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오슬로(노르웨이)와 스톡홀름(스웨덴)을 아주 짦게 다녀볼 기회를 가졌다. 십여년전 이틀간 덴마크 여행을 한 이래 처음으로 바이킹의 땅을 밟았다. 현재 지구상에 바이킹족, 즉 켈트족의 나라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4개국이다.
그러나 9-10세기에 걸쳐 바이킹족들이 유럽본토를 종횡으로 정복하고 유린하고 다닌 까닭에 영국의 스코틀랜드 지방과 프랑스 서북부의 노르망디 지방, 러시아의 발상지인 키에프 공국 등, 유럽의 여러곳이 과거 바이킹족의 국가이자 활동 영역이었다. 바이킹족은 당시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공연히 약탈할 정도로 강성했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는 인구 몇십만에 불과한 한적하고 작은 도시이다. 과거 바이킹의 거점이기도 했던 오슬로는 꼬불꼬불한 피요르드 해안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천혜의 요새지.
수심이 싶어 유럽 다른나라에서 초대형 유람선까지 들어와 정박을 하지만 도시로 진입하는 해로가 길고 협소하여 외적이 침입하려면 상당한 고난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이 사진은 수도원으로 쓰이던 해안의 요새에서 바라본 오슬로 전경이다. 시내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걸어야 삼십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작은 도시다.
마침 도착한 날 올해 첫 눈이 내려서 서울서 가져간 외투를 입고도 덜덜 떨며 지냈다. 시즌이 끝나 관광객은 한명도 없고 도시는 썰렁했다.(첫눈이라 산에만 눈이 쌓이고 모두 녹았다)
아름다운 부두가 끝에 위치한 이태리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시즌때는 인파로 붐비는 식당이 오늘은 텅비어 달랑 우리 일행 4명만 식사를 했다. 그래서 그런지 바이킹 전사처럼 건장하고 강인하게 생긴 금발의 노르웨이인 웨이트리스가 생김새와는 달리 동방에서 온 우리 이방인들을 꽤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오슬로 시내와 인근에는 낚시질 하기 좋은 해안과 호수들이 즐비했으나 낚시꾼은 한명도 볼 수 없었다. 스킨스쿠버를 하는 한국인 교포의 말로는 이 부근 바다속에 물고기와 가리비, 바다가재, 대게가 즐비하고 한국 사람들 좋아하는 멍게까지 지천에 널려있다 하는데 이 사람들이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아 아무도 잡는 이가 없다고 한다. 세상 참 불공평 하기는~~ 그래서 그런지 시내에는 그 흔한 해산물 식당 하나도 없었고 한국식당도 없었다. 교포가 운영하는 일본식당에서 베트남 주방장이 만든 메뉴에도 없는 해물탕을 사먹을 수 있었던 것이 낯선 음식에 지친 우리로서는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노르웨이는 스웨덴,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국왕이 있는 국가지만 왕궁은 소박하기 짝이 없었다. 노르웨이 왕가는 연륜이 100년밖에 안되고 국민들이 국왕 제도를 별로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국왕은 별 권한이 없고 왕궁 예산도 적어 국왕이 직접 차를 운전하고 다닐 정도라 한다.
노르웨이는 1380년 이래 약 435년간 덴마크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1815년부터 90년간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1905년에야 독립을 했으나 2차대전때는 다시 나치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쓸모없는 산악지대만 분리독립되어 나라살림이 곤궁했으나 최근 북해유전 발견으로 일인당 국민소득 6만달러라는 세계최고의 고소득 국가로 발돋움 하였다.
단풍으로 얼룩진 오슬로 시내 조각공원의 잔잔한 풍경.
오리와 철새가 헤엄치는 호수가 깨끗하고 조용하기 그지 없다. 오슬로 시내에 별로 볼거리가 없어 이곳이 주민과 관광객들의 주요 방문지가 되고 있다.
노르웨이인 난센(Nansen)이 직접 제작하여 1893-96간 북극 탐험에 사용했던 프람호(號).
난센은 이 배로 북위 83° 59'까지 가서 배에서 내려 개썰매와 카약을 이용해 북위 86° 14'지점에 도달하였다. 이 지점은 당시까지 인간이 도달할 수 있었던 최북단 지역이었다. 북극점의 정복은 그후 1909년 미국의 탐험가 피어리에 의해 이루어졌다. 난센은 그 이후 탐험가, 동물학교수, 외교관 등으로 활동했으며, 1922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과정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바이킹의 선박.
몸체가 작고 예리해서 전투시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바이킹족은 왕이 죽었을 때 관을 배에 담아 통째로 땅에 묻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여러개의 바이킹 선박들이 육지에서 발굴되고 있다.
오슬로 시내 최고 번화가의 밤거리.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지나다니는 여인네들은 하나같이 바이킹 전사처럼 키가 크고 건장하며 성격도 꽤 억세다고 한다. 노르웨이는 세계 최고의 국민소득에도 불구하고 세금 부담율이 워낙 높아서 국민의 소득 중 절반 이상을 각종 세금으로 거두어 가는 유럽식 사회주의 국가이다. 그 때문에 국가 재정이 부유하여 교육, 의료, 퇴직연금 등 여러가지 사회보장 제도를 실시하고 있지만, 물가가 세계최고 수준이고 국민들의 가용소득이 낮아서 쇼핑이나 외식은 거의 엄두를 못낸다 한다. 은퇴후 살아갈 돈을 미리 세금으로 비축해야 하는 까닭에 빈부차도 별로 없고 다들 소박하게 산다. 사회보장도 좋지만 과연 그것이 최선의 정책이고 최선의 삶인지는 각자 판단할 일이다.
오슬로 인근의 아름다운 호수.
그 날 내린 첫눈이 산 중턱까지 쌓여있다. 오슬로에서 1시간도 안되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호수가에서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서울 같으면 관광객과 낚시꾼들로 북적댈텐데... 다들 별장에 틀어박혀 조용히 쉬고 있는 것인지....
오슬로 인근의 피요르드 해안.
강처럼 길고 긴 바다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어 마치 강처럼 보인다. 피요르드 해안은 빙하가 쓸고 내려가면서 깊은 흔적을 남긴 곳이라 깊이가 수십미터나 되고 초대형 호화유람선들의 항해가 가능하다.
이처럼 고요한 시골같은 노르웨이와 비교할 때, 바로 이웃나라인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은 사뭇 다른 도시였다.
스톡홀름은 수백년간 스칸디나비아 전체를 지배해 온 강대국의 수도 답게 도시 전체가 거의 파리 수준의 고색창연한 건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화려한 왕궁과 근위대가 스웨덴의 오랜 영광을 말해주고 있었다. 촬영이 금지되어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스웨덴 왕궁은 비록 크기는 작으나 그 내부는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과 비견될 만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도시의 건물과 도로, 다리 등 도시 곳곳이 모두 파리나 비엔나처럼 정교하고 화려하여 근대국가 시절 북구의 강대국 스웨덴이 누렸던 부와 영광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꽉 짜이고 깨끗이 정돈된 스톡홀름은 어느 구석 하나 탓할 만한 곳이 없었다. 옥의 티가 하나 있다면, 스웨덴 국토는 대부분 평야인 관계로 노르웨이와 같은 아름다운 산림은 없다고 한다. 농사 못 짓는 척박한 산악지대는 노르웨이가 독립할 때 모두 떼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외에도 스톡홀름은 육지와 몇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태리의 베니스나 러시아의 페테르부르그와 같이 배를 타고 유람하는 낭만적인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뱃길 곳곳마다 스웨덴의 고색창연한 과거의 영광이 숨쉬고 있었다. 마치 파리의 세느강을 유람하는 느낌이었다. 바이킹의 후손이 그 옛날 이 먼 곳에 이런 훌륭한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볼보(Volvo) 자동차와 에릭슨(Ericsson) 휴대폰으로 유명한 나라 스웨덴.
100년전 노르웨이가 분리독립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자연의 절경과 북해 유전까지 갖춘 강국이 되었을 텐데, 이 사람들 정말 아쉬움이 많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