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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서(神書) 1
찌는 듯한 더위를 무릅쓰고
정휴 일행은 걷고 또걸었다.
온갖 고생을 다 해가며
세 사람이 지리산 산천재에도착한 것은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인 팔월이었다.
산천재에 올라가자 조식이 글을 읽고 있었다.
정휴는 다짜고짜 조식에게 따지고 들었다.
"화담 선생님이 이곳을 다녀가셨다면서요?"
"오, 화담을 찾아왔던 그 스님이로구먼.
거안됐구먼.
그대들이 한양으로 올라간 바로 뒤에
화담이 산천재로 왔었다네.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그냥 가기가 섭섭해서 억지로 왔다고 했네."
정휴가 전우치와 남궁두를 돌아보았다.
조식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정휴는 믿었다.
"선생님, 우릴 속이시는 겁니까?
그 책을 훔치고
우릴 쫓아내시려고 거짓을 꾸몄지요?"
"무슨 소린가?"
"화담 선생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같이 가서
직접 화담 선생의 묘를 파보았습니다."
말을 끝내면서 정휴는 조식의 서탁 위에 있는
벼루를 냅다 집어서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벼루가박살이 나버렸다.
"그 책을 내놓으십시오.
그 책이 탐이 나서 저희를속이셨습니까?"
"어서 내놓으시오."
전우치와 남궁두가 합세해서 붓통을 내팽개치고
방석을 집어 마당으로 집어던졌다.
그 소란으로 산천재가 발칵 뒤집혔다.
다른 학인들이 몰려와 세 사람을 붙잡았으나
워낙힘이 장사라서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그만 하고 내 말 좀 들어보게."
"무슨 할 말이 있소.
책을 내놓지 않으면 산천재에불을 싸지르겠소."
"글쎄 내 말을 들어보라니까.
내가 다 말해주리다."
그러자 정휴가 씩씩거리면서 조식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너희들은 물러가고 정개청이 너만 남거라."
학인들이 수근거리면서 물러가자
조식이 천천히말을 했다.
"내 다 말하지. 화담은 물론 죽었네."
"그러면 선생이 말씀하시는 화담은 누구란
말씀입니까?"
"물론 그것도 화담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계속 저희를 놀리시려는
겁니까?"
"들어보게. 화담은 천수를 다 해서 죽었다네.
그를지키던 태사성을 보게. 이미 빛을 잃었다네.
그를지키던 천기(天氣)가 사라졌으니
그의 죽음은 어쩔 수없다네.
그러나 그는 도학의 대가,
이 조선 땅에서손꼽히는 대학자요 선인이라네.
자네도 혼백(魂魄)이 어떻게 흩어지고 모이는지 알터,
그이는 혼쯤이야 마음대로 드나드는 재주를가졌다네.
그런 그가 그대로 죽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지기(地氣)를 모아 혼백을 다시일으켰다네.
화담은 그의 몸을 이루었던 송도 땅의기운을 빌어
백(魄)을 돋구어 혼을 잡아 놓은 거지.
그러나 그 지기도 머지 않아 사라질 것이니
화담의혼백도 곧 흩어지고 말 것일세."
"···"
"그런데 화담은 이지함이란 제자를 몹시 아껴서
뭔가 더 가르칠 게 있었다네.
그런 다음에 그가 지은책을 읽으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었는데
그만자네가 중간에 끼어든 게지.
그래서 이지함이 공부를마치기 전에는
그 책을 볼 수 없도록 자네들 앞길에
훼방을 놓은 것이라네."
"그러면 남명 선생께서 그 <진결>을 훔친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정휴가 조식에게 묻자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산천재의 학인 정개청이 입을 열었다.
"제가 훔쳤습니다."
"뭐요?"
"화담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서찰로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소?"
"선생님이 다시 받아가셨소.
그 뒤는 나도 모르오."
정휴는 망치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머리속이 휑하니 빈 듯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정휴는 정신을 가다듬고
사건의전말을 하나씩 꿰어보았다.
한참 만에야 정휴는
자초지종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제서야 모든의문이 풀리는 것이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정휴가 머리를 숙이고 조식에게 사죄를 청했다.
멋도 모르고 덩달아 산천재를 박살내는데 합세했던
전우치와 남궁두도 머리를 숙였다.
"알았네.
그러나 자네들이 화담 선생의 현신을 보고싶을 터인즉
지금 곧 밀양재로 가게나.
화담이 그곳을지나고 있을 것일세.
이지함 선비에게 책이전해졌는지도 확인해 보고…
어쨌든 <홍연진결>을
지함에게 전해주기로 화담과 약조한 당사자는
자네이니 자네가 알아서 그 약조를 지키도록 하게."
정휴 일행은 곧바로 산천재를 나왔다.
정휴는화담의 현신을 보고 싶었다.
도대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서 움직이고 있는지
그 모습을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그것은 전우치나
남궁두도 마찬가지였다.
지리산을 내려오면서부터 정휴 일행은
주막마다들러서 화담 일행의 행방을 물었다.
"며칠 전에 지나갔습니다."
돌림병이 휩쓸고 지난 지역까지 들어가 물었다.
그러나 번번이 대답은 똑같았다.
"며칠 전에 지나갔습니다."
세 사람은 화담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더 부지런히길을 걸었다.
경주 바로 옆 감포에서부터 바닷가를 따라오른
지함과 박지화는 팔월도 저물어갈 무렵
울진에도착했다.
들판의 벼는 황금빛으로 일렁이고 오른편으로
가없이 펼쳐진 동해 바다는 눈이 시린 쪽빛이었다.
**
화담이 떠나간 이래 두 사람은
조금씩 말을 잃어갔다.
왼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한 적도 있었다.
죽을 병에서 가까스로 회복한 박지화는
건강이 썩좋지 않은 상태여서
패기가 예전만 하지 못했다.
지함은 길을 걸으며 그다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히 눈을 열어 눈앞에 새롭게 펼쳐지는
경치를 영혼에 새겨넣을 뿐이었다.
벌써 바람은 제법 시리게 불고 한여름 푸르렀던
신록이 스산하게 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직 석양도 지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일찌감치주막을 찾아들어갔다.
멀찍이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자그마한 주막이었다.
누가 먼저 말을 한 것도아니건만
오랜 여행으로 익숙해진 두 사람은
마음이하나가 된 듯 서로를 읽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발길이약속이라도 한 듯
그 집으로 향했던 것이다.
마당에 내놓은 평상에 걸터앉을 때까지도
입담좋게생긴 주모는
연신 무슨 얘긴가를 손님들과 주고받는바람에
지함 일행이 들어서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있었다.
"그래 그 책에 무슨 비결이 있길래?"
"글쎄 세상 일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비결이
다적혀 있답니다.
그 책 한 권이면 먼훗날의 일도
손바닥 보듯이 다 알 수 있다는 거지요."
손님들 서넛이서 술상을 가운데 놓고
떠들고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젊은 중도 끼어 있었다.
"주모."
박지화가 주모를 부르자
주모는 그제서야 고개를돌리고
아는 체를 하면서 달려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시우?
우선요기할 것부터 주시오."
그렇지 않아도 어디 말 붙일 곳을 찾고 있던
주모였다.
주모는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일하는 아이에게
뭐라고 이르고는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지함과 박지화에게 다가왔다.
"아, 글쎄. 선비님들,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어린애 하나가 이상한 책을 가지고 왔답니더."
"어디서요?"
"아, 불영사(佛影寺)라예."
"불영사라니?"
"불영사라면 울진에서는 다 압니더.
그 아이가어려서부터 그 절에 자주 다니면서
스님들과 놀기도하고
밥을 얻어먹기도 하면서 다니더니
글쎄 이상한책을 하나 얻어왔다지 뭡니꺼."
"무슨 책인데요?"
지함이 호기심이 잔뜩 발동하여 물었다.
"사람이고 나라고 앞일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책이랍니더."
"그 책을 준 스님은 지금 어디 계신데요?"
역시 지함이 물었다.
"떠돌이 스님이랍니더.
곧 세상을 뜨게 된다면서
몰래 숨겨놓고 지내던 그 책을
그 아이에게 넘겨준것이랍니더.
아이구, 음식이 나오는 모양이구먼."
주모는 다시 부엌 쪽으로 뛰어갔다.
"그런 일이야 허다한 것 아닌가?
너무 기대하지말게나.
자네는 그저 비서니 신서니 하면
사족을못쓰는 게 탈이야."
박지화가 짐짓 지함을 나무랐다.
지함도 머쓱하여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체로 신서(神書)니 비서(秘書)니 하고 소문난
책들을 구해 보면 소문과 다르기 일쑤여서
지함은아직 제대로 된 책은 구경도 해보지 못했다.
그러나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니
대체 무슨책이길래 저리들 호들갑인가 하고
호기심이 발동하는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요기를 하고 봉놋방에 들자 마침 방 안에 있던
젊은중이 한마디 했다.
"제가 그 책을 보았소이다."
"그래요?"
지함이 반가워서 그 중에게 가까이 다가앉았다.
"소승은 무정(無情)이라고 합니다.
불영사에서하안거를 하고
동안거를 하려고 해인사에 갔다가
그냥오는 길입니다."
"그래요? 저희는 송도에서 온 사람들이올시다.
유람다니는 중이지요."
"유람이라.
저희 불가에서는 그것을 운수(雲水)라고 말하지요.
구름따라 물따라 흘러다니면서
훌륭한 선지식도 뵙고
좋은 도반(道伴)도 만나
도화법담(道話法談)을 나누지요."
"그 책을 보셨다니, 어떤 책입니까?"
"불영사에 있을 때 도유(道遊) 노사께서
신서를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도유 노사께서는입산하기 전에
도가에 몸을 두고 있었지요.
지리산에들어가 공부하던 중 신인(神人)을 만나
그 책을받았답니다."
"신인이라면 신선을 말함이오?"
"도유 노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신인은 평범한
숯장수였답니다.
지리산에서 참나무 숯을 구워다가
구례장에 내다 파는 분이었답니다."
"숯장수요?"
"예. 미륵 현신을 만난 뒤에 세상의 이치를 통하여
그 신서를 쓰게 되었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렇다면 화순 운주사의 그 나무꾼?"
지함이 머리를 갸웃거리자
박지화가 고개를끄덕였다.
"그렇군. 그 나무꾼이 운주사를 떠난 뒤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선화(仙化)하신 모양이로군."
그러자 젊은 중이 말했다.
"어쨌든 도유 노사께서는 그 신서를 받아
이곳 불영사로 돌아왔지요.
이후로 늘 신서에 매달려한탄만 하시더랍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하늘을원망하며 사시다가
몇 해 전에 홀연히사라지셨습니다.
그때 그 신서를 남사고란 어린아이에게 주었답니다.
저도 그 노사를 뵌 적은한번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책이길래?"
"조선의 앞날이 소상히 적혀 있습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재난이
계속일어납니다."
"어떤?"
지함과 박지화는 바짝 긴장하여
무정의 말에 귀를기울였다.
"사람이 너무 많이 다칩니다.
미륵경에 이르기를,
석가불 시대가 지나고 미륵불 시대가 오려면
그사이에 말법 시대가 도래하게 된답니다.
이제 그 말법시대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말법 시대에는
기근겁,질병겁, 도병겁의 삼재(三災)가 끊임없이
일어난답니다.
굶어죽고 병에 걸려 죽고 전란에 죽는
세 가지 재난이 끊일 새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그런 시대란 뜻이오?"
박지화가 물었다.
"그렇지요. 벌써 이 나라에서도 사화다 염병이다
해서 해마다 수만 명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경에 나오는 말법이 그뿐입니까?"
"아니오. 말법 시대에 들어서면
해도 달도 빛을잃게 된답니다.
하늘의 천문이 어지러워져 제 자리를잃게 됩니다.
땅이 꿈틀거리고 물이 말라버립니다.
때아닌 폭풍우가 몰아치고
여름에 눈이 내리고 겨울에매미가 울어댑니다.
굶어 죽는 자가 끊이지 않고 위정자는 눈이 멀어
백성을 돌보지 아니합니다.
괴이한 질병이 한번지나가면
주검이 산처럼 쌓입니다.
전쟁이 계속되어 이유없이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마침내 절이란 절은 다 파괴되고 중마저 살해되어
부처를 모실 법당도 없어지고 법당에 예불 드릴 중도
없어집니다.
도가 완전히 끊기게 됩니다."
"그게 조선에 일어날 일이란 말씀이오?"
"조선에 일어날 일로 이런 게 있더이다.
하늘에서불이 날아 떨어져 인간을 태운다.
십 리를 가도 사람하나 만나기 어렵다.
방이 열 개나 있어도 그 안에사람 하나 없다.
불이 만 길에 퍼져 있으니 사람의흔적은 멸하였다.
신장(神將)들이 날아다니며 불을 떨어뜨리니
조상이천이 있어도
자손은 하나가 겨우 사는 비참한 운수로다.
괴상한 질병에 걸려 죽어가니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닿도다.
하늘에서 내린 이름 없는 괴질로 죽는
시체가 산과 같이 쌓여 그 핏물이 계곡을 이루리라."
무정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다.
지함은 너무도놀라서 물을 말도 찾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