않고 가만히 있었어. 또한 방해도 하지 않았는데, 그건 그럴 만한 일도 못 된다는 생각에서였지. 아니, 사실을 말하면, 그 순간 나는 그날 점심시간에 뭔가를 잘못 먹어 배탈이 나 속이 좋지 않았거든. 금방이라도 설사가 나려 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약간 불안한 상태였고,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꼼짝 않고 있었어. 아니, 그보다도, 설사가 걱정이기도 했지만, 우선은 방귀가 자꾸 나오려 하고 있었고, 그것을 참느라 딴 데 신경을 쓸 수가 없었거든.
그는 리모컨의 정지 버튼을 누른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기억할 만한 게 있었던 것이 아닌데도 잊혀지지 않는 그날의 기억과 관련해 흐뭇한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어. 그런데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한 기억이 나의 생각의 좀을 쑤시게 하는군. 자, 나의 화자여, 너의 웃음을 내게도 배분해다오, 그것이 쓴웃음일지라도. 그의 미소는 웃음으로 바뀐다. 그래, 지금 이 말들을 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항상 이렇게 나는 내가 어떤 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내가 아닌, 내가 고용한 누군가의 입을 통해 말하게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길 좋아하지. 내가 그가 되어 그이기도 한 나를 말하는 기분으로. 그는 다시 녹화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지퍼를 내리고 그 안에 든 것을 꺼내는 데 성공을 했지. 의도한 것을 이룬 그녀의 얼굴은 환하게 빛났어.
그는 리모컨의 정지 버튼을 누른 후 생각에 잠긴다. 지금까지의 말 중 유언의 내용으로 적당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 유언이라는 것이 당연히 담아야 하는 것으로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건, 내가 보기에는 없어. 그런데 이건 무슨 자기 검열 같은 건가? 검열 같은 건 필요없어. 내가, 또는 내게서 아주 가까이 있긴 하지만 내가 아닌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마음껏 말하게 해주는 거야. 그는 다시 녹화 버튼을 누른 후 리모컨의 줌아웃 버튼을 누른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의 전신이 나타난다.
내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고 네가 생각할지 몰라서 하는 얘긴데,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다시 리모콘의 줌인 버튼을 누른다. 그의 얼굴이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채운다.
조금 있자 그녀가 내 몸 위로 올라왔어.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다는 듯. 나를 어떻게 할 셈이지, 내가 말했어. 그녀는 조금만 기다려보라는 말을 하며 내 몸의 일부를 그녀의 몸 속에 넣었어. 무거워, 내가 말했어.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지, 헐거워요. 그녀는 꽉 찬 느낌을 갖고 싶었던 거야. 나는 이왕 시작한 거니까 빨리 끝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서둘러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지. 그 말에 그녀는 조금 서두르는 것 같았어. 그런데 그 순간 뭔가 벌레 같은 것이 내 다리 쪽을 지나가는 것 같았어. 나는 그냥 무시했지. 그런데 그 조금 후 모든 게 순식간에 이루어져버렸지, 그로부터 열 달 후 네가 태어나게 될 일이 이루어져버린 거야, 내가 어떻게 손을 쓸 틈도 없이.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그 일이 빚게 될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가 없었지. 마침 바로 그 순간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그게 뭐였더라, 그래 맞아, 풀섶에 숨어 있던 쐐기에게 허벅지를 쏘인 거야. 나는 나를 쏜 쐐기를 잡으려 했지만 실패했어. 잡은 다음 죽일 생각은 없었고, 도대체 나를 쏜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보기만 할 생각이었지. 아니, 잡은 다음 죽일 작정이었어, 죽인다는 생각은 없이. 아니, 그보다도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할 마음이었지. 나는 누군가가 내게 한 짓에 대해서는, 그게 좋지 않은 것일 경우에는 특히, 반드시 되돌려주니까. 쏘인 자국은 금세 빨갛게 부어오르더군. 따갑게 쓰라렸어. 나는 화를 냈어, 쐐기에게인지, 아니면 네 어머니에게인지 불확실한, 어쩌면 둘 모두를 향한 화를. 그러자 네 어머니는 그까짓 걸 가지고 뭘 화를 내냐고 하더군. 어떻게 이런 일로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지, 내가 말했지. 그러자 네 어머니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발라주면서, 쏘인 자국이 예쁘게 부어올랐다는 말을 하며 웃더군. 나 또한 같이 웃었지, 그럴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 곧 나아질 거예요, 그녀가 말했어. 더 따가운데, 내가 말했어. 그러자 네 어머니는 자신을 안아달라고 하더군. 나는 싫다고 했어. 나를 안아주는 건 허락하지, 내가 말했어. 그녀는 나를 안아주는 대신, 다시 자신을 안아달라고 하더군. 나는, 하는 수 없군, 하고 말하며, 한 손을 내밀어 그녀를 가까이 오게 했고,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다른 한 손을 뻗어 더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지. 그런 다음, 우리 이제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고 말했지. 그러자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군. 나는 그녀의 눈길을 피했어. 다른 여자가 생겼어요, 그녀가 물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어. 그런데 왜 그만 만나자는 거예요, 그녀가 물었어. 이유는 없어,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나의 생각에 따르면, 여기에 굳이 이유가 제시되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 나를 이해해주기 바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할 수 없지만, 내가 말했어. 그녀는 바로 말을 잇지 못했어. 나는 나의 말에 그녀로서는 완전히 할말을 잃게 되는 어떤 말을 생각해내려고 애를 썼어. 그녀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어.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 내가 말했지. 그럼 조금 전의 일은 뭐죠, 그녀가 말했어.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 내가 말했어.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어. 아, 그거, 조금 전의 그 일은 없었던 일로 치지, 그냥 쐐기에게 쏘였다고 생각해, 쐐기에게 쏘인 건 나지만, 내가 말했어. 오늘은 나의 배란일이에요, 그녀가 말했어. 그렇다면…… 나는 말을 잇지 못했어. 맞아요, 그녀가 말했어. 나로 하여금 할말을 잃게 만드는군, 이 모든 게 다 의도적인 거였단 말야, 이게 무슨 고약한 속셈이지, 만약 아기가 생기게 되면 지우도록 해, 원하면 내가 병원에 같이 가줄 수는 있어, 아냐, 그냥 혼자 가도록 해, 어떤 이유로도 나는 병원에 가는 건 싫으니까, 내가 말했어. 진심에서 하는 말은 아니겠죠, 그녀가 말했어. 나의 진심은 조금 전 내가 한 말이 사실이었다고 말하라고 하는군, 내가 말했어.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가요, 그녀가 말했어.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어. 실소를 자아내고 있군, 내가 말했어.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아주 지독한 이기주의자예요, 당신은 항상, 좋지 않은 의미에서, 남을 먼저 생각하죠, 남에게 해가 될 일을, 자신에게 좋은 일이 못 된다 하더라도 남에게 좋지 않은 일이면 당신에겐 그만이죠, 그녀가 말했어. 맞아, 내가 말했어. 그러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더군. 그러지 마, 그런다고 별도리가 있는 것도 아닐 거야, 내가 말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어. 나는 누가 내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딱 질색이거든. 그것은 내가 싫어할 뿐만 아니라 아주 싫어하는 거지. 게다가 이제 설사가 나려는 걸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거든. 혹시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서로가 한층 더 실망스런 모습으로 만나게 되길 바래. 그 말을 한 나는 울고 있는 그녀를 뒤로 하고 그 자리를 떴지.
그는 녹화를 멈추고 조금 전 녹화한 내용을 다시 본 뒤 생각에 잠긴다. 마음에 안 들어. 이것을 보는 아들놈에게 좀더 감명을 주는, 그를 좀더 질리게 만드는 얘기를 할 필요가 있겠어. 그는 다시 녹화 버튼을 누른다.
그로부터 열 달 후 너는 세상에 나왔지. 네 어머니와 나는 묘지에서의 그 일이 있은 후에도 헤어지지 못했어. 우리의 인연은 구질구질하게도 끈질긴 것이었지. 네가 태어나는 순간 나는 네가 태어나는 일만은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지. 아니면, 태어난다 하더라도 인간을 닮지 않은, 이 세상의 살아 있는 그 무엇과도 비슷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태어난다면 봐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 하지만 너는 나의 그 소박한 기대를 송두리째 저버리고 지극히 정상적인 아기로 태어났어. 체중도 평균 이상이었고, 토실토실했지. 보기에 좋은 게 보기가 싫을 정도였지. 한순간의 방심이 낳은 결과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어. 핏덩어리의 그 기괴하면서도 느끼한 느낌. 아기를 낳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야.
그는 잠시 녹화를 멈춘 후 천장에 붙어 있는 고무 풍선 하나를, 실을 당겨, 아래로 내려 가만히 두 손에 쥔다. 자신의 무게를 잊은, 부피로만 표현된 형태. 그 부피가 슬픔으로 이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 풍선을 이렇게 가만히 쥐고 있으면 슬픔이 느껴져, 거북한 마음이 없이는 느낄 수 없는 슬픔이. 한데 이 아무런 무게도 나가지 않는 부피의 무게가 들고 있기 힘이 들 정도로 무겁기도 해.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간다. 끝내 그의 손 안에 든 풍선이 터지고, 풍선이 터지는 소리에 그는 깜짝 놀라며, 욕설을 퍼붓는다. 터뜨릴 생각이 아니었는데 왜 터진 거야! 그는 그의 무릎에 떨어진, 구멍이 난 쪼그라든 풍선을 집어든다. 화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화가 나는 일이 없는 것처럼 해야지, 마음을 가라앉혀야지. 그는 다시 풍선 하나를 내려 가만히 들고 있다가 놓아주기를 반복한다. 그런 다음 그는 그 풍선을 향해, 이번에는 내가 너를 터뜨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길 바래, 하고 말하며 풍선을 쓰다듬는다. 조금 후 그는, 이제야 마음이 진정이 되는군, 하고 말하며 풍선을 놓아준 후 다시 녹화 버튼을 누른다.
너를 처음 본 순간 나는 네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네 어머니와 나는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지. 나는 결혼을 할 마음이 없었지, 네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었지만. 그렇게, 너는 사생아로 태어난 거야. 네 어머니는 너를 볼모로 나를 붙잡으려 했지. 하지만 나는 도망을 쳤어, 너와 네 어머니로부터. 지긋지긋한 여자였거든.
그는 잠시 녹화를 멈추고 웃음을 짓는다. 어쩐지 이 웃음은 바보 같군. 그는 화를 내며 다시 녹화 버튼을 누른다.
네가 아기였을 때 네 몸에서 나는 젖비린내는 내게 구역질을 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요람에 누워 있는 너를 바라보며 나는 너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지. 그리고는 이왕 결심한 거니까 그 결심이 흔들리는 일은 없게 하리라는 결심 또한 했지.
그는 다시 녹화를 멈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기분이 더럽군. 아니 이렇게 기분이 더러울 때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기도 하지. 그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한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이상하게도 이렇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하게 된단 말야. 마치 불쾌감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게 틈을 열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데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는 이런 유언 같은 걸 왜 남기려 하는 거지. 그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맞아, 시간을 보내고, 지우고, 덮어버리기 위해서야. 이렇게, 내가 뭘, 무슨 이유에서 하고 있는지를 번번이 상기시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니까. 그는 다시 녹화 버튼을 누른다.
네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너와 너의 어머니 되는 여자를 떠난 후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어느 날 너는 용케도 나를 찾아왔지. 당시 내가 살던 집의 방 안에 누워 있는데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군. 밖으로 나간 내가 대문을 열자 그 앞에 네가 서 있었어. 그때 대문을 두드린 사람이 너인 줄 알았으면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을 텐데. 너는 대문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나는 못 들어오게 했지. 너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어. 그리고는 수첩에서 나의 젊은 시절의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 앞에 들이밀어 내가 아무것도 부인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지. 나는 우리의 인연을 연장시킨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네게 돌려주었지. 우리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았어. 내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묻자, 너는 너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나를 찾아가라는 얘기를 남겼다는 얘기를 했어. 나는 마음속으로 불쾌한 감정을 쓸어내리며, 그런 것이 나를 찾아온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 너는 슬픈 얼굴을 지었어. 내가 네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묻자 너는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했어. 운이 좋은 여자군, 나는 중얼거렸어. 하지만 불쌍한 여자였어, 내가 불쌍한 것과는 또 다르게 불쌍한 여자였지, 나는 생각했어. 너는 대문 안을 들여다보며, 당시 내가 이르게 된 나의 남루한 삶을 확인하는 것이었어. 나는 나의 초라하지만 충분히 초라하지는 않은 행색에 어울리는 멍한 얼굴로 너를 쳐다보고 있었지.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보이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뻤고 동시에 얼굴이 뜨거웠어. 그 동안 나의 삶은 나의 생각 이상으로 나빴었어. 아니, 생각만큼 나빴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제대로 된 나쁜 일은 없었어, 지금의 나의 생각에는 그래. 그 동안 나의 삶은 내가 원했던 바와, 내가 원하는 바와는 상관없이 전개되었던 상황 사이의 간격을 좁힐 수 없었던 상황들로 점철되었었지. 나는 그 안에서 내가 끝나게 될, 무슨 수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빈틈없는 완벽한 궁지를 나 자신에게 만들어주려고 애를 썼었지. 나는 누구도, 나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온 거야. 나는 나의 삶을 통틀어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지, 아무런 노력 없이 내가 얻게 된 것, 또는 이르게 된 것만이 온전한 나의 것으로 여겨졌던 거야. 나는 이것으로 우리의 만남은 끝이 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대문을 닫으려 했어. 그런데 그 순간 너는 이렇게 말했지, 이제부터는 내가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저와 함께 살도록 해요.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말했지. 네가 원하는 게 그거냐, 그렇다면 그 부탁은 들어주지 않겠다. 그러자 너는 이렇게 말했어. 아버지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앞으로는 아무 부족함이 없게 해드리겠어요.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뿐인데도. 내가 있어 네게 이익이 될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내가 말했어. 그러자, 그건 문제가 안 돼요, 제가 아버지를 모시는 건 당연한 도리예요, 하고 네가 말했지. 도리에 대한 너의 생각이 그런 거라면 그런 생각은 접어버리도록 해라, 내가 말했지. 안타깝게도 당시 나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었고,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고, 그래서 쉽게 너의 말에 넘어가버렸지. 그리고 나서의 그 희극적인 상황. 너는 내가 미처 막을 겨를도 주지 않고, 북받친 얼굴로, 두 팔로 나를 안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흐느끼는 네 품안에서 대책 없이 흔들려야 했지…… 그리고, 그후의 나의 생활. 내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너로 인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끔찍한 거였다…… 지금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너는 나를 위해 나를 부양한 것이 아니었어. 결국 너는 네가 지어낸 아들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뿐이야.
그는 정지 버튼을 눌러 녹화를 중단한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긴다. 아들놈 덕분에 내가 이렇게라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대신 아들놈만 아니었다면 이러면서까지 살아가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은 들지, 그 두 가지가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그는 다시 녹화 버튼을 누른다.
너의 도움 없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었을 텐데, 너는 내가 그것을 하게 내버려두었어야 했어. 내가 너의 도움 없이 할 수 있었던 게 없었다 해도 나를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었어야 했어. 결국 너는 내가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을 일어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지.
그는 화가 난 듯 정지 버튼을 누른 후 창 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방에서는 호수가 보이는데, 그것이 내게 커다란 위안이 되기보다는, 나로서는 작은 위안으로라도 삼으려고 하는 편이지. 넓은 호수의 한쪽 편에는 갈대밭이 무성해. 지금 그곳의 갈대들은 바람에 의한 것처럼 구부러져 있어. 하지만 바람은 전혀 불지 않고 있어. 그럼에도 호수에는 물결이 일고 있어. 조용한 호수면 위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만 같아. 어쩌면 곧 야생 오리떼가 날아와 수면 위에 내려앉거나, 아니면 물 속에서 어떤 물고기가 수면 밖으로 뛰어오르기라도 할 것 같아. 그는 사냥꾼처럼 숨을 죽인 채로 갈대밭을 바라본다. 그는 조금 후 웃음을 터뜨린다. 호수의 갈대밭 풍경은 벽에 걸린 사진 속의 영상일 뿐이야. 이 사진은 나의 죽은 아버지의 유품으로 내가 유일하게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거야. 사진은 아버지가 물오리 사냥을 나갔다가 찍어온 거야. 아버지는 직업적인 사냥꾼은 아니었지만 당시 총포상을 하고 있어 시간이 나면 사냥을 나가곤 했는데 가끔은 나를 데리고 가기도 했었지. 우리가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자동차의 트렁크 안은 죽은 물오리로 가득 차 있었어. 당시 집 거실에는 박제한 야생 동물들이 벽면 가득 진열되어 있었어. 끔찍한 광경이었어. 밤이면 그 야생 동물들이 되살아나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아서 화장실에도 못 갔지. 그런데도 거실의 박제 동물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지. 아버지는 그의 총에 맞은 동물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기운이 난다고 했어. 이제야 그가 한 말이 이해가 돼. 그리고 어쩌면 최근에 내가 자고 난 후 박쥐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어릴 때의 그 기억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 이 얘기는 그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기분좋은 얘기가 아냐. 다시 지금의 얘기로 돌아가야겠어. 실제로는, 이 집 밖에는 마당과, 그 너머로 작은 야산이 있을 뿐이야. 여기서 보이는 것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야산의 중턱에 있는 무덤뿐이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내가 나의 전망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인 풍경이야. 무덤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 집을 얻은 건 아들놈의 배려가 돋보이는 것이었어. 그는 휠체어를 밀어 창가로 간다. 그는 창가에 놓여 있는 망원경에 눈을 갖다 댄다. 역시, 무덤말고는, 내게 위안을 주고 싶어하는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군. 가끔 무덤 뒤쪽의 소나무에 다람쥐가 나타나 내 눈길을 끌기도 하지만 그것에게 내 눈길을 주지는 않아. 물론 그것 역시 내 눈길을 끌려고 내가 보는 앞에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어떤 때는 세 마리가 한꺼번에 나타나, 아마 그중 두 마리는 수놈일 테지, 서로 암컷의 마음을 차지하려고 장난이 아니게, 심각하게 다투기도 하지. 재미있는 광경이야. 자연계의 여러 놀라운 현상 중에서도 유성생식만큼 나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도 없어. 그런데 이 좋은 봄날 오후에 하다 못해 나물을 캐러 나온 처녀의 모습조차도 눈에 띄지 않는군. 그쪽에서는 나를 보지 못하더라도, 내 쪽에서는 그녀를 지켜보며, 나의 선량한 부분이 시키는 대로 손을 흔들어줄 수도 있을 텐데. 처녀의 모습은커녕 노파의 휘어진 등조차도 본 적이 없어. 전에는 이렇게 창가에 앉아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밝아지거나 어두워지거나 또는 무성해지거나 시들거나 하는 식으로 조금은 달라지지만 항상 그대로인 풍경에 눈을 고정시킨 채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를 보내곤 했었는데. 이젠 아냐. 무덤이 보이는 이 창문이 자신을 통해 내게 보여주는 것들에 나는 흥미를 잃었어. 무덤은 더이상 내가 나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어할 수 있는 어떤 게 못 돼. 그래서 가끔, 잠시 내다볼 뿐이지, 더이상 볼 게 없는 풍경을. 그리고는 이 지긋지긋한 풍경을 없애버릴 수는 없어, 대신 눈을 질끈 감아버리지. 그때 아래층에서 무슨 소린가가 들려온다. 며느리가 일어난 모양이군. 파출부가 올 시간이 다 된 모양이야. 그는 다시 휠체어를 밀어 책상 앞으로 간다. 조금 있으면 며느리가 파출부와 함께 나를 보러 올라오겠지, 그러고는 다시 내려가겠지, 성가신 일은 파출부에게 시키고. 며느리만큼 팔자가 늘어진 여자도 없을 거야. 하루 종일 빈둥거리다가 저녁이 되면 몸을 씻고 화장을 하고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지. 잘 먹고 잘 지내 얼굴이 뽀얘. 피부가 매끈한 게 매력이 넘쳐.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만 내가 며느리에게 흑심을 품은 적은 없어, 누구든 그녀를 보면 흑심을 품을 만한 아이인데, 그런 애를 보면 흑심이라도 품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나인데. 아마 나의 욕망이라는 게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서일 거야. 이렇게 반신불수에다, 하반신에 아무런 감각도 없게 된 건 잘된 일이야, 그래서 며느리에게까지 음탕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건강한 육체에는 음탕한 마음이 깃들이기 마련이지. 그리고 중요한 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머릿속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드는 거야, 헛물을 켜지 않게, 헛된 꿈을 꾸지 않게, 물론 그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는 잠시 귀를 기울인다. 화장실에서인 듯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며느리는 하는 짓도 밉지만은 않지, 말끝마다, 아버님, 아버님, 하고 불러서 그게 싫긴 하지만. 며느리는, 될 수 있으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여러 번 얘기를 했거늘, 항상 나를 그렇게 불러. 될 수 있는 한 나를 그렇게 부르려 하는 것 같아. 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게 다름아닌 며느리니까 참는 편이야. 그런데 딱하게도 아들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어. 어느 쪽에 문제가 있는 걸까? 며느리보다는 내 아들놈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어쨌든 아들놈이 고자라는 생각을 하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해, 흐뭇하기도 하고. 그들 부부에게 아기가 있다면 내가 돌봐줄 수도 있을 텐데, 여느 할아버지가 손자를 돌보는 것처럼. 한 번도 아기를 봐본 적이 없는 서툰 솜씨로 잘 봐줄 수 있을 텐데. 나는 휠체어에 앉은 채로, 아기는 유모차에 앉은 채로 같이 놀 수도 있을 텐데, 나는 나대로, 아기는 아기대로 서로를 개의치 않으면서, 아니면 서로를 꺼려하면서. 아니면 아기로 하여금 나를 데리고 놀게 하거나. 하긴 아기가 있다 해도 내게 맡기려 하지는 않을 거야, 내게 맡겨서는 아기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하긴, 내게 맡기려 해도, 내 쪽에서 아기의 접근을 막았을 거야, 내게서 나오는 좋지 않은 기운이 아기에게 스며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파출부가 다시 온 모양이군. 하루에 두 번씩 오는 이 파출부는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시간만 나면 내게 야단을 친단 말야. 물건을 어질러놓지 말라고, 자신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라고. 내가 딴 마음이 있어 그렇게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도 내가 눈길조차 주지 않으면 사람이 옆에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한 번 쳐다보는 일도 없냐고 하지. 그런데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냐. 내게는 누군가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아니면 상대를 무안하게 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상한 버릇이 있으니까. 또한 그녀는 내 기저귀를 갈 때면, 어떻게 이렇게 심한 냄새가 날 수 있지, 하고 말하곤 해. 며느리에게 얘기를 해서 다른 파출부로 바꾸자는 얘기를 해야겠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다. 며느리가 올라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그 사이에 하려던 것을 계속해야지. 그는 녹화 버튼을 누른다. 그는 줌인 버튼을 누르고, 그의 입술은 극단적으로 확대되어 입술의 형태를 상실한다.
언젠가 너는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지, 우리가 화해할 수는 없겠냐고. 네가 다시 묻는다 해도 나는 똑같은 대답을 하겠다, 우리의 관계는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을 해도 좋을 것이다. 나의 생각이 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것은 내가 아무런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서, 아니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하는 말이다.
그는 방금 녹화한 부분을 다시 본 후 그 부분을 지운다. 내가 죽은 후 아들놈이 우연히 이 테이프를 발견하고 그것을 보게 되면 어리둥절해하겠지. 하지만 그가 어리둥절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아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나 또한 내켜서는 아냐,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는 다시 녹화 버튼을 누른다.
지금까지 내가 한 얘기를 생각해볼 때, 나는 아무런 마음의 거리낌 없이 얘기를 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내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너에 대한 나의 좋지 않은 생각을 마저, 내가 느끼는 정도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것밖에는 없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너에 대한 역겨움을 살려내지 못한 것이다.
그는 정지 버튼을 누른 후 다시 생각에 잠긴다. 마침표를 찍는 결정적인 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다시 녹화 버튼을 누른다.
이제 너도 네가 내게 얼마나 소중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직도 그걸 모르겠다면 끝까지 모른다 해도 어쩔 수 없지.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너를 나의 아들로 생각한 적이 없다. 이로써 우리의 모든 관계는 무효이며, 마땅히 무효가 되어야 하며, 무효임을 선언한다.
그는 정지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이런다고 무효가 될 수 있을까? 그는 고개를 젓는다. 그는 테이프를 처음으로 되돌려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른 후 녹화된 내용을 본다. 아, 아냐, 이건 아냐. 이건 어제도 했고, 마음에 들지 않아 지워버린 이야기야. 항상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말하지 못한 것들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어. 그는 급하게 정지 버튼을 누른 후 테이프를 다시 처음으로 돌린 뒤 녹화 버튼을 누른 다음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는다. 그 사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녹화되며, 그전에 녹화된 내용은 모두 지워진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의 두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얼굴을 감싼다. 조금 후 두 손을 내린 그의 얼굴은 평화롭다. 가끔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기도 해. 그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어 사탕 하나를 꺼내 입 안에 넣고 빨기 시작한다. 이 멜론 사탕 안에는 멜론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것일까? 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