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정선 문래초교
문래산과 골지천이 감싸 안은 포근한 교정
문래초등학교는 정말 예뻤다. 사철 색깔을 달리하는 문래산(文來山)이 병풍처럼 뒤를 감싸고, 그 앞으로는 온갖 추억을 간직한 골지천이 유유히 흐른다. 말하지 않아도 시(詩)가 되고 노래가 흘러 나와 흥겹다. 강가에는 장바에 매어놓은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발가벗은 몸으로 부끄럼 없이 고기 잡고 멱 감는 아이들이 마냥 즐거웠다. 한여름 태풍은 오지 않아 순한 비 내리고 바람 고르니, 가을이면 오곡이 들판에 가득하다.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누리는 마을이다. 겨울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 이글루처럼 지붕과 마당을 하나로 만들었다. 문래초등학교가 위치한 마을의 풍경이다.
문래초등학교 학생들은 골지리(2009년 문래리로 변경), 용산리, 덕암리, 토산리에 살고 있는 학생들이 다녔다. 토산과 문래리에는 농사도 많이 지었지만 은광과 금광이 있었다. 그 때문에 학생들이 꽤나 많았다. 초등학교가 위치한 마을은 양지마을이라 했다. 그곳에는 식당, 약국, 여인숙, 잡화점, 문방구, 술집, 버스차부, 우체국, 지서, 쌀가게, 예비군중대 등이 있어서 언제나 사람들이 붐볐다. 시골 중에서도 큰 시골이었다. 굳이 임계면 소재지까지 가지 않아도 어지간한 생필품은 모두 구입할 수 있었다. 학교 앞에는 문방구가 두 집이나 있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리고 가끔 넓은 공터에 설치된 이동가설극장에서는 활동사진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문래1리 본동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농사짓고 나물 뜯으며 사는 한적한 농촌이었다.
마을의 중심은 아무래도 문래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거의가 문래초등학교 선후배 관계였다. 소풍이며 운동회 때에는 서로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학교 역사가 깊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문래초등학교는 1939년 7월 10일 문래공립간이소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10월 15일 문래공립심상소학교로 개교했다. 1941년에는 문래공립국민학교로 개칭하였고, 이후 광복이 되면서 문래국민학교가 되었다가 1996년 문래초등학교로 개명을 했다. 1999년 2월 18일 56회 졸업식을 끝으로 졸업생 1,944명을 배출하고, 임계초등학교 문래분교가 되었다가 2009년 3월 1일에 폐교하였다.
세월은 마을을 변화 시키고 마을의 구심점이었던 초등학교도 사라지게 했다. 폐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펜션이 되었다가 그마저도 이제는 멈추었다. 텅 빈 교정이 마음을 쓰리게 했다. 예쁜 화단은 어디로 가고 누군가 파헤친 황량한 모습만 쓸쓸한 겨울바람을 맞고 있었다. 학교 울타리를 하던 큰 소나무와 미루나무도 어디로 사라졌다.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는 널빤지를 이어 붙인 검은 색 목조건물이었다. 화단에 심어놓은 나팔꽃이 보이는 유리창이 무척 예뻤다. 교실 바닥은 나무판자로 되어 있어 매일 양초를 칠하고 마른 걸레로 닦아야 했다. 물 당번이 되면 주전자에 물을 떠 놔야 했는데, 뒷마당에 있는 두레우물이 너무 깊어 무서웠다. 겨울에는 우물 주변이 얼어 많이 미끄러웠다.
풍금을 켜며 한 소절씩 따라 부르라던 선생님이 생각난다. 몇 번이고 따라 해야 겨우 동요 한 곡씩 함께 했다. 문래초등학교 33회 졸업생 이한숙 시인은 <폐교된 모교>에서 이 상황을 “어디선가/ 친구들 목소리/ 선생님 음성/ 낡은 풍금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했다. 필자와 동창인 31회 졸업생 김종만 씨는 교실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생각이 난다고 했다. 선생님은 먼저 외우는 학생부터 집으로 가도록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외우지 못한 학생이 있었다. 예방주사도 교실에서 줄을 서서 맞았다. 인두를 불에 달궈서 어깨에 지지면서 천연두 예방주사를 맞았다. 아파서 울기도 하고, 도망을 가기도했다. 어깨에는 주사를 맞으면서 생긴 화상자국이 크게 남아 있다. 손들고 벌서고 손바닥을 맞던 생각은 아직도 기억 속에서 아프다. 교실 한 반에 72명이 수업을 했다. 그래서 콩나물시루였다고 다들 말한다. 이한숙 시인은 같은 시에서 “오랜만에 찾아가 보니/ 콩나물시루였던 교실은/ 굳게 닫혀있고”라 했다. 그렇게 많던 학생들은 다들 어디로 가고 문이 닫혀 있는 슬픈 폐교가 떠오른다.
학교에는 앞 운동장이 컸고, 뒤 운동장에는 우물과 화장실과 퇴비더미와 숙직실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작은 밭이 있어 채소를 심었다. 운동장에서는 아침이면 교장 선생님이 조회 시간에 훈시를 했다. 아이들은 모두 줄을 맞춰 서 있지만 사실 그 훈시 시간이 무척 지루했다.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고 나면 중간놀이를 했다. 스피커를 통해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아이들은 남녀로 짝을 지어 손을 맞잡고 매스게임을 했다. 남녀가 서로 손잡는 것이 어색해서 나뭇가지를 맞잡기도 했다. 아무래도 짜릿한 그 손길이 부끄러워서였던 것 같다. 운동장에서는 학교 웅변대회도 했다. 연단에 올라 “이 연사 외칩니다.”고 목청을 돋우어 소리를 질렀다. 웅변대회는 거의가 반공웅변대회였다. 선생님이 써 준 원고를 외워서 나갔다. 글 읽기 대회도 했다. 그때 받았던 상장이 아직도 있다. 운동장에서 하는 행사로는 아무래도 운동회가 백미였다. 만국기가 걸려 있는 운동장에서 청백으로 나누어 “백군 이겨라. 청군 이겨라.”고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다. 운동회 날은 동네 어르신들이 모두 오시고, 장사꾼도 많이 왔다. 하루 종일 신났다.
뒤 운동장에서는 여학생들이 모여 고무줄놀이를 했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김일성 똥구멍을 갈기갈기 찢어서 ~~~”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고무줄놀이를 한 사실은 잊을 수 없다.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왜 남학생들은 고무줄 끊기를 애써 하고 도망가다 잡혀서 맞았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이 가끔 하기 싫은 숙제도 내줬다. 그 중 하나가 쥐 잡아오기였다. 쥐잡기 운동에 초등학교 학생들이 동참한 거였다. 쥐꼬리만 가져오라 했는데, 쥐꼬리 자르기가 쉽지 않아서 발바닥만한 쥐를 들고 와서 양동이에 담기도 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퇴비를 가져오는 숙제도 있었다. 그러면 다들 걸빵을 해서 어깨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학교로 가져갔다. 때론 북한에서 보낸 삐라를 주워오라는 숙제 때문에 산에 올라가 헤매기도 했다.
이밖에도 마을마다 애향단을 조직해서 집으로 갈 때 줄을 맞춰서 갔다. 마을길 가꾸기로 꽃씨를 심기도 하는 등, 나는 친구와 초등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참 많은 추억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모든 졸업생이 공유한 추억이리라. 문래초등학교 동문들 모두 아름다운 삶이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