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고 한다. 그만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의 밀접한 관계는 인간의 원만한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의 인간들의 모습은 어떤가?
사회가 유지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인간 개개인들은 타인을 이해하는 마냥 미소지어 보이고 타인을 위해 사는 척 하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안에서 자신들의 관점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한다. 너무도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게 인간이라면 너무도 비관적인 생각일까.
그럼 타인을 사랑하라고 가르침을 내렸던 예수나 장애인을 돕고자 자발적으로 나선 자원 봉사자들도 모두 이기적인 사람들인가? 물론 그렇다. 그들도 이기적이다. 왜냐하면 타인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은 신도들을 예수가 보면 뿌듯하고 흐뭇할 것이다. 그건 예수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결국은 자아 만족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자원봉사자도 같은 경우다. 굳이 말로 표현한다면 좋은 의미에서의 이기주의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협한 시각에 대한 것이다.
질송의 ■장미의 이름■에서(책 구입 실패로 카페에 올려진 글을 읽었기 때문에 몇 쪽에 나오는지는 모름) 인용된 구절을 보면
■그때 사부님은 웃으면서, 참 기독교인이라면 상대가 이교도들이라고 하더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중략) 나에게 사부님은, 늙은 프란체스코 수도사에게 이로운 풀이라고 해서 베네딕트 수련사에게 반드시 이로운 리는 없다고 대답했다■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가 보면
■사부님은, 우주라고 하는 것이 아름다운 까닭은, 다양한 가운데에도 통일된 하나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통일된 가운데에서도 다양하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인용된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서 인간이 느끼는 건 천차만별이다. 한 사람에게 행복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행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의미 있는 행동이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너무도 간단하고 쉬운, 누구나 생각 할 수 있는 사실을 짜증나게도 인간들은 몸소 실천하기를 꺼리는 듯 하다.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왜 이해를 못하는 거지■라는 표정으로 답답해 한다. 자신이 상대에 대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상대도 자신에 대해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이러한 경우는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이며 특히 기독교 인들이 비 기독교 인들을 설교할 때 느낄 수 부분이다.(개인적으로는)
설교하는 기독교인들의 의견을 이해 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하면 또 오히려 당신의 생각이 잘못 됐다고 반박하는 경우 설교자들은 불쌍한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한다. 절대자를 통해서 평시에 느낄 수 없는 초월적 가치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고? 그게 꼭 종교여만 하는 걸까. 내가 종교 아닌 다른 무엇으로 나만의 초월적 가치를 느끼면 되는 게 아닌가.
종교문제를 예를 들어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다양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우리의 주변에서는 이와 같은 사례는 너무도 흔하다. 나라의 중대한 임무를 맡고 대표자가 된 자들도 자신들의 이해만 관철시키기 위해 당파 싸움이나 하고 있는 꼴이니 말이다.
한 번만 더 생각해보자. 깊게 생각하고 안하고 문제도 아니다. 타인의 의견을 조금만 더 존중하는 태도를 갖자는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 아름다움은 인간이라는 통일된 요소 가운데서 서로의 다양한 생각을 존중 할 수 있는 태도가 전제 돼야 한다.